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의 전화는 또다시 연결되지 않았고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때마침 여희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온지유는 화가 난 김에 오늘 있었던 일과 자신의 계획을 모두 여희영에게 털어놓았다.여희영은 온지유에게 교외의 한 바에서 만나자고 했다. 온지유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불과 몇 분 거리였다. 온지유에게 지금 차가 없는 것을 고려한 듯했다. 바에 걸어가 잠시 기다리자 곧 그들이 도착했다.“지유 씨, 누군가를 조사하고 싶다고 들었어요.”차에서 내린 이태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인영의 사진을 그에게 건넸다.“유인영의 남편이 어떤 회사의 매니저라 들었어요.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찾아주세요. 유인영이 감히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그 집안을 박살 낼 거예요.”먼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지만 받은 건 천 배로 갚아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그 점에 이태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와 여희영을 위한 방을 따로 잡아준 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태훈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온지유에게 한 장의 자료를 건넸다.유인영의 남편 안건휘는 여진 그룹 산하의 한 호텔에서 구매부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자료에는 또 다른 핵심 인물이 나와 있었다. 바로 안건휘의 연인 황미미였다.황미미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현재 교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태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웃긴 건 안건휘의 친어머니가 그녀를 돌보고 있다는 점이었다.“불쌍하게도 저런 남자를 만나서는.”여희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고모님은 불쌍하다고 하지만 만약 제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오늘 불쌍한 건 유인영이 아니라 제가 됐을 거예요.”말을 마친 후 온지유는 이태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태훈 씨,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요? 유인영에게 황미미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 일은 제가 직접 나설 순 없어요.”이태훈은 그녀의 요청에 흥미를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여이현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화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온지유는 여이현을 용서하기로 했다.그녀는 손을 뻗어 여이현을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난 괜찮아. 당신도 내 실력을 알고 있잖아. 웬만한 사람은 상대가 되지 못해.”“그래도 난 여보한테 정말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안심 못 하겠어. 앞으로는 꼭 곁에 있을게. 아무리 바빠도 곁에서 떠나지 않을게.”“됐어, 난 지금 이렇게 멀쩡하잖아.”온지유는 그래도 여이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화제를 돌리려 입을 삐죽이며 투정을 부렸다.“나 너무 배고파. 오늘 점심에 준비한 뷔페도 제대로 먹지 못했거든. 모두 수다 떨며 사진 찍느라 그 사이에서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어.”사실 충분히 잘 먹었지만 여이현에게 그 전의 일을 잊도록 만들고 싶었다. 이미 지나 간 일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까.여이현은 그녀를 들어 올려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그럼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아직 못 정했어.”온지유는 그의 품속에 얼굴을 묻으며 키득거렸다.그녀를 내려놓으면서 여이현은 길고 깊은 키스를 남겼다.도착한 마라 샤브샤브집에서 여이현은 눈앞의 새빨간 국물을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목숨도 내놓겠지만 매운 음식은 정말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온지유는 일부러 얄밉게 말했다.“못 먹겠으면 다른 데 가도 돼.”“아냐, 이걸로 할게.”여이현은 자존심을 부리며 대답했다. 그는 고집스럽게 소고기를 한 점 집어 작게 한입 베어 물었고 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괜찮네. 이번엔 이것도 먹어봐.”온지유는 여이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릇에 덜어주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대표님이 안 먹어주면 나 아주 서운할 것 같은데.”여이현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온지유는 병원에서 여이현과 함께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아침을 사러 내려간 그녀는 유인영이 급하게 입원 병동으로 향하는 모습을 발견했다.온지유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갈 길을 갔다.“지유 씨.”하지만 뜻밖에도 유인영이 그녀를 발견하고 곧바로 다가와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제가 멀쩡한 게 그렇게 놀라울 일이에요?”둘 사이의 거리가 좁아지자 온지유는 유인영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알아챘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흔적이었다.그녀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뭐가 웃긴데요? 당신이 황미미의 일을 내게 알린 거죠? 우리 가정을 망치려는 속셈이에요?”온지유는 유인영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유인영이 이렇게 빠르게 눈치챌 줄은 몰랐다.온지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맞아요, 내가 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한 일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일도 아니지 않나요?”유인영은 격분하며 소리쳤다.“당신은 죽어봐야 정신 차릴 거야!”그리고 온지유를 향해 덤벼들었다. 온지유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유인영은 허공을 치고 곧장 데스크에 부딪혔다. 위에 있던 물건들이 모두 바닥에 떨어지고 이를 목격한 간호사들이 몰려들었다.간호사 한 명이 유인영을 붙잡았고 또 다른 간호사가 온지유 쪽으로 다가왔다.“온지유 씨, 괜찮으세요?”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유인영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나한테 따지러 올 게 아니라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고맙긴 개뿔! 당신 탓에 남편 바람난 걸 알게 됐고, 집까지 찾아가 대판 싸워서 내가 버림받은 거잖아. 당신 때문에 난 이혼까지 했다고. 내가 꼭 죽여버릴 거야!”“사람 참 웃기네요. 저는 선의로 한 건데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이야.”온지유는 간호사들이 유인영을 붙잡아 줄 것을 알고 있었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병원을 떠났다. 그녀는 떠나는 내내 유인영이 난리를 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미소를 지었다.이후 온지유는 소문을 통해 유인영이 다투는 도중 황미미를 밀쳐 그녀가 병원에서
“너희들...! 전 이 사람들 몰라요. 그냥 지나가려던 참이었어요.”유인영은 관계를 부정하려 했지만 온지유는 이미 골목 끝에서 경찰에게 신고를 해둔 상태였다. 두 남자의 발언은 이미 증거로 확보되었기에 경찰은 그녀의 해명을 듣지 않고 그대로 차에 태웠다.“여진 그룹의 사모님, 괜찮으십니까?”경찰관이 다가와 물었다. 유인영은 여진 그룹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얼어붙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여이현의 아내였어?”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안 그래 보여요?”유인영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상대임을 알았다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여진 그룹 대표의 부인이고 자신은 그저 평범한 인물일 뿐이었다.유인영의 문제가 해결되자 온지유는 한층 더 기분이 좋아졌다. 특별히 큰 케이크를 주문했고 여이현이 이유를 묻자 그냥 먹고 싶어서라고 답했다.여이현은 그녀의 거짓말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서에서 이미 연락이 왔기 때문이었다. 유인영과 그 일당은 법에 따라 처리될 예정이었다.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온지유는 과일을 손질해 서재로 가져갔다.서재에 들어가자마자 장중건의 계약서를 발견하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이 사람과는 협력하지 않기로 했잖아? 왜 생각을 바꾼 거야?”“이태훈이 장중건이 이전에 바꿔치기한 약재들이 아직 행방이 묘연하다고 했어. 그래서 접근해 조사하려고.”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자료를 건네며 계속 말했다.“생각해 보니, 그 시기가 너희 아버지가 습격당했던 때와 아주 근접해. 그때 상대 인원이 갑자기 많아졌던 걸 떠올려보면...”“그 약재들이 그 사람들에게 팔렸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지?”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온지유는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그렇다면 장중건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야겠어.”“아버지에게는 말했어?”온지유는 아직 아버지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법로의 성격으로는 무조건 장중건을 잡아들이고 강압적으로 심문하려 들 게
“별이 친구.”여자는 손을 흔들며 전혀 주저하지 않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모습을 봐서는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부모가 도착하기 전까지 별이는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여자는 철조망을 통해 아이에게 먹을것을 건넸다.이 모습을 본 온지유는 서둘러 다가가 아이를 불렀다.“별아, 엄마가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는지 잊었어?”“안 잊었어요, 엄마. 저 사람은 유진 이모에요. 다른 친구들이 말했는데, 전에 학교에서 춤을 가르쳤대요.”별이는 솔직했다. 아이의 말로 보아 예전에 학교에서 일했기 때문에 낯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했다.하지만 별이는 이번 학기에 전학 온 터라 그 여자를 전혀 알 리가 없었다.온지유는 아이를 혼내려 했지만 여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별이 어머니, 저는 강유진이라고 합니다. 전에 이 학교에서 춤을 가르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연예 기획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이건 제 명함이에요.”명함에는 ‘구름 엔터테인먼트 매니저 강유진’ 이라고 적혀 있었다.온지유는 아직 그녀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기에 명함을 돌려주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아, 매니저분이시군요. 어제도 오셨다던데, 우리 별이를 왜 찾으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강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사실 오늘 어머니께서 안 오셨다면 집으로 찾아갈 생각이었어요. 별이에게는 정말 연예인의 자질이 보여요. 아이를 연예계로 데뷔시키고 싶은데 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강유진의 태도는 진실되어 보였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미세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그건 아이의 의견을 들어봐야겠죠.”온지유는 바로 거절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수락할 의사도 없었다.그녀의 아이는 돈이 부족하지 않았고 연예계에 데뷔하지 않아도 상관없었기 때문이다.강유진은 무릎을 꿇고 별이를 바라보며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차분히 설명한 후 물었다.“별이 친구, 방금 말한 재밌는 일들을 해보고 싶지 않아요?”“제가 방송에 나가면 외할아버지도 저를 볼 수 있어요?”별이
그 사람은 계약서를 주워 내용을 확인하더니 크게 웃으며 강유진을 조롱했다.“말도 안 돼, 용케도 이런 계약에 손을 댔네요? 한 달도 안 하고 그만두면 어쩔 건데 그래요? 돈도 시간도 날려버리는 거 아니죠? 유진 씨, 돈 없는 건 알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아무 돈이나 벌려다 나중에 더 빚지는 거 아니에요?”“서정 씨, 그건 제 일이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강유진은 다시 계약서를 가지고 차분히 들어가 웃으며 온지유 앞에 놓았다.“죄송해요, 웃음거리만 보여드렸네요.”“괜찮아요. 연예계는 다를 줄 알았는데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네요.”온지유는 계약서를 보고 서명을 하며 말했다.“별이가 몇 살인지 아시죠? 그냥 재미로 하는 걸 수도 있으니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세요.”“그건 이미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별이 어머니를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계약서에는 부모 중 한 명의 이름만 필요했기 때문에 온지유는 여이현의 이름은 기재하지 않았다.그녀는 모든 일이 여이현의 이름에 연결되는 것은 원치 않았고, 연예계가 별이에게 과도한 주목을 주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실력 대신 신분으로 알려지면 질투와 악의적인 시선을 초래할 뿐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지유 언니라고 불러요.”“그럼 지유 언니, 계약도 했으니 내일 시간 되시면 별이를 데리고 오세요. 광고 촬영인데 어렵지 않아요. 대본은 나중에 보내드릴게요.”강유진은 살짝 긴장한 듯 보였다. 그녀는 온지유가 거절할까봐 걱정했다.온지유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걱정 마세요. 계약도 했으니 촬영은 할 거예요.”“정말 감사합니다.”강유진은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했고 온지유는 연예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한지 새삼 느꼈다.다음 날, 광고 촬영 현장광고는 어린이용 샴푸 광고였다. 별이의 부드럽고 윤기 나는 머릿결은 광고에 딱 어울렸다.별이에게 스튜디오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별이는 마치 놀이공원에 처음 온 어린이처럼 두리번거리며 모든
“당신 같은 사람은 이미 많이 봐왔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죠. 아동 모델은 직업 수명이 길지 않으니까요. 지금이 아니면 돈을 뽑아낼 수 없으시겠죠.”권서정은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그녀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강유진과 광고 촬영 후 어디서 식사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이 모습에 권서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권서정이 폭발하려는 찰나 옆에서 촬영하던 감독이 배우의 컨디션 문제로 큰소리를 쳤다. 권서정은 급히 그쪽으로 뛰어가 문제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 틈을 타 강유진은 온지유에게 조용히 말했다.“앞으로 서정 씨 같은 사람과는 정면으로 맞서지 마세요.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어요. 지유 언니, 서정 씨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행동이 유진 씨를 곤란하게 했나 봐요. 생각이 짧았어요. 다음부터는 더 신경 쓸게요.”그녀는 권서정이 감독에게 굽신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조금 웃음이 나왔다.‘이게 현실이지.’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광고 촬영이 끝난 후 별이는 정식으로 연예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강유진은 아이가 대중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려면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드라마 출연은 상대적으로 조정이 가능해 문제가 없었지만 예능은 지속적인 촬영이 필요해 까다로웠다. 그러나 강유진은 예능 출연을 추천했다. 여러 번 얼굴을 비출수록 관객들에게 익숙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온지유는 이미 연예계에 발을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일을 골라 받는 것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그 소식을 들은 법로 외할아버지가 특별한 선물을 보내왔다.크기가 큰 박스는 두 사람이 겨우 옮길 정도로 무거웠다. 별이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다.상자는 별이의 방에 놓였다. 별이는 온지유의 허락을 받고 상자를 열었다. 그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서서 천천히 테이프를 뜯었다.“안녕! 우리 귀여운 별이!”상자 안에서 법로
“그래, 그리고 항상 미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알겠니?”“알겠어요!”별이는 외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달빛이 반짝이는 옥상에서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온지유와 여이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지난번에 강유진과 같은 회사의 직원이 실랑이가 있었다고 했잖아. 그 때문에 우리 쪽도 곤란한 일을 겪었다며. 내가 나서서 해결할까?”여이현이 노트북을 닫으며 말했다.“이렇게 하자. 내일 예능 프로그램 촬영 시작일이잖아? 별이의 이름으로 전 제작진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대접하자고 해. 시내 중심 호텔로 예약할게.”하지만 온지유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아직 사람들이 별이의 아빠가 당신이라는 걸 아는 건 이르다고 생각해. 게다가 이번 일은 나도 잘 처리할 수 있어. 유진 씨도 있잖아. 매니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 아니겠어? 만약 유진 씨가 이걸 처리 못 한다면 그건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난 다른 사람의 능력은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신경 쓰는 건 여보랑 별이가 불편한 일을 겪지 않게 하는 거야.”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여보, 당신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숙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도 든든한 후원이 돼주고 싶어.”온지유는 살짝 웃으며 장난스레 그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어머 여 대표님, 설마 자신이 필요 없게 느껴져서 섭섭한 건 아니지?”여이현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사실 최근 온지유는 무슨 일이든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심지어 도움이 필요할 때도 여희영을 찾아갔지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그런 모습이 조금 서운했던 것도 사실이었다.온지유는 살짝 그의 입술에 입 맞추며 웃었다.“걱정 마. 아직은 별이의 아빠가 여이현이라는 걸 밝힐 때가 아니야. 별이 팬이 좀 더 많아지면 그때 아빠의 얼굴도 공개할게.”온지유는 달래는 듯 말했지만 뚜렷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온지유가 여유롭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고 여이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
“참.”권다솔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체크아웃 해야겠어요.”“그럴 필요 없어. 어젯밤 방은 내가 예약한 거거든. 우린 그냥 바로 병원으로 가면 돼. 나머진 내가 알아서 다 처리할 거야.”남태건은 급하게 그녀를 말렸다.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배진호가 돌아왔다.그의 손에는 금방 만든 샌드위치가 있었다. 맛집으로 소문난 가게였던지라 그는 족히 반 시간은 기다려서야 살 수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 권다솔이 좋아하기만 한다면 반 시간이든 한 시간이든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손님.”이때 로비 직원이 그를 불렀다.그녀는 배진호를 측은한 눈길로 보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사러 나갔다가 그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그는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직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주었다.“여자친구분이 이미 떠나셨어요. 체크아웃하시겠어요?”“네, 체크아웃할게요.”배진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잠에서 깨어난 권다솔이 그에게 말도 없이 가버린 것을 보면 아직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그래서 그가 나간 사이에 생각을 정리할 겸 먼저 가버린 것으로 생각했다.체크 아웃을 한 뒤 배진호도 호텔에서 나왔다.그는 누군가 자신을 사칭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남태건은 권다솔을 데리고 병원으로 온 뒤 기본적인 검사를 진행했다. 권다솔은 아주 건강했다.하지만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다솔아, 나랑 함께 밤을 보낸 게 그렇게 슬픈 일이야? 너한테 나는 그런 존재였어?”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남태건은 눈가가 붉어졌다.권다솔은 오직 배진호만 원했다. 그 사실에 그는 가슴이 쓰라리면서 분노가 치밀었다.그는 이미 권다솔을 자신의 아내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의 아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는가.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니에요. 전 그냥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에요. 전 태건 씨를 여전히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거든요.
권다솔은 눈을 떴다.옆에 누워있는 남태건을 본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머릿속도 하얘졌다.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다.“어젯밤에... 그럴 리가 없잖아요?”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이 알려주고 있었다. 어젯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은 배진호라고. 하지만 왜 남태건이 눈앞에 있는 것일까?그녀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다솔아, 내가 어제 일찍 집에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싫다면서 나더러 먼저 가라고 했지. 내가 어떻게 너만 혼자 남겨두고 집에 가? 주위에 남자들이 득실거리는데. 정말로 내가 먼저 갔다면 이상한 파리들이 너한테 꼬였을 거라고. 내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도 너한테 파리가 꼬였을 줄은 몰랐네.”남태건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해댔다.얼굴도 붉지 않고 가슴도 요동치지 않을 정도로 태연했지만 두 눈엔 안타까움만 남아 있었다.“누가 네 술잔에 뭔가를 탔어. 그걸 눈치 못 챈 네가 주스를 가지러 갈 때 결국 정신을 잃게 되었었지. 하마터면 처음 보는 놈들에게 끌려갈 뻔한 걸 내가 막은 거야.”권다솔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기억해내려고 애를 썼다.그녀는 확실히 자신에게 치근대던 남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에게 손을 대려고 했으나 배진호가 나타나 남자를 때려주며 무사하게 되었다.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진호라는 것을. 애초에 남태건이 아니었다.“정말로 절 구해준 사람이 태건 씨예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건 아니죠?”권다솔은 반신반의하며 말했다.남태건은 손을 번쩍 들며 맹세했다.“당연히 거짓말이 아니야. 어젯밤 널 구한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너랑 같은 방에 있겠어? 다솔아, 그 약은 아주 위험한 약이야. 사람 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들 수 있는 약이지. 이따가 나랑 같이 병원에 가자. 후유증이라도 남으면 안 되잖아.”기억까지 흐릿하게 만든다는 말에 권다솔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설마 진호 씨랑 보낸 시간이 전부 꿈인 거야? 약 때문에 환각이 생긴 거야?'그녀는 어제 꿈속에서 배
만약 권다솔이 모른다고 한다면 그는 이곳을 떠나 그녀가 푹 쉴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그는 알고 있었다. 권다솔이 취했다는 것을. 술에 취한 사람과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진호 씨, 내가 어떻게 진호 씨 얼굴을 잊겠어요. 설마 내가 진호 씨를 못 알아볼 거로 생각한 거예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호텔 불빛 아래 보이는 배진호의 얼굴도 흐릿했다.이 모든 게 꿈일 거로 생각했다.현실에서는 감정을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꿈에서만큼은 전부 표현하리라 생각했다.그녀는 한번 또 한 번 배진호의 이름을 불렀다.그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배진호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그는 옷을 하나씩 벗으며 방 안의 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고개를 내려 권다솔에게 키스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두 사람은 전부 힘이 빠진 상태였다.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권다솔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었기에 샤워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다.그래서 그대로 눈을 감고 자버렸다.그날 밤, 그녀와 배진호는 그 어느 때보다 푹 자게 되었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열린 커튼 틈 사이로 햇볕이 들어와 배진호는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옆에 누워있는 권다솔을 본 그는 전례 없던 행복을 느끼게 되었고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바랐다.그는 권다솔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옷을 입었다. 아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어젯밤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서로를 원했기에 권다솔이 깨어나면 분명 배고플 것이었다.아침을 먹은 후에 두 사람을 편히 잠 못 이루게 했던 문제들을 해결해볼 생각이었고 이혼도 취소할 생각이었다.그는 그렇게 호텔을 나섰다.그 모습을 마침 남태건이 목격했다. 그는 어젯밤 내내 권다솔을 찾아다니느라 잠도 자지 못했지만 찾지 못했다.조급해진 그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려던 때 배진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배진호는 호텔에서 나왔다.그렇다는 건...남태건은 이를 빠득 갈며 호텔
남자는 머리가 어질거렸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잔뜩 화가 난 배진호의 얼굴에 그는 꼬리를 내리게 되었고 이내 배진호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했다.“깼어요, 깼어요. 이 여자는 형님한테 넘길게요. 두 사람 방해하지 않고 바로 여기서 꺼져드릴 테니까 형님은 천천히 즐기십시오!”“여자도 사람이야. 우리랑 같은 인간이라고. 물건처럼 넘기느니 마느니 할 자격 없어, 너한테.”배진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멱살을 잡으며 엄숙하게 경고했다.그는 방금 이곳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나서서 도와준 이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여자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그저 한 몫 챙겨보려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 권다솔 외에는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다.“네, 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남자는 바닥을 기어 다니더니 빠르게 몸을 일으켜 도망쳤고 중얼거리며 배진호를 욕했다.‘어디서 허세를 부려!'‘세상에 욕망이 없는 남자가 어디에 있다고! 다들 여자를 원한다고!'배진호는 쫓아가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방금 남자에게 당하고 있었던 여자에게 밤늦게 술집에 왔을 땐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런데 그는 권다솔을 발견하게 되었다.“진호 씨?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니죠? 진호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권다솔은 그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자신이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남자가 지금 바로 눈앞에 있자 땜이 무너져버린 저수지처럼 감정이 흘러나왔다.이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권다솔은 속으로 자신에 말했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손을 뻗게 되었다. 배진호를 직접 만지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나예요. 우리가 같은 목적으로 여기에 온 것 같네요.”배진호는 씁쓸하게 웃었다.방금 그는 차를 몰고 이곳으로 오면서 안에서 빛나는 불빛 보며 생각했었다. 만약 이곳에 권다솔이 있다면 분명 안으로 들어가 한잔 마셨을 것이라고.그 생각으로 이 안까지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그는 정말로 이곳에서 권다솔을 만나게
“태건 씨,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요. 빨리 돌아가세요.”권다솔의 목소리엔 이미 지친 듯한 짜증이 묻어났다.그녀가 밤늦게 클럽에 온 이유는 마음을 풀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이지 남태건이 옆에서 잔소리를 늘어놓으라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남태건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녀 옆에 자리를 잡고 자신도 맥주 한 병을 땄다.“네가 술을 마시고 싶다면 내가 같이 마셔줄게. 네가 집에 가고 싶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다줄게.”권다솔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갑자기 술 마실 기분이 뚝 떨어진 그녀는 술병을 옆으로 밀어두고 춤추는 남녀들로 가득한 스테이지를 멍하니 바라봤다.‘이 순간에 배진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다솔아, 우리도 같이 춤출래?”남태건이 먼저 제안했다.아까 이쪽으로 오면서 그는 배진호를 봤다.그 남자는 정말로 끈질기게 권다솔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둘 사이엔 정말 인연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힘들고 지칠 때 찾는 곳이 똑같다는 것 자체가.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인연도 자신이 있는 한 반드시 끊어낼 거라 다짐했다.그는 배진호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권다솔과 자신이 춤을 추며 두 사람의 몸이 밀착해 있는 모습을 말이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혼자 가세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요.”“네가 안 간다면 나도 안 가. 나는 너하고만 있고 싶어. 다른 여자는 보지도 않을 거야.”남태건은 천천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둘 사이의 거리가 한층 더 좁혀졌다.남태건이 손을 내밀어 권다솔의 손끝에 닿으려는 순간, 권다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솔아, 어디 가려고?”남태건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얼른 따라가려고 몸을 일으켰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주스 좀 받아어려고요. 금방 올 테니까 여기 있으세요.”그제야 남태건은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액세서리를 가방에서 꺼냈다. 권다솔이 돌아오면 그녀에게 선물할 생각에 미소를 지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