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다들 뜻이 다른 것 같으니 이 협력은 여기서 끝마치는 거로 하죠. 저희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공장의 책임자는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붙잡았다.“잠시만요. 에이, 뭘 그렇게 성급하게 가세요. 혹시 저희가 제안한 금액이 적은 거라면 일단 가지 마시고 하루 쉬면서 대화를 나눠보시는 건 어떨까요? 여기까지 오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거잖아요.”배진호가 거절하려던 순간 권다솔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본 후 다시 말을 바꾸었다.“그러죠. 오늘은 여기서 쉬다 가죠.”저녁이 되자 하늘이 어둠으로 깔렸다.배진호는 권다솔을 보며 말했다.“왜 굳이 남으려고 한 거죠?”그는 권다솔이 피곤해서 남으려고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권다솔은 다소 사악한 눈빛을 지으며 말했다.“이 세상에서 어떤 장사꾼이든 두 손이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죠. 전 방금 이 공장에서 불법 행위를 발견했어요. 그래서 이따가 몰래 증거로 남겨둘 생각이에요. 만약 정말로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면 바로 신고해서 이 사람들을 처리하는 거죠.”말을 하면서 그녀는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배진호가 물었다.“정말로 제대로 본 게 맞아요?”만약 정말이라면 그의 인맥으로 바로 이 사람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당연하죠. 그래서 제가 그딴 소리를 들어도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한 번에 시원하게 복수하려고요.”두 사람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기에 바로 현장을 살펴보러 갔다. 두 사람이 흥미진진하게 현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 비서님과 권다솔 씨는 이 야밤에 잠도 안 자고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익숙한 목소리에 배진호는 경직되었다. 이내 고개를 돌리자 손전등을 들고 있는 공장의 책임자가 서 있었다. 어두운 밤 아래 책임자의 얼굴은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권다솔은 순간 무서움을 느끼며 배진호를 보았다. 배진호는 다소 그녀를 달래는 듯한 눈빛으로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산책 좀 하고 있었어요. 이젠 피
배진호의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의 멍청함에 후회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앞만 보고 달렸다. 권다솔은 점점 체력이 떨어졌다. 비록 힘겹게 따라가고는 있었으나 숨 쉬는 소리가 거칠어진 것을 보아 이미 한계였다.그녀가 말했다.“배 비서님, 먼저 가세요. 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배진호가 바로 대답했다.“안 돼요. 자, 얼른 업혀요.”권다솔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저었다.“아... 아니에요.”“얼른요. 계속 시간을 지체했다간 따라 잡힐 거예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더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그녀는 배진호의 목에 팔을 둘렀다.“저 무겁죠.”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녀는 평소에 운동 좀 할 걸 생각하면서 후회했다. 이런 때에 배진호의 짐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부드러운 그녀의 몸이 배진호의 등에 닿았지만 현재 그는 다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팔을 두어 번 올리며 자세를 고친 후 권다솔에게 말했다.“가벼워요. 너무 가벼워서 고양이를 업은 것 같네요. 전혀 무겁지 않아요.”배진호의 말에 권다솔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는 그녀를 힐끗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만약에, 아주 만약에 여기서 함께 죽으면 순장이 될까요?”말은 뱉은 사람도, 들은 사람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배진호는 헛기침만 할 뿐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들 뒤로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솔직히 그것도 괜찮은 것 같네요.”배진호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걱정하지 마요. 분명 무사할 거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앞쪽에서 몇 개의 돌이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추격자들은 거의 쫓아오고 있었고 앞은 벼랑이니 더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벼랑은 그다지 높지 않아 보였다. 만약 여기서 뛰어내린다면 어쩌면 살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잡힌다면 산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그렇게 생각하니 배진호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권다솔 씨, 많이 무서워요?”그의 어투는 확고했다.
권다솔은 무의식적으로 배진호의 손을 꽉 잡았다가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배진호를 천천히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녀는 주위에 있던 나뭇가지를 들고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와. 오라고. 난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배진호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너무 자극하지 말아요.”뱀은 서늘한 눈을 번뜩이며 혀를 날름거리더니 확 다가왔다.“아악...”권다솔은 나뭇가지를 마구 휘두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뱀은 그녀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에 감겼고 바로 팔을 물고 사라져버렸다.그녀는 놀라 소리를 지른 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에 난 이빨 구멍을 보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본능적으로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결국 눈물을 흘렸다.“배진호 씨, 저 여기서 죽게 되는 걸까요?”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절대 죽지 않을 거니까. 일단 마음부터 추슬러요.”말을 하면서 그는 망설임 없이 입을 권다솔의 팔에 가져다 댔다. 권다솔은 일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팔에서는 부드럽고 따듯한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그녀는 바로 입을 열었다.“배진호 씨, 괜찮아요. 이러실 필요 없어요. 이러면 배진호 씨 상태만 더 나빠질 거예요.”그러나 배진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빨았고 이내 검은 핏물을 뱉어낸 후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권다솔 씨는 제가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거니까 반드시 무사히 돌려보낼 거예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진호는 번지르르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한 번 뱉은 말은 확실히 지키는 사람이었다.“배진호 씨, 저희 꼭 무사히 여기서 빠져나가요.”말하면서도 목이 메었고 눈가에 눈물도 맺혔다.배진호는 독을 빼낸 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당연하죠. 우린 꼭 안전하게 빠져나갈 거예요.”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초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권다솔은 이상하게도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배진호가
배진호가 이렇게 긴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그는 사람들과 이렇게 긴 대화를 하는 걸 귀찮아했었다. “더 이상 울지 말아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운이 정말 좋다는 증명 아니겠어요?” 그는 말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고 권다솔의 기분이 좋아지게끔 애썼다. 권다솔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배진호 씨 말이 맞아요.” 밤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밖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추위에 몸을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배진호는 바로 다가갔다. 목을 두어 번 움찔거리더니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 “둘이 좀 더 가까이 있으면 아마 더 따뜻할 거예요.” 그의 말은 다소 모호했지만, 권다솔은 금방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몸은 아주 순순히 배진호 쪽으로 다가갔다. 배진호는 결국 남자였고 그것도 튼튼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몸은 작은 난로처럼 뜨거웠고 권다솔은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았고 순간 배진호는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권다솔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배진호 씨를 만난 건 제 행운이에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달라진 감정이 흐르는 듯했다. 배진호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다솔 씨를 만난 것도 내 행운이에요.” 그 순간 숲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더 이상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배진호는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면 내가 꼭 제대로 쉬게 해줄게요.” 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굳이 지금 찬물을 끼얹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 버텼으니, 내일 아침만 되면 길을 잘 찾아서 무사히 나갈 수 있겠지? “그때는 제가 살게요. 절대 저랑 뺏지 마세요.” 권다솔이 말했다. “좋아요.” 배진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못을 발견한 권다솔은 순간 마음속에서 기쁨이 벅차오르며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나무를 찾아 배진호를 기대게 했다. 그녀는 치마 끝을 찢어 천 조각을 만든 후 물에 적셔 배진호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진호 씨, 제발 괜찮아지셔야 해요. 돌아가면, 돌아가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다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배진호가 지금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라 아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진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뜨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한 말 다 진심이에요?” 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만약 배진호의 몸이 계속 뜨겁지 않았다면 열이 나는 척 일부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얼른 놔 주세요.” 하지만 배진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죠. 저 다 들었어요.” 권다솔은 고개를 숙이고 못 마땅해하며 그를 밀었다. “일부러 열 나는 척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 배진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권다솔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대며 말했다. “자, 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닌지 직접 만져봐요.” 뜨거운 체온에 권다솔은 순간 더 이상 장난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이런 상태로는 안 돼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그렇게 그녀는 배진호를 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권다솔의 발걸음이 멈췄고 눈에는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녀는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온 중년 남자를 보았다. 그녀는 급히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사는 주민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급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권다솔은 바로 대답했다. “이건 제 친구인데 저희가 이곳에 놀러 왔다가 길을 잃었어요. 지금 열이 많이 나서
혹시 그녀에게 딴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그 가능성이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긴장하며 마음속으로 경계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그녀는 아마 이 사냥꾼 아저씨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배진호가 아픈 상황이라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사냥꾼 아저씨는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본 듯이 말했다.“난 당신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요. 난 깡마른 사람보다 좀 더 성숙하고 매력 있는 여자가 좋아요.”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권다솔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피해망상에 빠져있고 자아도취라도 된 것처럼 들렸다.“밤새 저 사람 돌봤으니, 아마 내일쯤이면 열도 내릴 겁니다. 그때 제가 두 분을 배웅해 드릴게요.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좋은 술 두 병만 가져다주면 돼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마침, 우리 집에 괜찮은 술이 좀 있어요. 그때 꼭 맛보세요.”사냥꾼 아저씨는 술 얘기기 나오자 갑자기 말이 많아지며 웃었다.“보니까 부자 집안이신 것 같네요. 집안에 귀한 술일 텐데 맛이 분명 좋을 것 같네요.”권다솔도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저는 먹을 것 좀 준비할게요.” 말을 끝내고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권다솔은 방으로 들어가서 배진호를 살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배진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배진호가 젊고 건강한 탓인지, 아니면 사냥꾼 아저씨가 준 해열제가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진호의 몸은 벌써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이마의 온도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권다솔은 마음속으로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지금 상황을 보니 내일이면 배진호는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나 물을 가져오려고 하던 중,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배진호가 언제 눈을 뜬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어
“고마워요.”갑자기 권다솔의 귀에 배진호의 따뜻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와 동시에 배진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권다솔을 바라보고 있었다.권다솔은 그 순간, 그가 얼마나 진지한지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정중하게 굴지 않으셔도 돼요. 배진호 씨도 저를 도와주셨어요. 우리 빨리 상처부터 회복해서 여기서 나가요. 조금 있다가 아저씨한테 핸드폰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볼까요?”권다솔은 이 산속에서 배진호와 보낸 시간이 충분히 길었다고 생각했다.공장 쪽은 복수심을 품고 있을 것이고, “살아서든 죽어서든 반드시 찾아야 한다.”라는 태도로 그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래요. 조금 있다가 내가 얘기해 볼게요.”이 아저씨는 그들을 구해주긴 했지만, 배진호가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저씨는 단호히 거절했다.“나야 늘 산에서 사냥하며 사는데, 핸드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죠.”아저씨의 집은 작은 방 하나였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그런데 핸드폰이 없다니 배진호는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아저씨 주변에는 정말로 통신할 수 있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다.그래서 배진호는 제안했다.“그럼, 아저씨. 저희를 시장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거기서 돈을 내고 구조 전화를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연락이 닿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아저씨는 핸드폰은 없었지만, 그의 옷차림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배진호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아저씨가 먼저 조건을 내걸었다.배진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물었다.“아저씨, 어떤 조건인가요?”아저씨는 배진호와 권다솔을 번갈아 가며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내가 그쪽들을 구했지만, 그쪽들은 둘 중 한 명만 떠날 수 있어요.”배진호와 권다솔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이 즉시 굳어졌다.둘 중 한 명만 떠날 수 있다니. 누구를 보낸다고 해도 좋을 리 없었다.게다가 아저씨는 지금까지 괜찮았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혹시, 배진호는 순간 마
“그래도 자신을 조금은 아는군요.”권다솔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깊게 지었다.배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권다솔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녀의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배진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분명 의식이 했으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네요, 당신은.”“우리가 아직도 얼굴 찡그리면서 울상을 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진짜 죽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건 운명이고, 하늘이 우리를 같이 죽게 만든 거라면 우리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어요?”배진호가 말을 끝내기 전에 권다솔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권다솔의 웃는 모습은 고난 속에서 즐기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배진호는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다.“당신을 데리고 출장을 왔는데, 이렇게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예전에는 권다솔에 대해 의심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일을 함께 겪고 나니 권다솔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권다솔의 인품이 좋지 않았다면, 이미 그를 내버려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권다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권다솔이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만약 미안하시다면, 우리가 이곳을 떠날 수 있을 때 제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는 건 어떠세요? 저는 저 자신을 단련하고 싶어요. 게다가 이렇게 큰 여진 그룹에서 제가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여이현 대표님이 저를 그냥 두겠어요?”몇 년 전, 여이현은 이미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른 지금, 여이현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께서 우리를 꼭 찾을 거예요.” 비록 지금 여이현은 온전히 온지유와 별이에게 정신이 쏠려 있지만, 그래도! 여진 그룹에서 많은 일은 그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중요한 순간에 여이현이 그를 찾지 못하면 분명 그를 찾을 거고, 그렇게 되면 배진호와 권다솔이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그랬으면
단미주는 담담히 말했다.“아무도 안 배워줬다면 지금 배우면 되겠네요. 전에 서비스업 할 때 어땠는지 잘 알잖아요. 이제 나도현 씨랑 결혼했다고 태도를 바꾸겠다는 거예요? 사람은요, 초심을 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나도현은 클럽 안까지 따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양시은이 거절하고 그를 밖에 세워뒀다. 그걸 모르는 단미주는 그녀 혼자 있는 게 만만해 보였는지 처음부터 줄곧 막말을 쏟아냈다.“단미주 씨, 제가 오늘 왜 여기 왔을 것 같아요?”양시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예리한 시선으로 단미주를 바라봤다.단미주는 비웃는 표정으로 대꾸했다.“제가 그것도 알아야 해요? 여기 온 이상 똑똑히 기억해요. 저는 갑이고, 양시은 씨는 을이에요.”갑과 을이라는 표현에 양시은은 피식 웃음이 터졌다.“협력이 성사됐나요? 제가 협력 얘기는 없던 거로 하자면 어떡할 건데요. 저도 단미주 씨랑 꼭 협력해야 한다는 의무는 없어요.”양시은은 단미주의 거만한 태도가 못마땅했다. 단미주가 조금은 자중하다가 협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에야 빈정대려나 싶었는데, 예상과 달리 시작부터 전혀 자제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그렇다면 양시은도 더 이상 배려할 필요가 없다.“협력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겠어요. 단미주 씨, 앞으로 저를 계속 괴롭히려 든다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퇴로는 마련하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네요.”그 한마디를 남기고, 양시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그런데 문을 나서려던 찰나 나도현이 문간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그의 시선은 아주 날카로웠다. 양시은은 그가 분명 단미주에게 따지러 왔다는 걸 직감했다.얼마 전 연회장에서, 나도현은 단미주를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가 줬다. 하지만 단미주는 전혀 자중하지 않고 또다시 양시은을 건드렸다.나도현은 입가에 냉소를 띠었다.“협력이라는 것도 결국 내 아내를 곤란하게 하려는 속셈 아니었나요? 근데 왜 이어가지 않아요?”단미주는 그가 밖에서 기다리고만 있으리라 생각했지, 직접
그날 연회장에서, 사람들은 나도현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양시은을 무시했다. 하물며 그가 없는 틈을 노려 양시은에게 험한 말을 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나도현은 양시은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러운 눈빛을 보냈다.“우리 예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잖아. 이제 겨우 함께하게 됐는데 내가 널 지키고 싶은 마음도 알아줘. 무슨 일을 겪든 나한테 꼭 말해 줘. 말 안 해주면 내가 모르고 지나갈 테고, 그럼 너 혼자서 괜한 고생할 거잖아.”차분하고도 따뜻한 나도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네 마음 다 알고 있어. 그런데 이번 협력은 정말 내 실력을 증명할 기회라고 생각해.”스스로 능력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까.양시은은 나도현의 곁에서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그 여자랑 협력한다고 해서 뭘 증명할 수 있는데? 시은아, 내가 있으면 굳이...”나도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양시은이 손으로 그의 입술을 막았다. 더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도현의 생각은 그녀도 알았다. 그래서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단미주 씨는 나를 무시하고 있어. 만약 이번 기회에 단미주 씨의 기를 꺾으면 아무도 날 얕볼 수 없을 텐데, 넌 어떻게 생각해?”양시은의 의도는 너무나 단순하고 직설적이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악감정을 품은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꿀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잘해도 끝없이 딴지를 걸 거야. 넌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돼. 굳이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어.”그의 부모만 해도 양시은에게 엄청난 편견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편견을 내려놓고 하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만 말이다.어찌 됐든 유언비어는 끊임없이 생기는 법이라, 양시은이 모든 공격을 다 막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아니, 난 이미 마음먹었어. 말리지 말아 줘.”양시은은 결심이 확고했다. 나도현도 억지로 막을 수 없음을 잘 알았다.“그래. 그렇다면 내가 차
“그냥 집에서 하민이를 돌봐 주면 안 돼? 하민이 너랑 있으면 나도 마음이 한결 편하거든. 돈은 내가 많이 벌 테니까 넌 걱정 말고 편히 지내면 돼. 평생 널 먹여 살릴 수 있어.”나진 그룹의 규모가 워낙 크고, 변호사 시절부터 받았던 수임료도 억대였으니, 나도현은 한 가족이 평생 먹고사는 데 문제없다는 생각이었다.하지만 양시은은 고개를 저었다.“전에 내가 하던 일도 이것저것 뒤죽박죽이었잖아. 근데 넌 그때부터 나한테 마음껏 해 보라고 응원해 줬어. 그런데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건 너무 한 거 아니야?”양시은이 다시 법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사실 나도현이 크게 응원해 준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집에서 하민을 돌보라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집에서 아이만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좋은 기회를 얻어 자기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시기였다.“그런 뜻은 아니야. 네가 여기저기 다니는 게 힘들어 보여서 그래. 너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기도 하고, 네가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나도현은 그녀를 껴안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말과 함께 그의 눈길은 온통 양시은에게 쏠려 있었다.양시은이라고 어찌 그 마음을 모르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잡은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수는 없었다. 세상 모두에게 자신은 나도현과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알았어, 알았어. 더는 말 안 할게. 그럼 오늘은 일단 푹 쉬는 게 어때? 내일 회사 가야 하잖아.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지금 주문해 줄게. 아니면 뭐 마실래?”나도현은 양시은을 마치 아이 대하듯 온갖 걸 다 챙겨 주려 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뭐든 해결해 주고 싶다는 표정이었다.양시은도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오늘 밤에는 다른 고민이 있었다. 단미주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그녀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나도현이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무슨 문제 있어?”“아픈 건 아니고... 사실 이따가 협력할 사람이랑
단미주는 임다혜를 면회했다. 임다혜의 상태는 역시나 좋지 않아 보였다.“일이 이렇게 된 거 후회 안 해?”만약 임다혜가 나도현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지도 않았을 것이다.임다혜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인생사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잖아. 난 이제 후회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아.”그러면서 그녀는 단미주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나를 본보기로 삼아. 너는 절대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한테 목매지 마. 그러다가 멍청한 짓을 저지르게 되는 거야.”임다혜는 아주 정형적인 본보기였다.단미주는 임다혜를 대신해 복수해 주고 싶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전에 양시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오히려 당한 적도 있어서 더욱 마음이 쓰렸다.“미안해. 내가 네 억울함을 풀어 주지 못했어. 근데 나도 잊진 않았어.”“네가 날 찾아와 주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굳이 나를 위해 나도현을 건드리거나, 양시은을 상대로 무리수를 두지 말아 줘. 넌 걔네 상대가 안 돼.”특히 나도현은 전직 변호사로서 아주 치밀한 사람이었다. 그건 변호사 일을 그만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단미주는 한숨을 깊이 쉬었다.“알지. 그래서 더 미안해. 아무튼 이제 나오면 다시 당당하게 살아. 기다리고 있을게.”“응.”단미주는 임다혜와 오래 이야기를 나눈 뒤에야 자리를 떴다.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단미주는 어느 날 양시은과 협력을 논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도 단미주는 여전히 양시은을 깔보는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당신 같은 사람을 나도현 씨가 아니면 누가 알아줬겠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이는 거예요? 대체 뭘 믿고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양시은 씨, 설마 사람들이 조금 치켜세워 준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단미주는 비웃듯이 웃었다.사람들이 양시은을 높이 평가하는 건 오로지 나도현이 뒤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나도현은 나진 그룹의 경영을 맡고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 시절에 쌓은 인맥도 상당했다. 게다가 그의 절친한 친
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위로하는 걸 알고 한숨을 쉬었다. 잠시 우울했지만 곧 기분을 추스르고 괜찮아졌다.하지만 두 아이가 차 안에서 조잘조잘 나누던 비밀이 식당까지 이어질 줄은 몰랐다. 밥을 먹을 때도 두 아이는 얼굴을 맞대고 귓속말하느라 음식에 손도 별로 대지 않았다.결국 양시은은 더 이상 봐줄 수 없어서 테이블을 톡톡 쳤다.“식사 시간에는 조용히 밥부터 먹어야지. 학교에서도 밥 먹을 땐 떠들지 말라고 배웠을 텐데?”하민은 그녀가 화가 좀 난 것 같다는 걸 단박에 눈치챘다. 그래서 바로 바른 자세로 돌아앉아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네, 이제 조용히 먹을게요.”양시은은 별이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별이도 은근히 그녀가 무서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먹겠다고 했다.두 아이가 순식간에 얌전해지자 양시은은 내심 흐뭇해졌다. 그 모습을 본 나도현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과일 주스를 한 잔 더 따랐다.“기분이 좋아 보이네?”양시은은 콧방귀를 뀌며 소곤소곤 말했다.“아까 차 안에서 하민이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그냥 복수하는 거지, 뭐.”나도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너 아직도 애 같다는 거 알아? 왜 애한테 앙심을 품고 그래.”양시은은 나도현이 뭘 말하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큰 문제도 아니니 아이들 장난처럼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놀리고 장난치는 맛이 없으면 육아의 절반은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지 않나.한편, 별이는 저녁을 먹고 나서 온지유가 데리러 왔다. 온지유는 오늘 도와줘서 고맙다며 거듭 인사했다.“별거 아니에요. 고맙긴요. 저 별이 좋아하잖아요.”양시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온지유의 품에서 잠 들어 버린 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사랑스러웠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요한 거실 한편을 둘러봤다. 그러다 마침 나도현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딱 봐도 양시은을 찾으러 오는 기색이었다.그걸 알아챈
나도현은 고개를 숙여서 양시은이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지만 눈빛 속에는 여전히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양시은은 그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해 괜히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 달래야 좋을지 몰라서 결국 그의 손을 계속 붙잡고만 있었다. 그게 바로 나도현이 원하던 바였다.“이제 슬슬 하민이 데리러 갈 시간이네.”양시은이 자료를 전부 훑어본 뒤 기지개를 켜며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오후 네 시가 되었다. 유치원은 네 시 반에 끝나니 지금 출발하면 딱 맞게 도착할 터였다.나도현은 이미 차 키를 들고 있었다.“가자.”마침 길이 막히지 않아 금세 유치원 앞에 도착했다.양시은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말했다.“지유 씨가 오늘 일이 있어서 별이를 못 데리러 간대. 우리 보고 대신 좀 가달라네.”둘은 시선을 마주쳤다.나도현은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하나 더 데리러 가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양시은은 집 냉장고 사정을 떠올리고는 조금 고민스러운 얼굴이 됐다.“집에 식재료가 그리 많진 않은데...”아이가 둘이면 조금 모자랄 수도 있었다.온지유가 평소에도 도움을 준 걸 생각하면 별이를 대충 대접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럼 나가서 먹자.”나도현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양시은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하민을 유치원에서 태운 뒤, 저녁에 별이도 함께 있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진짜요? 엄마, 그럼 빨리 별이 형아 만나러 가요!”“일단 앉아. 안전벨트부터 매고.”시동을 걸기 전에 양시은이 하민의 자세를 바로잡았다.별이는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는 유치원과 가까운 덕분에 금방 태울 수 있었다.두 아이가 차에 함께 타자마자 온 세상이 시끌벅적해졌다. 하민과 별이는 서로 보고 싶었다며 눈을 반짝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 살짝 귀
식당에 있던 대부분 사람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남자의 말만 듣고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남자가 뻔뻔하게 되묻자 자연스레 의심의 시선이 양시은 쪽으로 향했다.“요즘 애들은 망상증이 심한가 봐.”“아니지, 자기가 예쁘다고 착각하는 거겠지. 자신감도 병이라잖아.”“에이, 너무들 하네. 난 저 여자가 꽤 예뻐 보이는데? 오히려 저 남자가 진짜 훔쳐본 것 같아. 아까부터 묘하게 수상했잖아.”마침 누군가가 중립적으로 말을 거들자, 양시은은 그 사람에게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해준 이는 젊은 여대생으로 보였는데, 양시은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져 서둘러 고개를 떨구었다.양시은은 다시 그 남자와 맞섰다.“제가 언제 저를 봤다고 했어요? 제 손에 들린 서류를 봤다고 했죠.”“헛소리하지 마요!”양시은은 짧게 한숨을 쉰 뒤 미소를 띤 채 단호하게 말했다.“헛소린지 아닌지, 여기 CCTV 영상 보면 바로 알 수 있어요. 저쪽에 카메라가 하나 달려 있거든요. 떳떳하다면 확인 정도 해봐도 되죠?”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따라가 보니 희미하게 빨간불이 켜진 카메라가 있었다. 남자는 그제야 카메라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양시은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잡아주세요! 저 사람 변태예요!”하지만 상황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주변 사람들도 영문을 몰라 허둥대느라 반응을 못 했다. 양시은 역시 한발 늦어 속만 탔다.그때 갑자기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뭐야, 네가 뭔데 내 손을 꺾어! 아악!”남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만 들어도, 그를 붙잡은 사람이 꽤 강하게 제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도현이었다.언제부턴가 문가에 서 있던 나도현을 발견한 양시은은 눈을 깜빡이며 리셉션 쪽을 흘끗 봤다.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다.“너 언제 온 거야? 아까는 여기 없었잖아...”“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