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대답을 들은 뒤 여희영을 보고서는 놀라며 말했다.“왜 지유 옷을 입고 있어요? 옷이 없어요?”그렇게 말하며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요. 내 돈은 아까워하지 말고요.”“내가 돈을 다 쓰면 네 와이프는 무슨 돈을 써?”여희영은 여이현을 놀리고 싶어 농담을 던졌지만 여이현이 슬며시 웃으며 온지유를 감싸안더니 말했다.“내 돈은 다 지유 손에 있어요. 고모한테 준 건 내 용돈일 뿐이에요.”“정말이야?”여희영은 마음속으로 여이현 같은 그룹의 대표가 모든 돈을 온지유에게 맡겼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건 일반적인 가정의 몇백만 원, 몇천만 원이 아니라 수백억, 수천억에 달할 테니 말이다.하지만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아 여희영은 다시 한번 놀랐다.“만약 이태훈이 돈을 다 나한테 맡긴다고 해도 나는 받지 못할 것 같아.”“바보 아니에요? 못 받긴 왜 못 받아요? 그냥 대범하게 받으면 되지. 이태훈이 안 주면 그게 이상한 거예요.”온지유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여이현도 모든 돈을 다 온지유의 명의로 돌린 것은 아니었다. 여이현의 개인적인 자산만 온지유의 손에 있을 뿐 그룹의 자산은 여전히 여이현의 손에 있었다.“이현아,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네가 이러면 다른 남자는 어떻게 살아?”여희영은 이 일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부부는 비록 일심동체라고 해도 자산을 모두 한쪽에 넘기는 건 너무 모험이었기 때문이다.“나는 지유하고 이혼할 생각 없는데. 그럼 돈을 누구에게 맡기겠어.”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그렇지, 여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질투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 알겠지?”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이현의 턱에 얼굴을 비볐다.여희영은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참지 못하고 서둘러 소파에 놓았던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더 이상 방해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태훈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여희영이 떠나자 정색하며 각자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온지유가 운동회에 참가하기로 한 건 여이현의 계략에 빠진 것이다.여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말했다.“그럼 부인께서는 위층에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으시죠. 저는 지금 별이를 불러 준비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어디 가는데?”온지유는 의아해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코끝을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운동회 가야지.”‘학교 운동회를 오늘 한다고?’온지유가 의문을 품고 위층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오자 두 부자는 이미 차에서 온지유를 기다리고 있었다.가는 길 내내 온지유는 자신이 여이현의 계략에 속아 넘어간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온지유는 자진해서 여이현의 함정에 뛰어든 꼴이었다.학교 정문 앞은 차들로 가득했고 여이현은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 해 온지유와 별이를 먼저 학교에 들여보낸 뒤 여이현은 주차를 마치고서는 다시 만나기로 했다.온지유는 별이를 데리고 축구장으로 들어갔다. 신나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더운 날씨에 얼굴을 찌푸린 부모들을 보며 온지유는 마음속으로 왜 이런 운동회를 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동회를 하는 건 괜찮아도 왜 굳이 부모들까지 참가 해야 하는지 정말 짜증이 났다.‘학교에 다니는 건 아이들의 일인데 왜 부모가 참가해야 하는 거야?’온지유가 불쾌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떤 부모들은 흥분한 얼굴로 선생님 옆에서 이번 운동회가 얼마나 의미 있는지 떠들고 있었다. 온지유는 이를 듣기만 해도 가식적으로 느껴졌다.‘의미가 있다고? 그럼 왜 저렇게 꽁꽁 전신 무장을 하고 온 거야? 다른 사람이 타도 되고 자기는 타면 안 된다는 건가?’“저기... 혹시 별이네 아줌마세요?”방금 운동회가 의미 있다고 말하던 한 어머니가 다가와 온지유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별이네 아버지는 사업하신다고 들었어요.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네요. 사업하는 가문에서 고용한 도우미가 이렇게 꾸미나요?”“그럼 어떻게 꾸며야 하는데요? 그쪽처럼 입어야 하나요?”온지유는 마침 화풀이할 상대를
유인영은 주의 사항이 적힌 종이를 온지유의 얼굴 앞에 뿌렸고 자칫 잘못하면 눈에 닿을 정도였다.온지유는 이에 화를 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말하세요.”유인영은 낮은 목소리로 비웃음을 날렸다.“주의 사항을 확인하시라고요. 그리고 뒷면에는 오늘 점심에 준비할 요리가 적혀 있어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맛으로 준비하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쪽 요리를 먹지 않을 거고 그쪽 아들이 오늘 운동회에서 따낸 성적도 전부 무효화될 거예요.”“제 요리가 맛이 없는 게 제 아들과 무슨 상관이죠? 저를 벌하면 벌했지 왜 아이까지 피해를 주려는 건가요?”온지유는 운동회에 참가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이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만약 정말 아무도 온지유의 요리를 먹지 않는다면 별이까지 힘들게 할 수 있었다.온지유는 얼굴을 찌푸렸다.‘학교에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리 없어. 이건 분명 이 학부모회장이라는 여자가 권력을 남용하는 거야.’이미 와버렸으니 온지유는 준비하라는 대로 따를 생각이었지만 꼭 직접 요리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만약 할 줄 모르는 요리라면 호텔에 주문하면 될 일이었다.온지유는 종이를 당당하게 받아 들고 뒷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그러자 온지유는 너무 놀라서 턱이 빠질 뻔했다.“왜요? 설마 못 하겠다는 건 아니겠죠?”유인영은 온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웃었다.“하지만 당시 같은 아줌마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나는 할 줄 몰라요. 요리 같은 거 해본 적이 없어서요. 다른 엄마들도 마찬가지로 요리는 못할 거예요. 그러니까 점심 준비는 아줌마한테 맡길게요.”“걱정하지 마세요. 문제 해결이 제 전문이거든요. 회장님은 마음 편히 쉬세요.”온지유는 여유롭게 대답했다.“그쪽... 그냥 말로만 큰소리치는 거 아니죠? 이번엔 넘어가 줄게요.”유인영은 돌아갔고 이번에는 다시 온지유에게 찾아와 귀찮게 하지 않았다.운동회가 곧 시작되자 각 반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 일련의 절차를 진행했다. 절차가 끝나고 교장이 신호
총성이 울리자마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별이가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상황을 보니 부상이 가볍지 않은 것 같았다.온지유는 가장 먼저 달려가 별이를 안아 올렸다. 그녀는 별이의 무릎 피부가 크게 까져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엄마, 아파요. 다리가 너무 아파요.”별이는 온지유의 품에 안겨 크게 울기 시작했다.“별이야, 걱정하지 마. 엄마가 지금 당장 의사 아저씨한테 데려다줄게.”온지유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고 가까운 곳에 임시로 설치된 의무실이 있는 걸 발견하고서는 바로 뛰어갔다.선생님과 다른 학부모들도 뒤따라왔고 모두가 별이의 상처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의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아이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밖으로 나가달라고 요청했다. 덕분에 의무실이 조용해지자 온지유는 의사에게 다급히 물었다.“의사 선생님, 뼈에는 이상이 없나요?”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약 뼈에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바로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의사는 다시 검진한 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머님, 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무릎의 상처가 나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겁니다. 그 기간 절대 상처가 물에 닿지 않게 하고 또 손으로 상처를 만지게 하면 안 됩니다.”온지유는 대답한 뒤 진지하게 주의해야 할 점을 적었다.상처 치료를 끝낸 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별이가 작은 목소리로 훌쩍이고 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온지유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위로했다.“별이야, 아프면 그냥 마음껏 울어도 돼. 무서워하지 마. 아프면 울 수밖에 없는 거야. 어른들도 마찬가지고.”“엄마, 그럼 나 울어도 애들이 나를 겁쟁이라고 놀리지 않는 거예요?”“당연히 안 놀리지. 혹시 누가 너를 놀린다고 해도 엄마는 항상 네 편이야. 엄마는 네가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아주 용감하고 강하다고 생각해.”별이는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아픈 걸 참지 않고 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별이가
별이는 온지유가 왜 이러는지 몰라 조용히 물었다.“엄마, 어디 아파요?”온지유는 별이의 작은 얼굴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별이는 정말 다정하네. 엄마를 걱정해 주다니. 근데 엄마는 어디도 안 아파. 그런데 별이 지금 집에 가고 싶어? 아니면 계속 경기를 보고 싶어?”별이는 운동장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작게 말했다.“그래도 여기 남아서 경기를 끝까지 보고 싶어요. 선생님이 순위보다 참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엄마, 나중에 엄마가 요리해야 하지 않아요? 제가 엄마의 조수가 되어 드릴게요.”온지유는 기쁜 마음에 별이의 얼굴에 뽀뽀하며 말했다.“그럼 너무 좋지. 이제 우리 조수 별이에게 맡길게.”“알겠습니다. 엄마의 멋진 조수가 될게요.”별이는 손을 들어 다짐하며 이제는 아픈 다리는 잊은 듯했다.약을 발랐으니 아픔은 점점 사라졌고 별이는 아까의 두려움마저 사라져 예전의 활발한 모습을 되찾았다. 원래 별이도 배구 경기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온지유는 선생님께 별이의 모든 경기를 취소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지유에게 별이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에 어린이 운동회에 지나치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다영아, 화이팅. 다들 우리 다영이를 위해 응원해 주세요.”멀리서 유인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의 부모들은 마지못해 손에 든 작은 깃발을 들어 올리며 힘없이 응원했다.별이는 아주 적극적으로 큰 목소리로 응원했다.“다영아, 힘내. 공을 잘 잡고 앞으로 달려.”멀리 있던 다영이는 별이의 응원 소리에 고개를 들었지만 그 순간 공을 놓쳤고 결국 공은 다른 쪽으로 굴러가게 되었다.다영이는 급히 공을 쫓아갔으나 서두르다가 실수로 공을 밟아 바닥에 넘어져 흙을 뒤집어썼다.“아. 나쁜 공이야. 엄마 빨리 공을 버려. 나 이 공 싫어.”다영이는 바닥에 앉아 뒹굴며 입에 모래가 들어가는 것도 잊고서는 큰 목소리로 울었다.유인영은 곧 달려가 다영이를 달래며 공을 탓하기 시작했다.이를 지켜보던 몇몇 학부모들은 유인영의 교육 방식에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
“우리 집 아줌마가 아니라 우리 엄마예요.”별이는 화가 나서 유인영의 다리를 주먹으로 때렸고 유인영은 화가 나서 발로 별이를 차서 넘어뜨렸다. 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억울하게 유인영을 쳐다보았다.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져 온지유가 반응하기도 전에 별이는 이미 넘어져 있었다. 온지유는 별이를 품에 안고 다시 일어나 차가운 눈빛으로 유인영을 노려봤다.유인영은 겁에 질려 두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내가 힘을 준 것도 아니고 아이가 저절로 넘어진 거야.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어.”“유인영 씨라고 했죠? 기억할게요. 만약 내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변호사를 통해 연락할 거예요. 그쪽 남편이 대기업 본부장이라면서요? 돈도 많을 텐데, 의료비 같은 걸로 시간 끌지 않길 바랄게요.”온지유는 원래 유인영과 엮이고 싶지 않았지만 상대방이 기어코 나대고 싶다면 맞장구를 쳐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별이를 발로 찬 것은 선을 넘은 일이었다.‘여기서 계속 참으면 내가 온지유가 아니지.’온지유의 차가운 태도에 유인영은 물론 주변의 부모들도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온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안고서는 휴식 구역으로 돌아갔다.경기는 계속해서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경기에서 이긴 아이들은 환호했고 진 아이들은 울며 투정을 부렸다. 그렇게 오전 경기가 끝날 무렵 여이현에게서 회사에 급한 상황이 생겨 먼저 회사에 왔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온지유는 전화를 걸어 따지지 않았고 레스토랑에 연락해 점심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굳이 온지유가 직접 요리를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선생님이 점심 식사를 유인영에게 맡긴 것만 봐도 딱히 실상에 신경을 쓰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맛있는 식사를 즐기게 해주는 편이 나을 듯했다.오전 경기가 끝났다는 방송이 나오자 부모들은 각자의 휴식 구역으로 돌아갔다. 다른 학급 부모들은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반면 별이네 반 부모들은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보며 그냥 느긋하게 점심
이 소동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그들의 제복이 경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제복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학교의 재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대단한 셰프를 그가 무슨 수로 불러올 수 있을까. 부모님들 중 누군가가 준비한 서프라이즈인게 분명했다.“사모님, 말씀하신 대로 최고급 뷔페 요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어디에 차려두면 될까요?”호텔 매니저가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와 말하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유인영은 더구나 얼굴을 붉히며 안절부절못했다.“이 호텔 요리는 일반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닐 텐데 돈도 얼마 없어 보이는 분이 어떻게 부르셨을까?”“그러게요. 조금 전 학부모 모임 회장이랑 분쟁이 있었나 본데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는 걸로밖에 안 보이네요.”누가 뒷담화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은 유인영은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온지유에게로 다가갔다.온지유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유인영은 이미 비아냥거리고 있었다.“정말 최고급 요리인지 제가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아무 요리나 최고급 타이틀을 붙이는 건 용납할 수 없거든요.”보관함을 열자 안의 요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고기찜이었다.요리의 향긋한 냄새가 퍼져오자 관중들은 감탄을 금치못했다.온지유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유인영 씨, 어떠세요? 이 정도면 최고급 요리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유인영은 모두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표정이 일그러졌다.“향은 괜찮네요. 맛은 어떨지 모르겠지만.”“맛이 어떨지는 식사가 시작되면 아시겠죠. 지금 설마 모두가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시는 건 아니겠죠?”온지유는 이 상황이 오기를 기다렸었다. 그녀는 유인영이 절벽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단번에 밀어내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유인영은 당장 자리에서 비키고 요리가 식탁 위에 올려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온지유가 정말 거금을 들여 뷔페를 준비했을까 봐 가슴을 졸였다.최고급 요리가 아니더
온지유가 준비한 요리는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이번 일로 그녀는 단번에 학교의 유명인이 되었다.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녀는 이미 돈 많은 엄마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유인영에 쏠렸던 관심은 줄어들었고 이는 유인영의 반발심을 사게 되었다.오후의 운동회에는 별이가 상한 탓에 점심을 먹고 난 뒤 조퇴해서 집으로 돌아왔다.집에 도착하자 유인영의 그룹 채팅 요청이 와있었다. 반급의 모든 어머니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강조하기까지 했다. 목적은 이후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교류라고 하지만 온지유는 참여하지 않았다.유치원의 그룹채팅은 그다지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별이가 잠들고 온지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여이현은 이미 통화 중이었다.오늘 운동회에서의 여러 사건들을 떠올린 온지유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억압 되어있던 화를 어떻게든 분출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려 확인하자 유인영이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온지유는 그녀에게 전혀 호감이 들지 않았다. 바로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호기심 끝에 온지유는 전화를 받았다.“별이 어머니, 왜 그룹채팅에 안 들어오신 거예요?”“어머, 그 일이라면 전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안 들어간 거예요. 왜 그러세요? 따로 할 말이 없으시다면 이만 끊을게요. 지금 조금 바빠서요.”온지유는 쓸모없는 대화에 흥미가 없었다.그러나 상대방은 급히 온지유를 말렸다. 몇 번이고 온지유를 불러 멈추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다름 아니라 제가 다른 부모님들이랑 시내 쇼핑몰에서 보기로 했거든요. 어쩌다 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인데 하루 정도는 재밌게 놀아보면 어떨까 해서요.”“전 사양할게요. 모두 좋은 시간 보내세요.”“그러지 마시고, 별이 엄마도 한 번만 와보세요. 유치원에서 인맥을 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별이도 초등학교, 중학교로 진학할 거잖아요. 또 보게 될지 누가 알아요.”유인영은 온지유를 불러낼 생각뿐이었다.온지유는 하는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