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다솔은 서슴없이 말하면서 확고한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그녀가 눈치챌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권다솔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여진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권다솔의 능력은 면접 때 본 그것이 전부였다. 여하간에 여이현의 비서 자리는 막중한 자리였고 앞으로 그와 함께 일을 해야 했기에 신중해야 한다.“권다솔 씨의 집안이 어떤지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진은 능력과 실력만 중요하게 보거든요. 권다솔 씨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이 계약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어요?”배진호는 느긋하게 입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권다솔 씨 혼자만 가는 거 아닙니다. 저와 함께 가는 겁니다.”배진호가 있으니 아무리 권다솔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었다.권다솔은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배 비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최주하와 지석훈, 그리고 나도현은 여이현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정부와 연관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여이현도 몇 년 동안 그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 기회에 다들 한몫 챙겨보면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생각을 했다.그런데 그들은?그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소소한 모임으로 생각했다. 협력이 아니라.그러나 그들의 시야에 나타난 사람은 여이현이 아니라 배진호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연한 핑크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그녀와 배진호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길이였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고 두 사람의 모습은 유난히도 어울렸다.최주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배 비서, 이분은 여자친군가요?”“아니면 약혼녀?”지석훈은 더 서슴없이 말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저 두 사람을 훑어볼 뿐이다.“두 사람 참 눈치도 없다. 배 비서 이 나이에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야. 아내면 모를까, 안 그래?”“...”배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배진
온지유는 여이현이 나이를 먹어도 체력이 이토록 좋은 줄은 몰랐다.그가 잠깐 틈을 보인 사이 얼른 밀어냈다.“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는데 안 받아도 괜찮아? 혹시 큰일이라도 난 거면 어쩌려고...”“급한 일이라면 배 비서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지금 너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어.”말을 마친 여이현은 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최주하는 여이현이 두 번이나 전화를 끊어버리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건 안내음이었다. 그는 이미 눈치를 했다. 여이현이 지금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의 연락을 끊어버릴 리가 없었다.그는 너무도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모이지 못해서 말이다.배진호도 더는 최주하가 쓸데없이 그와 권다솔을 이어주길 바라지 않았다.“권다솔 씨는 금방 입사해서 제가 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지켜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최 대표님과 같은 건 아닙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최주하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러자 지석훈은 웃었다.“네가 뭘 어쨌는지 정말로 모르는 거냐? 쓸데없이 자꾸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잖아.”최주하는 지금까지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었다. 그는 아주 다양한 여자들을 애인으로 두면서 한 여자에게 정학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둥이는 아니었다.“정말이지 그동안 너무 일만 해서 멍청해졌나 보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일만 하려는 거예요? 배 비서, 굳이 얘네들처럼 일하는 기계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최주하의 곁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그와 달리 지석훈과 나도현은 일에만 열중하면서 살았고 가끔 모임에 나가거나 술을 마셨다.인간은 평생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가족도 만들고 사랑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배진호에게 있어 뒷전이었고 설령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절대 권다솔과 할 리가 없었다.여하간에 권다솔은 금방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아직 그의 시험에도 넘지 않았기에
권다솔은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생각되면 그럼 증거라도 내놓으세요.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지 마시고요.”배진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증거?그건 곧 손에 들어올 것이다.한편 별이는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있었다. 고개를 젖혀 커다란 솜사탕을 보던 아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일 큰 거로 주세요.”아이의 이마엔 땀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즐겁게 논 것이 분명했다.법로는 솜사탕을 산 뒤 별이에게 건네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아이가 솜사탕을 받고 난 뒤에서 법로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이를 보았다.별이는 커다란 솜사탕을 베어 물며 말했다.“할아버지, 솜사탕이 너무 맛있어요. 드셔보세요.”“할아버지는 안 먹어. 별이가 먹어. 맛있으면 많이 먹어.”법로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먹었다.한 입 더 베어 물려고 하자 갑자기 멈칫했다.“할아버지, 저 배가 아파요...”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잃어버렸다.“별아, 왜 그러니.”법로는 얼른 아이를 안았다.주위로 사람이 몰려들며 말했다.“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누가 좀 구급차 불러주실래요?”“일단 제 차로 가요. 길가에 차를 세워뒀거든요. 얼른 오세요.”선한 사람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를 부축하며 병원으로 갔다.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호흡은 일정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아이의 안색은 너무도 창백했다.응급실로 들어간 뒤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오라고 한 뒤 자신은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안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외손자였다. 그런데 그가 응급실까지 오게 했으니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법로는 솜사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빠르게 여이현과 온지유가 도착했다. 온지유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불렀다.“아버지, 별이가 왜 병원에 온 거예요?”법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책하듯 말했다.“내가 솜사탕을 사줬는데 먹다가 정신을 잃었어. 딸아, 미안하구나. 내가 별이를 잘 돌보지 못했구나.”“아버지,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상대는 갑자기 크게 웃다가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제가 직접 대표님 아들을 데려다주었는데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 뭐, 이건 중요하지 않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대표님 아들에게 뭘 좀 주사로 투여했거든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아들을 데리고 제가 알려준 장소로 오세요.”권서정은 마지막 말까지 한 뒤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소는 어느 한 아파트 단지였다.그녀가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 드디어 서막을 열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별이를 데리고 가고 다시 돌려준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여이현은 주소를 잘 기억한 뒤 경고했다.“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너 같은 사람은 내가 손가락만 튕겨도 처리할 수 있어.”“대표님, 뭘 그렇게 무섭게 경고를 하고 그러세요. 제가 대표님 아들도 고이 돌려줬잖아요. 그런데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전 무섭지 않아요. 뭐, 여차하면 목숨으로 상대하면 되는 거죠.”목숨으로 상대한다니. 권서정의 목숨과 별이의 목숨을 어떻게 비길 수 있겠는가.권서정에 관해 그는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조용히 알아보고 있는 이유는 온지유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권서정은 주제도 모르고 나대며 그를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시끄럽고 네가 알려준 주소로 갈 거니까 딱 기다려.”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미 차올라버린 분노를 삭이기 위함이었다.감히 그의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정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아침밥을 사러 나가려다가 우연히 여이현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듣게 되었다. 바로 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여이현이 복도에서 화를 삭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여이현은 몇 분 후 병실로 들어왔다.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별이에게 다가가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권서정은 일부러 잘못된 주소를 알려주었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여이현이 경찰들과 함께 오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온지유는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죄송해요. 저희는 친구 찾으러 온 거예요. 제 친구 이름이 권서정이에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여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권서정이요? 모를 리가 없죠. 윗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듣기론 이 건물 전체를 매입했다고 하던데, 돈 많은 건물주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죠. 아들이 죽었으니. 어휴.”여자는 말을 마친 후 더는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아들이 죽고 나서 이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에겐 501호의 주소를 알려주었다.대체 무슨 생각일까?정말로 그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같은 의문이 머릿속에 생겨났다.그러나 두 사람은 권서정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권서정은 와인을 음미하며 동요를 듣고 있었고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유리관을 보았다.유리관 안에는 남자아이가 누워있었고 겉보기엔 4살쯤 되어 보였다. 아이는 아주 조용히 잠을 자는 것 같았다.“아들, 엄마가 우리 아들 친구 골라줬으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안목은 아주 좋거든. 우리 아들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아이니까 너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이때 입구 CCTV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온지유와 여이현이 찍히고 있었다.권서정은 모니터를 빤히 보면서 확인했으나 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분노가 솟구쳤다.“감히 날 속여? 내 아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는 걸 방해했으니 아들 살릴 생각은 절대 못 하게 할 거야!”그녀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 있던 두 사람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바로 문을 두드렸다.“권서정 씨,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요.”“문 열어. 안 그러면 사람 불러올 거니까.”두 사람은 문
여이현이 나서기도 전에 온지유가 권서정을 향해 달려들었다.온지유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권서정의 목을 졸랐다.“우리가 별이를 사랑하든 말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네 미래는 우리가 정할 수 있지!”그녀가 별이를 연예계로 데리고 온 이유는 별이가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그런데 누군가 호시탐탐 별이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권서정은 본능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온지유의 힘은 너무도 셌기에 그녀는 온지유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권서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네가 내 목을 조른다고 해서 별이가 나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해주는 데 그 약은 내가 특별히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제작한 거야!”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랴.특히 별이처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외동아들이면 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그녀는 이 점을 노려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온지유와 여이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온지유는 권서정의 무릎을 걷어차곤 손을 올려 있는 힘껏 뺨을 갈궜다.“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널 벙어리로 보지 않아. 이현 씨, 이 여자를 당장 유령 별장에 가둬버려!”여이현은 온지유와 몇 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토록 단호하고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설령 온지유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권서정을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었다.권서정은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으나 여이현은 사람을 시켜 입을 막아버리게 했다.별이에게 약을 투여한 손도 잘라버렸다...권서정은 그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의 아이가 평생 유리관 안에만 외로이 누워있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몰랐다. 별이에게 그런 약물을 투여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법로는 이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를 했다. 일반 약물을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것은 법로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법로는 빠르게 해독제를 만들
아침 일찍 의사가 다녀간 후 별이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법로에게 달라붙으며 퇴원하고 싶다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했다. 온지유의 허락을 받은 후 퇴원을 했다.병원으로 나오자마자 기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두 사람의 길을 막아섰다.누군가 별이의 앞으로 마이크를 들이밀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별이 어린이, 요 며칠 동안 촬영 전부 펑크 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아픈 거예요, 아니면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별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젖혀 법로를 보았다.법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별이를 안은 후 기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이가 요 며칠 고열에 시달려서 촬영할 수 없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별이가 티브이에 나오는 걸 바라고 있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건강을 되찾고 퇴원하게 되었으니까 이틀 후면 다시 티브이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고작 감기에 걸린 것인데 이틀이나 더 쉬어야 하는 겁니까? 별이와는 어떤 사이시죠? 별이의 보호자로 엄마가 왔다던데 아닌가요?”기자는 끈질겼다. 별이에 관한 불리한 대답을 들어야만 질문을 멈출 생각으로 보였다.법로가 대답하려던 때 마침 도착한 온지유는 경호원을 불러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어두워진 안색으로 기자들을 보았다.“어느 언론사의 기자시죠? 아니, 어느 방송사에서 나오셨죠?”“저기,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하.”말을 마친 기자는 얼른 짐을 챙겨 도망갔다. 다만 온지유는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지라 경호원들에게 눈짓하며 길을 막았다.그러자 기자는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에게 지금 상황을 찍으라고 하면서 온지유에게 별이가 연예인 병에 걸려 갑질한다는 영상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겠다고 협박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작게 말했다.“우리 별이 아빠가 누군지 알고 있죠? 여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를 텐데요. 여이현이라고.”기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아니요. 제 아내가 결정한 일이니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그쪽이 아무리 저한테 사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아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사람이라서요.”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배진호에게 샛별이라는 아역 배우를 알아보라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료가 그의 메일로 전송되었다.자료를 읽은 후 여이현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배진호에게 연락했다.“배 비서, 자료 조사 결과대로 어떻게든 이 샛별이라는 아이를 연예계에서 발도 못 들이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아역 스타를 묻어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반 시간 후, 그 사람은 다시 전화했다. 여이현은 무시한 채 티브이를 시청했다.마침 샛별이의 보호자가 이중 계약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고 샛별이의 소속사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그러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에게 연락할 것이었다. 물론 소용이 없겠지만.온지유는 경호원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여이현에게 달려가 꽉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아이, 부끄러워. 어른들이 어린이 앞에서 뽀뽀를 막 하고 있대요.”별이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별아, 엄마랑 아빠가 뽀뽀를 안 하면 별이 동생 어떻게 만들어주지? 별아, 정말로 동생을 원해?”동생이라는 말에 별이는 바로 두 손을 들며 찬성했다.“원해요! 여동생! 여동생이 갖고 싶어요! 아빠랑 엄마랑 얼른 뽀뽀해요!”아이는 순수했다. 어른이었다면 여이현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법로는 두 사람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 순간 온지유의 얼굴이 뜨거워지게 되었다.부끄러워진 그녀는 한참 여이현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법로는 허허 웃었다. 자기 딸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이를 안고 방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애정행각을 벌일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실험실을 어디에 만들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였다.“두 사람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