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동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들의 제복이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제복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학교의 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단한 셰프를 그가 무슨 수로 불러올 수 있을까. 부모님들 중 누군가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인게 분명했다.“사모님, 말씀하신 대로 최고급 뷔페 요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어디에 차려두면 될까요?”호텔 매니저가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와 말하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인영은 더구나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이 호텔 요리는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닐 텐데 돈도 얼마 없어 보이는 분이 어떻게 부르셨을까?”“그러게요. 조금 전 학부모 모임 회장이랑 분쟁이 있었나 본데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네요.”누가 뒷담화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은 유인영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온지유에게로 다가갔다.온지유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인영은 이미 비아냥거리고 있었다.“정말 최고급 요리인지 제가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아무 요리나 최고급 타이틀을 붙이는 건 용납할 수 없거든요.”보관함을 열자 안의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고기찜이었다.요리의 향긋한 냄새가 퍼져오자 관중들은 감탄을 금치못했다.온지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유인영 씨, 어떠세요? 이 정도면 최고급 요리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유인영은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향은 괜찮네요.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맛이 어떨지는 식사가 시작되면 아시겠죠. 지금 설마 모두가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온지유는 이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녀는 유인영이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단번에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유인영은 당장 자리에서 비키고 요리가 식탁 위에 올려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온지유가 정말 거금을 들여 뷔페를 준비했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최고급 요리가 아니더
온지유가 준비한 요리는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로 그녀는 단번에 학교의 유명인이 되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돈 많은 엄마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유인영에 쏠렸던 관심은 줄어들었고 이는 유인영의 반발심을 사게 되었다.오후의 운동회에는 별이가 상한 탓에 점심을 먹고 난 뒤 조퇴해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하자 유인영의 그룹 채팅 요청이 와있었다. 반급의 모든 어머니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목적은 이후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교류라고 하지만 온지유는 참여하지 않았다.유치원의 그룹채팅은 그다지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별이가 잠들고 온지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이미 통화 중이었다.오늘 운동회에서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린 온지유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억압 되어있던 화를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려 확인하자 유인영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전혀 호감이 들지 않았다. 바로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호기심 끝에 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별이 어머니, 왜 그룹채팅에 안 들어오신 거예요?”“어머, 그 일이라면 전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간 거예요. 왜 그러세요? 따로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끊을게요. 지금 조금 바빠서요.”온지유는 쓸모없는 대화에 흥미가 없었다.그러나 상대방은 급히 온지유를 말렸다. 몇 번이고 온지유를 불러 멈추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다름 아니라 제가 다른 부모님들이랑 시내 쇼핑몰에서 보기로 했거든요. 어쩌다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 하루 정도는 재밌게 놀아보면 어떨까 해서요.”“전 사양할게요. 모두 좋은 시간 보내세요.”“그러지 마시고, 별이 엄마도 한 번만 와보세요. 유치원에서 인맥을 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별이도 초등학교, 중학교로 진학할 거잖아요. 또 보게 될지 누가 알아요.”유인영은 온지유를 불러낼 생각뿐이었다.온지유는 하는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 관련이라면 하는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여이현에게 별이 친구 부모님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여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차는 이미 번화가를 벗어났다.온지유는 의문을 품었다.“쇼핑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알다시피 회장이란 여자가 변덕이 심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여기서 기다릴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까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차를 구석진 길로 돌렸다. 온지유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은 사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구석진 산길이었다.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에게 영문을 물어보려던 찰나 차는 골목에서 벗어 나 큰길로 나왔다. 앞은 주유소였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주유소 사장에게 돈을 지불하러 가고, 온지유는 그 틈을 타 유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유인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가씨.”그때 누군가가 온지유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은 법로의 부하였다.온지유는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려 했지만 밖에 나가 있던 남자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온지유는 눈짓을 하여 먼저 부하를 떠나보냈다.법로의 부하는 모두 두 명이었다. 그들은 법로의 명령을 받아 몰래 온지유 모자를 지키러 온 것이었다. 본래 온지유에게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남자가 온지유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서자 둘은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얼마나 더 갔을까, 드디어 차가 멈춰서고 산기슭에는 차량 두 대가 이미 세워져 있었다.온지유는 세워진 두 대의 차를 보고 남자에게 물었다.“유인영과 당신의 아내는 모두 저 차 안에 있는 건가요?”“빨리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늦었네요. 이미 산 위에 올라갔을지도 모르니 같이 가보죠. 위에 올라가면 사찰이 있는데 다들 아이를 위해 소원을 빌러 간다고 했거든요.”이런 곳에 사찰이 있을 줄은 몰랐다.산길은
여이현의 전화는 또다시 연결되지 않았고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때마침 여희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온지유는 화가 난 김에 오늘 있었던 일과 자신의 계획을 모두 여희영에게 털어놓았다.여희영은 온지유에게 교외의 한 바에서 만나자고 했다. 온지유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불과 몇 분 거리였다. 온지유에게 지금 차가 없는 것을 고려한 듯했다. 바에 걸어가 잠시 기다리자 곧 그들이 도착했다.“지유 씨, 누군가를 조사하고 싶다고 들었어요.”차에서 내린 이태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인영의 사진을 그에게 건넸다.“유인영의 남편이 어떤 회사의 매니저라 들었어요.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찾아주세요. 유인영이 감히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그 집안을 박살 낼 거예요.”먼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지만 받은 건 천 배로 갚아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그 점에 이태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와 여희영을 위한 방을 따로 잡아준 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태훈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온지유에게 한 장의 자료를 건넸다.유인영의 남편 안건휘는 여진 그룹 산하의 한 호텔에서 구매부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자료에는 또 다른 핵심 인물이 나와 있었다. 바로 안건휘의 연인 황미미였다.황미미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현재 교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태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웃긴 건 안건휘의 친어머니가 그녀를 돌보고 있다는 점이었다.“불쌍하게도 저런 남자를 만나서는.”여희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고모님은 불쌍하다고 하지만 만약 제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오늘 불쌍한 건 유인영이 아니라 제가 됐을 거예요.”말을 마친 후 온지유는 이태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태훈 씨,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요? 유인영에게 황미미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 일은 제가 직접 나설 순 없어요.”이태훈은 그녀의 요청에 흥미를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여이현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온지유는 여이현을 용서하기로 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여이현을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난 괜찮아. 당신도 내 실력을 알고 있잖아. 웬만한 사람은 상대가 되지 못해.”“그래도 난 여보한테 정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안심 못 하겠어. 앞으로는 꼭 곁에 있을게. 아무리 바빠도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됐어, 난 지금 이렇게 멀쩡하잖아.”온지유는 그래도 여이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화제를 돌리려 입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렸다.“나 너무 배고파. 오늘 점심에 준비한 뷔페도 제대로 먹지 못했거든. 모두 수다 떨며 사진 찍느라 그 사이에서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어.”사실 충분히 잘 먹었지만 여이현에게 그 전의 일을 잊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미 지나 간 일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여이현은 그녀를 들어 올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아직 못 정했어.”온지유는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으며 키득거렸다.그녀를 내려놓으면서 여이현은 길고 깊은 키스를 남겼다.도착한 마라 샤브샤브집에서 여이현은 눈앞의 새빨간 국물을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목숨도 내놓겠지만 매운 음식은 정말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온지유는 일부러 얄밉게 말했다.“못 먹겠으면 다른 데 가도 돼.”“아냐, 이걸로 할게.”여이현은 자존심을 부리며 대답했다. 그는 고집스럽게 소고기를 한 점 집어 작게 한입 베어 물었고 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괜찮네. 이번엔 이것도 먹어봐.”온지유는 여이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릇에 덜어주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대표님이 안 먹어주면 나 아주 서운할 것 같은데.”여이현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온지유는 병원에서 여이현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아침을 사러 내려간 그녀는 유인영이 급하게 입원 병동으로 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온지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갈 길을 갔다.“지유 씨.”하지만 뜻밖에도 유인영이 그녀를 발견하고 곧바로 다가와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제가 멀쩡한 게 그렇게 놀라울 일이에요?”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자 온지유는 유인영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알아챘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흔적이었다.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뭐가 웃긴데요? 당신이 황미미의 일을 내게 알린 거죠? 우리 가정을 망치려는 속셈이에요?”온지유는 유인영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유인영이 이렇게 빠르게 눈치챌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맞아요, 내가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한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지 않나요?”유인영은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은 죽어봐야 정신 차릴 거야!”그리고 온지유를 향해 덤벼들었다. 온지유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유인영은 허공을 치고 곧장 데스크에 부딪혔다. 위에 있던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고 이를 목격한 간호사들이 몰려들었다.간호사 한 명이 유인영을 붙잡았고 또 다른 간호사가 온지유 쪽으로 다가왔다.“온지유 씨, 괜찮으세요?”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유인영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나한테 따지러 올 게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긴 개뿔! 당신 탓에 남편 바람난 걸 알게 됐고, 집까지 찾아가 대판 싸워서 내가 버림받은 거잖아. 당신 때문에 난 이혼까지 했다고. 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사람 참 웃기네요. 저는 선의로 한 건데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이야.”온지유는 간호사들이 유인영을 붙잡아 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병원을 떠났다. 그녀는 떠나는 내내 유인영이 난리를 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미소를 지었다.이후 온지유는 소문을 통해 유인영이 다투는 도중 황미미를 밀쳐 그녀가 병원에서
“너희들...! 전 이 사람들 몰라요. 그냥 지나가려던 참이었어요.”유인영은 관계를 부정하려 했지만 온지유는 이미 골목 끝에서 경찰에게 신고를 해둔 상태였다. 두 남자의 발언은 이미 증거로 확보되었기에 경찰은 그녀의 해명을 듣지 않고 그대로 차에 태웠다.“여진 그룹의 사모님, 괜찮으십니까?”경찰관이 다가와 물었다. 유인영은 여진 그룹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여이현의 아내였어?”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안 그래 보여요?”유인영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상대임을 알았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여진 그룹 대표의 부인이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인물일 뿐이었다.유인영의 문제가 해결되자 온지유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특별히 큰 케이크를 주문했고 여이현이 이유를 묻자 그냥 먹고 싶어서라고 답했다.여이현은 그녀의 거짓말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서에서 이미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유인영과 그 일당은 법에 따라 처리될 예정이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지유는 과일을 손질해 서재로 가져갔다.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장중건의 계약서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이 사람과는 협력하지 않기로 했잖아? 왜 생각을 바꾼 거야?”“이태훈이 장중건이 이전에 바꿔치기한 약재들이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어. 그래서 접근해 조사하려고.”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자료를 건네며 계속 말했다.“생각해 보니, 그 시기가 너희 아버지가 습격당했던 때와 아주 근접해. 그때 상대 인원이 갑자기 많아졌던 걸 떠올려보면...”“그 약재들이 그 사람들에게 팔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온지유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그렇다면 장중건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아버지에게는 말했어?”온지유는 아직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법로의 성격으로는 무조건 장중건을 잡아들이고 강압적으로 심문하려 들 게
“별이 친구.”여자는 손을 흔들며 전혀 주저하지 않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모습을 봐서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부모가 도착하기 전까지 별이는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여자는 철조망을 통해 아이에게 먹을것을 건넸다.이 모습을 본 온지유는 서둘러 다가가 아이를 불렀다.“별아, 엄마가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어?”“안 잊었어요, 엄마. 저 사람은 유진 이모에요. 다른 친구들이 말했는데, 전에 학교에서 춤을 가르쳤대요.”별이는 솔직했다. 아이의 말로 보아 예전에 학교에서 일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하지만 별이는 이번 학기에 전학 온 터라 그 여자를 전혀 알 리가 없었다.온지유는 아이를 혼내려 했지만 여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별이 어머니, 저는 강유진이라고 합니다. 전에 이 학교에서 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명함에는 ‘구름 엔터테인먼트 매니저 강유진’ 이라고 적혀 있었다.온지유는 아직 그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기에 명함을 돌려주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아, 매니저분이시군요. 어제도 오셨다던데, 우리 별이를 왜 찾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강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사실 오늘 어머니께서 안 오셨다면 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어요. 별이에게는 정말 연예인의 자질이 보여요. 아이를 연예계로 데뷔시키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강유진의 태도는 진실되어 보였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미세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건 아이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죠.”온지유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락할 의사도 없었다.그녀의 아이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연예계에 데뷔하지 않아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강유진은 무릎을 꿇고 별이를 바라보며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설명한 후 물었다.“별이 친구, 방금 말한 재밌는 일들을 해보고 싶지 않아요?”“제가 방송에 나가면 외할아버지도 저를 볼 수 있어요?”별이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