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호가 이렇게 긴말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그는 사람들과 이렇게 긴 대화를 하는 걸 귀찮아했었다. “더 이상 울지 말아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무사히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운이 정말 좋다는 증명 아니겠어요?” 그는 말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고 권다솔의 기분이 좋아지게끔 애썼다. 권다솔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배진호 씨 말이 맞아요.” 밤바람은 매우 차가웠다. 밖에서 찬 바람이 불어오자, 그녀는 추위에 몸을 움츠러들었다. 그녀의 모습을 본 배진호는 바로 다가갔다. 목을 두어 번 움찔거리더니 약간 쑥스러운 듯 말했다. “둘이 좀 더 가까이 있으면 아마 더 따뜻할 거예요.” 그의 말은 다소 모호했지만, 권다솔은 금방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몸은 아주 순순히 배진호 쪽으로 다가갔다. 배진호는 결국 남자였고 그것도 튼튼한 체격을 가진 남자였다. 그의 몸은 작은 난로처럼 뜨거웠고 권다솔은 순간적으로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았고 순간 배진호는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권다솔은 얼굴을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말했다. “배진호 씨를 만난 건 제 행운이에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뭔가 달라진 감정이 흐르는 듯했다. 배진호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목이 메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권다솔 씨를 만난 것도 내 행운이에요.” 그 순간 숲속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도 더 이상 거슬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배진호는 말했다. “우리가 돌아가면 내가 꼭 제대로 쉬게 해줄게요.” 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굳이 지금 찬물을 끼얹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 또한 마음속으로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여기까지 버텼으니, 내일 아침만 되면 길을 잘 찾아서 무사히 나갈 수 있겠지? “그때는 제가 살게요. 절대 저랑 뺏지 마세요.” 권다솔이 말했다. “좋아요.” 배진
밖으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연못을 발견한 권다솔은 순간 마음속에서 기쁨이 벅차오르며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나무를 찾아 배진호를 기대게 했다. 그녀는 치마 끝을 찢어 천 조각을 만든 후 물에 적셔 배진호의 몸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배진호 씨, 제발 괜찮아지셔야 해요. 돌아가면, 돌아가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다 들어드릴게요.” 그녀는 배진호가 지금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라 아마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배진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뜨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한 말 다 진심이에요?” 권다솔은 깜짝 놀랐다. 만약 배진호의 몸이 계속 뜨겁지 않았다면 열이 나는 척 일부러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얼른 놔 주세요.” 하지만 배진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안 되죠. 저 다 들었어요.” 권다솔은 고개를 숙이고 못 마땅해하며 그를 밀었다. “일부러 열 나는 척하는 거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 배진호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권다솔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에 대며 말했다. “자, 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닌지 직접 만져봐요.” 뜨거운 체온에 권다솔은 순간 더 이상 장난칠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이마를 찡그리며 말했다. “지금 이런 상태로는 안 돼요. 제가 데리고 나갈게요.” 그렇게 그녀는 배진호를 끌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갑자기 권다솔의 발걸음이 멈췄고 눈에는 기쁨의 빛이 스쳤다. 그녀는 사냥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온 중년 남자를 보았다. 그녀는 급히 다가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사는 주민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급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죠?” 권다솔은 바로 대답했다. “이건 제 친구인데 저희가 이곳에 놀러 왔다가 길을 잃었어요. 지금 열이 많이 나서
혹시 그녀에게 딴마음이 있는 건 아닐까? 그 가능성이 떠오르자, 그녀는 순간 긴장하며 마음속으로 경계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그녀는 아마 이 사냥꾼 아저씨에게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배진호가 아픈 상황이라 그를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사냥꾼 아저씨는 마치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본 듯이 말했다.“난 당신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요. 난 깡마른 사람보다 좀 더 성숙하고 매력 있는 여자가 좋아요.”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권다솔은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이 피해망상에 빠져있고 자아도취라도 된 것처럼 들렸다.“밤새 저 사람 돌봤으니, 아마 내일쯤이면 열도 내릴 겁니다. 그때 제가 두 분을 배웅해 드릴게요. 감사 인사는 필요 없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좋은 술 두 병만 가져다주면 돼요.”그 말을 들은 권다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마침, 우리 집에 괜찮은 술이 좀 있어요. 그때 꼭 맛보세요.”사냥꾼 아저씨는 술 얘기기 나오자 갑자기 말이 많아지며 웃었다.“보니까 부자 집안이신 것 같네요. 집안에 귀한 술일 텐데 맛이 분명 좋을 것 같네요.”권다솔도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알겠어요. 그럼 저는 먹을 것 좀 준비할게요.” 말을 끝내고 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권다솔은 방으로 들어가서 배진호를 살폈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배진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배진호가 젊고 건강한 탓인지, 아니면 사냥꾼 아저씨가 준 해열제가 효과가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배진호의 몸은 벌써 정상으로 회복되었고 이마의 온도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권다솔은 마음속으로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지금 상황을 보니 내일이면 배진호는 완전히 회복될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나 물을 가져오려고 하던 중, 갑자기 손목이 잡혔다. 배진호가 언제 눈을 뜬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어
“고마워요.”갑자기 권다솔의 귀에 배진호의 따뜻하고 진심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와 동시에 배진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권다솔을 바라보고 있었다.권다솔은 그 순간, 그가 얼마나 진지한지 느낄 수 있었다.“그렇게 정중하게 굴지 않으셔도 돼요. 배진호 씨도 저를 도와주셨어요. 우리 빨리 상처부터 회복해서 여기서 나가요. 조금 있다가 아저씨한테 핸드폰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볼까요?”권다솔은 이 산속에서 배진호와 보낸 시간이 충분히 길었다고 생각했다.공장 쪽은 복수심을 품고 있을 것이고, “살아서든 죽어서든 반드시 찾아야 한다.”라는 태도로 그들을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래요. 조금 있다가 내가 얘기해 볼게요.”이 아저씨는 그들을 구해주긴 했지만, 배진호가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아저씨는 단호히 거절했다.“나야 늘 산에서 사냥하며 사는데, 핸드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죠.”아저씨의 집은 작은 방 하나였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그런데 핸드폰이 없다니 배진호는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아저씨 주변에는 정말로 통신할 수 있는 도구가 아무것도 없었다.그래서 배진호는 제안했다.“그럼, 아저씨. 저희를 시장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거기서 돈을 내고 구조 전화를 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연락이 닿으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아저씨는 핸드폰은 없었지만, 그의 옷차림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배진호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아저씨가 먼저 조건을 내걸었다.배진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물었다.“아저씨, 어떤 조건인가요?”아저씨는 배진호와 권다솔을 번갈아 가며 쓱 훑어보더니 말했다.“내가 그쪽들을 구했지만, 그쪽들은 둘 중 한 명만 떠날 수 있어요.”배진호와 권다솔은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이 즉시 굳어졌다.둘 중 한 명만 떠날 수 있다니. 누구를 보낸다고 해도 좋을 리 없었다.게다가 아저씨는 지금까지 괜찮았다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혹시, 배진호는 순간 마
“그래도 자신을 조금은 아는군요.”권다솔은 입가에 미소를 더욱 깊게 지었다.배진호는 그 모습을 보며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권다솔은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그녀의 정신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배진호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분명 의식이 했으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네요, 당신은.”“우리가 아직도 얼굴 찡그리면서 울상을 지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진짜 죽게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이건 운명이고, 하늘이 우리를 같이 죽게 만든 거라면 우리가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어요?”배진호가 말을 끝내기 전에 권다솔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권다솔의 웃는 모습은 고난 속에서 즐기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배진호는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다.“당신을 데리고 출장을 왔는데, 이렇게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요.”예전에는 권다솔에 대해 의심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일을 함께 겪고 나니 권다솔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권다솔의 인품이 좋지 않았다면, 이미 그를 내버려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권다솔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권다솔이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만약 미안하시다면, 우리가 이곳을 떠날 수 있을 때 제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는 건 어떠세요? 저는 저 자신을 단련하고 싶어요. 게다가 이렇게 큰 여진 그룹에서 제가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여이현 대표님이 저를 그냥 두겠어요?”몇 년 전, 여이현은 이미 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른 지금, 여이현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반드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거예요. 대표님께서 우리를 꼭 찾을 거예요.” 비록 지금 여이현은 온전히 온지유와 별이에게 정신이 쏠려 있지만, 그래도! 여진 그룹에서 많은 일은 그가 맡아서 하고 있었다.중요한 순간에 여이현이 그를 찾지 못하면 분명 그를 찾을 거고, 그렇게 되면 배진호와 권다솔이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그랬으면
“2억원.”여이현이 가격을 제시했다.아저씨는 처음에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지만 여이현이 금액을 언급하자마자 흔쾌히 동의했다.“좋아요. 하지만 돈을 주기 전에는 사람을 넘길 수 없습니다.”여이현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계좌번호를 주세요.”사냥꾼은 깊은 산속에서 사냥하며 지냈지만 은행 계좌는 가지고 있었다. 그가 계좌번호를 불러주자 불과 2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계좌로 2억 원이 입금되었다.그는 평생 이렇게 많은 돈을 본 적이 없었다. 기쁨에 휩싸여 있던 그는 여이현이 이미 사람을 데리고 배진호와 권다솔을 찾으러 떠난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돈이 입금된 이상 사람은 자연스럽게 여이현에게 넘겨졌다.여이현은 즉시 배진호와 권다솔을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지석훈에게 직접 검사를 맡겼다.두 사람 모두 부상이 심했고 심지어 몸에는 뱀독의 잔여물까지 남아 있었다. 지석훈은 두 사람에게 혈청을 투여하고 입원 치료를 권장했다.병실에서 여이현은 배진호에게 말했다.“당분간 병원에서 푹 쉬세요. 회사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퇴원하면 유급 휴가를 줄 테니 그때까지 몸을 잘 회복하도록 해요.”베진호는 여러 해 동안 여이현의 곁에서 헌신적으로 일해왔다.이번 유급 휴가는 당연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다.“며칠만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제가 회사에 안 나가면 대표님 혼자서 어떻게 다 감당하시겠습니까?”고모인 여희영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푹 빠져있고, 권다솔은 배진호와 함께 입원해 있었다. 온지유는 임신을 한 상태였기에 회사에 나와 업무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혼자 감당하기 힘들다고 해서 다친 사람을 끌어내 와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여이현은 병상 옆에 앉으며 말했다.배진호와 권다솔을 한 병실에 둔 이유는 두 사람의 증상이 같았기에 지석훈을 배려해서였다.배진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몸이 좀 나으면 몇 가지 업무는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괜찮아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몸부터 챙기세요. 권다솔 씨도 마찬가지예요.
지석훈은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그가 불평 섞인 말을 내뱉자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예전 온지유도 노승아도 그의 곁에 없었을 때, 여이현과 지석훈의 관계에 대해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었다.그런데 지금 지석훈이 또 예전과 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다.여이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말했다.“정말 죽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까?”여이현은 근거 없는 소문을 가장 싫어했다.특히 지금처럼 행복한 가정이 있는 상황에서 이상한 소문이 다시 생길 가능성을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지석훈은 여이현의 눈빛에 담긴 날카로운 기운을 느끼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그렇게 그는 여이현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여이현은 수려원으로 돌아왔다.돌아온 여이현을 본 온지유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무거운 기운을 알아챘다.온지유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 아직도 두 사람을 못 찾았어?”며칠이 지났고 많은 인력을 동원했는데도 사람을 못 찾았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 곁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이다.그에게 만약 정말로 무슨 일이 생겼다면 여이현이 얼마나 자책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찾았어.”온지유의 말을 들은 여이현은 겨우 얼굴의 긴장을 풀었다.하지만 온지유는 그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며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사람을 찾았다면 기뻐해야 할 텐데 여전히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즉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온지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찾았다면서 왜 이렇게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현 씨, 우리 부부잖아. 어떤 일이든 함께 헤쳐나가야지.”온지유는 두 발짝 앞으로 다가가 여이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여이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별일 아니야. 지석훈이 화나게 해서 그래. 난 우리에게 쓸데없는 소문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여재호가 외부에 숨겨둔 애인 송미경이었다.예전 여재호가 살아 있을 때는 생활비와 각종 소비가 풍족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엔 상황이 이전만 못 하게 된 그녀였다.더군다나 그녀는 임신한 배를 드러낸 채 나타났다.그리고 앞에 선 아이 둘은 여재호의 아들과 딸로 보였다.그들의 목적은 매우 분명했다.“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죽었어요. 당신들이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결국 당신들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다고요. 이제 우리 가족은 생계가 막막해졌어요!”송미경은 얼굴을 가리며 오열했다.그녀는 온지유의 볼록한 배를 보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당신도 임신했으니 임신부가 얼마나 힘든지 알 거 아니에요!”“우린 정말 살길이 없어서 찾아온 거예요. 이대로라면 우린 다 죽을 지경이라고요!”송미경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졌고, 아이들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보호하려는 듯 그녀를 등 뒤로 밀어냈다.“너는 위층으로 올라가. 여긴 내가 처리할게.”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나도 같이 있을게.”그녀는 여이현의 곁에 남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여이현은 그들을 날카롭게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여재호는 자발적으로 나간 겁니다. 그리고...”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미경이 말을 끊었다.“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이야말로 가문의 진정한 자손들이에요. 당신은 고작 입양아잖아요. 가문이 이만큼의 명예를 줬으면, 동생들한테 조금 나눠주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여자의 눈빛은 날카롭고 단호했다.이에 온지유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그럼 친자 확인서를 가져오세요. 만약 확인서와 조건이 다 맞는다면 당연히 일부를 드릴 수 있어요.”그러자 여자는 불만스럽게 소리쳤다.“일부요? 우리야말로 진짜 자손인데, 일부만 주고 나머지는 다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그건 우리 걸 뺏는 거잖아요!”그녀의 탐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모든 재산을 자신들에게 몰아주길 바라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