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다솔은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생각되면 그럼 증거라도 내놓으세요.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지 마시고요.”배진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증거?그건 곧 손에 들어올 것이다.한편 별이는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있었다. 고개를 젖혀 커다란 솜사탕을 보던 아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일 큰 거로 주세요.”아이의 이마엔 땀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즐겁게 논 것이 분명했다.법로는 솜사탕을 산 뒤 별이에게 건네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아이가 솜사탕을 받고 난 뒤에서 법로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이를 보았다.별이는 커다란 솜사탕을 베어 물며 말했다.“할아버지, 솜사탕이 너무 맛있어요. 드셔보세요.”“할아버지는 안 먹어. 별이가 먹어. 맛있으면 많이 먹어.”법로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먹었다.한 입 더 베어 물려고 하자 갑자기 멈칫했다.“할아버지, 저 배가 아파요...”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잃어버렸다.“별아, 왜 그러니.”법로는 얼른 아이를 안았다.주위로 사람이 몰려들며 말했다.“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누가 좀 구급차 불러주실래요?”“일단 제 차로 가요. 길가에 차를 세워뒀거든요. 얼른 오세요.”선한 사람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를 부축하며 병원으로 갔다.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호흡은 일정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아이의 안색은 너무도 창백했다.응급실로 들어간 뒤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오라고 한 뒤 자신은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안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외손자였다. 그런데 그가 응급실까지 오게 했으니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법로는 솜사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빠르게 여이현과 온지유가 도착했다. 온지유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불렀다.“아버지, 별이가 왜 병원에 온 거예요?”법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책하듯 말했다.“내가 솜사탕을 사줬는데 먹다가 정신을 잃었어. 딸아, 미안하구나. 내가 별이를 잘 돌보지 못했구나.”“아버지,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상대는 갑자기 크게 웃다가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제가 직접 대표님 아들을 데려다주었는데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 뭐, 이건 중요하지 않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대표님 아들에게 뭘 좀 주사로 투여했거든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아들을 데리고 제가 알려준 장소로 오세요.”권서정은 마지막 말까지 한 뒤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소는 어느 한 아파트 단지였다.그녀가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 드디어 서막을 열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별이를 데리고 가고 다시 돌려준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여이현은 주소를 잘 기억한 뒤 경고했다.“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너 같은 사람은 내가 손가락만 튕겨도 처리할 수 있어.”“대표님, 뭘 그렇게 무섭게 경고를 하고 그러세요. 제가 대표님 아들도 고이 돌려줬잖아요. 그런데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전 무섭지 않아요. 뭐, 여차하면 목숨으로 상대하면 되는 거죠.”목숨으로 상대한다니. 권서정의 목숨과 별이의 목숨을 어떻게 비길 수 있겠는가.권서정에 관해 그는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조용히 알아보고 있는 이유는 온지유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권서정은 주제도 모르고 나대며 그를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시끄럽고 네가 알려준 주소로 갈 거니까 딱 기다려.”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미 차올라버린 분노를 삭이기 위함이었다.감히 그의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정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아침밥을 사러 나가려다가 우연히 여이현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듣게 되었다. 바로 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여이현이 복도에서 화를 삭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여이현은 몇 분 후 병실로 들어왔다.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별이에게 다가가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권서정은 일부러 잘못된 주소를 알려주었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여이현이 경찰들과 함께 오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온지유는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죄송해요. 저희는 친구 찾으러 온 거예요. 제 친구 이름이 권서정이에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여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권서정이요? 모를 리가 없죠. 윗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듣기론 이 건물 전체를 매입했다고 하던데, 돈 많은 건물주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죠. 아들이 죽었으니. 어휴.”여자는 말을 마친 후 더는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아들이 죽고 나서 이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에겐 501호의 주소를 알려주었다.대체 무슨 생각일까?정말로 그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같은 의문이 머릿속에 생겨났다.그러나 두 사람은 권서정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권서정은 와인을 음미하며 동요를 듣고 있었고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유리관을 보았다.유리관 안에는 남자아이가 누워있었고 겉보기엔 4살쯤 되어 보였다. 아이는 아주 조용히 잠을 자는 것 같았다.“아들, 엄마가 우리 아들 친구 골라줬으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안목은 아주 좋거든. 우리 아들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아이니까 너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이때 입구 CCTV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온지유와 여이현이 찍히고 있었다.권서정은 모니터를 빤히 보면서 확인했으나 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분노가 솟구쳤다.“감히 날 속여? 내 아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는 걸 방해했으니 아들 살릴 생각은 절대 못 하게 할 거야!”그녀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 있던 두 사람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바로 문을 두드렸다.“권서정 씨,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요.”“문 열어. 안 그러면 사람 불러올 거니까.”두 사람은 문
여이현이 나서기도 전에 온지유가 권서정을 향해 달려들었다.온지유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권서정의 목을 졸랐다.“우리가 별이를 사랑하든 말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네 미래는 우리가 정할 수 있지!”그녀가 별이를 연예계로 데리고 온 이유는 별이가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그런데 누군가 호시탐탐 별이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권서정은 본능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온지유의 힘은 너무도 셌기에 그녀는 온지유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권서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네가 내 목을 조른다고 해서 별이가 나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해주는 데 그 약은 내가 특별히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제작한 거야!”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랴.특히 별이처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외동아들이면 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그녀는 이 점을 노려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온지유와 여이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온지유는 권서정의 무릎을 걷어차곤 손을 올려 있는 힘껏 뺨을 갈궜다.“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널 벙어리로 보지 않아. 이현 씨, 이 여자를 당장 유령 별장에 가둬버려!”여이현은 온지유와 몇 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토록 단호하고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설령 온지유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권서정을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었다.권서정은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으나 여이현은 사람을 시켜 입을 막아버리게 했다.별이에게 약을 투여한 손도 잘라버렸다...권서정은 그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의 아이가 평생 유리관 안에만 외로이 누워있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몰랐다. 별이에게 그런 약물을 투여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법로는 이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를 했다. 일반 약물을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것은 법로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법로는 빠르게 해독제를 만들
아침 일찍 의사가 다녀간 후 별이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법로에게 달라붙으며 퇴원하고 싶다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했다. 온지유의 허락을 받은 후 퇴원을 했다.병원으로 나오자마자 기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두 사람의 길을 막아섰다.누군가 별이의 앞으로 마이크를 들이밀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별이 어린이, 요 며칠 동안 촬영 전부 펑크 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아픈 거예요, 아니면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별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젖혀 법로를 보았다.법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별이를 안은 후 기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이가 요 며칠 고열에 시달려서 촬영할 수 없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별이가 티브이에 나오는 걸 바라고 있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건강을 되찾고 퇴원하게 되었으니까 이틀 후면 다시 티브이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고작 감기에 걸린 것인데 이틀이나 더 쉬어야 하는 겁니까? 별이와는 어떤 사이시죠? 별이의 보호자로 엄마가 왔다던데 아닌가요?”기자는 끈질겼다. 별이에 관한 불리한 대답을 들어야만 질문을 멈출 생각으로 보였다.법로가 대답하려던 때 마침 도착한 온지유는 경호원을 불러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어두워진 안색으로 기자들을 보았다.“어느 언론사의 기자시죠? 아니, 어느 방송사에서 나오셨죠?”“저기,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하.”말을 마친 기자는 얼른 짐을 챙겨 도망갔다. 다만 온지유는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지라 경호원들에게 눈짓하며 길을 막았다.그러자 기자는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에게 지금 상황을 찍으라고 하면서 온지유에게 별이가 연예인 병에 걸려 갑질한다는 영상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겠다고 협박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작게 말했다.“우리 별이 아빠가 누군지 알고 있죠? 여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를 텐데요. 여이현이라고.”기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아니요. 제 아내가 결정한 일이니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할 겁니다. 그쪽이 아무리 저한테 사정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아내 말을 아주 잘 듣는 사람이라서요.”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배진호에게 샛별이라는 아역 배우를 알아보라고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자료가 그의 메일로 전송되었다.자료를 읽은 후 여이현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배진호에게 연락했다.“배 비서, 자료 조사 결과대로 어떻게든 이 샛별이라는 아이를 연예계에서 발도 못 들이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아역 스타를 묻어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반 시간 후, 그 사람은 다시 전화했다. 여이현은 무시한 채 티브이를 시청했다.마침 샛별이의 보호자가 이중 계약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고 샛별이의 소속사도 조사를 받게 되었다.그러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그에게 연락할 것이었다. 물론 소용이 없겠지만.온지유는 경호원에게서 이 소식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여이현에게 달려가 꽉 끌어안고 뽀뽀를 했다.“아이, 부끄러워. 어른들이 어린이 앞에서 뽀뽀를 막 하고 있대요.”별이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었다.“별아, 엄마랑 아빠가 뽀뽀를 안 하면 별이 동생 어떻게 만들어주지? 별아, 정말로 동생을 원해?”동생이라는 말에 별이는 바로 두 손을 들며 찬성했다.“원해요! 여동생! 여동생이 갖고 싶어요! 아빠랑 엄마랑 얼른 뽀뽀해요!”아이는 순수했다. 어른이었다면 여이현의 말을 바로 알아들었을 것이다. 법로는 두 사람을 보면서 혀를 찼다. 그 순간 온지유의 얼굴이 뜨거워지게 되었다.부끄러워진 그녀는 한참 여이현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법로는 허허 웃었다. 자기 딸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이를 안고 방으로 올라갔다. 두 사람이 애정행각을 벌일 공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하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다. 실험실을 어디에 만들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등을 토닥였다.“두 사람
여이현은 별이와 함께 온지유의 실험실로 놀러 왔다가 우연히 온지유가 화장실로 달려가며 힘겹게 토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왜 그래. 어디 안 좋은 거야? 왜 갑자기 토하는 거야?”“아니야. 그건 아닌데...”온지유는 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전보다 더 심해져 눈물이 맺혀버렸다.여이현은 얼른 그녀를 안고 밖으로 뛰쳐나갔다.“얼른 병원으로 가자. 아버님, 별이 좀 봐주세요.”“너도 참, 내가 의사라는 걸 잊은 거냐?”법로는 아무 말도 없이 온지유를 빤히 보았다. 짐작이 가긴 했으나 그래도 제대로 검사를 해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의 말에 여이현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온지유를 내려놓았다. 머리를 긁적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짐작 가는 것이 있어도 검사는 해봐야 안다. 법로는 온지유에게 소변 검사를 하자고 했다. 결과는 그가 짐작했던 것과 같았다.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며 검사 결과를 여이현에게 보여주었다.“축하해. 또 아빠가 되었네.”“또 아빠가 된다고요?”여이현은 검사 결과를 받으며 꼼꼼히 보았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온지유를 끌어안고 빙빙 돌았다.“나 또 아빠가 된대! 여보, 나한테도 둘째가 있대!”온지유도 기쁜 표정을 지었다. 행여나 놓치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얼른 여이현에게 내려달라고 했지만 여이현은 내려주지 않았다.너무도 기뻤다. 별이가 동생을 갖고 싶다고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온지유가 임신했으니 말이다.별이는 아무것도 모른 척 법로를 잡아당기며 작게 물었다.“할아버지, 아빠랑 엄마가 왜 저렇게 기뻐하시는 거예요?”“별아, 우리 별이한테 곧 동생이 생길 거야.”법로는 별이의 코를 톡 치며 말을 이었다.“우리 별이는 앞으로 오빠나 형이 될 거야. 앞으로 동생 잘 돌봐야 한다.”“정말요?”별이는 활짝 웃었다. 사실 그들의 대화로 눈치채고 있었으나 법로에게 확인을 받고 싶었다.온지유가 임신했다는 걸 안 여이현은 실험실에 있을 시간을 정해 주었다. 매일 오전 2시간, 오후 2시간만 머물게 하면서 그 외
여이현의 앞에서 이렇듯 거만한 말을 내뱉는 사람은 처음이었다.그는 눈을 가늘게 접었다.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어두운 아우라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여이현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나온 염라대왕 같았다.“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온지유는 신분으로 사람을 찍어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새파랗게 어린놈이 거만하게 주제도 모르고 나대고 있지 않은가.게다가 남자가 자신의 동생이라고 칭하고 있는 샛별의 이름도 그녀의 아들 이름을 본떠서 지은 이름이 아니던가.남자는 거만하게 코웃음을 쳤다.“여이현 씨잖아요. 누가 몰라요? 자기를 키워준 양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양아버지는 죽인 비열한 사람이잖아요. 친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잡종이면서.”남자는 거침없이 말했다.심지어 마지막 말에는 힘까지 주었다.여이현은 절대 누군가 자신에게 이렇듯 무례하게 말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나서려던 순간 찰칵 소리가 나면서 플래시가 터졌다.남자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여러분, 다들 보세요! 저분이 여이현 씨입니다. 여씨 가문의 재산을 혼자 꿀꺽한 것도 모자라 제 동생을 연예계에서 치워버렸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아십니까? 제 동생의 이름이 샛별이라서 그랬다더군요. 자기 아들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말이죠!”정말이지 헛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온지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담담하게 다가간 뒤 뺨을 갈궜다. 그것도 여러 번.“왜 연예계에서 치워버렸는지 정말로 몰라서 그래요? 그쪽이 오늘 한 행동에 대해서도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감히 여이현을 잡종이라고 욕하지 않았던가.정말이지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듣고 튀어나온 멍청이인지 알 수 없었다.남자가 불러온 기자들이 여기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가족 중 믿을 만한 빽이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이현이 그들을 처리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여이현을 공격하면서 이런 식으로 헛소문을 퍼뜨리지 않겠는가.남자는 여이현과 온지유를 가리키며 화를 냈다.“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
설마 특수한 취향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진호 오빠...”석규리는 배진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묵묵히 일어나기만 했다.배진호가 보여준 혐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석규리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미진이 약속한 물건은 너무나도 달콤했다.둘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것은 아이의 것이 되고 회사도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여이현도 배진호를 가족처럼 대해주니 그 인맥을 이용해 배진호의 회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다. 지금 이 대우만 참아내기만 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호화로운 부잣집 며느리 생활이었다.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배진호는 독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배진호는 좋은 남자였다. 그를 따내기만 하면 그 뒤에는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석규리는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권다솔 쪽.그녀는 단걸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방문을 잠갔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에게 한번, 또 한 번 배진호 따위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되새김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똑똑똑.”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따라온 것일 테다.권다솔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버지가 아닌 남태건이 서 있었다.“다솔아, 괜찮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호 씨와 여자분이 하도 너무 심한 말을 하길래. 입 밖에 오빠, 오빠라며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잖아.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남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많이 속상할거라는건 잘 알고 있어. 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고 나면 좋아질 거야.”“졸려요. 전 그냥 빨리 자고 싶어요.”
“다솔 씨, 우리 꼭 이런 결말로 끝을 보아야겠어요?”배진호는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의 마음도 덩달아 식어가기 시작했다.이 순간 배진호는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다솔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정오의 햇빛처럼 따뜻했다.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권다솔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여기까지 온건 다 당신 탓이 아닌가요? 진호 씨, 선택은 당신이 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건 재미가 없어요. 성인인데 자신이 한 결정에는 책임을 져야지 않겠어요?”그가 어머니의 말을 듣기로 하고 석규리와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지 않았다.권다솔은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었다. 남편이 밖에서 여동생을 만들어 오는 것도, 시어머니가 시시각각 남편에게 바람 상대를 소개해 주는 것도 참을 수 없다.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그와 함께 살면 된다. 어쨌든 권다솔은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솔 씨, 제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인터넷 여론도 사람을 시켜서 해결하도록 했어요. 어머니 쪽도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우리 좋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돼요?”배진호는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권다솔은 손을 뻗어 옆의 나무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그리고 그 나뭇가지를 배진호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가지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어요? 안 되겠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어요. 저희 사이는 완전히 끝났으니까 이만 애인을 데리고 돌아가세요.”권다솔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사랑이며 혼인이며 결국은 다 헛된 것뿐이다. 다시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배진호는 그래도 권다솔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석규리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온몸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진호 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 오빠가 이렇게까지 맞았는데 또 모욕을 받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그러나 배진호는 힘껏 그녀의 팔
“비켜, 방해하지 말고! 석규리 너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야?”배진호는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그는 권용민과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어째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해오는 걸까.“진호 씨, 절 죽이고 싶다면 그대로 목을 졸라 죽이세요. 전 상관없어요.”석규리는 턱을 들고 가녀린 목을 배진호 앞에 드러냈다.한 가닥의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그녀는 배진호가 아무리 화가 나도 여성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있는 곳에서 그녀는 목 졸라 죽일 리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이번 일로 정말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하더라도 권다솔의 집안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권용민은 두 사람이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이곳은 그의 집이다. 드라마 촬영현장이 아니다.차오르는 화를 못 이겨 권용민은 다시 한번 배진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양심의 가책은 무슨!”“아저씨, 때리려면 저를 때리세요! 진호 오빠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석규리는 급히 배진호의 앞을 막아섰다.권다솔은 메시지를 받고 달려 온 순간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석규리는 배진호의 앞에 막아선 것도 모자라 권용민을 손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권다솔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초인이 아닌 이상 그렇게 빨리 도착할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곁에 남태건이 있었기에 권용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권다솔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는 남태건의 손에서 아버지의 손을 전해받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배진호를 보는 권다솔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가세요. 전 이제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진호 오빠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러고 돌아갈 생각이에요?”석규리는 쉽게 돌아설
“당연히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해명했다.하지만 석규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그녀는 먼저 배진호를 한번 바라보고 억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다.“저는 진호 씨를 단순히 오빠로만 생각해요. 우리 둘은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이 말은 권용민의 분노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석규리의 표정만 보아도 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런데 무슨 남매 같은 사이라니.“오빠 동생은 무슨. 이혼도 했겠다 집에 가서 실컷 마음껏 해 봐라. 왜 여기서 연극을 하면서 날 역겹게 만드냐!”권용민은 분노에 차서 배진호의 옷깃을 놓고 손을 털어냈다.그는 자신의 딸이 이런 남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호 오빠, 빨리 말 좀 해 봐요! 오빠가 형수님이랑 이혼한 건 저 때문이 아니잖아요!”석규리는 서둘러 배진호의 옆으로 다가섰다.그녀는 손을 뻗어 배진호의 손을 잡으려 하며 연약한 척 그의 쪽으로 기댔다.남태건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진을 찍어 권다솔에게 보내고 메시지를 덧붙였다.배진호는 석규리를 거칠게 밀어내며 혐오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그는 어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로 석규리를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것이 자신과 석규리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석규리가 계속해서 배진호의 앞에 나타나 관심을 끌려는 행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석규리는 남태건과 비등할 정도로 성가셨다. 둘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니 그와 권다솔 사이를 방해하지 말고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배진호는 생각했다.권용민은 배진호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혐오는 거짓으로 보
딸이 결혼 생활 동안 겪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게다가 인터넷에 퍼진 여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권다솔을 욕하고 악독한 말들로 그녀를 공격했다.이 모든 것을 떠올린 권용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결국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둘렀다.배진호의 몸에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었다.“아버님, 남태건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남태건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다솔 씨를 때린 적도 없고, 욕하거나 모함하려 한 적도 없어요.”배진호는 권용민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아 반격하지 않고 계속 몸을 피하며 말했다.하지만 권용민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 있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며 말했다.“콩 심은 데서 콩 난다는데 당신 어머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잖아. 매일 우리 딸을 괴롭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어?”배진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그 역시 남자로서 권용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만약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의 해명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권다솔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깊이 아프게 한 건 사실이었다.그리고 혈연관계는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걸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 줄까?“이렇게 찾아와서 변명하는 건 무슨 뜻인데? 다솔이 부모님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회사에 피해 갈까 봐 말이지.”남태건은 이 틈을 이용해 발길질을 더 했다.남태건의 발길은 거칠었다. 특히 한 번은 배진호의 허리를 강하게 찼다. 배진호가 권다솔과 부부였다는 사실, 그들이 모든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남태건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다.권다솔은 그의 것이다. 영원히!“네가 우리 딸을 진심으로 대하고 처음에 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도 널 도와줬을 거다. 내가 소중한 딸을 고생하게 놔두겠냐? 그런데 약속은커녕
밖으로 가는 도중 남태건은 권용민을 진정시키는 척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만 계속했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 배진호와 마주쳤다.“무슨 담으로 여기에 온 거냐! 딸을 그렇게 해코지해놓고 지금 와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권용민은 소매를 걷고 주먹을 꽉 쥐었다.쭉 신사적인 태도로 살아왔던 그는 말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절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딸을 위해 배진호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아버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솔 씨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배진호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태건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는 진실이 밝혀질까 봐 불안해 급히 배진호를 쫓아내려 했다.“두 분은 이미 이혼하셨지 않나요. 지금 이곳에 있을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만. 당장 여기서 떠나세요, 될수록 멀리요. 이미 다솔이를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들도 편치 않게 만들 작정인가요!”“태건 씨, 사람을 모함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습니다!”배진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남태건은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한 짓들은 비겁하다는 단어 외에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짓들을 벌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호 씨는 이미 내기에서 졌어요. 당장 다솔이 곁에서 떨어져서 다시는 접근하지 마세요. 뒤에서 꼼수를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요.”배진호는 인터넷의 여론을 떠올렸다.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권용민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권용민은 분명 이 모든 것이 배진호가 벌인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배진호가 권다솔을 해칠 리가 있는가?“아버님, 인터넷의 그...”“퍽!”남태건은 급한 마음에 결국 배진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그는 배진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비서가 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나서야 배진호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배진호는 자신이 어떤 모욕을 들어도 상관없었으나 권다솔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었다.“다솔 씨는 제게 미안할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어요.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설령 권다솔이 정말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이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배진호가 권다솔에게 험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권다솔은 좋은 여성이었다. 둘이 헤어지게 된 건 다 배진호가 잘해주지 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동영상을 업로드 한것이 지금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어요.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가서 권다솔 씨 집에서 반격을 하고 있습니다.”비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전해주었다.배진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바로 사람을 시켜서 해명하도록 하세요. 함부로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 계정에는 고소장을 보내고요. 앞으로 또 근거 없는 말들을 하면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배진호는 당장 권다솔을 만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비서는 바로 해명 글을 올리러 갔다.하지만 밀접히 인터넷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남태건이 이 일을 쉽사리 해명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배진호가 해명 문장을 올린다면 그 문장들 사이에서 트집을 잡아내 또 네티즌들을 자극 시키면 된다.동시에 권용민과 김영은에게 배진호가 한 ‘악행’들을 전해주기도 했다.“다솔이는 너무 순진했던 겁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셔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배진호의 본성을 알아 채지 못한 겁니다. 배진호라는 사람도 정말 지독하죠. 아무리 그래도 부부였던 사이인데 남은 정도 없는 걸까요.”“우리 딸에게 욕받이를 시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건가!”권용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힘껏 상을 내리쳤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