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이제 숨길 필요도 없겠네요. 나와요,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까.”그러자 다른 방에서 이민영이 나왔다. 그녀의 눈엔 증오심만 가득했다.이민영을 보자 온지유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온지유는 그녀를 보며 웃었고 이민영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웃겨요? 알아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요? 지금 당신은 우리 손안에 있어요. 소리쳐봤자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못할 거예요.”온지유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과연 그럴까요?”이민영은 완전히 분노하며 다가가 온지유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온지유는 아이를 다치게 할까봐 조심스럽게 그녀의 힘에 따라 일어나며 냉정하게 말했다.“지금 당신은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는 거예요.”“파멸? 하!”이민영은 비웃으며 뒤를 돌아 송미경을 바라보고는 크게 웃었다.“여기까지 데려온 순간 내 임무는 끝났어요. 돈만 받으면 나랑 이모는 이 도시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당신을 이렇게 만든 걸 아는 사람은 하늘뿐일 테죠. 누구도 날 막을 수는 없어요.”송미경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비켜요,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이민영은 온지유를 풀어주고 송미경 곁으로 물러났다.송미경은 다리를 꼬고 앉아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지금 당장 여이현에게 연락해서 여진 그룹을 내게 넘기라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을 여기서 떨어뜨려 버릴 테니까. 나야 몇년 감옥살이를 하면 그만이지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겠죠.”온지유는 차분하게 말했다.“날 협박하고 있는 거군요.”송미경은 당당하게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협박. 그래서 뭐요?”온지유는 여전히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뱃속에 든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무섭지 않나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엄마가 이런 지독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당신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요?”모든 어머니는 아이가 자신을 사랑하기를 바란다.온지유의 말은 송미
“형사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죠? 이런 악독한 여자들에게는 절대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습니다.”여이현은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이번 사건은 그의 분노의 한계를 넘은 것이 분명했다.온지유와 아이는 그의 금기였고 누구든 그 선을 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했다.이선영은 마지막으로 발버둥 치려 했지만 여이현의 차가운 눈빛에 얼어붙어 그대로 꼼짝하지 못했다.경찰서에서 조사를 마친 뒤 여이현은 온지유의 코를 가볍게 집으며 꾸지람을 했다.“위험한 걸 알면서도 왜 그 여자들을 따라간 거야.”온지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며 그의 팔에 기대었다.“여보도 이미 다 알았잖아.”여이현은 그녀의 말에 얄밉다는 듯 눈을 굴렸다.부부로 오래 지내왔기에 온지유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그의 눈에는 뻔히 보였다.“그냥 모든 문제를 한 번에 끝내고 싶었어. 알지? 다음부턴 안 그럴게.”온지유가 사과하며 말했다.하지만 여이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이번 건 너무 위험했어. 만약, 정말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난 어쩌라고 그랬는데?”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지유는 그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췄다.여이현은 순간 멍해졌지만 곧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를 깊게 이어갔다.다섯 달 후.검은색 자동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다.여이현은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돌아와 온지유가 차에서 내리도록 도왔다.그녀의 배는 크게 부풀어 있었고 걷는 것조차 불편해 보였다.여이현은 그녀를 부축하며 병원으로 들어섰다.병원 문 안쪽에서 지석훈이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었다.“정말 시간 딱 맞추셨네. 정확히 두 시간을 기다렸거든.”여이현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미안해. 급하게 처리할 일이 좀 있었거든.”지석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급하게 처리할 일? 형이 지유 씨를 여기 오지 못하게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닌지. 아이의 성별을 아는 게 무서웠던 건 아니야?”전날 여이현은 지석훈에게 온지유의 태아가 아들인지 딸
“엄마! 아빠가 나한테 여동생이 생긴대요!”온지유가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별이가 그녀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이 말에 온지유는 가슴이 따뜻해졌다.아들과 딸, 이걸로 그녀의 삶은 충분했다.“엄마, 기분 좋아요?”별이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는 둘째 딸이 생기는 게 소원이었어. 그래서 정말 기뻐.”“너무 잘됐어요!”별이는 신나서 환호하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말했다.“엄마, 나 여동생한테 줄 선물 사고 싶어요. 우리 쇼핑 가면 안 돼요?”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딱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출산 준비물이나 아이 옷 등을 미리 준비해야겠다 싶었다.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여이현은 아내가 오래 걸어 다니기 힘들다는 걸 알고 지석훈에게 휠체어를 준비하게 했다.그렇게 가족들은 다 같이 번화가에 있는 유아용품 매장으로 향했다.유아용품 매장에 들어서자 진열된 물건들이 온통 눈을 사로잡았다.온지유는 이것저것 살펴보며 모두 예쁘다고 생각했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결국 고르기 어려워져서 우물쭈물했다.“애 옷은 너무 많이 살 필요 없어. 아기들은 금방 자라니까 갈아입힐 만큼만 준비하면 돼.”여이현은 경험자로서 작은 목소리로 조언했다.온지유는 아기 모자 하나를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이 작은 모자 좀 봐, 너무 귀엽지 않아?”“응, 마음에 들면 이런 걸로 사자.”여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모자 세네 개를 골랐다.그러고는 옷이 진열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도 한 번 보자.”온지유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한편, 별이는 여동생을 위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이것저것 들어보며 고민하다가 문득 작은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한 인형이었다.별이는 달려가 인형을 집어 들며 말했다.“바로 이거예요!”법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이거 괜찮네.”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
하지만 두 소녀는 이미 마셨던 음료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서로가 손해 보지 않길 바라면서 결국 손안의 잔을 버리고 새 음료 두 잔을 다시 구매했다.온지유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과거 그녀와 백지희도 그랬었다.서로가 더 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한쪽이 손해 볼까봐 걱정하며.“왜 그래? 혹시 뭐 마시고 싶어?”여이현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고 허리를 숙여 조용히 물었다.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 나 지희 보러 병원에 가고 싶어.”여이현은 바로 법로에게 별이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하고 온지유와 함께 백지희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문을 막 열려고 하던 그때, 안에서 백시윤이 나왔다.셋이 마주친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지유는 차갑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여기는 왜 왔어요? 지희를 그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또 뭘 하려고요?”백시윤은 잠시 여이현을 흘낏 보더니 두 사람을 더 이상 가로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병실 안의 백지희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온지유는 지난번보다 더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백지희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온지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지희야...”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살짝 잡고 조용히 말했다.“난 의사한테 가서 상태 좀 알아볼게. 넌 여기서 지희 씨랑 얘기 좀 해. 금방 다시 올게.”여이현은 두 친구의 시간을 존중하며 방을 나갔다.하지만 병실 밖에서 머물며 온지유를 지켜보기로 했다. 임신 중이라 더욱 안심할 수 없었다.병실 안, 온지유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백지희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백지희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온지유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흥분하며 말했다.“지희야, 깨어난 거야? 그렇지? 나 좀 봐봐, 지희야.”그녀는 백지희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며 애원하듯 말했다.“나야, 지유야. 날 좀 봐줘.
백지희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잠겼다.온지유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앉아 위로했다.“됐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백지희가 사고를 당한 이후 온지유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그녀가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건 분명 무언가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온지유는 자신이 백지희의 유일한 친구라는 걸 알기에 자신 외에는 백지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결국 온지유는 결심했다.백지희가 깨어나기만 하면 어떤 요청이든 무조건 들어주겠다고.백지희가 떠나고 싶다고 하면 그녀는 그걸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온지유는 병실에 있는 휠체어를 가져와 백지희를 태우고 바로 병실을 나섰다.“무슨 일이야? 어디 가는 거야?”여이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백지희가 깨어난 건 반가웠지만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가려는 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지희가 여길 떠나고 싶대. 난 지희를 도와줄 거야. 지금 바로 가야 해. 더 기다릴 수 없어.”그녀는 여이현의 팔을 잡으며 부탁했다.“이현 씨도 날 도와 줄 거지?”여이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당연하지. 하지만 이렇게 바로 데리고 나가면 병원에는 뭐라고 해. 내가 가서 석훈이랑 얘기해서 퇴원 절차를 밟을게. 넌 먼저 지희 씨를 데리고 내려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지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여이현은 병실을 나와 지석훈을 찾아갔다.퇴원 절차는 금방 끝났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섰고 백지희는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그러면서 백지희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우선 우리 집에 가자.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밥도 먹자. 저녁에 우리가 너를 공항으로 데려다줄게.”백지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지유야,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그녀는 온지유를
백시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약속했다.“사람들을 먼저 물러나게 해요. 그러면 여기서 나갈게요.”그녀는 여전히 온지유를 걱정했다.만약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여이현이 바로 차를 몰고 떠날 수 있도록 온지유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다.백시윤의 사람들은 도로변으로 차를 옮겼고 여이현도 차를 세웠다.길이 트이자 백지희는 차 문을 열었다.그리고 걱정하는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지유야, 괜찮을 거야. 나 소고기 먹고 싶어. 집에 도우미분들한테 준비 해달라고 해줘.”“알겠어. 지금 전화 걸어 둘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차로 돌아오고.”온지유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백지희가 차에서 내리자 백시윤은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지희야, 깨어났구나. 정말 깨어났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정말 난 널 잃은 줄 알았어.”백지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숨 막혀요! 제발 이거 놔요!”백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이대로 널 놓칠 수 없어. 절대로 널 떠나보낼 수 없어.”백지희는 그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약속했잖아요. 내가 떠나고 싶다면 막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방금 한 말을 잊은 거예요?”백시윤이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백지희는 다시 차로 돌아가 온지유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백시윤은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았고 백지희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힘이 없었다.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그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백지희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백시윤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 당황하며 손을 풀었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간절하게 말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야. 널 잃는 게 너무 두려웠어.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몰라. 그때 난 정말... 널 영원히 잃을까 봐 무서웠어.”백시윤은 백지희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으로 가자. 네가
응급실 문밖, 김가은이 사람들을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백지희를 보자마자 다가가 뺨을 때렸다.온지유가 이를 보고 재빨리 백지희를 자기 뒤로 끌어들이며 김가은을 노려보았다.“왜 때리는지 알죠?”김가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짐작할 수 있었다. 백시윤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백시윤은 응급실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알면서도 친구가 감싸게 내버려두는 거예요?”김가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백지희는 그녀 앞으로 걸어가 목이 멘 목소리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하, 죄송하면 다예요?”김가은이 차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하다고 끝낼 거였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겠죠. 백지희 씨, 당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에요.”온지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백지희를 끌어당겨 뒤로 숨겼다. 그리고 김가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가은 씨,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셔야죠. 지희는...”“지유야, 그만해.”백지희가 온지유의 말을 막아섰다. 백시윤이 사고를 당한 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그가 붙잡을 걸 알면서도 굳이 떠났던 자신이었기에 김가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백지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목에 난 흉터가 눈에 띄었고 김가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김가은은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명령했다.“내 허락 없이는 백지희가 시윤 씨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해요.”그리고 다시 백지희를 보며 말했다.“불만 없죠? 아니면 설마 직접 시윤 씨를 돌보고 싶어요?”“아니요, 언니 뜻에 따를게요. 그리고 시윤 씨가 깨어나면 저는 떠날 겁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백지희는 김가은의 오해를 풀고 싶어 솔직히 말했다.그러나 김가은은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백지희 씨, 당신 참 대단하네. 어쩐지 시윤 씨가 그렇게 신경 쓰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좀 알려줘 봐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백지희가 기억하는 백시윤은 그녀의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일정마저 정해주며 심지어 입을 옷까지 정해주었다.백시윤이 그녀를 도와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준 적 없어야 했다.“김가은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희를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씀인 거예요?”온지유는 백지희가 지난번 그런 일을 당한 것도 백시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 백시윤의 미친 짓을 보게 되었을 때 더욱 백시윤의 곁에서 반드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김가은은 차갑게 웃으며 백지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떠나겠다면서요? 그럼 지금 당장 떠나요. 영원히.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지희 씨가 정말로 떠날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벌일 건지 말이에요. 어차피 전 시윤 씨가 아니라서 지희 씨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거든요.”김가은은 아주 매정하게 말했다. 다만 백지희가 원하던 반응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백시윤은 여전히 응급실에 있었기에 그녀는 바로 떠날 수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었다.“그래요, 이만 가죠. 가은 씨가 시윤 씨가 더는 우리 지희를 찾아오지 않게 잘 지켜보고 있길 바라요.”온지유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지희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말을 마친 온지유는 백지희의 팔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차에 올라탄 뒤 나직하게 말했다.“지희 씨, 정말로 떠나고 싶어요?”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왜 안 떠나겠어? 백시윤이 그동안 너한테 한 짓을 잊은 거야? 당연히 떠나야지. 우리 지희한테는 백시윤 따위 필요 없다고.”백지희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일단 깨어난 거 보고 떠나고 싶어. 뭐가 어찌 됐든 그 교통사고는 나 때문에 당한 거니까 책임은 지고 싶어.”온지유는 화가 났으나 백지희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그녀는 백지희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일단은 우리 집에서 지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백시윤 소식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