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경준이 계속 말을 이었다.“지유는 지금 결혼해서 가정을 이뤘는데 우리랑 가면 아이들은? 여이현은 분명 지유 혼자 우리를 따라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정미리가 대꾸했다.“그게 뭐라고 그래요. 여 서방도 따라오라고 하면 되잖아요.”정미리의 생각은 아주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결정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여이현이 허락하는지부터 봐야지.”“하, 당신도 참. 애들은 그냥 결혼했을 뿐이에요. 결혼했다고 우리 지유가 남이 되나요? 지유는 여이현의 소유물이 아니라고요.”정미리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온경준의 말에 반박했다.결혼은 하나의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으나 온지유는 자유의 몸이었다. 언제든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기에 굳이 일일이 여이현에게 허락받지 않아도 된다.온경준이 말했다.“우리가 이렇게 논쟁을 벌일 때가 아니야. 지유 의견이 중요하지.”“제가 집으로 돌아가면 두 분께 민폐만 끼칠 거예요. 지금은 배 속에 아기도 있어서 입맛도 매일 변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전 그냥 여기 있을게요. 며칠 머물다가 가세요.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 테니까요.”“이건 네가 우릴 데려다주느냐 안 데려다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란다. 그리고 민폐라니. 가족끼리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어차피 거리도 멀지 않은데 돌아가는 거야 어렵지 않지.”“그냥 두 분 여기서 한동안 지내시는 게 어때요. 별이가 방학하면 함께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오늘은 화요일이었다. 별이는 금요일부터 방학할 것이었다.다만 온경준이 조용히 한마디 던졌다.“방학에 함께 돌아가자고? 내가 보기엔 별이는 매일 촬영하느라 시간이 없는 것 같고 너는 시간이 있을 것 같은데.”온경준은 사실 탐탁지 않았다. 그는 별이가 촬영이 아닌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록 아직은 유치원생이었으나 어릴 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순간 난감해졌다.“아빠, 전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에요. 전... 전 그냥 아빠랑 엄마가 여기서 조금 더
“그럼 난 주방으로 가서 뭘 좀 만들어 보마. 네가 좋아하는 거로.”정미리는 온경준을 당기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난 지유를 어떻게든 데리고 갈 생각이에요. 여 서방은 당신이 알아서 설득해줘요.”“당신 정말...”온경준은 정미리를 말려보려고 했으나 확고한 눈빛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완성되었고 전부 온지유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자리에 앉자 정미리는 음식을 집어주었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정미리는 인내심 있게 말했다.“임신 초기엔 다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전부 말해. 입덧 때문이라면서 자꾸 밥 거르면 안 되니까.”온지유는 임신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처음과 달랐다. 입덧이 심해도 너무 심해 정미리가 만들어준 음식을 보아도 자꾸 속이 울렁거렸다.정미리는 매운탕을 담아 그녀에게 건넸다.“입덧이 심할수록 더 먹어야 하는 거야. 그래야 토할 때도 덜 괴로워.”온경준도 옆에서 그녀를 걱정해 주었다. 온지유는 두 사람을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먹었다.정미리는 바로 더 떠주었다. 온지유가 국물을 꿀꺽 삼킨 것을 보고 나서야 웃으며 말했다.“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다니 다행이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렴. 내가 전부 떠줄 테니까.”두 사람이 와서 분위기가 달려져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국물 한입 먹고 나니 정말로 입맛이 생기는 것 같았다.고개를 끄덕인 후 정미리에게 돼지갈비찜을 집어달라고 했다.그녀는 봉인 해체라도 된 것처럼 먹었다. 너무 많이 먹으면 아기에게도 좋지 않았지만 그녀는 계속 먹고 싶었다.어느새 해가 저물고 온지유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여이현이 돌아왔다.바깥에서 들리는 자동차 소리에 온지유는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밖을 내려다보자마자 여이현과 눈이 마주쳤고 바로 미소를 지었다.여이현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손에 든 간식을 들어 보였다.“내 거야?”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온지유는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여이현은 온지유를 소파에 앉힌 후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응, 괜찮아졌대. 아주 만족하고 있대. 다음도 기대할 거래.”말을 마친 그는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는 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미소가 지어졌다.다음 날 아침, 정미리는 특별히 일찍 일어나 여이현을 기다렸다.여이현이 방에서 내려오자 바로 다가갔다.“여 서방, 내가 할 말이 있네.”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무슨 일이세요?”“난 지유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 한동안 살고 싶네. 어제도 사실 지유한테 말했는데 망설여지는 모양이야. 자네가 좀 지유를 설득해주게.”정미리의 말에 여이현은 다소 난감해졌다. 회사에 발을 뗄 수 없는 상황에서 온지유를 데려가도 된다고 허락하기는 어려웠다.그는 온지유와 떨어져 지내고 싶지 않았다.두 사람은 이미 충분히 떨어져 지냈었다. 그랬기에 여이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어떻게든 떨어져 지낸 5년 동안의 시간을 보상해주고 싶어 했고 1분 1초라도 그녀의 곁에 꼭 붙어 있고 싶었다.정미리의 기대 가득한 눈빛에 그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두 분이 여기서 지내시는 게...”“자네는 평소에도 회사 일로 바쁘지 않은가. 또 남자니까 지유를 제대로 보살펴 주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난 시간이 아주 많아서 지유 곁에 24시간 붙어 있을 수 있어.”정미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란 여이현은 얼른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뭘, 뭘 하시려고요.”“지유는 비록 내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지만 가슴으로 낳은 아이이네. 친딸보다 더 친딸 같은 아이지. 자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허락해줄 때까지 무릎 꿇고 있겠네.”“아니에요. 허락할게요. 허락할 거예요. 다만 폐를 끼치게 될까 봐 조금 걱정했을 뿐이에요.”여이현은 그녀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혔다.“이렇게 하죠. 제가 사람을 불러 필요한 물건들을 전부 준비하라고 할게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로 말씀하세요. 바로 준비할 수 있
저녁을 먹은 후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온지유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미루고 있었다. 정미리가 화난 척해서야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화장실로 간 그녀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여 보았다. 피가 어느새 흥건히 나 있었다.“엄마! 엄마! 얼른 와주세요!”깜짝 놀란 온지유는 당황해버렸고 무의식적으로 정미리를 찾았다.정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바로 달려왔다. 바닥에 어느새 피가 뚝뚝 떨어졌다.온지유에게 옷을 입으라고 한 뒤 정미리는 그녀를 침대로 부축했고 다시 방 문을 열고 온경준을 불렀다.피를 보게 된 두 사람은 더는 시간을 지체할 것도 없이 바로 온지유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검사를 받고 나니 유산의 징조가 보인다는 결과를 듣게 되었고 입원이 필요하다고 했다.정미리는 너무도 속상했다. 자책하면서 여이현에게 사과했다.사실 이건 정미리의 탓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온지유도 나이를 먹었기에 몸 상태는 예전 같지 않았고 언제든 유산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고작 시골로 내려왔다고 해서 유산의 징조를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여이현은 이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자책할 필요 없다면서 정미리를 달랬다.정미리는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온경준이 온지유가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덕에 결국 걱정 가득한 얼굴로 병실에서 나갔다.온지유는 벽을 멍하니 보았다.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다.만약, 아주 만약에 유산하기라도 한다면 정말로 아주 괴로울 것 같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두 손을 잡으며 달래주었다.“괜찮아. 의사 선생님도 이젠 괜찮다고 하셨잖아. 우린 열심히 건강 챙기면서 안정기까지 무사히 버티면 돼.”“미안해. 내가 우리 아기를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거야.”온지유는 자책하고 있었다. 어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여이현은 그를 품에 끌어안고 이마에 뽀뽀해주었다.“네 탓 아니야.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 그러니 누구의 탓도 아니야. 착하지, 울지 마. 우리 아기는 아주 강
여이현은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안내대 뒤에 있는 방은 뭐 하는 방인지 알지 못했으나 남녀가 유별한데 한 방에 둘만 있다는 건 이상했다. 게다가 방금 간호사의 행동으로 그는 더 들어가기 싫었다.“그냥 가져다주세요. 나오기 불편하신 거라면 이따가 다시 가지러 올게요.”걸음을 옮기려던 때 상대가 말했다.“여이현 씨, 혹시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긴 CCTV가 있거든요. 아무 짓도 못 해요.”그렇게 말하자 여이현은 더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저 문 앞에 우뚝 서 있을 뿐이다.간호사는 그를 보자마자 바로 달려와 붙었다. 지금의 간호사는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았다. 그저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여이현이 고개를 숙이면 그녀의 몸매가 다 보일 정도의 상의를 입고 있었다.여이현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앞만 보며 말했다.“간호사님, 약은 어디에 있죠?”“여이현 씨, 제가 방금 약 가지러 들어갔다가 허리를 삐끗해서요. 좀 눌러주시면 안 될까요?”말을 하면서 간호사는 여이현의 손을 잡더니 자신의 허리에 올려두었다.여이현은 빠르게 손을 빼낸 후 그녀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계속 이러시면 병원에 항의할 겁니다.”“안 돼요. 전 그냥 여이현 씨에게 반해서 그런 거예요. 제가 싫으신 거라면 거부하시면 되는 거잖아요.”간호사는 발을 동동 굴리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알겠어요. 들어오세요. 약은 저 안에 상자에 있으니까 알아서 가져가세요.”여이현은 원래 그녀를 무시하고 가버리고 싶었으나 온지유가 먹어야 하는 약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방으로 들어가자 간호사의 말대로 테이블 위에 상자가 있었고 안에는 작은 약병이 있었다.“한 번에 전부 먹어야 해요. 점심때가 되면 또 가지러 오세요. 참, 반드시 식후 30분이 지난 후에 먹어야 해요.”간호사는 말하면서 일부러 머리를 자꾸 쓸어넘겼다. 여이현은 얼른 방에서 나왔다.그 방에 1초라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여이현은 간호사가 입을 열기도 전에 원장을 불러와 확고하게 말했다. 해고하라고.간호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여이현의 다리를 붙잡으며 애원했다.“여이현 씨, 정말로 죄송해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저희 부모님이 어렵게 인맥을 동원해서 이 병원에 취직시켜준 거란 말이에요. 전 부모님을 실망하게 해 드릴 순 없어요.”“부모님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 그러지 말았어야죠.”온지유는 물러서지 않았다.“병원장님, 이분을 해고하지 않으면 전 계속 책임을 물을 겁니다. 그때가 되면 병원의 이미지에도 영향이 가겠죠. 전 미리 말했습니다.”병원장은 여이현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었기에 바로 간호사를 해고했다.간호사는 끌려가면서도 반항을 했고 우는 소리가 병원 전체에 울려 퍼질 정도였다.병원장은 두 사람을 향해 사과한 뒤 다른 간호사를 배정해 주었다.여이현은 아주 만족했다. 병원장을 돌려보내면서 병원 리모델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그러자 병원장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온지유는 약을 먹은 후 잠을 잤다.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여이현인 줄 알고 가만히 있었다.그런데 상대는 아주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있었기에 그녀는 바로 경계하며 보았다.“그쪽이었어요?”온지유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침대까지 다가온 이민영을 보았다. 그녀는 조금 전 해고당한 간호사였고 침을 든 채 섬뜩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 하는 거죠?”온지유는 베개를 꽉 잡으며 상대를 보았다.그러자 이민영은 픽 웃었다.“뭘 할 것 같아요? 병원에서도 잘렸는데 당연히 복수하러 와야죠.”말을 하면서 그녀는 온지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온지유는 베개로 막아버리곤 얼른 침대에서 내려와 문 쪽으로 달렸다.이민영은 행동이 빨랐다. 침을 다시 들고 달려가자 온지유는 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힘껏 벽으로 쾅 내리쳤다.침이 떨어지고 이민영은 이를 빠득 갈며 소리를 질렀다.“죽여버릴 거야!”행여나 배 속의 아기에게 문제가 생
“그건 안 돼요.”이민영은 흥분하더니 핀셋으로 온지유의 목에 상처를 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며 주위 사람들은 긴장하게 되었다.“그럼 저도 이민영 씨 요구를 들어줄 수 없네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지금 당장 경찰 부를 거니까.”여이현은 핸드폰을 꺼냈다. 신고하는 척하면서 이민영을 계속 지켜보았다.이민영이 달려들며 그의 핸드폰을 빼앗으려는 행동을 조금이라도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역시나 이민영은 당황해하고 있었다. 병실로 들어가자마자 온지유를 죽이지 못한 것에 후회하기도 했다.“이 간호사, 지금 이게 무슨 짓인가. 얼른 환자를 놓아주게.”소식을 듣고 달려온 병원장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이민영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민영은 온지유를 잡은 채 뒷걸음질 쳤다.일부러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민영은 창가에 멈춰 섰다.온지유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낮게 그녀를 설득했다.“지금 그만둬도 늦지 않았어요. 경찰이 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그래. 이 간호사, 얼른 그 핀셋을 내려놓게. 부모님 생각도 해야지.”병원장도 설득하기 시작했다.여이현은 조용히 뒤로 다가가다가 이민영의 손목을 잡으려던 때 들키고 말았다.이민영은 바로 악 소리를 질렀다.“더 다가오면 정말로 찔러버릴 거예요!!!”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여이현을 가리켰다.“여이현 씨, 전 평생 당신이 저를 잊지 못하게 할 거예요. 전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고요. 그러니 평생 기억해줘요.”말을 마친 후 온지유를 끌면서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으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온지유가 아니었다.원래는 그녀에게 기회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를 뻥 차버린 건 이민영이었다. 온지유는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핀셋을 떨어뜨리게 한 뒤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이민영은 주위에서 구경하고 있던 환자 가족들에 의해 제압당했고 경찰이 체포해갔다.이 사건으로 삼시 세끼 식사를 전부 정미리가 직접 만들어 가져왔다. 여이현도 그녀의 딱 붙어 밀착
온지유는 법로와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던지라 침묵했다.법로는 계속 온지유를 설득하려고 했으나 통화를 마친 여이현이 다가오며 달라져 버린 두 사람의 표정을 발견했다.그는 온지유와 법로를 번갈아 보았다.“아버님,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분위기가 싸늘해진 거예요?”“난 그냥 나랑 같이 Y 국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단다. 그러면 너도 마음 놓고 일에 집중할 수 있잖니.”법로는 자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부모들은 아무래도 자식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여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이 일은 설득하실 필요 없으세요. 회사 일은 제가 이미 배 비서한테 맡겼거든요.”“그럼 배 비서님이 힘들지 않을까? 그동안 한 번도 쉬지도 못했을 거잖아.”온지유는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그러자 여이현이 가볍게 웃었다.“그래서 출장을 준비하라고 했지. 마침 새로 뽑은 비서랑 함께 말이야. 업무 강도는 그리 높진 않아. 쉬면서 해도 돼.”여이현이 말한 쉬면서 해도 되는 일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하루 이틀로 완성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한편 공항에 있는 배진호는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캐리어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지사의 책임자가 배진호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연신 책임지겠다며 사과했다.배진호는 점점 짜증이 솟구쳐 노트북을 쾅 닫아버렸다.“정말이지 왜 저런 사람한테 지사를 맡겼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 이렇게 간단한 일도 이해하지 못하고 해결도 못 하다니.”“혹시 어렵게 말씀하신 건 아니에요?”권다솔은 핸드폰을 꺼냈다.“제가 문자로 다시 말씀드려볼까요?”“제가 말해서 이해 못 할 걸 권다솔 씨가 다시 말한다고 해서 이해할 것 같아요?”배진호는 눈을 뒤집어 깠다.이때 공항에서 탑승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탑승구 쪽으로 다가갔다.권다솔은 그의 허락 없이도 간결하게 업무 내용을 정리해 지사 책임자에게 문자를 보냈다.두 사람은 입에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