문자 내용을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 백시윤은 명령 어조로 백지희에게 문자를 보냈다.“가지 마. 백시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거야. 만약 정말로 급한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여길 찾아내서 올 거야. 우리가 겁먹을 필요 없어. 이현 씨가 여기 있잖아. 여차하면 서준 씨도 우릴 도와줄 거야.”온지유는 백지희가 백시윤을 만나러 가지 않길 바랐다.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그녀에게 털어놓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그녀는 굳이 캐묻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지희가 위험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백지희는 원래부터 백시윤을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기에 온지유의 말을 들은 후 바로 문자를 삭제 해버렸다.호텔 로비로 돌아온 뒤 잠시 나갔던 강서준이 두 사람에게 다가오며 등 뒤에서 장미꽃을 꺼냈다.“지희 씨, 매일 저와 같은 꽃미남을 보면서 행복하길 바라요.”강서준은 말을 하면서 꽃을 백지희의 손에 쥐여주고는 헤실헤실 웃었다.“전부터 장미를 선물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마침 여이현 씨가 지희 씨가 얼마 전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동안 힘들어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더는 타이밍 따위 핑계 대지 말고 주고 싶으면 바로 주라고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백지희는 본능적으로 거절하려고 했다.그러나 온지유가 꽃을 다시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작게 설득했다.“지금은 그냥 받아. 다른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은 즐겁게 보내는 거야, 알았지?”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여전히 손에 든 장미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세 사람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온지유는 여이현의 옆에 앉았기에 백지희는 강서준과 앉을 수밖에 없었다.달라진 분위기에 백지희는 도망가고 싶었다.그 순간 강서준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목걸이를 꺼냈다.“짜잔, F 국 유명 디자이너의 첫 작품. 이 목걸이를 지희 씨한테 드릴게요. 제가 주는 첫 번째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놀란 백지희는 망설였다.강서준의 웃는 얼굴을 보니 순간 받아주고 싶었지만 그녀
다행히 백시윤에겐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다만 의사는 침대에서 자주 내려오지 말라고 당부했고 병원 밖으로 나가지 말 것을 권유했다. 의사는 말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백지희를 보았다. 백지희는 그 눈빛이 너무도 불편했다.그런 의사의 눈빛을 눈치챈 온지유가 얼른 백지희를 몸 뒤로 숨기며 의사를 보았다.“저기요, 왜 제 친구를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죠? 환자 자료에 보호자는 제 친구가 아니라 김가은 씨로 되어 있을 텐데요. 뭔가 착각하신 거 아니에요?”의사는 민망한 듯 웃음을 지었다.“김가은 씨가 보호자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시윤 씨가 깨어나지 못했을 때 계속 백지희 씨 이름만 부르셨습니다. 마침 조금 전 이분이 백지희 씨라는 걸 알게 되어서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백시윤 씨가 그토록 찾았는지 궁금해서 본 것일 뿐입니다.”의사에 말에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눈빛으로 백시윤을 보았다.강서준은 어딘가 불쾌한 기분이 들어 얼른 백지희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의사에게 말했다.“백시윤이 잠꼬대로 중얼거렸다고 해서 우리 지희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어쩌면 저 사람이 변태일 수도 있잖아요.”“누구더러 변태라는 거죠.”김가은이 따져 묻는 어투로 말하면서 병실로 들어왔다. 침대에 누운 백시윤을 본 후 바로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몸을 돌려 백지희를 보았다.백지희 곁에 있는 강서준에 그녀는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픽 비웃었다.“하, 그 며칠 사이에 벌써 다른 남자한테 꼬리친 거예요?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생각이에요? 백지희 씨, 우리 시윤 씨 망친 거로 부족한 거예요?”“김가은 씨, 말조심하세요.”강서준은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 어떻게든 백지희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김가은은 대놓고 비웃으며 백지희를 위아래 훑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생긴 것도 평범하게 생긴 주제에 왜 남자한테 인기가 많은지 모르겠네요.”백지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백시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두 개의 전시 전부 다요?”백지희는 믿어지지 않았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김가은 씨랑 연관이 없어요. 만약 방금 하려던 말을 계속한다면 지희 씨가 불리해질 거예요. 일단은 참고 돌아가서 다시 계획을 세워보자고요.”온지유가 다가오며 백지희의 손을 잡은 뒤 달랬다.“우리도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 말하라고 해. 우린 우리대로 살면 되니까.”일리가 있는 말이었으나 백지희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다.이때 김가은이 차갑게 웃으며 혀를 찼다.“쯧쯧, 온지유 씨. 홑몸도 아닌데 저런 여자랑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괜히 저런 여자랑 친하게 지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누굴 탓할 수 있겠어요. 그때 가서 제가 알려주지 않았다고 원망이나 하지 말아요.”온지유도 차갑게 웃었다.“참 오지랖도 넓으시네요.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할 시간이 있으면 백시윤 씨 건강부터 살피세요. 방금 의사 선생님 말씀 들었죠?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하잖아요. 백시윤 씨가 자꾸 침대에서 내려오면 김가은 씨는 행복한 부부 생활과 점점 멀어지게 될 거니까요.”그녀는 일부러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김가은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분이 차올랐으나 온지유는 멈추지 않고 계속 말했다.“아, 그리고 남편이 깨어나면 말 좀 전해줘요.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자꾸 쓸데없이 우리 지희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요. 보기만 해도 짜증 나고 거슬리니까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백지희의 팔을 잡으며 병실에서 나갔다.온지유의 말발에 강서준은 온지유를 향해 엄지를 척 들었다. 너무도 통쾌했다.이번 만남에 강서준은 백지희와 백시윤의 관계에 의문이 한 층 더 생겼다. 이 의문으로 그는 어떻게든 백지희를 지켜줘야겠다는 마음이 더 생겨났다.돌아온 후 그는 바로 갤러리를 원상복구 하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벽에 있던 글씨는 남겨두었다. 그리고 거액을 들여 그 벽을
백지희의 반응에 강서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그녀가 귀엽게만 느껴졌다.그녀를 데리고 갤러리로 온 뒤 다음 순서로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볼 생각을 했다. 커플들이 하는 데이트 코스로 준비했다.백지희는 다소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백화점 앞에 와 있었다.반응하려던 순간 강서준은 이미 주차까지 하고 왔다.“어디로 가는 거예요?”그녀는 오늘 강서준이 모든 걸 준비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으나 강서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강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매너 있게 문까지 열어주었다.“백지희 씨, 오늘은 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지희 씨를 에스코트할 생각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점심시간이니까 제가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가는 중이고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백지희는 미간을 찌푸렸다.“미안해요, 서준 씨. 제 행동으로 서준 씨가 오해를 한 것 같네요. 지금이라도 분명히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는...”“양식을 싫어해요?”강서준은 동문서답하면서 못 알아들은 척했다.백지희는 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핸드폰을 꺼내 온지유를 불렀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강서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저기, 전 지유가 옆에 있는 게 더 편해서요. 혹시 불편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전 지유를 기다리면 되니까요.”강서준은 당연히 떠날 사람이 아니었기에 바로 대답했다.“불편하긴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잖아요. 지금 바로 연락해서 임산부가 먹을 만한 음식도 주문해둘게요.”그녀가 무슨 수를 써도 강서준은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백지희는 다소 짜증이 났다.온지유가 도착하자 온지유의 팔짱을 끼며 수다를 떨었고 강서준이 끼어들 틈도 주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강서준은 누군가의 연락을 받게 되었고 먼저 가버렸다. 백지희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온지유는 그런 그녀를 놀려주었다.“아니, 그러게 서준 씨랑 한번 만나보라니까. 정말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단 말이야.”백지희는 손을 내저었다.“난 너처럼 살 수 없어. 난
다음 순간 백지희는 고통스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나는지 그녀도 몰랐다. 그저 가슴이 답답하고 너무도 아픈 감정이 차올라 눈물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그런 백지희를 안아주며 묵묵히 토닥여주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사나운 눈빛으로 백시윤에게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경고하는 눈빛에선 경계도 가득했다. 백시윤은 온지유의 눈빛을 무시해버렸다. 오히려 온지유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백지희 곁에 있어 줘서 말이다.그는 이내 장민준을 향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민준은 뭔가를 내밀었다.온지유는 잔뜩 불쾌한 어투로 말했다.“백시윤 씨, 이건 무슨 뜻이죠? 설마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백시윤은 미소를 지었다.“저도 알고 있어요. 온지유 씨에게 이런 선물쯤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요. 하지만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요. 제 성의도 담았으니 받아주시지요.”“아니요. 필요 없어요. 저와 백시윤 씨 사이는 선물까지 주고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온지유는 더는 그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 말을 마친 후 이내 작별 인사도 했다.백지희의 팔에 팔짱을 낀 채로 밖으로 나가려는데 장민준이 다가와 앞을 막아섰다.온지유는 차갑게 웃었다.“왜요? 설마 백시윤 씨는 우릴 이곳에 가둬두기라도 하려고요?”백시윤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가게 내버려 둬.”장민준은 길을 비켜주었다. 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백시윤을 힐끗 보았다.그러나 백시윤은 온지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고 신경이 온통 백지희에게 쏠려 있었다. 백지희의 뒷모습을 보는 백시윤의 눈빛은 엄청 괴로워 보였다.장민준은 백시윤이 어디 아픈 줄 알고 의사를 불러오려고 했으나 백시윤이 그를 불러세우며 지시를 내렸다.“지희한테 꽃다발 선물할 거야. 꽃이 싱싱한 꽃가게 알아보고 매일 카드랑 함께 다양한 꽃다발을 보내줘.”장민준은 이해가 가지 않았을뿐더러 조금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궁금한 것을 그대로 물었다간 욕먹을 것
백시윤이 보낸 꽃다발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백지희는 배달원이 오자마자 먼저 달려나가 받았다.마음이 바뀐 건 아니었다. 그저 온지유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다.오늘도 카드를 갈기갈기 찢은 후 길가의 쓰레기통에 던지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갔다.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미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온지유와 마주쳐 백지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방으로 올라갔다.“사실 네가 뭘 하든 상관 안 해. 난 네가 뭘 하든 전부 응원할 거니까. 우린 영원한 친구잖아. 나한테 들킬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온지유는 백지희가 자신에게 뭔갈 숨기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직설적으로 말했다.백지희는 느껴지는 양심의 가책에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나도 알아.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난 그냥 네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랬을 뿐이야. 괜찮아, 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 나 믿고 시간 좀 줘.”온지유는 의아했다.“꽃다발을 주는 사람이 일반인은 아닌가 봐? 나마저도 건들면 안 되는 사람인 거야?”백지희는 설명해주고 싶었으나 마침 강서준과 여이현이 함께 들어오며 꽃다발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강서준은 바로 백지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꽃다발이라니요. 누가 선물하는 건데요? 꽃다발 좋아했어요? 제가 사드릴게요.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아니지, 꽃집에 있는 걸 전부 선물해드릴게요.”온지유는 긴장한 채로 백지희를 보는 강서준의 모습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었다.강서준이 백시윤보다 더 믿음직했기 때문이다. 만약 백지희와 강서준이 연인 사이가 된다면 어쩌면 백시윤이 백지희를 포기할지도 모른다.그녀는 걸음을 떼고 백지희의 곁으로 다가가 팔을 잡으며 말했다.“세상에 꽃을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어요. 서준 씨는 당연히 진심으로 한 말씀이겠죠? 빈말로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강서준은 바로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내 장미 꽃다발을 주문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꽃 배달이 도착했다. 우연하
백지희는 반사적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백시윤은 그녀보다 더 빨랐고 그녀의 팔을 단번에 잡았다.“데려다줄게.”“필요 없어요. 지유가 곧 올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를 핑계를 댔다. 지금의 상황에서 떠오르는 사람이 온지유 뿐이었으니까.“맹세할게. 진짜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집까지 데려다주기만 할게.”백시윤은 그녀가 믿어주지 않을까 봐 소매를 걷어 팔에 남은 주삿바늘 자국을 보여주었다.“설령 너한테 뭔 짓을 하고 싶다고 해도 그럴 힘이 없어. 며칠 동안 매일 병원에서 링거 맞고 있었거든.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조금 힘들어.”바람이 불어오며 비가 두 사람의 몸을 적셨다. 백시윤은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얼른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백지희는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앞만 보았다.차에 올라탄 백시윤은 마음이 아픈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이러지 마. 나한테 이러지 마. 난 며칠 동안 네 얼굴 못 봐서 힘들었어. 너도 내 마음이 어떤지 잘 알잖아... 아니다, 넌 몰라. 어쨌든 난 살면서 널 단 한 번도 속인 적 없어. 이건 진짜야. 믿어줘.”백지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힘겹게 말을 뱉었다.“절 좀 내버려 둬요. 네?”백시윤의 안색이 굳어지더니 목소리를 낮게 깔고 운전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호텔로 가.”호텔이라는 두 글자에 백지희는 그날 하마터면 죽을 뻔한 기억이 떠올라 순간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그녀는 차에서 내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백시윤이 그녀를 꽉 안아버렸다. 급한 마음에 그녀는 백시윤의 팔을 깨물었다.하필이면 주삿바늘이 있던 부위라 백시윤은 고통에 그녀를 놓아주고 말았다.그 짧은 순간에 백지희는 문을 열고 차에서 뛰어내렸다.기사는 얼른 차를 세웠다. 백지희는 어두운 도로에서 힘겹게 일어난 후 도망치고 있었기에 걱정스럽게 백시윤에게 물었다.“대표님, 쫓을까요?”“쫓아.”백시윤의 한 마디에 사람들이 바로 그녀를 쫓아갔다.빗속이라 앞이 잘 보이지 않았고 그들이 바로 쫓아왔다고
간호사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백시윤 씨가 꼭 백지희 씨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가 거절한다면 병원에 민원을 넣어서 곤욕을 치르게 하겠다고 하셨어요. 백지희 씨,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고 받아주세요. 게다가 이 영양 식단은 백지희 씨 건강에 좋다고요.”돈이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는 걸까?백지희는 화가 치밀었지만 애꿎은 간호사들에게 화풀이할 수 없기에 물건들을 내려놓으라고 했다.아침을 먹은 후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문자로 입원한 사실을 알리면서 퇴원하고 싶다고 말했다.그녀는 온지유가 이미 병원에 와 있다는 것을 몰랐다. 진료실에 온지유만 있을 뿐 아니라 여이현과 백시윤도 있었다.세 사람의 안색은 좋지 못했고 분위기도 심각했다.특히 온지유는 눈물을 참고 있었고 어깨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옆에 있던 여이현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무슨 말로 위로해줘야 할지 몰랐다.“이렇게 해요.”한참 지난 후 백시윤이 이 정적을 깨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제 신장을 지희한테 이식해줘요.”온지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백시윤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백지희는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이것을 치료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바로 신장이식이었다. 온지유는 거액을 들여서라도 기증자를 찾아 이식 수술을 시켜주고 싶었으나 백시윤이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했다.그 순간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백시윤을 다시 보게 되었다.‘백시윤은 대체 백지희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걸까?'‘가족애인가? 그건 아닌 것 같아.'‘아니면 사랑인가?'‘그것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이미 결혼했잖아.'‘설령 지희를 좋아한다고 해도 자기 일부터 처리한 후에 지희의 마음을 얻어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백시윤 씨, 신장이식은 어린 애들 장난이 아니에요. 그러니 진지하게 고민하고 말하세요.”의사가 그에게 경고했다. 여하간에 백시윤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사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백시윤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의사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