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김태훈 씨랑 한번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너랑 김태훈 씨, 나름대로 친분이 있잖아?”윤신재의 말에 지현승이 고개를 갸웃했다.“할 수야 있지. 근데 김태훈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진 않은데.”그날 연미혜가 파트너를 바꾸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표정을 떠올려보니, 연미혜와 김태훈이 단순한 연인 사이는 아닌 듯했다.하지만 분명한 건, 김태훈이 연미혜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점이었다.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나서서 염성민과 김태훈 사이의 갈등을 풀어준다고 해서, 김태훈이 곧바로 협력하겠다고 나올 리도 없었다.“그럼
더군다나 연미혜와 염성민의 사이는 원수라 부를 정도도 아니었다.이번 일에서 연미혜가 잘못한 건 없었고 그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하지만 이제 염용석이 직접 나선다면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다만...’그때, 염용석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혜야, 급히 결정할 필요 없어. 충분히 생각한 후에 답해도 괜찮아.”“네.”염용석이 다시 덧붙였다.“그리고 성민이에 대해서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 체면을 세워주려고 무리할 필요 없어.”연미혜가 담담하게 답했다.“알겠습니다.”그 솔직한 반응에 염용석이 미
연미혜의 담담한 표정은 마치 처음부터 이 협력이 성사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염성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김태훈이 미리 이야기해 둔 것이라 여겼다.그는 무심하게 말했다.“잘 부탁드립니다.”식당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후, 연미혜와 김태훈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염성민의 시야에 맞은편에서 들어오는 경민준과 임지유가 들어왔다.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경 대표님, 지유 씨, 여기서 뵙네요.”경민준과 임지유도 그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염 대표님, 김 대표님, 잘 지내셨나요...
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김태훈은 그저 염성민을 약 올릴 셈이었다.실제로 이 정도 식사 비용은 셋 중 누구에게도 부담이 되는 금액은 아니었다.식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본격적으로 협력 관련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연미혜는 조용히 식사를 하며 꼭 필요한 순간에만 간단히 의견을 보탰다. 그 외엔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따금 그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 때마다 그 내용은 꽤 건설적이었다.그 점을 눈치챈 염성민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으로 연미혜를 바라봤다.‘생각보다... 실력이 있었네.’그는 처
연미혜가 다시 룸으로 돌아온 후, 한참이 지나서야 염성민이 돌아왔다.식사가 마무리된 후, 그들은 식당을 나섰다.염성민은 회사로 돌아가 자료를 정리했고 연미혜와 김태훈은 넥스 그룹으로 복귀했다.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하승태가 염성민과 거의 같은 시간에 넥스 그룹에 도착했다.세인티에서 자율주행 차량 테스트가 있었을 때, 함께 식사한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은 마주치자마자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도 넥스 그룹과의 협력을 확정하셨습니까?”“네. 염 대표님도 계약 준비 중이신가 보군요.”“맞습니다.”하승태는 조
얼마 지나지 않아 경민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는 휴대폰을 확인한 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받았다.“그래. 알겠어.”“저희가 계속 보관해 둘까요?”“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상대방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와 함께 식사하던 임지유가 물었다.“민준 씨, 회사에 볼일 있어?”경민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답했다.“아니야. 경매장에서 온 전화야.”임지유가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경다솜이 끼어들었다.“경매장이 뭔데요?”경민준은 식기를 들고 고기를 잘라 한 조각 먹으며 대답
‘경민준이 지유 씨를 향한 마음은 의심할 필요도 없어. 그러니 그 장면은 단순한 오해였을 가능성이 커!’...금요일 아침, 연미혜가 막 일어나자마자 허미숙의 전화가 걸려 왔고, 일요일 아침에 함께 지관식의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했다.허미숙은 동양화의 거장인 지 화백, 지관식의 열렬한 팬이었다.지관식이 마지막으로 개인 전시회를 연 건 십여 년 전이었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기회였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네. 일요일에 같이 가요.”전화를 막 끊자마자, 이번엔 경다솜에게서 전화가 왔다.월요일, 학교에서 열린
연미혜는 허미숙의 팔을 꼭 붙잡았고, 허미숙은 담담하게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괜찮아.”그들이 허미숙이 올 걸 알고 있었다면 허미숙도 그들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김태훈이 말했다.“할머니, 제가 먼저 들어가서 화백님을 찾아뵙겠습니다. 미혜야, 할머니를 모시고 같이 가자.”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허미숙을 지관식에게 소개해, 그녀가 우상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만들려는 것이었다.하지만 허미숙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렇게 많은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야. 괜히 폐를 끼치고 싶진
김태훈의 변호사는 지난주 세인티와의 계약 해지를 논의하기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았지만, 결국 협의는 결렬되었고 넥스 그룹은 그날 바로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그 무렵 연미혜와 임지유 사이에 세인티에서 벌어진 마찰은 업계에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고, 당시 김태훈은 지방 출장을 떠나 있었기에 자리에 없었다.김태훈과 아직 직접 대면하지 못했기에, 임지유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보였다.월요일 아침, 출근한 연미혜는 회사 1층에서 다시 임지유와 마주쳤다.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순간, 눈길만 짧게 마주치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
경다솜에게 있어서 연미혜와 경민준, 임지유, 이 셋은 절대 한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경다솜이 말한 건 ‘엄마도 같이 가줘요’가 아니라 ‘엄마가 저랑 같이 가주세요’였다.그 한 문장에 담긴 경다솜의 마음을 연미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경다솜의 펜싱 대회는 다음 주말로 예정돼 있었다.통상적으로 연미혜에게도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고 무엇보다 아이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으니, 예전 같았으면, 당연히 가장 먼저 그 자리에 함께하려 했을 것이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연미혜는
코치는 끝내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연미혜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사실 코치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경다솜이 펜싱을 배우게 된 건 아마 경민준이나 임지유의 영향일 거라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그 사실에 대해 연미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이미 양육권을 포기한 입장에서, 아이의 미래에 자신이 얼마나 개입할 수 있을지 잘 알고 있었고, 어쩌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는 더 멀어질 거란 것도 받아들이고 있었다.그렇다고 해도 경다솜은 그녀가 열 달 동안 뱃속에 품었던 아이였기에, 언젠가 거리가 더
경다솜과의 통화를 마친 지 십여 분쯤 지났을 무렵, 경민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내일 경다솜이 훈련받을 장소와 시간을 문자로 보내왔던 것이었다.하지만 문자에는 필요한 정보만 짧게 적혀 있을 뿐, 다른 말은 단 한 마디도 덧붙여져 있지 않았다.다음 날, 연미혜가 펜싱장에 도착한 지 5분쯤 지났을 무렵, 경다솜 도착했다.차에는 경다솜과 기사만 타고 있었고, 경민준은 함께 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린 경다솜은 반갑게 웃으며 연미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연미혜의 손을 꼭 잡고는 힘차게 말했다.“엄마, 같이 가요!”그러고는 연미혜
연미혜가 사무실에 막 돌아오자마자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는 경다솜이었다.조금 전 회의실에서 경민준이 식사를 제안했던 그 의도를 떠올리며, 연미혜는 경다솜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하지만 경다솜은 포기하지 않고 연이어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고, 끝내 통화가 되지 않자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엄마, 나 다음 달에 펜싱 대회 나가야 돼요. 내일 펜싱 연습이 있는데, 같이 가줄 수 있어요?]그 문자를 본 연미혜는 손에 든 휴대폰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경민준을 따라 경다솜을
하승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연미혜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별거 아닙니다.”오전 일정을 마친 후, 오후에는 김태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방금 변호사한테 연락이 왔어. 임지유 쪽에서 아직도 계약 해지는 못 받아들이겠다고 했대. 대신 명예 훼손에 대한 배상금은 꽤 크게 제시했더라고. 근데 그건 내가 거절했어. 협상이 더 이상 의미 없다고 판단해서, 그냥 법적으로 절차 밟기로 했어.”연미혜는 짧게 응답했다.“네. 알겠습니다. 수고했어요.”잠시 뜸을 들인 김태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출장 중이었구나...’임지유가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구진원이 담담하게 물었다.“나한테 다른 볼일 있어?”임지유는 고개를 저은 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건넸다.“넥스 그룹에서 일하게 된 지도 꽤 됐지? 잘 적응하고 있어? 어려운 점은 없고?”“난 잘 지내.”구진원이 짧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다른 일 없으시면, 난 먼저 올라가 볼게. 출근 시간이라...”그 말과 함께 구진원은 인사도 없이 곧장 등을 돌려 걸어갔다.머뭇거림 없이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지유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그녀는 예전에 구
손아림은 눈이 동그래진 채 얼어붙었다.경민준이 직접 나섰음에도 해결되지 않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손아림은 다급히 말했다.“전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그날 일은 그냥... 그냥 소소한 해프닝 아니었나요? 그걸로 진짜 계약 해지를 걸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임지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세인티가 넥스 그룹이랑 계약할 때 쓴 계약서는 변호사를 통해서 다시 확인했어. 거기에 빼도 박도 못하게 명시돼 있었어. 어느 한쪽이 상대방의 명예를 훼손했을 경우, 피해자 측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고...”손아림은 납득이 되지
“몇 분 전에 저한테 먼저 전화 왔었어요.”김태훈이 코웃음을 쳤다.“비겁한 자식, 역시 너한테 먼저 연락했었구나...”임지유가 경민준에게 도움을 청했을 가능성, 그리고 그 일로 연씨 가문까지 건드릴 수도 있다는 건 김태훈과 연미혜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반대로 경민준도 그들이 넥스 그룹과 경문 그룹의 협력 프로젝트를 카드로 꺼낼 거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연미혜에게 연락해 틈을 보려 했지만 연미혜가 전혀 여지를 주지 않자 방향을 바꿔 김태훈을 택한 거였다.애초에 이 문제를 김태훈이 직접 나선 것도, 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