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영은 주의 사항이 적힌 종이를 온지유의 얼굴 앞에 뿌렸고 자칫 잘못하면 눈에 닿을 정도였다.온지유는 이에 화를 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하세요.”유인영은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날렸다.“주의 사항을 확인하시라고요. 그리고 뒷면에는 오늘 점심에 준비할 요리가 적혀 있어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맛으로 준비하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쪽 요리를 먹지 않을 거고 그쪽 아들이 오늘 운동회에서 따낸 성적도 전부 무효화될 거예요.”“제 요리가 맛이 없는 게 제 아들과 무슨 상관이죠? 저를 벌하면 벌했지 왜 아이까지 피해를 주려는 건가요?”온지유는 운동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이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만약 정말 아무도 온지유의 요리를 먹지 않는다면 별이까지 힘들게 할 수 있었다.온지유는 얼굴을 찌푸렸다.‘학교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리 없어. 이건 분명 이 학부모회장이라는 여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거야.’이미 와버렸으니 온지유는 준비하라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지만 꼭 직접 요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만약 할 줄 모르는 요리라면 호텔에 주문하면 될 일이었다.온지유는 종이를 당당하게 받아 들고 뒷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그러자 온지유는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왜요? 설마 못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유인영은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하지만 당시 같은 아줌마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나는 할 줄 몰라요. 요리 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서요.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요리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점심 준비는 아줌마한테 맡길게요.”“걱정하지 마세요. 문제 해결이 제 전문이거든요. 회장님은 마음 편히 쉬세요.”온지유는 여유롭게 대답했다.“그쪽... 그냥 말로만 큰소리치는 거 아니죠?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유인영은 돌아갔고 이번에는 다시 온지유에게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았다.운동회가 곧 시작되자 각 반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 일련의 절차를 진행했다. 절차가 끝나고 교장이 신호
총성이 울리자마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별이가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상황을 보니 부상이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온지유는 가장 먼저 달려가 별이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별이의 무릎 피부가 크게 까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엄마, 아파요. 다리가 너무 아파요.”별이는 온지유의 품에 안겨 크게 울기 시작했다.“별이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금 당장 의사 아저씨한테 데려다줄게.”온지유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고 가까운 곳에 임시로 설치된 의무실이 있는 걸 발견하고서는 바로 뛰어갔다.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도 뒤따라왔고 모두가 별이의 상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의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아이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덕분에 의무실이 조용해지자 온지유는 의사에게 다급히 물었다.“의사 선생님, 뼈에는 이상이 없나요?”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약 뼈에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바로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의사는 다시 검진한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머님, 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릎의 상처가 나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 기간 절대 상처가 물에 닿지 않게 하고 또 손으로 상처를 만지게 하면 안 됩니다.”온지유는 대답한 뒤 진지하게 주의해야 할 점을 적었다.상처 치료를 끝낸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온지유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별이야, 아프면 그냥 마음껏 울어도 돼. 무서워하지 마. 아프면 울 수밖에 없는 거야.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엄마, 그럼 나 울어도 애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는 거예요?”“당연히 안 놀리지. 혹시 누가 너를 놀린다고 해도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엄마는 네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아주 용감하고 강하다고 생각해.”별이는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아픈 걸 참지 않고 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별이가
별이는 온지유가 왜 이러는지 몰라 조용히 물었다.“엄마, 어디 아파요?”온지유는 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별이는 정말 다정하네. 엄마를 걱정해 주다니. 근데 엄마는 어디도 안 아파. 그런데 별이 지금 집에 가고 싶어? 아니면 계속 경기를 보고 싶어?”별이는 운동장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작게 말했다.“그래도 여기 남아서 경기를 끝까지 보고 싶어요. 선생님이 순위보다 참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엄마, 나중에 엄마가 요리해야 하지 않아요? 제가 엄마의 조수가 되어 드릴게요.”온지유는 기쁜 마음에 별이의 얼굴에 뽀뽀하며 말했다.“그럼 너무 좋지. 이제 우리 조수 별이에게 맡길게.”“알겠습니다. 엄마의 멋진 조수가 될게요.”별이는 손을 들어 다짐하며 이제는 아픈 다리는 잊은 듯했다.약을 발랐으니 아픔은 점점 사라졌고 별이는 아까의 두려움마저 사라져 예전의 활발한 모습을 되찾았다. 원래 별이도 배구 경기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온지유는 선생님께 별이의 모든 경기를 취소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지유에게 별이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어린이 운동회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다영아, 화이팅. 다들 우리 다영이를 위해 응원해 주세요.”멀리서 유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부모들은 마지못해 손에 든 작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힘없이 응원했다.별이는 아주 적극적으로 큰 목소리로 응원했다.“다영아, 힘내. 공을 잘 잡고 앞으로 달려.”멀리 있던 다영이는 별이의 응원 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그 순간 공을 놓쳤고 결국 공은 다른 쪽으로 굴러가게 되었다.다영이는 급히 공을 쫓아갔으나 서두르다가 실수로 공을 밟아 바닥에 넘어져 흙을 뒤집어썼다.“아. 나쁜 공이야. 엄마 빨리 공을 버려. 나 이 공 싫어.”다영이는 바닥에 앉아 뒹굴며 입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잊고서는 큰 목소리로 울었다.유인영은 곧 달려가 다영이를 달래며 공을 탓하기 시작했다.이를 지켜보던 몇몇 학부모들은 유인영의 교육 방식에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
“우리 집 아줌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예요.”별이는 화가 나서 유인영의 다리를 주먹으로 때렸고 유인영은 화가 나서 발로 별이를 차서 넘어뜨렸다. 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억울하게 유인영을 쳐다보았다.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온지유가 반응하기도 전에 별이는 이미 넘어져 있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품에 안고 다시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유인영을 노려봤다.유인영은 겁에 질려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내가 힘을 준 것도 아니고 아이가 저절로 넘어진 거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유인영 씨라고 했죠? 기억할게요. 만약 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를 통해 연락할 거예요. 그쪽 남편이 대기업 본부장이라면서요? 돈도 많을 텐데, 의료비 같은 걸로 시간 끌지 않길 바랄게요.”온지유는 원래 유인영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기어코 나대고 싶다면 맞장구를 쳐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별이를 발로 찬 것은 선을 넘은 일이었다.‘여기서 계속 참으면 내가 온지유가 아니지.’온지유의 차가운 태도에 유인영은 물론 주변의 부모들도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온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안고서는 휴식 구역으로 돌아갔다.경기는 계속해서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경기에서 이긴 아이들은 환호했고 진 아이들은 울며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오전 경기가 끝날 무렵 여이현에게서 회사에 급한 상황이 생겨 먼저 회사에 왔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따지지 않았고 레스토랑에 연락해 점심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굳이 온지유가 직접 요리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선생님이 점심 식사를 유인영에게 맡긴 것만 봐도 딱히 실상에 신경을 쓰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맛있는 식사를 즐기게 해주는 편이 나을 듯했다.오전 경기가 끝났다는 방송이 나오자 부모들은 각자의 휴식 구역으로 돌아갔다. 다른 학급 부모들은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반면 별이네 반 부모들은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보며 그냥 느긋하게 점심
이 소동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들의 제복이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제복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학교의 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단한 셰프를 그가 무슨 수로 불러올 수 있을까. 부모님들 중 누군가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인게 분명했다.“사모님, 말씀하신 대로 최고급 뷔페 요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어디에 차려두면 될까요?”호텔 매니저가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와 말하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인영은 더구나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이 호텔 요리는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닐 텐데 돈도 얼마 없어 보이는 분이 어떻게 부르셨을까?”“그러게요. 조금 전 학부모 모임 회장이랑 분쟁이 있었나 본데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네요.”누가 뒷담화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은 유인영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온지유에게로 다가갔다.온지유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인영은 이미 비아냥거리고 있었다.“정말 최고급 요리인지 제가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아무 요리나 최고급 타이틀을 붙이는 건 용납할 수 없거든요.”보관함을 열자 안의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고기찜이었다.요리의 향긋한 냄새가 퍼져오자 관중들은 감탄을 금치못했다.온지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유인영 씨, 어떠세요? 이 정도면 최고급 요리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유인영은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향은 괜찮네요.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맛이 어떨지는 식사가 시작되면 아시겠죠. 지금 설마 모두가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온지유는 이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녀는 유인영이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단번에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유인영은 당장 자리에서 비키고 요리가 식탁 위에 올려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온지유가 정말 거금을 들여 뷔페를 준비했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최고급 요리가 아니더
온지유가 준비한 요리는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로 그녀는 단번에 학교의 유명인이 되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돈 많은 엄마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유인영에 쏠렸던 관심은 줄어들었고 이는 유인영의 반발심을 사게 되었다.오후의 운동회에는 별이가 상한 탓에 점심을 먹고 난 뒤 조퇴해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하자 유인영의 그룹 채팅 요청이 와있었다. 반급의 모든 어머니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목적은 이후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교류라고 하지만 온지유는 참여하지 않았다.유치원의 그룹채팅은 그다지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별이가 잠들고 온지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이미 통화 중이었다.오늘 운동회에서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린 온지유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억압 되어있던 화를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려 확인하자 유인영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전혀 호감이 들지 않았다. 바로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호기심 끝에 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별이 어머니, 왜 그룹채팅에 안 들어오신 거예요?”“어머, 그 일이라면 전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간 거예요. 왜 그러세요? 따로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끊을게요. 지금 조금 바빠서요.”온지유는 쓸모없는 대화에 흥미가 없었다.그러나 상대방은 급히 온지유를 말렸다. 몇 번이고 온지유를 불러 멈추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다름 아니라 제가 다른 부모님들이랑 시내 쇼핑몰에서 보기로 했거든요. 어쩌다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 하루 정도는 재밌게 놀아보면 어떨까 해서요.”“전 사양할게요. 모두 좋은 시간 보내세요.”“그러지 마시고, 별이 엄마도 한 번만 와보세요. 유치원에서 인맥을 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별이도 초등학교, 중학교로 진학할 거잖아요. 또 보게 될지 누가 알아요.”유인영은 온지유를 불러낼 생각뿐이었다.온지유는 하는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일 관련이라면 하는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을 탓하지 않았다. 그저 여이현에게 별이 친구 부모님들과 함께 외출을 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여이현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무렵 차는 이미 번화가를 벗어났다.온지유는 의문을 품었다.“쇼핑을 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알다시피 회장이란 여자가 변덕이 심하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여기서 기다릴 일도 없었겠지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까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차를 구석진 길로 돌렸다. 온지유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은 사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구석진 산길이었다.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남자에게 영문을 물어보려던 찰나 차는 골목에서 벗어 나 큰길로 나왔다. 앞은 주유소였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주유소 사장에게 돈을 지불하러 가고, 온지유는 그 틈을 타 유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유인영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아가씨.”그때 누군가가 온지유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 사람은 법로의 부하였다.온지유는 차에서 내려 인사를 하려 했지만 밖에 나가 있던 남자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온지유는 눈짓을 하여 먼저 부하를 떠나보냈다.법로의 부하는 모두 두 명이었다. 그들은 법로의 명령을 받아 몰래 온지유 모자를 지키러 온 것이었다. 본래 온지유에게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럴 수 없었다.남자가 온지유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서자 둘은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얼마나 더 갔을까, 드디어 차가 멈춰서고 산기슭에는 차량 두 대가 이미 세워져 있었다.온지유는 세워진 두 대의 차를 보고 남자에게 물었다.“유인영과 당신의 아내는 모두 저 차 안에 있는 건가요?”“빨리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늦었네요. 이미 산 위에 올라갔을지도 모르니 같이 가보죠. 위에 올라가면 사찰이 있는데 다들 아이를 위해 소원을 빌러 간다고 했거든요.”이런 곳에 사찰이 있을 줄은 몰랐다.산길은
여이현의 전화는 또다시 연결되지 않았고 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때마침 여희영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고 온지유는 화가 난 김에 오늘 있었던 일과 자신의 계획을 모두 여희영에게 털어놓았다.여희영은 온지유에게 교외의 한 바에서 만나자고 했다. 온지유가 있는 곳에서 걸어서 불과 몇 분 거리였다. 온지유에게 지금 차가 없는 것을 고려한 듯했다. 바에 걸어가 잠시 기다리자 곧 그들이 도착했다.“지유 씨, 누군가를 조사하고 싶다고 들었어요.”차에서 내린 이태훈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인영의 사진을 그에게 건넸다.“유인영의 남편이 어떤 회사의 매니저라 들었어요. 어느 회사에 다니는지 찾아주세요. 유인영이 감히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똑같이 그 집안을 박살 낼 거예요.”먼저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하지 않지만 받은 건 천 배로 갚아 주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았다.그 점에 이태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온지유와 여희영을 위한 방을 따로 잡아준 후 바로 조사를 시작했다.10분도 채 되지 않아 이태훈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온지유에게 한 장의 자료를 건넸다.유인영의 남편 안건휘는 여진 그룹 산하의 한 호텔에서 구매부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꽤 괜찮은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자료에는 또 다른 핵심 인물이 나와 있었다. 바로 안건휘의 연인 황미미였다.황미미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고, 현재 교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태교에 전념하고 있었다. 웃긴 건 안건휘의 친어머니가 그녀를 돌보고 있다는 점이었다.“불쌍하게도 저런 남자를 만나서는.”여희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지유는 차갑게 말했다.“고모님은 불쌍하다고 하지만 만약 제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오늘 불쌍한 건 유인영이 아니라 제가 됐을 거예요.”말을 마친 후 온지유는 이태훈을 바라보며 말했다.“태훈 씨,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요? 유인영에게 황미미의 존재를 알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 일은 제가 직접 나설 순 없어요.”이태훈은 그녀의 요청에 흥미를
여학생이 사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달리기를 하던 중 과다 출혈이 일어난 것이었다.그녀는 생리 기간이라 선생님에게 달리기를 면제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선생님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무리하게 달리기를 하다가 출혈이 심해진 데다가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그런데 학교 쪽에서는 자신들이 잘못한 건 일부일 뿐이고, 학생과 학부모 쪽 책임도 크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은 달려도 멀쩡한데, 왜 그 여학생만 그랬냐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양시은은 사건 자료를 살펴보면서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이런 파렴치한 학교가 다 있네!”나도현이 달래듯 말을 건넸다.“진정해.”양시은은 억지로 심호흡을 했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알기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400만 원으로 한 생명의 가치가 판단되는 것이 황당하기는 해도 실존한다. 현실에서는 정말 흔히 일어나고 있지만 법에 명시된 조항이 없어서 답답할 따름이다.“게다가 그 여자애 학교에서 전학한 뒤로 적응도 못 하고 왕따까지 당했어. 여기저기 호소해 봐도 해결이 안 됐고 집에서도 신경을 안 썼대.”그렇게 말하던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나도현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순수한 의문이 서려 있었다.“이렇게 비슷한 일이 자꾸 생기는데 왜 명확한 규정 하나 안 만들어지는 걸까?”왕따는 겉보기에는 사소해 보여도 실제로는 사람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는 문제였다. 심지어 매년 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도 적지 않았다.나도현은 시선을 살짝 떨구며 깊은 무력감이 깃든 목소리로 대답했다.“진정해. 이런 일에는 얽힌 게 생각보다 많이 있어. 그래도 좋게 생각해 보자. 이번에 네가 변론에서 이기면 많은 사람이 이 사건에 더 관심을 가질 수 있잖아. 그럼 좀 나아질 수도 있어.”“응.”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그 사이, 나도현도 일하기 시작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묘한 평온을 공유했다. 창문 너머
“이 법률 자료들은 누구 겁니까?”양시은이 대답했다.“제 거예요. 요즘 어떤 대회에 참가 중이라서요.”간단히 상황을 설명하자, 경찰은 자료를 돌려주며 회사 내에 이런 자료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마디 덧붙이고는 그냥 돌아갔다.그러자 그 남자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아니, 제대로 조사 안 해본 겁니까? 저 사람은 변호사였다고요! 변호사가 어떻게 대표가 될 수 있어요? 그건 불법이잖아요!”남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나도현이 서 있었다. 경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나도현 씨의 변호사 자격은 이미 오래전에 말소됐습니다.”남자는 순간 멍해져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인했다.“그, 그럴 리가... 그건 말이 안 돼요!”“뭐가 안 된다는 거죠? 나도현 씨가 변호사 자격증을 취소하러 왔을 때, 일부 서류를 저희 쪽에서도 처리해 줬어요.”경찰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이건 사실관계를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사실 나도현은 워낙 유명한 변호사였기에 변호사 자격을 정리할 때도 꽤 화제가 됐었다. 그래서 경찰들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남자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휘청거리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이럴 수가... 이럴 수가...”경찰들은 허탕 치고 가게 된 것이 불만인 듯 돌아가기 전 남자를 한 번 더 나무랐다.“다음부터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함부로 신고하지 마세요.”이 한마디로 그 남자는 체면이 말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양시은은 시퍼렇게 질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이제 믿겠어요? 아직도 못 믿겠다면 직접 로펌에 가도 돼요. 거기선 다들 증언해 줄 테니. 만약 믿었다면 이전에 한 약속 이행 좀 부탁드릴게요.”남자는 약속을 어기고 싶었지만, 이미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는 시선이 엄청났다. 만약 그 자리에서 발을 빼려 한다면 사회적 신뢰가 무너질 게 뻔했다.결국 그는 마지못해 공개 해명을 올렸다. 그 덕분에 온라인에서 막 불붙으려던 논란은 재빨리 사그라들었고, 나도현
그렇다고 해서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대신해 앞장서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그는 양시은을 뒤로 끌어당기며 말을 시작한 무리에게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그럼 경찰 불러서 조사해 보죠.”양시은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물론 잘못이 없으면 두려울 이유도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들은 애초에 시비를 걸 목적으로 왔을 게 뻔했다. 혹시 뒤에서 상대편이 사주한 걸 수도 있고,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해도 여론몰이를 해서 나도현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도현 씨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려 하다니...’양시은은 감동스러우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의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손길이 양시은을 제지하는 듯했다.“왜 신고 안 해요? 이제 와서 겁내는 거예요?”나도현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눈썹을 치켜떴다. 여유로우면서도 강압적인 기세가 느껴졌다.시끄럽게 목소리를 높이던 이가 가장 먼저 그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고, 곧 스스로를 다독이듯 중얼거렸다.“무, 무서울 건 없지. 어차피 다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짧은 시간에 증거를 없앨 수 있었겠어...”그러면서 나도현을 노려보았다.“좋아요. 지금 바로 신고하죠. 다만 약속하세요.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뒤에 있는 저 여자는 준결승에서 사퇴해야 해요.”“당신들 같은 사람이 대회에 나오는 건 인정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조건을 바꾸죠. 이건 제 일이니 다른 사람은 끌어들이지 마요.”자신이야 어떻게 되든 괜찮지만 양시은이 휘말리는 건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이 대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그 말을 들은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겁난다면 그냥 겁난다고 하지 그래요?”“그렇게 하죠.”“시은아, 너...”나도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양시은이 괜찮다는 눈빛을 건넨 뒤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 조건에 응할게요. 다만 저도 약속을 받아야겠어요
“위에 CCTV도 있어요. 임다혜 씨를 위해 화풀이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말씀드리죠. 나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임씨 가문 일이라고 하든, 외부인인 단미주 씨가 낄 자리는 없어요. 이 술 한 잔으로 경고하는 거예요. 제 한계를 시험하려 들지 마요.”나도현의 한계란 곧 양시은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녀를 괴롭히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여러분 다 들으셨죠? 술로 저를 경고하겠다네요. 여러분은 이게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몇 마디 했다고 이 지경을 만드는 게 말이나 돼요? 나도현 씨 같은 사람은 분명히 벌을 받게 돼 있어요! 다들 궁금하지 않나요? 변호사로 잘 나가던 사람이 왜 갑자기 회사를 운영하겠어요. 변호사가 상업에 뛰어들면 안 된다는 건 기본 상식이에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억울했다. 그 억울함은 임다혜를 대신한 것이기도 했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그녀는 한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굴욕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나도현이 무슨 권리로 함부로 술을 끼얹느냐는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그 말이 떨어지자 장내가 일제히 술렁거렸다.“그러고 보니 나도현 씨 전에는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왜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 설마 내막이 있는 거 아냐?”“그야 뻔하죠. 뒷배경 없이 어떻게 변호사 접고 곧장 대표 자리에 오르겠어요?”“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인맥도 많고 나씨 가문의 오랜 기반도 있잖아요. 뭐든 상상 초월인 거죠.”“돈 많고 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원하는 걸 얻기 마련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세상 구경을 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느새 나도현을 몰아세우는 비난의 장소로 바뀌어 버렸다. 사람들 태도가 하나같이 막무가내였다.양시은은 나도현을 끌고 나가려 했으나, 그가 오히려 양시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나도현은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말했다.“제 직종 변경은 모두 절차에 따른 겁니다. 변호사 자격증도 이미 말소했고, 나
양시은은 자신과 나도현의 관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두 사람이 오래갈 것 같아요? 둘 사이에는 애초에 신분 격차가 있어요. 나도현 씨가 정말 신경을 안 썼다면 이렇게 자주 연회에 왔겠어요? 결국에는 신경 쓰고 있다는 거겠죠.”말투에서 은근히 도발적인 기색이 풍겼다. 상대는 우아하고 고상해 보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양시은은 낮은 목소리로 비꼬듯 대꾸했다.“도현 씨가 신경 쓴다고 해도, 그건 저희 문제지 그쪽과는 상관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말, 정말 당당하면 도현 씨 앞에서도 해봐요. 근데 저만 붙잡고 이러는 거 보니까 그럴 용기는 없나 보네요.”양시은은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낯선 여자가 모른다고 해도 그녀는 잘 알았다. 나도현이 그녀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말이다.“나도현 씨 앞에서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 한 건 당신이 눈치 있는 사람인 줄 알아서였는데... 보다시피 아니네요.”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다.마침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도현은 곧장 움직였다. 양시은에게 시비를 건 여자가 임다혜의 친구인 단미주라는 걸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단미주가 양시은의 앞에 나타난 목적은 뻔했다.그렇게 생각한 나도현은 대화를 나누던 무리에서 벗어나 양시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는 잠시 망설이지도 않고 양시은과 함께 곧장 단미주를 찾아갔다. 단미주는 나도현이 나타난 걸 보자마자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당신 고자질하는 취미도 있었네요.”단미주는 나도현이 자신의 앞에 온 이유가 양시은이 무언가 일러바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직접 찾아올 리 없다고 여긴 것이다.“시은이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제가 직접 본 거거든요. 남 험담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재능 살릴 만한 직업이라도 구해줄까요, 단미주 씨?”나도현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서빙 트레이에 있던 술잔을 집어 들어 단미주의 얼굴에 그
나도현이 양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이현이네랑 만났어. 시은아, 내일 나랑 같이 연회에 가지 않을래?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해줘.”양시은에게 상류층 행사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짜 중시하는 건 나도현의 곁에 함께 있는 일뿐이었다.하지만 나도현은 그녀에게 세상을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싶었고, 가능한 모든 인맥과 자원을 총동원해 그녀의 앞길을 활짝 열어 주고자 했다. 양시은은 지금 이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지내는 편이 더 좋은데도 말이다.“난 지금으로 충분해. 연회 같은 거 별로 관심도 없어. 그냥 안 가면 안 될까?”양시은은 차라리 하민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종종 별이도 만나서 둘이 친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훨씬 즐거웠다.“당연히 네 의견이 우선이야. 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큰 자리에 나가야 하는 일이 많아질 텐데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알았어. 먼저 샤워부터 해. 내가 비타민C 챙겨둘게.”이미 나도현이 결정한 듯 보였기에 양시은도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나도현이 푹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었다.나도현은 그녀를 살짝 끌어안고 속삭였다.“난 네가 아이를 하나 더 낳아주면 좋겠지만 출산은 고통스럽지. 그리고 우리가 이현이네랑 같은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까 봐 좀 꺼려지기도 해. 우선 네가 좀 더 편하게 이 생활을 누리면 좋겠어. 다른 건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양시은이 예전에 겪었던 삶은 너무 힘겨웠다. 이제는 일단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혹시 나중에 정말 원하게 되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응, 다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나도현을 사랑했고, 당연히 그의 아이를 낳는 일도 기쁘게 여겼다. 예전에 둘이 떨어졌을 때도 아이를 기어코 낳은 건 그를 향한 마음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다음 날, 나도현은 양시은을 데리고
지석훈과 최주하가 동시에 나도현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결혼까지 다 해놓고 그러냐. 하여간 너도 참 대단하다.”여이현은 나도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미 애도 있는데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주면 되는 거야. 게다가 네 와이프 지유랑 같이 있는 거 보니까 괜찮던데?”나도현은 최근 양시은의 상태를 떠올렸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하게 된 뒤로는 이전처럼 피곤해 보이지 않아 상태가 훨씬 낫기는 했다.지석훈이 끼어들었다.“나 다음 달 지방 출장 가야 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못 올 뻔했어.”“나도 내일 해외 나가야 해.”최주하도 맞장구쳤다.그렇게 짬을 내서 다 같이 모인 것이다.여이현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도현이 놀리다가 너희도 똑같이 될 줄 알아. 너희는 언제쯤 가정 꾸리고 애 낳을 건데? 우리 애들 중학생 될 때까지도 결혼 안 하고 이러고 있을 거야?”그들은 이미 서른을 훌쩍 넘겼다.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부터 안정을 선호하게 되었다.하지만 최주하는 달랐다.“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아무나 붙잡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지석훈도 거들었다.“여이현처럼 지유 씨랑 먼저 결혼해 놓고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쪽도, 나도현처럼 재회한 뒤 오해로 얽히고설키는 쪽도, 내 취향은 아냐.”그는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태도였다.“결혼해서 뭐 해? 맨날 아내랑 애들만 신경 쓰게 되잖아. 난 지금 일하는 게 더 재밌어. 인생이 꼭 결혼이 전부는 아니지.”솔직히 말해서, 그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전혀 부럽지 않았다. 결혼이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의문이었다.매일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일하는 게 훨씬 더 매력적이지 않나. 게다가 인생이 결혼만이 전부는 아니었다.최주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석훈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결혼했다고 우리까지 끌어들이려는 것 같아.”“뭐야, 네 명이 아니면 못 하는 거라도 있어?”최주하는 여
“훌륭합니다. 양시은 변호사는 법 조항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인상 깊네요. 주장도 명확하고 논리 정연해서, 이번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줬어요.”다른 심사위원들도 잇달아 동의하며 양시은의 변론을 높이 평가했다.대회가 끝난 뒤, 양시은은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탈락한 여성 변호사가 갑자기 주먹을 쥐고 외쳤다.“이건 불공평합니다.”조금 전 무대에서 사용했던 마이크가 꺼지지 않았던 터라, 그 소리는 대회장 안팎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장내가 조용해졌다.“이번 변론은 양시은 변호사 쪽이 훨씬 수월하게 짜여 있습니다. 게다가 뒤를 봐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까지 있는 데 왜 참가 자격을 박탈하지 않은 거죠?”그녀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양시은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표정은 차분하면서도 단호했다.“상황을 잘 모르시는 것 같네요.”양시은의 목소리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저는 어떤 특혜도 받지 않았어요. 모든 절차는 대회 운영위원회의 엄격한 심사를 거쳤고, 온라인상의 소문은 실력 있는 사람을 함부로 정의하지 못한다고 믿습니다.”여성 변호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그래도 지금 누리는 편의가 전부 다 나도현 변호사 덕분이잖아요. 이게 뒤를 봐주는 게 아니면 뭐겠어요?”양시은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나도현 변호사는 대회의 스폰서 중 한 명이고, 스폰서가 추가로 한 명을 뽑을 수 있다는 건 공개된 조항이에요. 그건 운영위원회의 결정이고, 저는 그 범위 안에서 경쟁했을 뿐이죠. 만약 이게 뒤를 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스폰서의 추천을 받는 모든 참가자를 그렇게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요?”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양시은의 말은 많은 이들에게도 나름의 설득력이 있었다.“게다가 대회 중 제가 보여 준 실력은 심사위원과 관중들이 다 지켜봤다고 생각해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었다면, 저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양시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곧 오늘 대회가 시작되겠네요. 저는 제가 가진 전문성으로 끝까지 가볼 거예요. 설령 못 간다고 해도 떳떳하게 임할 거고요.”그 말을 남기고 양시은은 돌아섰다.곧이어 대회가 시작됐다. 유언비어 때문인지, 방청석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편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기색까지 드러냈다.그러나 양시은은 전혀 개의치 않고 법 조항을 들고 무대에 올라 당당하게 변론을 펼쳤다.“이모 씨가 몸싸움을 하는 과정에, 증언에 따르면 가해자는 여전히 행동 능력이 있었고 침해 행위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모 씨의 생존을 위한 반항은 정당방위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봅니다.”상대 변호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반박했다.“법의학자가 부검한 결과, 피해자는 당시 이미 행동 능력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도 이모 씨가 공격을 이어간 건 방어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죠.”양시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이모 씨는 체구가 작아서 키가 160도 안 되는 반면 가해자는 180에 달합니다. 체격 차이가 꽤 크기 때문에 가해자가 완전히 재공격 능력을 잃었다고 확신하기 전까지는 손을 뗄 수 없었겠죠? 이모 씨에게 가해자를 고의로 해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양시은의 목소리는 단단했고, 사건에 대한 이해와 법 조항 활용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 줬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전문성에 저절로 감탄하는 분위기였다.상대 변호사 역시 그녀의 논리에 흔들린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반박했다.“그래도 이모 씨의 행동은 필요한 한도를 이미 넘어섰습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가상 판사가 기침을 하며 둘 사이의 공방을 제지했다.“핵심은 이모 씨의 행동에 주관적 고의가 있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양시은은 미묘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실무에서 주관적 고의 판단은 언제나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모 씨는 가해자가 이미 행동 불능 상태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양시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