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이현을 살짝 째려보았다.“엄마...”별이는 온지유의 손을 잡고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여이현은 바로 따라 하면서 입을 열었다.“자기야...”온지유는 그런 두 사람의 공격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두 사람 다 그만해!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아직 유치원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두 사람은 동생을 낳아달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녀와 여이현은 오랜 부부기도 했으나 아직 밖에서 이런 대화를 대놓고 할 정도로 무뎌지지 않았다. 만약 몰래 따라온 기자가 사진이라도 찍는다면 모든 플랫폼에 그녀와 여이현의 기사로 도배될 것이 분명했다.“그래, 얼른 집 가서 동생 만들자고!”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를 감싸며 온지유와 함께 차에 타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왼손으로 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하지만 별이는 바로 손을 빼내면서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갔다.비록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소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여이현을 보았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법로가 그들을 반겼다.신무열과 김혜연은 Y 국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은퇴를 했기에 매일 시간이 많았고 지난번 별이가 그를 찾은 뒤로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외할아버지.”별이와 법로의 사이도 아주 좋았다. 법로가 반기자 별이는 바로 법로의 품으로 달려갔다.법로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아이를 보며 얼른 안아 올렸다.“가자, 별아. 이 할아버지랑 좋은 곳에 가자.”“저희 방금...”돌아왔다고 말하려던 순간 여이현은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바싹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일부러 별이를 데리고 집까지 비워주시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온지유는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주먹을 들어 여이현의 가슴을 쳤다.여이현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기만 했다.“자기야. 이런 일은 나이 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해야 하는 거야. 게다가 마음껏 즐겨야지!”말을 하던 여이현은 바로 온지유를 확 끌어안았다.법로와 별이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았기에 감히 이것보다 더
권다솔은 서슴없이 말하면서 확고한 눈빛으로 배진호를 보았다.배진호는 그녀가 눈치챌 줄은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권다솔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그녀가 무슨 목적으로 여진으로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그리고 그가 알고 있는 권다솔의 능력은 면접 때 본 그것이 전부였다. 여하간에 여이현의 비서 자리는 막중한 자리였고 앞으로 그와 함께 일을 해야 했기에 신중해야 한다.“권다솔 씨의 집안이 어떤지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진은 능력과 실력만 중요하게 보거든요. 권다솔 씨의 실력이 뛰어나다면 이 계약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어요?”배진호는 느긋하게 입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권다솔 씨 혼자만 가는 거 아닙니다. 저와 함께 가는 겁니다.”배진호가 있으니 아무리 권다솔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가 나서서 해결하면 되었다.권다솔은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배 비서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최주하와 지석훈, 그리고 나도현은 여이현의 절친한 친구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정부와 연관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여이현도 몇 년 동안 그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 기회에 다들 한몫 챙겨보면서 오랜만에 얼굴도 볼 생각을 했다.그런데 그들은?그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소소한 모임으로 생각했다. 협력이 아니라.그러나 그들의 시야에 나타난 사람은 여이현이 아니라 배진호와 권다솔이었다.권다솔은 연한 핑크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그녀와 배진호의 키 차이는 머리 하나 정도 길이였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고 두 사람의 모습은 유난히도 어울렸다.최주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배 비서, 이분은 여자친군가요?”“아니면 약혼녀?”지석훈은 더 서슴없이 말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저 두 사람을 훑어볼 뿐이다.“두 사람 참 눈치도 없다. 배 비서 이 나이에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야. 아내면 모를까, 안 그래?”“...”배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다.배진
온지유는 여이현이 나이를 먹어도 체력이 이토록 좋은 줄은 몰랐다.그가 잠깐 틈을 보인 사이 얼른 밀어냈다.“핸드폰이 계속 울리고 있는데 안 받아도 괜찮아? 혹시 큰일이라도 난 거면 어쩌려고...”“급한 일이라면 배 비서가 알아서 처리할 거야. 지금 너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어.”말을 마친 여이현은 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최주하는 여이현이 두 번이나 전화를 끊어버리자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들려오는 건 안내음이었다. 그는 이미 눈치를 했다. 여이현이 지금 아내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의 연락을 끊어버릴 리가 없었다.그는 너무도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모이지 못해서 말이다.배진호도 더는 최주하가 쓸데없이 그와 권다솔을 이어주길 바라지 않았다.“권다솔 씨는 금방 입사해서 제가 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는 지켜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최 대표님과 같은 건 아닙니다!”“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최주하는 어안이 벙벙했다.그러자 지석훈은 웃었다.“네가 뭘 어쨌는지 정말로 모르는 거냐? 쓸데없이 자꾸 두 사람을 이어주려고 했잖아.”최주하는 지금까지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었다. 그는 아주 다양한 여자들을 애인으로 두면서 한 여자에게 정학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둥이는 아니었다.“정말이지 그동안 너무 일만 해서 멍청해졌나 보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일만 하려는 거예요? 배 비서, 굳이 얘네들처럼 일하는 기계로 살려고 하는 거예요?”최주하의 곁엔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그와 달리 지석훈과 나도현은 일에만 열중하면서 살았고 가끔 모임에 나가거나 술을 마셨다.인간은 평생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가족도 만들고 사랑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랑은 배진호에게 있어 뒷전이었고 설령 사랑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절대 권다솔과 할 리가 없었다.여하간에 권다솔은 금방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고 아직 그의 시험에도 넘지 않았기에
권다솔은 고개를 들었다.“그렇게 생각되면 그럼 증거라도 내놓으세요.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모함하지 마시고요.”배진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증거?그건 곧 손에 들어올 것이다.한편 별이는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있었다. 고개를 젖혀 커다란 솜사탕을 보던 아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일 큰 거로 주세요.”아이의 이마엔 땀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즐겁게 논 것이 분명했다.법로는 솜사탕을 산 뒤 별이에게 건네며 천천히 먹으라고 했다.아이가 솜사탕을 받고 난 뒤에서 법로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이를 보았다.별이는 커다란 솜사탕을 베어 물며 말했다.“할아버지, 솜사탕이 너무 맛있어요. 드셔보세요.”“할아버지는 안 먹어. 별이가 먹어. 맛있으면 많이 먹어.”법로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먹었다.한 입 더 베어 물려고 하자 갑자기 멈칫했다.“할아버지, 저 배가 아파요...”그러더니 이내 정신을 잃어버렸다.“별아, 왜 그러니.”법로는 얼른 아이를 안았다.주위로 사람이 몰려들며 말했다.“얼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요. 누가 좀 구급차 불러주실래요?”“일단 제 차로 가요. 길가에 차를 세워뒀거든요. 얼른 오세요.”선한 사람이 그에게 도움을 주었고 그를 부축하며 병원으로 갔다.별이의 안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호흡은 일정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아이의 안색은 너무도 창백했다.응급실로 들어간 뒤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해 병원으로 오라고 한 뒤 자신은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안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의 외손자였다. 그런데 그가 응급실까지 오게 했으니 절대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법로는 솜사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자책했다.빠르게 여이현과 온지유가 도착했다. 온지유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불렀다.“아버지, 별이가 왜 병원에 온 거예요?”법로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책하듯 말했다.“내가 솜사탕을 사줬는데 먹다가 정신을 잃었어. 딸아, 미안하구나. 내가 별이를 잘 돌보지 못했구나.”“아버지,
배진호에게 문자를 보내자마자 상대는 갑자기 크게 웃다가 음험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제가 직접 대표님 아들을 데려다주었는데 벌써 저를 잊으신 거예요? 뭐, 이건 중요하지 않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제가 대표님 아들에게 뭘 좀 주사로 투여했거든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싶으시면 아들을 데리고 제가 알려준 장소로 오세요.”권서정은 마지막 말까지 한 뒤 주소를 알려주었다. 주소는 어느 한 아파트 단지였다.그녀가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계획이 드디어 서막을 열게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직접 별이를 데리고 가고 다시 돌려준 것이 의미가 없게 된다.여이현은 주소를 잘 기억한 뒤 경고했다.“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너도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너 같은 사람은 내가 손가락만 튕겨도 처리할 수 있어.”“대표님, 뭘 그렇게 무섭게 경고를 하고 그러세요. 제가 대표님 아들도 고이 돌려줬잖아요. 그런데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거예요? 전 무섭지 않아요. 뭐, 여차하면 목숨으로 상대하면 되는 거죠.”목숨으로 상대한다니. 권서정의 목숨과 별이의 목숨을 어떻게 비길 수 있겠는가.권서정에 관해 그는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조용히 알아보고 있는 이유는 온지유가 걱정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그런데 권서정은 주제도 모르고 나대며 그를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시끄럽고 네가 알려준 주소로 갈 거니까 딱 기다려.”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복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미 차올라버린 분노를 삭이기 위함이었다.감히 그의 아들에게 손을 대다니. 정말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아침밥을 사러 나가려다가 우연히 여이현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을 듣게 되었다. 바로 별이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녀는 여이현이 복도에서 화를 삭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먼저 병실로 들어갔다.여이현은 몇 분 후 병실로 들어왔다.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별이에게 다가가 볼을 조물조물 만졌다.“
권서정은 일부러 잘못된 주소를 알려주었다.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여이현이 경찰들과 함께 오는 것이 두려웠던 걸까?온지유는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웃는 얼굴로 여자에게 말했다.“죄송해요. 저희는 친구 찾으러 온 거예요. 제 친구 이름이 권서정이에요. 혹시 아는 사람이에요?”여자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권서정이요? 모를 리가 없죠. 윗집에 사는 사람이에요. 듣기론 이 건물 전체를 매입했다고 하던데, 돈 많은 건물주라고 들었어요. 하지만 불쌍한 사람이기도 하죠. 아들이 죽었으니. 어휴.”여자는 말을 마친 후 더는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문을 닫아버렸다.아들이 죽고 나서 이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을 뿐 아니라 두 사람에겐 501호의 주소를 알려주었다.대체 무슨 생각일까?정말로 그들이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같은 의문이 머릿속에 생겨났다.그러나 두 사람은 권서정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권서정은 와인을 음미하며 동요를 듣고 있었고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유리관을 보았다.유리관 안에는 남자아이가 누워있었고 겉보기엔 4살쯤 되어 보였다. 아이는 아주 조용히 잠을 자는 것 같았다.“아들, 엄마가 우리 아들 친구 골라줬으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안목은 아주 좋거든. 우리 아들처럼 잘생기고 귀여운 아이니까 너도 분명 마음에 들 거야.”이때 입구 CCTV 화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온지유와 여이현이 찍히고 있었다.권서정은 모니터를 빤히 보면서 확인했으나 별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분노가 솟구쳤다.“감히 날 속여? 내 아이한테 친구 만들어주는 걸 방해했으니 아들 살릴 생각은 절대 못 하게 할 거야!”그녀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문밖에 있던 두 사람의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 두 사람은 바로 문을 두드렸다.“권서정 씨, 안에 있는 거 다 아니까 문 열어요.”“문 열어. 안 그러면 사람 불러올 거니까.”두 사람은 문
여이현이 나서기도 전에 온지유가 권서정을 향해 달려들었다.온지유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그녀는 두 손으로 권서정의 목을 졸랐다.“우리가 별이를 사랑하든 말든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네 미래는 우리가 정할 수 있지!”그녀가 별이를 연예계로 데리고 온 이유는 별이가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그런데 누군가 호시탐탐 별이를 노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권서정은 본능적으로 버둥거렸다. 하지만 온지유의 힘은 너무도 셌기에 그녀는 온지유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권서정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네가 내 목을 조른다고 해서 별이가 나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해주는 데 그 약은 내가 특별히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제작한 거야!”이 세상에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에 있으랴.특히 별이처럼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외동아들이면 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그녀는 이 점을 노려 이런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온지유와 여이현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온지유는 권서정의 무릎을 걷어차곤 손을 올려 있는 힘껏 뺨을 갈궜다.“가만히 있어도 아무도 널 벙어리로 보지 않아. 이현 씨, 이 여자를 당장 유령 별장에 가둬버려!”여이현은 온지유와 몇 년을 함께 살았지만 이토록 단호하고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하지만 설령 온지유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권서정을 알아서 처리할 생각이었다.권서정은 소리를 지르며 반항했으나 여이현은 사람을 시켜 입을 막아버리게 했다.별이에게 약을 투여한 손도 잘라버렸다...권서정은 그저 자신의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자신의 아이가 평생 유리관 안에만 외로이 누워있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몰랐다. 별이에게 그런 약물을 투여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법로는 이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를 했다. 일반 약물을 분석하고 해독제를 만드는 것은 법로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법로는 빠르게 해독제를 만들
아침 일찍 의사가 다녀간 후 별이는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법로에게 달라붙으며 퇴원하고 싶다고 떼를 썼다. 하는 수 없이 법로는 온지유에게 연락했다. 온지유의 허락을 받은 후 퇴원을 했다.병원으로 나오자마자 기자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두 사람의 길을 막아섰다.누군가 별이의 앞으로 마이크를 들이밀고 직설적으로 물었다.“별이 어린이, 요 며칠 동안 촬영 전부 펑크 냈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아픈 거예요, 아니면 갑질을 하고 있는 거예요?”별이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젖혀 법로를 보았다.법로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처했다. 별이를 안은 후 기자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별이가 요 며칠 고열에 시달려서 촬영할 수 없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우리 별이가 티브이에 나오는 걸 바라고 있는 거죠?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건강을 되찾고 퇴원하게 되었으니까 이틀 후면 다시 티브이에 나올 수 있을 겁니다.”“고작 감기에 걸린 것인데 이틀이나 더 쉬어야 하는 겁니까? 별이와는 어떤 사이시죠? 별이의 보호자로 엄마가 왔다던데 아닌가요?”기자는 끈질겼다. 별이에 관한 불리한 대답을 들어야만 질문을 멈출 생각으로 보였다.법로가 대답하려던 때 마침 도착한 온지유는 경호원을 불러 두 사람을 차에 태웠다. 그리고 어두워진 안색으로 기자들을 보았다.“어느 언론사의 기자시죠? 아니, 어느 방송사에서 나오셨죠?”“저기,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하하.”말을 마친 기자는 얼른 짐을 챙겨 도망갔다. 다만 온지유는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지라 경호원들에게 눈짓하며 길을 막았다.그러자 기자는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카메라를 든 스태프에게 지금 상황을 찍으라고 하면서 온지유에게 별이가 연예인 병에 걸려 갑질한다는 영상을 생방송으로 내보내겠다고 협박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작게 말했다.“우리 별이 아빠가 누군지 알고 있죠? 여 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를 텐데요. 여이현이라고.”기자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