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희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잠겼다.온지유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앉아 위로했다.“됐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백지희가 사고를 당한 이후 온지유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그녀가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건 분명 무언가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온지유는 자신이 백지희의 유일한 친구라는 걸 알기에 자신 외에는 백지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결국 온지유는 결심했다.백지희가 깨어나기만 하면 어떤 요청이든 무조건 들어주겠다고.백지희가 떠나고 싶다고 하면 그녀는 그걸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온지유는 병실에 있는 휠체어를 가져와 백지희를 태우고 바로 병실을 나섰다.“무슨 일이야? 어디 가는 거야?”여이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백지희가 깨어난 건 반가웠지만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가려는 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지희가 여길 떠나고 싶대. 난 지희를 도와줄 거야. 지금 바로 가야 해. 더 기다릴 수 없어.”그녀는 여이현의 팔을 잡으며 부탁했다.“이현 씨도 날 도와 줄 거지?”여이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당연하지. 하지만 이렇게 바로 데리고 나가면 병원에는 뭐라고 해. 내가 가서 석훈이랑 얘기해서 퇴원 절차를 밟을게. 넌 먼저 지희 씨를 데리고 내려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지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여이현은 병실을 나와 지석훈을 찾아갔다.퇴원 절차는 금방 끝났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섰고 백지희는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그러면서 백지희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우선 우리 집에 가자.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밥도 먹자. 저녁에 우리가 너를 공항으로 데려다줄게.”백지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지유야,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그녀는 온지유를
백시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약속했다.“사람들을 먼저 물러나게 해요. 그러면 여기서 나갈게요.”그녀는 여전히 온지유를 걱정했다.만약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여이현이 바로 차를 몰고 떠날 수 있도록 온지유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다.백시윤의 사람들은 도로변으로 차를 옮겼고 여이현도 차를 세웠다.길이 트이자 백지희는 차 문을 열었다.그리고 걱정하는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지유야, 괜찮을 거야. 나 소고기 먹고 싶어. 집에 도우미분들한테 준비 해달라고 해줘.”“알겠어. 지금 전화 걸어 둘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차로 돌아오고.”온지유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백지희가 차에서 내리자 백시윤은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지희야, 깨어났구나. 정말 깨어났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정말 난 널 잃은 줄 알았어.”백지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숨 막혀요! 제발 이거 놔요!”백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이대로 널 놓칠 수 없어. 절대로 널 떠나보낼 수 없어.”백지희는 그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약속했잖아요. 내가 떠나고 싶다면 막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방금 한 말을 잊은 거예요?”백시윤이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백지희는 다시 차로 돌아가 온지유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백시윤은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았고 백지희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힘이 없었다.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그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백지희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백시윤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 당황하며 손을 풀었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간절하게 말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야. 널 잃는 게 너무 두려웠어.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몰라. 그때 난 정말... 널 영원히 잃을까 봐 무서웠어.”백시윤은 백지희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으로 가자. 네가
응급실 문밖, 김가은이 사람들을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백지희를 보자마자 다가가 뺨을 때렸다.온지유가 이를 보고 재빨리 백지희를 자기 뒤로 끌어들이며 김가은을 노려보았다.“왜 때리는지 알죠?”김가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짐작할 수 있었다. 백시윤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백시윤은 응급실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알면서도 친구가 감싸게 내버려두는 거예요?”김가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백지희는 그녀 앞으로 걸어가 목이 멘 목소리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하, 죄송하면 다예요?”김가은이 차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하다고 끝낼 거였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겠죠. 백지희 씨, 당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에요.”온지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백지희를 끌어당겨 뒤로 숨겼다. 그리고 김가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가은 씨,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셔야죠. 지희는...”“지유야, 그만해.”백지희가 온지유의 말을 막아섰다. 백시윤이 사고를 당한 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그가 붙잡을 걸 알면서도 굳이 떠났던 자신이었기에 김가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백지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목에 난 흉터가 눈에 띄었고 김가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김가은은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명령했다.“내 허락 없이는 백지희가 시윤 씨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해요.”그리고 다시 백지희를 보며 말했다.“불만 없죠? 아니면 설마 직접 시윤 씨를 돌보고 싶어요?”“아니요, 언니 뜻에 따를게요. 그리고 시윤 씨가 깨어나면 저는 떠날 겁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백지희는 김가은의 오해를 풀고 싶어 솔직히 말했다.그러나 김가은은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백지희 씨, 당신 참 대단하네. 어쩐지 시윤 씨가 그렇게 신경 쓰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좀 알려줘 봐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백지희가 기억하는 백시윤은 그녀의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일정마저 정해주며 심지어 입을 옷까지 정해주었다.백시윤이 그녀를 도와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준 적 없어야 했다.“김가은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희를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씀인 거예요?”온지유는 백지희가 지난번 그런 일을 당한 것도 백시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 백시윤의 미친 짓을 보게 되었을 때 더욱 백시윤의 곁에서 반드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김가은은 차갑게 웃으며 백지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떠나겠다면서요? 그럼 지금 당장 떠나요. 영원히.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지희 씨가 정말로 떠날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벌일 건지 말이에요. 어차피 전 시윤 씨가 아니라서 지희 씨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거든요.”김가은은 아주 매정하게 말했다. 다만 백지희가 원하던 반응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백시윤은 여전히 응급실에 있었기에 그녀는 바로 떠날 수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었다.“그래요, 이만 가죠. 가은 씨가 시윤 씨가 더는 우리 지희를 찾아오지 않게 잘 지켜보고 있길 바라요.”온지유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지희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말을 마친 온지유는 백지희의 팔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차에 올라탄 뒤 나직하게 말했다.“지희 씨, 정말로 떠나고 싶어요?”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왜 안 떠나겠어? 백시윤이 그동안 너한테 한 짓을 잊은 거야? 당연히 떠나야지. 우리 지희한테는 백시윤 따위 필요 없다고.”백지희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일단 깨어난 거 보고 떠나고 싶어. 뭐가 어찌 됐든 그 교통사고는 나 때문에 당한 거니까 책임은 지고 싶어.”온지유는 화가 났으나 백지희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그녀는 백지희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일단은 우리 집에서 지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백시윤 소식
팬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백지희는 결국 수락했다.하지만 이번 만남에서 백지희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대화는 이어가고 있었기에 그녀는 얼른 이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고 싶었다.드디어 투자자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백지희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온지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지희 너는! 하,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백시윤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면서 팬이 실망하는 건 또 싫다고 하고.”“괜찮아, 백시윤이 아직 깨어난 건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아직 떠날 수 없었잖아. 그냥 투자자가 하자는 대로 하자. 이번만 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다음에는 그런 제안을 할 수 없을 거야.”백지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사실 불안했다.상대가 만약 백시윤을 봐서 투자한 것이라면 아마 백시윤의 결정에 따를 것이다.그녀는 전부터 이미 위약금까지 낼 준비를 했기에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이내 한숨이 나왔다.온지유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힐끗 째려보았다.두 사람이 찻집에서 나오려고 할 때 온지유는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던 사람을 똑똑히 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김가은의 옆에 있던 여자였다.여자는 온지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찻잔을 들며 그녀와 인사를 했다.온지유는 태연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김가은이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미행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일까.온지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연이은 며칠, 백지희는 방에만 박혀 그림에만 집중했다. 가끔 방에서 나와 온지유와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일주일 후, 백시윤 쪽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었다. 아마 상태가 많이 나아진 듯했다.다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온지유는 이 소식을 백지희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여이현이 그녀를 막았다.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난 지희랑 약속했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기로.”“내가 알기론 백시윤은 여전히
전시 당일,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구경하러 온 팬들이 갤러리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그림이 하나도 없는 거죠? 그림도 없으면서 무슨 전시를 해요? 당장 환불해줘요.”“환불! 환불!”이곳저곳에서 환불해달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환불을 요구했다.사회자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백지희도 당황했다.며칠 동안 그녀는 밤까지 새우면서 그림을 그려 총 99점의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 100번째 그림을 망가뜨리지만 않았다면 완벽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갤러리엔 그녀의 그림이 한 점도 없었다.믿어지지 않았다.투자자도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오니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믿어지지 않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갤러리 안을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한 점의 그림도 없었다.투자자는 바로 화가 치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약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니 배상금을 물어낼 준비를 하고 있으세요.”그리고 이내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 환불을 원하신다면 백지희 씨에게 요구하세요. 저도 사기당한 거니 저도 피해자입니다.”“아니에요. 전, 전 여러분들 속이지 않았어요. 제 그림도 이 사람들이 가져간 거예요. 그런데 왜 제가 그린 그림이 한 점도 없는지 모르겠네요.”백지희는 말을 마친 후 스케치 전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위에는 어떤 그림을 누가 가져갔는지 시간과 장소가 전부 적혀 있었다.투자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유승민이라는 사람은 저희 쪽 사람이 아닙니다. 백지희 씨, 아무리 위조한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회사 사람으로 그럴싸하게 해야죠.”“전 정말 그러지 않았어요. 제 친구 집에 CCTV도 있으니 저랑 함께 제 친구 집으로 가시죠. 제가 친구한테...”“됐습니다. 일단 환불부터 해주세요. 내일 제가 변호사를 통해 말을 전해드리죠.”투자자는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렸다.표를 산 사람들은 바로 백지희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오늘 일도 고마워요.”온지유의 집 앞에 도착하자 백지희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그녀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내려 강서준은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 대부분 여자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들러붙으려고 애를 썼으나 백지희는 달랐다. 오히려 번번이 선을 긋고 있었다.강서준은 조금 실망스러웠다.“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가라고도 안 해요?”강서준은 백지희를 불러세웠다. 백지희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갑자기 목이 마르네요. 지희 씨 집으로 들어가 차 한잔하면 안 될까요?”백지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미안해요. 저도 남의 집에서 신세 지고 있어서 그건 안 될 것 같네요. 그러니 서준 씨는 이만 돌아가 주세요.”말을 마친 백지희는 더는 그와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서준은 씁쓸함을 느꼈고 속으로 멍청이라며 자신을 욕했다.백지희는 대부분 여자들과 달랐다. 이런 방식으로 그녀에게 작업을 걸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정말로 멍청이였다.2층의 커튼이 열렸다. 강서준은 백지희의 실루엣을 발견하게 되었다. 요염한 그녀의 자태에 순간 열정이 불타올랐다. 한 번의 실패로 포기하면 강서준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는 계속 노력해보기로 했다.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기분이 나아져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게 되었다.방 안에 있던 온지유는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강서준의 차가 떠나자 백지희에게 물었다.“강서준 씨 너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응, 맞아. 하지만 난 곧 떠날 사람이니까 너 외에는 다른 사람과 깊이 알아가고 싶지 않아. 게다가 사랑은 나한테 아주 머나먼 단어야. 기대해서도 안 돼.”백지희의 눈빛은 어두웠다. 우울함이 가슴 깊이 피어올랐다.온지유는 다가가 그녀를 안아주며 위로했다.“무슨 일이 있었든 걱정하지 마. 전부 다 괜찮아질 거니까. 네 것이었던 것도 전부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올 거야.”그 말에 백지희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괜스레 투덜댔다.“겨우
온지유는 이내 자기 생각을 이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내가 처리해 줄게. 누가 널 괴롭힌다는 건 날 괴롭히는 거랑 같은 의미니까. 경성에서 김가은이 제멋대로 날뛸 수 없을 거야.”백지희는 온지유에게서 든든함을 느끼며 얼른 끌어안더니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고맙다는 말로 온지유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다 전해지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감사 인사뿐이었다.전시 사건이 김가은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온지유는 계속 참고만 있지 않을 생각이었다.온지유는 방에서 나와 자기 생각을 여이현에게 말해주었다. 증거를 찾아 투자자에게 보여준 뒤 투자자가 김가은을 찾아가 괴롭히게 할 생각이었다.그러자 여이현은 고개를 저었다.“증거를 찾는 건 시간이 오래 걸려. 투자자도 지희 씨가 증거를 찾을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을 거야. 우리는 범인이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어야 해.”“방법은 있어?”온지유가 웃으며 말했다. 여이현에게 대책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역시나 그녀의 생각은 맞았다. 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 구부렸다.온지유는 바로 다가가 그의 계획을 들으려 했으나 여이현이 그녀에게 뽀뽀해버렸다.볼에서 전해지는 따듯한 온도에 그녀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얼굴이 빨개지며 여이현을 슬쩍 째려보았다.“왜, 남편이 아내한테 뽀뽀도 하면 안 돼?”“당연히 되지.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겠어? 내가 더 도와줄게.”온지유는 나직하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의 허벅지 위로 앉은 후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곤 그의 귓가에 바람을 후 불었다.여이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자극하지 마. 그러면 너만 힘들어져.”“어머? 당신이 어떻게 알아? 내가 힘들어할지 아닐지.”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넌 지금 임산부야.”온지유는 깔깔 웃었다.“임산부는 남편을 자극하면 안 되는 거야?”여이현은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그는 온지유한테 자신이 얼마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