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나한테 여동생이 생긴대요!”온지유가 진료실에서 나오자마자 별이가 그녀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이 말에 온지유는 가슴이 따뜻해졌다.아들과 딸, 이걸로 그녀의 삶은 충분했다.“엄마, 기분 좋아요?”별이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봤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는 둘째 딸이 생기는 게 소원이었어. 그래서 정말 기뻐.”“너무 잘됐어요!”별이는 신나서 환호하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말했다.“엄마, 나 여동생한테 줄 선물 사고 싶어요. 우리 쇼핑 가면 안 돼요?”온지유는 그 말을 듣고 딱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출산 준비물이나 아이 옷 등을 미리 준비해야겠다 싶었다.온지유는 별이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별이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여이현은 아내가 오래 걸어 다니기 힘들다는 걸 알고 지석훈에게 휠체어를 준비하게 했다.그렇게 가족들은 다 같이 번화가에 있는 유아용품 매장으로 향했다.유아용품 매장에 들어서자 진열된 물건들이 온통 눈을 사로잡았다.온지유는 이것저것 살펴보며 모두 예쁘다고 생각했고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결국 고르기 어려워져서 우물쭈물했다.“애 옷은 너무 많이 살 필요 없어. 아기들은 금방 자라니까 갈아입힐 만큼만 준비하면 돼.”여이현은 경험자로서 작은 목소리로 조언했다.온지유는 아기 모자 하나를 집어 들며 미소 지었다.“이 작은 모자 좀 봐, 너무 귀엽지 않아?”“응, 마음에 들면 이런 걸로 사자.”여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모자 세네 개를 골랐다.그러고는 옷이 진열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저쪽도 한 번 보자.”온지유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한편, 별이는 여동생을 위한 선물을 고르고 있었다.이것저것 들어보며 고민하다가 문득 작은 인형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한 인형이었다.별이는 달려가 인형을 집어 들며 말했다.“바로 이거예요!”법로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래, 이거 괜찮네.”선물은 주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
하지만 두 소녀는 이미 마셨던 음료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서로가 손해 보지 않길 바라면서 결국 손안의 잔을 버리고 새 음료 두 잔을 다시 구매했다.온지유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과거 그녀와 백지희도 그랬었다.서로가 더 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한쪽이 손해 볼까봐 걱정하며.“왜 그래? 혹시 뭐 마시고 싶어?”여이현은 그녀의 감정 변화를 눈치채고 허리를 숙여 조용히 물었다.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 나 지희 보러 병원에 가고 싶어.”여이현은 바로 법로에게 별이를 집으로 데려가라고 부탁하고 온지유와 함께 백지희의 병실로 향했다.병실 문을 막 열려고 하던 그때, 안에서 백시윤이 나왔다.셋이 마주친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온지유는 차갑게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여기는 왜 왔어요? 지희를 그렇게 만든 것도 모자라서 또 뭘 하려고요?”백시윤은 잠시 여이현을 흘낏 보더니 두 사람을 더 이상 가로막지 않고 옆으로 비켜섰다.병실 안의 백지희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온지유는 지난번보다 더 수척해진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백지희의 창백한 얼굴을 보자마자 온지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지희야...”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목이 메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살짝 잡고 조용히 말했다.“난 의사한테 가서 상태 좀 알아볼게. 넌 여기서 지희 씨랑 얘기 좀 해. 금방 다시 올게.”여이현은 두 친구의 시간을 존중하며 방을 나갔다.하지만 병실 밖에서 머물며 온지유를 지켜보기로 했다. 임신 중이라 더욱 안심할 수 없었다.병실 안, 온지유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백지희의 손을 꼭 잡았다.그때 백지희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다.온지유는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흥분하며 말했다.“지희야, 깨어난 거야? 그렇지? 나 좀 봐봐, 지희야.”그녀는 백지희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가며 애원하듯 말했다.“나야, 지유야. 날 좀 봐줘.
백지희는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잠겼다.온지유는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고 앉아 위로했다.“됐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다 지나간 일이야.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백지희가 사고를 당한 이후 온지유는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그녀가 갑자기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건 분명 무언가 큰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그리고 온지유는 자신이 백지희의 유일한 친구라는 걸 알기에 자신 외에는 백지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결국 온지유는 결심했다.백지희가 깨어나기만 하면 어떤 요청이든 무조건 들어주겠다고.백지희가 떠나고 싶다고 하면 그녀는 그걸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온지유는 병실에 있는 휠체어를 가져와 백지희를 태우고 바로 병실을 나섰다.“무슨 일이야? 어디 가는 거야?”여이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백지희가 깨어난 건 반가웠지만 두 사람이 갑작스럽게 나가려는 건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지희가 여길 떠나고 싶대. 난 지희를 도와줄 거야. 지금 바로 가야 해. 더 기다릴 수 없어.”그녀는 여이현의 팔을 잡으며 부탁했다.“이현 씨도 날 도와 줄 거지?”여이현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당연하지. 하지만 이렇게 바로 데리고 나가면 병원에는 뭐라고 해. 내가 가서 석훈이랑 얘기해서 퇴원 절차를 밟을게. 넌 먼저 지희 씨를 데리고 내려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백지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여이현은 병실을 나와 지석훈을 찾아갔다.퇴원 절차는 금방 끝났다.세 사람은 병원을 나섰고 백지희는 한숨을 쉬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그러면서 백지희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우선 우리 집에 가자.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밥도 먹자. 저녁에 우리가 너를 공항으로 데려다줄게.”백지희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지유야, 너를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그녀는 온지유를
백시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차 약속했다.“사람들을 먼저 물러나게 해요. 그러면 여기서 나갈게요.”그녀는 여전히 온지유를 걱정했다.만약 대화가 잘 풀리지 않으면 여이현이 바로 차를 몰고 떠날 수 있도록 온지유의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했다.백시윤의 사람들은 도로변으로 차를 옮겼고 여이현도 차를 세웠다.길이 트이자 백지희는 차 문을 열었다.그리고 걱정하는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지유야, 괜찮을 거야. 나 소고기 먹고 싶어. 집에 도우미분들한테 준비 해달라고 해줘.”“알겠어. 지금 전화 걸어 둘게. 무슨 일이 있으면 빨리 차로 돌아오고.”온지유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백지희가 차에서 내리자 백시윤은 기다릴 것도 없이 달려가 그녀를 거칠게 끌어안았다.“지희야, 깨어났구나. 정말 깨어났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정말 난 널 잃은 줄 알았어.”백지희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숨 막혀요! 제발 이거 놔요!”백시윤은 단호하게 말했다.“안 돼. 이대로 널 놓칠 수 없어. 절대로 널 떠나보낼 수 없어.”백지희는 그의 말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약속했잖아요. 내가 떠나고 싶다면 막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방금 한 말을 잊은 거예요?”백시윤이 약속을 지킬 사람이 아니라는 걸 간과했다.백지희는 다시 차로 돌아가 온지유와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하지만 백시윤은 여전히 그녀를 놓지 않았고 백지희는 필사적으로 버텼지만 힘이 없었다.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그녀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백지희의 눈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백시윤은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자 당황하며 손을 풀었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간절하게 말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다치게 하려던 건 아니야. 널 잃는 게 너무 두려웠어.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몰라. 그때 난 정말... 널 영원히 잃을까 봐 무서웠어.”백시윤은 백지희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으로 가자. 네가
응급실 문밖, 김가은이 사람들을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백지희를 보자마자 다가가 뺨을 때렸다.온지유가 이를 보고 재빨리 백지희를 자기 뒤로 끌어들이며 김가은을 노려보았다.“왜 때리는지 알죠?”김가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백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짐작할 수 있었다. 백시윤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없었다면 백시윤은 응급실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알면서도 친구가 감싸게 내버려두는 거예요?”김가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싸늘해졌다.백지희는 그녀 앞으로 걸어가 목이 멘 목소리로 사과했다.“죄송합니다.”“하, 죄송하면 다예요?”김가은이 차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죄송하다고 끝낼 거였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겠죠. 백지희 씨, 당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에요.”온지유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백지희를 끌어당겨 뒤로 숨겼다. 그리고 김가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가은 씨, 먼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인하셔야죠. 지희는...”“지유야, 그만해.”백지희가 온지유의 말을 막아섰다. 백시윤이 사고를 당한 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걸 알았다.그가 붙잡을 걸 알면서도 굳이 떠났던 자신이었기에 김가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이야말로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백지희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목에 난 흉터가 눈에 띄었고 김가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김가은은 뒤를 돌아보며 사람들에게 명령했다.“내 허락 없이는 백지희가 시윤 씨 근처에 가지 못하게 해요.”그리고 다시 백지희를 보며 말했다.“불만 없죠? 아니면 설마 직접 시윤 씨를 돌보고 싶어요?”“아니요, 언니 뜻에 따를게요. 그리고 시윤 씨가 깨어나면 저는 떠날 겁니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예요.”백지희는 김가은의 오해를 풀고 싶어 솔직히 말했다.그러나 김가은은 갑자기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백지희 씨, 당신 참 대단하네. 어쩐지 시윤 씨가 그렇게 신경 쓰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요. 좀 알려줘 봐요,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백지희가 기억하는 백시윤은 그녀의 모든 걸 전부 통제하고 일정마저 정해주며 심지어 입을 옷까지 정해주었다.백시윤이 그녀를 도와주며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준 적 없어야 했다.“김가은 씨, 그게 무슨 말이죠?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희를 다치게 해도 된다는 말씀인 거예요?”온지유는 백지희가 지난번 그런 일을 당한 것도 백시윤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오늘 백시윤의 미친 짓을 보게 되었을 때 더욱 백시윤의 곁에서 반드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김가은은 차갑게 웃으며 백지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떠나겠다면서요? 그럼 지금 당장 떠나요. 영원히. 저야말로 궁금하네요. 지희 씨가 정말로 떠날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일을 벌일 건지 말이에요. 어차피 전 시윤 씨가 아니라서 지희 씨한테 별다른 감정이 없거든요.”김가은은 아주 매정하게 말했다. 다만 백지희가 원하던 반응이기도 했다.하지만 그녀는 망설였다.백시윤은 여전히 응급실에 있었기에 그녀는 바로 떠날 수 없었다.그녀는 할 수 없었다.“그래요, 이만 가죠. 가은 씨가 시윤 씨가 더는 우리 지희를 찾아오지 않게 잘 지켜보고 있길 바라요.”온지유는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지희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지켜볼 수 없었다.말을 마친 온지유는 백지희의 팔을 잡으며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차에 올라탄 뒤 나직하게 말했다.“지희 씨, 정말로 떠나고 싶어요?”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왜 안 떠나겠어? 백시윤이 그동안 너한테 한 짓을 잊은 거야? 당연히 떠나야지. 우리 지희한테는 백시윤 따위 필요 없다고.”백지희는 입술을 앙다물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일단 깨어난 거 보고 떠나고 싶어. 뭐가 어찌 됐든 그 교통사고는 나 때문에 당한 거니까 책임은 지고 싶어.”온지유는 화가 났으나 백지희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그녀는 백지희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일단은 우리 집에서 지내. 내가 사람을 보내서 백시윤 소식
팬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백지희는 결국 수락했다.하지만 이번 만남에서 백지희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대화는 이어가고 있었기에 그녀는 얼른 이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고 싶었다.드디어 투자자의 핸드폰이 울리더니 급한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백지희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온지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지희 너는! 하,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백시윤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면서 팬이 실망하는 건 또 싫다고 하고.”“괜찮아, 백시윤이 아직 깨어난 건 아니잖아? 그리고 어차피 아직 떠날 수 없었잖아. 그냥 투자자가 하자는 대로 하자. 이번만 그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다음에는 그런 제안을 할 수 없을 거야.”백지희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사실 불안했다.상대가 만약 백시윤을 봐서 투자한 것이라면 아마 백시윤의 결정에 따를 것이다.그녀는 전부터 이미 위약금까지 낼 준비를 했기에 일을 더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다.이내 한숨이 나왔다.온지유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힐끗 째려보았다.두 사람이 찻집에서 나오려고 할 때 온지유는 자신들을 미행하고 있던 사람을 똑똑히 보았다. 그 사람은 바로 김가은의 옆에 있던 여자였다.여자는 온지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찻잔을 들며 그녀와 인사를 했다.온지유는 태연하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진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김가은이 사람을 보내 두 사람을 미행하고 있는 목적은 무엇일까.온지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연이은 며칠, 백지희는 방에만 박혀 그림에만 집중했다. 가끔 방에서 나와 온지유와 함께 밥을 먹기도 했다.일주일 후, 백시윤 쪽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었다. 아마 상태가 많이 나아진 듯했다.다만 여전히 깨어나지 못했다.온지유는 이 소식을 백지희에게 알려주려고 했으나 여이현이 그녀를 막았다.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난 지희랑 약속했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기로.”“내가 알기론 백시윤은 여전히
전시 당일,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마자 구경하러 온 팬들이 갤러리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그림이 하나도 없는 거죠? 그림도 없으면서 무슨 전시를 해요? 당장 환불해줘요.”“환불! 환불!”이곳저곳에서 환불해달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환불을 요구했다.사회자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백지희도 당황했다.며칠 동안 그녀는 밤까지 새우면서 그림을 그려 총 99점의 그림을 그렸다. 마지막 100번째 그림을 망가뜨리지만 않았다면 완벽했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갤러리엔 그녀의 그림이 한 점도 없었다.믿어지지 않았다.투자자도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오니 입구에 몰려든 사람들이 보였다. 그럼에도 믿어지지 않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갤러리 안을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한 점의 그림도 없었다.투자자는 바로 화가 치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약서대로 이행하지 않았으니 배상금을 물어낼 준비를 하고 있으세요.”그리고 이내 사람들에게 말했다.“여러분, 환불을 원하신다면 백지희 씨에게 요구하세요. 저도 사기당한 거니 저도 피해자입니다.”“아니에요. 전, 전 여러분들 속이지 않았어요. 제 그림도 이 사람들이 가져간 거예요. 그런데 왜 제가 그린 그림이 한 점도 없는지 모르겠네요.”백지희는 말을 마친 후 스케치 전표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 위에는 어떤 그림을 누가 가져갔는지 시간과 장소가 전부 적혀 있었다.투자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말도 안 되는 소리! 이 유승민이라는 사람은 저희 쪽 사람이 아닙니다. 백지희 씨, 아무리 위조한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 회사 사람으로 그럴싸하게 해야죠.”“전 정말 그러지 않았어요. 제 친구 집에 CCTV도 있으니 저랑 함께 제 친구 집으로 가시죠. 제가 친구한테...”“됐습니다. 일단 환불부터 해주세요. 내일 제가 변호사를 통해 말을 전해드리죠.”투자자는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고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돌렸다.표를 산 사람들은 바로 백지희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
설마 특수한 취향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진호 오빠...”석규리는 배진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묵묵히 일어나기만 했다.배진호가 보여준 혐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석규리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미진이 약속한 물건은 너무나도 달콤했다.둘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것은 아이의 것이 되고 회사도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여이현도 배진호를 가족처럼 대해주니 그 인맥을 이용해 배진호의 회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다. 지금 이 대우만 참아내기만 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호화로운 부잣집 며느리 생활이었다.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배진호는 독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배진호는 좋은 남자였다. 그를 따내기만 하면 그 뒤에는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석규리는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권다솔 쪽.그녀는 단걸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방문을 잠갔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에게 한번, 또 한 번 배진호 따위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되새김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똑똑똑.”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따라온 것일 테다.권다솔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버지가 아닌 남태건이 서 있었다.“다솔아, 괜찮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호 씨와 여자분이 하도 너무 심한 말을 하길래. 입 밖에 오빠, 오빠라며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잖아.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남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많이 속상할거라는건 잘 알고 있어. 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고 나면 좋아질 거야.”“졸려요. 전 그냥 빨리 자고 싶어요.”
“다솔 씨, 우리 꼭 이런 결말로 끝을 보아야겠어요?”배진호는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의 마음도 덩달아 식어가기 시작했다.이 순간 배진호는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다솔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정오의 햇빛처럼 따뜻했다.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권다솔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여기까지 온건 다 당신 탓이 아닌가요? 진호 씨, 선택은 당신이 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건 재미가 없어요. 성인인데 자신이 한 결정에는 책임을 져야지 않겠어요?”그가 어머니의 말을 듣기로 하고 석규리와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지 않았다.권다솔은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었다. 남편이 밖에서 여동생을 만들어 오는 것도, 시어머니가 시시각각 남편에게 바람 상대를 소개해 주는 것도 참을 수 없다.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그와 함께 살면 된다. 어쨌든 권다솔은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솔 씨, 제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인터넷 여론도 사람을 시켜서 해결하도록 했어요. 어머니 쪽도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우리 좋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돼요?”배진호는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권다솔은 손을 뻗어 옆의 나무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그리고 그 나뭇가지를 배진호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가지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어요? 안 되겠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어요. 저희 사이는 완전히 끝났으니까 이만 애인을 데리고 돌아가세요.”권다솔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사랑이며 혼인이며 결국은 다 헛된 것뿐이다. 다시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배진호는 그래도 권다솔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석규리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온몸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진호 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 오빠가 이렇게까지 맞았는데 또 모욕을 받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그러나 배진호는 힘껏 그녀의 팔
“비켜, 방해하지 말고! 석규리 너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야?”배진호는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그는 권용민과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어째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해오는 걸까.“진호 씨, 절 죽이고 싶다면 그대로 목을 졸라 죽이세요. 전 상관없어요.”석규리는 턱을 들고 가녀린 목을 배진호 앞에 드러냈다.한 가닥의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그녀는 배진호가 아무리 화가 나도 여성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있는 곳에서 그녀는 목 졸라 죽일 리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이번 일로 정말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하더라도 권다솔의 집안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권용민은 두 사람이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이곳은 그의 집이다. 드라마 촬영현장이 아니다.차오르는 화를 못 이겨 권용민은 다시 한번 배진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양심의 가책은 무슨!”“아저씨, 때리려면 저를 때리세요! 진호 오빠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석규리는 급히 배진호의 앞을 막아섰다.권다솔은 메시지를 받고 달려 온 순간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석규리는 배진호의 앞에 막아선 것도 모자라 권용민을 손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권다솔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초인이 아닌 이상 그렇게 빨리 도착할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곁에 남태건이 있었기에 권용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권다솔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는 남태건의 손에서 아버지의 손을 전해받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배진호를 보는 권다솔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가세요. 전 이제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진호 오빠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러고 돌아갈 생각이에요?”석규리는 쉽게 돌아설
“당연히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해명했다.하지만 석규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그녀는 먼저 배진호를 한번 바라보고 억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다.“저는 진호 씨를 단순히 오빠로만 생각해요. 우리 둘은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이 말은 권용민의 분노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석규리의 표정만 보아도 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런데 무슨 남매 같은 사이라니.“오빠 동생은 무슨. 이혼도 했겠다 집에 가서 실컷 마음껏 해 봐라. 왜 여기서 연극을 하면서 날 역겹게 만드냐!”권용민은 분노에 차서 배진호의 옷깃을 놓고 손을 털어냈다.그는 자신의 딸이 이런 남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호 오빠, 빨리 말 좀 해 봐요! 오빠가 형수님이랑 이혼한 건 저 때문이 아니잖아요!”석규리는 서둘러 배진호의 옆으로 다가섰다.그녀는 손을 뻗어 배진호의 손을 잡으려 하며 연약한 척 그의 쪽으로 기댔다.남태건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진을 찍어 권다솔에게 보내고 메시지를 덧붙였다.배진호는 석규리를 거칠게 밀어내며 혐오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그는 어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로 석규리를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것이 자신과 석규리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석규리가 계속해서 배진호의 앞에 나타나 관심을 끌려는 행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석규리는 남태건과 비등할 정도로 성가셨다. 둘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니 그와 권다솔 사이를 방해하지 말고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배진호는 생각했다.권용민은 배진호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혐오는 거짓으로 보
딸이 결혼 생활 동안 겪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게다가 인터넷에 퍼진 여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권다솔을 욕하고 악독한 말들로 그녀를 공격했다.이 모든 것을 떠올린 권용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결국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둘렀다.배진호의 몸에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었다.“아버님, 남태건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남태건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다솔 씨를 때린 적도 없고, 욕하거나 모함하려 한 적도 없어요.”배진호는 권용민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아 반격하지 않고 계속 몸을 피하며 말했다.하지만 권용민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 있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며 말했다.“콩 심은 데서 콩 난다는데 당신 어머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잖아. 매일 우리 딸을 괴롭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어?”배진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그 역시 남자로서 권용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만약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의 해명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권다솔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깊이 아프게 한 건 사실이었다.그리고 혈연관계는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걸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 줄까?“이렇게 찾아와서 변명하는 건 무슨 뜻인데? 다솔이 부모님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회사에 피해 갈까 봐 말이지.”남태건은 이 틈을 이용해 발길질을 더 했다.남태건의 발길은 거칠었다. 특히 한 번은 배진호의 허리를 강하게 찼다. 배진호가 권다솔과 부부였다는 사실, 그들이 모든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남태건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다.권다솔은 그의 것이다. 영원히!“네가 우리 딸을 진심으로 대하고 처음에 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도 널 도와줬을 거다. 내가 소중한 딸을 고생하게 놔두겠냐? 그런데 약속은커녕
밖으로 가는 도중 남태건은 권용민을 진정시키는 척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만 계속했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 배진호와 마주쳤다.“무슨 담으로 여기에 온 거냐! 딸을 그렇게 해코지해놓고 지금 와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권용민은 소매를 걷고 주먹을 꽉 쥐었다.쭉 신사적인 태도로 살아왔던 그는 말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절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딸을 위해 배진호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아버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솔 씨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배진호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태건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는 진실이 밝혀질까 봐 불안해 급히 배진호를 쫓아내려 했다.“두 분은 이미 이혼하셨지 않나요. 지금 이곳에 있을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만. 당장 여기서 떠나세요, 될수록 멀리요. 이미 다솔이를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들도 편치 않게 만들 작정인가요!”“태건 씨, 사람을 모함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습니다!”배진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남태건은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한 짓들은 비겁하다는 단어 외에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짓들을 벌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호 씨는 이미 내기에서 졌어요. 당장 다솔이 곁에서 떨어져서 다시는 접근하지 마세요. 뒤에서 꼼수를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요.”배진호는 인터넷의 여론을 떠올렸다.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권용민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권용민은 분명 이 모든 것이 배진호가 벌인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배진호가 권다솔을 해칠 리가 있는가?“아버님, 인터넷의 그...”“퍽!”남태건은 급한 마음에 결국 배진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그는 배진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비서가 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나서야 배진호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배진호는 자신이 어떤 모욕을 들어도 상관없었으나 권다솔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었다.“다솔 씨는 제게 미안할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어요.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설령 권다솔이 정말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이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배진호가 권다솔에게 험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권다솔은 좋은 여성이었다. 둘이 헤어지게 된 건 다 배진호가 잘해주지 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동영상을 업로드 한것이 지금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어요.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가서 권다솔 씨 집에서 반격을 하고 있습니다.”비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전해주었다.배진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바로 사람을 시켜서 해명하도록 하세요. 함부로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 계정에는 고소장을 보내고요. 앞으로 또 근거 없는 말들을 하면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배진호는 당장 권다솔을 만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비서는 바로 해명 글을 올리러 갔다.하지만 밀접히 인터넷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남태건이 이 일을 쉽사리 해명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배진호가 해명 문장을 올린다면 그 문장들 사이에서 트집을 잡아내 또 네티즌들을 자극 시키면 된다.동시에 권용민과 김영은에게 배진호가 한 ‘악행’들을 전해주기도 했다.“다솔이는 너무 순진했던 겁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셔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배진호의 본성을 알아 채지 못한 겁니다. 배진호라는 사람도 정말 지독하죠. 아무리 그래도 부부였던 사이인데 남은 정도 없는 걸까요.”“우리 딸에게 욕받이를 시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건가!”권용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힘껏 상을 내리쳤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