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별이와 함께 온지유의 실험실로 놀러 왔다가 우연히 온지유가 화장실로 달려가며 힘겹게 토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왜 그래. 어디 안 좋은 거야? 왜 갑자기 토하는 거야?”“아니야. 그건 아닌데...”온지유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전보다 더 심해져 눈물이 맺혀버렸다.여이현은 얼른 그녀를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병원으로 가자. 아버님, 별이 좀 봐주세요.”“너도 참, 내가 의사라는 걸 잊은 거냐?”법로는 아무 말도 없이 온지유를 빤히 보았다. 짐작이 가긴 했으나 그래도 제대로 검사를 해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의 말에 여이현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온지유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짐작 가는 것이 있어도 검사는 해봐야 안다. 법로는 온지유에게 소변 검사를 하자고 했다. 결과는 그가 짐작했던 것과 같았다.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검사 결과를 여이현에게 보여주었다.“축하해. 또 아빠가 되었네.”“또 아빠가 된다고요?”여이현은 검사 결과를 받으며 꼼꼼히 보았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온지유를 끌어안고 빙빙 돌았다.“나 또 아빠가 된대! 여보, 나한테도 둘째가 있대!”온지유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행여나 놓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얼른 여이현에게 내려달라고 했지만 여이현은 내려주지 않았다.너무도 기뻤다. 별이가 동생을 갖고 싶다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지유가 임신했으니 말이다.별이는 아무것도 모른 척 법로를 잡아당기며 작게 물었다.“할아버지, 아빠랑 엄마가 왜 저렇게 기뻐하시는 거예요?”“별아, 우리 별이한테 곧 동생이 생길 거야.”법로는 별이의 코를 톡 치며 말을 이었다.“우리 별이는 앞으로 오빠나 형이 될 거야. 앞으로 동생 잘 돌봐야 한다.”“정말요?”별이는 활짝 웃었다. 사실 그들의 대화로 눈치채고 있었으나 법로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온지유가 임신했다는 걸 안 여이현은 실험실에 있을 시간을 정해 주었다. 매일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만 머물게 하면서 그 외
여이현의 앞에서 이렇듯 거만한 말을 내뱉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두운 아우라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여이현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나온 염라대왕 같았다.“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온지유는 신분으로 사람을 찍어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거만하게 주제도 모르고 나대고 있지 않은가.게다가 남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칭하고 있는 샛별의 이름도 그녀의 아들 이름을 본떠서 지은 이름이 아니던가.남자는 거만하게 코웃음을 쳤다.“여이현 씨잖아요. 누가 몰라요? 자기를 키워준 양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양아버지는 죽인 비열한 사람이잖아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종이면서.”남자는 거침없이 말했다.심지어 마지막 말에는 힘까지 주었다.여이현은 절대 누군가 자신에게 이렇듯 무례하게 말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나서려던 순간 찰칵 소리가 나면서 플래시가 터졌다.남자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여러분, 다들 보세요! 저분이 여이현 씨입니다. 여씨 가문의 재산을 혼자 꿀꺽한 것도 모자라 제 동생을 연예계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아십니까? 제 동생의 이름이 샛별이라서 그랬다더군요. 자기 아들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말이죠!”정말이지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담담하게 다가간 뒤 뺨을 갈궜다. 그것도 여러 번.“왜 연예계에서 치워버렸는지 정말로 몰라서 그래요? 그쪽이 오늘 한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감히 여이현을 잡종이라고 욕하지 않았던가.정말이지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듣고 튀어나온 멍청이인지 알 수 없었다.남자가 불러온 기자들이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가족 중 믿을 만한 빽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이현이 그들을 처리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여이현을 공격하면서 이런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겠는가.남자는 여이현과 온지유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하지만 남자에겐 살려달라고 빌 기회도 없었다.남자가 끌려간 후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다가갔다.“방금 같은 상황에 내가 나서서 처리하면 되는데. 왜 네가 나서서 그래?”여이현은 온지유의 손을 잡다가 이내 허리를 끌어안았다.5년 동안 생이별을 하고 나서 여이현은 온지유를 아주 애지중지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임신까지 했으니 여이현의 보호는 더 심해졌고 그녀의 귀에 더러운 욕설조차 들리게 하지 않게 했다.“화가 나잖아. 더러운 말만 내뱉는데 당연히 때려야지 않겠어?”감히 여이현을 잡종이라고 했으니 말이다.여이현은 S 국 대통령 브람의 셋째 아들이었다. 브람도 그를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 생각이었다.만약 그녀와 별이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S 국에 남아서 대통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이현이 이토록 대단한 사람인데 감히 새파랗게 어린놈이 멋대로 지껄이지 않는가.게다가 여이현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두 아이의 아빠였기에 당연히 화가 났다.“그래, 때려야 하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직접 나서지 마. 손이 더러워지잖아.”여이현은 그녀를 부축했다.“앞으로 이런 일은 나한테 맡겨. 당신은 그냥 지켜보고 있기만 하면 돼. 임신해서 입맛도 없는 데 자꾸 힘 빼면 안 돼. 만약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하면 별이랑 장인어른한테 어떻게 설명하라고 그래.”법로와 온지유는 지금 아주 사이가 좋았다.별이도 활발해졌고 자꾸만 두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며 달라붙었다.셋이서... 아니 이젠 넷이 되었으니 앞으로 더 행복할 것이다.그는 절대 이 행복을 깨지지 않게 노력할 것이다.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그 정도까지 아니야. 예전의 나는...”여이현이 말허리를 잘랐다.“예전에 어땠다고 말하지 마.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지금은 내가 네 곁에 있으니까 절대 뜻밖의 사고가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알았어.”여이현은 아주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그녀가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온경준과 정미리가 오후에 그들을 찾아왔다.온지
여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았다.“그래서요? 그래서 당신들은 나더러 지금 고개를 푹 숙이면서 사과하고 보상금까지 내놓으라는 건가요? 그러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나한테 돌리고 알아서 그 상황을 받아들여라 이건 가요?”여이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눈은 싸늘했다.그들도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만나보았다.여이현의 태도에도 딱히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지만 반드시 여이현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알고 있다니 다행이군요.”하지만 여이현이 누구인가? 절대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니었다.특히 지위와 권력으로 남을 짓누르는 사람에겐 더더욱.먼저 찾아온 사람들은 그들이었으니 그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그러자 바로 감사팀이 왔다. 그들의 아들과 손자들까지 조사를 하고 나니 샛별이는 원래부터 별이의 인지도를 노리고 데뷔한 것이었다. 이름까지 비슷하게 지으면 연예계에서 별이의 덕을 보고 유명해질 것으로 생각했다.게다가 그들이 투자한 돈도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번 것이 아니었다.제일 중요한 건 새파랗게 어린 남자는 아버지와 삼촌의 명의로 나쁜 짓을 많이 했다.하필이면 여이현에게 걸려 인생이 끝장나게 되었다.여이현은 전화를 끊은 후 강태규를 찾아가려고 했다. 혼자 남을 온지유가 걱정되었지만 마침 온경준과 정미리가 왔으니 편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여이현은 두 사람에게 온지유를 부탁했다.“아버님, 어머님. 저 대신 지유를 잘 챙겨주세요. 여기서 며칠 동안 지내셔도 돼요. 전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여이현이 거만한 태도로 찾아온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온경준과 정미리도 보았다.온지유와 여이현은 살면서 평온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온경준도 온지유가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일에 휘말리기를 원치 않았다.그래서 온지유에게 말했다.“지유야, 여 서방이랑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는 건
온경준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유는 지금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우리랑 가면 아이들은? 여이현은 분명 지유 혼자 우리를 따라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정미리가 대꾸했다.“그게 뭐라고 그래요. 여 서방도 따라오라고 하면 되잖아요.”정미리의 생각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여이현이 허락하는지부터 봐야지.”“하, 당신도 참. 애들은 그냥 결혼했을 뿐이에요. 결혼했다고 우리 지유가 남이 되나요? 지유는 여이현의 소유물이 아니라고요.”정미리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온경준의 말에 반박했다.결혼은 하나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으나 온지유는 자유의 몸이었다. 언제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기에 굳이 일일이 여이현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온경준이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야. 지유 의견이 중요하지.”“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두 분께 민폐만 끼칠 거예요. 지금은 배 속에 아기도 있어서 입맛도 매일 변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전 그냥 여기 있을게요. 며칠 머물다가 가세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 테니까요.”“이건 네가 우릴 데려다주느냐 안 데려다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란다. 그리고 민폐라니. 가족끼리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어차피 거리도 멀지 않은데 돌아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그냥 두 분 여기서 한동안 지내시는 게 어때요. 별이가 방학하면 함께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오늘은 화요일이었다. 별이는 금요일부터 방학할 것이었다.다만 온경준이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방학에 함께 돌아가자고? 내가 보기엔 별이는 매일 촬영하느라 시간이 없는 것 같고 너는 시간이 있을 것 같은데.”온경준은 사실 탐탁지 않았다. 그는 별이가 촬영이 아닌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록 아직은 유치원생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순간 난감해졌다.“아빠, 전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전... 전 그냥 아빠랑 엄마가 여기서 조금 더
“그럼 난 주방으로 가서 뭘 좀 만들어 보마. 네가 좋아하는 거로.”정미리는 온경준을 당기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난 지유를 어떻게든 데리고 갈 생각이에요. 여 서방은 당신이 알아서 설득해줘요.”“당신 정말...”온경준은 정미리를 말려보려고 했으나 확고한 눈빛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완성되었고 전부 온지유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자리에 앉자 정미리는 음식을 집어주었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정미리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임신 초기엔 다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부 말해. 입덧 때문이라면서 자꾸 밥 거르면 안 되니까.”온지유는 임신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과 달랐다. 입덧이 심해도 너무 심해 정미리가 만들어준 음식을 보아도 자꾸 속이 울렁거렸다.정미리는 매운탕을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입덧이 심할수록 더 먹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토할 때도 덜 괴로워.”온경준도 옆에서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온지유는 두 사람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었다.정미리는 바로 더 떠주었다. 온지유가 국물을 꿀꺽 삼킨 것을 보고 나서야 웃으며 말했다.“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니 다행이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렴. 내가 전부 떠줄 테니까.”두 사람이 와서 분위기가 달려져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국물 한입 먹고 나니 정말로 입맛이 생기는 것 같았다.고개를 끄덕인 후 정미리에게 돼지갈비찜을 집어달라고 했다.그녀는 봉인 해체라도 된 것처럼 먹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아기에게도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계속 먹고 싶었다.어느새 해가 저물고 온지유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여이현이 돌아왔다.바깥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온지유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을 내려다보자마자 여이현과 눈이 마주쳤고 바로 미소를 지었다.여이현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간식을 들어 보였다.“내 거야?”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온지유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여이현은 온지유를 소파에 앉힌 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졌대. 아주 만족하고 있대. 다음도 기대할 거래.”말을 마친 그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는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미소가 지어졌다.다음 날 아침, 정미리는 특별히 일찍 일어나 여이현을 기다렸다.여이현이 방에서 내려오자 바로 다가갔다.“여 서방, 내가 할 말이 있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이세요?”“난 지유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살고 싶네. 어제도 사실 지유한테 말했는데 망설여지는 모양이야. 자네가 좀 지유를 설득해주게.”정미리의 말에 여이현은 다소 난감해졌다. 회사에 발을 뗄 수 없는 상황에서 온지유를 데려가도 된다고 허락하기는 어려웠다.그는 온지유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떨어져 지냈었다. 그랬기에 여이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떨어져 지낸 5년 동안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어 했고 1분 1초라도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있고 싶었다.정미리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두 분이 여기서 지내시는 게...”“자네는 평소에도 회사 일로 바쁘지 않은가. 또 남자니까 지유를 제대로 보살펴 주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난 시간이 아주 많아서 지유 곁에 24시간 붙어 있을 수 있어.”정미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여이현은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뭘, 뭘 하시려고요.”“지유는 비록 내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지만 가슴으로 낳은 아이이네. 친딸보다 더 친딸 같은 아이지. 자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허락해줄 때까지 무릎 꿇고 있겠네.”“아니에요. 허락할게요. 허락할 거예요. 다만 폐를 끼치게 될까 봐 조금 걱정했을 뿐이에요.”여이현은 그녀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혔다.“이렇게 하죠. 제가 사람을 불러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준비하라고 할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바로 준비할 수 있
저녁을 먹은 후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온지유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정미리가 화난 척해서야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화장실로 간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여 보았다. 피가 어느새 흥건히 나 있었다.“엄마! 엄마! 얼른 와주세요!”깜짝 놀란 온지유는 당황해버렸고 무의식적으로 정미리를 찾았다.정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바로 달려왔다. 바닥에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졌다.온지유에게 옷을 입으라고 한 뒤 정미리는 그녀를 침대로 부축했고 다시 방 문을 열고 온경준을 불렀다.피를 보게 된 두 사람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검사를 받고 나니 유산의 징조가 보인다는 결과를 듣게 되었고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정미리는 너무도 속상했다. 자책하면서 여이현에게 사과했다.사실 이건 정미리의 탓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온지유도 나이를 먹었기에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고 언제든 유산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작 시골로 내려왔다고 해서 유산의 징조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여이현은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책할 필요 없다면서 정미리를 달랬다.정미리는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온경준이 온지유가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덕에 결국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병실에서 나갔다.온지유는 벽을 멍하니 보았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만약, 아주 만약에 유산하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아주 괴로울 것 같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달래주었다.“괜찮아. 의사 선생님도 이젠 괜찮다고 하셨잖아. 우린 열심히 건강 챙기면서 안정기까지 무사히 버티면 돼.”“미안해. 내가 우리 아기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거야.”온지유는 자책하고 있었다. 어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여이현은 그를 품에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해주었다.“네 탓 아니야.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 그러니 누구의 탓도 아니야. 착하지, 울지 마. 우리 아기는 아주 강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