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를 보는 임지유의 눈빛에는 영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과의 대상이 연미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인 것이 분명한 눈빛이었다. 염성민은 애초에 연미혜에게 관심이 없었던지라 당연히 이런 임지유의 눈빛을 발견할 리가 없었다.“고작 몇 분만 늦었는데 뭘요. 괜찮아요.”“염 대표님은 역시 너그러우세요.”김태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갑게 말했다.“왔으니 이제 더는 우리 시간을 낭비하지는 말죠. 얼른 시작하세요.”경민준은 정중하게 말했다.“늦은 저희 탓이에요. 김 대표님, 얼른 들어가시죠.”김태훈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연
세인티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을 때도 김태훈은 잔뜩 씩씩대고 있었다. 그러다가 뭔가가 떠올랐는지 연미혜에게 물었다.“참, 임지유 뒤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여자는 누구야? 걔도 널 보는 눈빛이 만만치 않던데. 아는 사람이야?”“임지유 사촌 동생이에요.”“...”김태훈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경민준이 임지유를 세인티로 데리고 온 건 그렇다 쳐. 그런데 임지유 사촌까지 세인티로 끌어들이는 거야? 하, 참나. 곧 있으면 세인티가 임지유로 개명하겠다? 쯧.”연미혜도 경민준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러게
“네. 알겠어요.”토요일 아침, 연미혜는 대충 아침을 먹고 연창훈에게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오후 두 시가 넘어서 그녀는 차를 타고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도착했을 때 하승태와 수연이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하승태가 불러온 사람들이 텐트를 치고 바비큐 그릴도 세우고 있었다. 며칠 동안 눈이 내렸던지라 캠핑장엔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그녀를 발견한 수연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예전에 그녀는 자주 경다솜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지라 눈사람을
하늘은 완전히 까맣게 되었고 산속이었던지라 추위도 점점 더 심하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하승태는 몸을 돌려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연미혜와 수연을 보고는 텐트에서 두꺼운 겉옷을 두 개 꺼내왔다.그중 큰 옷을 연미혜에게 건네자 연미혜가 말했다.“전 안 추워요.”“그래도 덮고 있어요.”그는 옷을 펼쳐 연미혜의 어깨에 둘러주었고 이내 작은 옷을 수연에게 입혀주었다. 연미혜는 확실히 별로 춥지 않았지만 옷을 덮으니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어 따듯했던지라 더는 거절하지 않았다. 바비큐 파티가 끝나고 캠프파
남의 차를 탄 연미혜는 몇 분간 졸게 되었지만 편하게 잠들지는 못했다. 눈을 뜨자 눈앞에서 사라지는 하승태의 손을 보았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도착했어요?”“네.”2분 뒤 차는 병원 입구에 멈춰서고 하승태는 수연을 안고 차에서 내려 연미혜에게 말했다.“운전 기사님 붙여드릴까요?”연미혜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제가 운전해서 가면 돼요.”하승태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집에 거의 도착하고 있을 때쯤 핸드폰이 울렸고 경민준이 보낸 문자가 화면에 떴다.[할머니께서 이따가 네 외할머님을 만나러 가시겠다고 하셨
경민준은 연미혜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경다솜의 콧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아빠는 일이 있어서 못 가니까 엄마 말 잘 들어. 알았지?”“네.”경다솜은 결국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보더니 곁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어 손잡아달라고 했다. 먼저 화해하자는 의미기도 했다.아이의 손을 잡은 연미혜는 집사와 인사를 한 후 집을 나섰다. 연씨 가문으로 도착했을 때 노현숙은 이미 한참 전에 와 있었다. 두 사람을 본 노현숙은 경민준이 보이지 않자 바로 표정이 굳어졌다.“민준이는? 또 바쁘다고 하든?”“네.
연미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통화가 끝나고 나니 그녀는 또 재채기하게 되었다.그녀의 외숙모 하여진은 그녀가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던지라 주방으로 들어가 생강차를 끓여주었지만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더 머리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들고 말았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이마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고열에 시달리게 된 그녀는 머리가 너무도 어지럽고 무거웠다. 경다솜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조금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엄마, 아파요?”“응.”노현숙도 그녀가 걱정되었는지 그녀에게
이혼서류에 연미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작성했다. 이혼 위자료는 물론이고 경다솜의 양육권 문제도 깔끔하게 포기하면 이혼이 빠르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혼서류를 남겨놓고 귀국한 지 3개월 정도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연미혜는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물어보려던 순간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와 경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형수님, 아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요?”연미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경민준이 대답했다.“들어와.”조금 전 방에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던지라 문을 닫지 않았었다. 경민준의 목소리를 들은 경준혁은
놀란 것도 잠시, 염성민은 이 자리에 김태훈과 유명욱까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보고 고개가 끄덕여졌다.‘유 교수님 정도 인맥이면... 연미혜가 이 자리에 있어도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지.’그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염용석 역시 아들과 이 자리에서 마주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물었다.“성민아, 고객 만나러 온 거야?”“네. 아버지.”그 대화를 들은 한명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용석아... 이 청년이 네 아들이야?”염용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내 아들 녀석이야. 이렇게 우연히 얼굴을 보여주게 됐
임지유는 이제 세인티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고, 방금까지 자리에 없던 건 경민준 일행과 회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지유 언니!”손아림이 반갑게 달려와 임지유 옆에 붙었다. 그러곤 슬쩍 연미혜를 흘끗 바라본 뒤, 두 사람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연미혜가 꽃 받았다고 아까는 으쓱대더니, 언니한테 꽃이랑 선물 잔뜩 왔단 얘기, 거기다 형부가 지분까지 넘겼단 말 듣고는 완전 말문이 막혔지 뭐야.”임지유는 특별한 반응 없이 조용히 연미혜 쪽을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 묘한 여유가 스쳤다.손아림은
세인티로 향하던 차 안에서 연미혜의 휴대폰이 울렸다. 노현숙이 걸어온 전화였다.전화를 받자 익숙하고도 정겨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미혜야... 잘 지내지?”“그럼요. 할머니도 잘 계시죠?”“며칠 전에 다솜이가 그러더라. 너 요즘 일 많아서 밤샘도 한다고...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선물 받은 보약 좀 챙겨놨어. 곧 도착할 테니까 꼭 챙겨 먹어. 알겠지?”연미혜는 설령 거절해도, 노현숙은 끝까지 밀어붙일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더는 사양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감사해요. 할머니, 꼭
그날 저녁, 일정이 있었던 하승태는 공적인 이야기를 마친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회의실을 나서기 전, 그는 연미혜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 시선을 느낀 연미혜가 고개를 들었다.“하 대표님, 혹시 더 하실 말씀이라도...”내일이 발렌타인데이라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연미혜는 지금 온통 일에만 집중해 있었고, 발렌타인데이 같은 기념일은 아예 잊고 지내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연미혜는 늘 그렇듯 조금 이른 시간에 출근했다.회사에 도착해 사무실 쪽으로 향하던 중, 동료
연미혜는 차에서 내린 후 차 문을 닫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경민준의 손에 들린 우산을 가져가며 차분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경민준은 시선을 내리더니 그녀의 발을 훑어보며 조용히 물었다.“발은 괜찮아?”‘좀 아프지만 걸을 수는 있어.’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고, 오늘 경민준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그저 우산을 펼치며 담담히 말했다.“이혼 절차는 어떻게 되어가? 정리되면 그때 연락해.”그 말은 곧 이혼에 관련된 일 외엔 연락하지 말라는
연미혜는 얼굴빛이 살짝 굳었다.“이러지 말고... 나 좀 내려놔.”그러나 경민준은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우산 단단히 잡아.”그는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연미혜를 그대로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한마디 남겼다.“먼저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따로 뵙죠.”경민준과 안면이 있는 몇몇 기업 대표들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모두가 알다시피, 연미혜와 김태훈의 관계는 넥스 그룹 안팎에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이였다.게다가 오늘처럼 정부 주최 간담회에 김태훈 대신 연미혜가 공식 대표로 참
염성민은 오늘 있었던 일을 지현승에게 간단히 전했다.곧 지현승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지랑 할아버지는 미혜 씨하고 미혜 씨 외할머님에 대해 인상이 꽤 좋으셨어. 아마 그래서일 거야.]지현승의 말대로라면 지철호가 연미혜를 신경 쓰는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지만 염성민은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아무리 좋은 첫인상이었다 해도, 겨우 한두 번 본 사이에 그 정도로 각별할 수 있을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현승에게 더 따져 묻는 건 의미 없었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오늘 오후부터 비가 내릴 거라고 했
간담회가 끝난 뒤, 정부 측에서 참석한 기업 대표들에게 준비한 오찬 자리가 이어졌다.연미혜는 조용히 짐을 챙겨 일어났고, 경민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뒤따라 나왔다.회의실을 나서던 중, 염성민은 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지철호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지씨 가문과 염씨 가문은 원래부터 교류가 있는 편이었고, 염성민과 지철호 역시 자주 마주치는 사이였다.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연미혜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 지철호에게 고개를 숙였다.“장관님, 안녕하세요.”지철호는 눈가에 미소를
퇴근 후, 연미혜와 김태훈이 유명욱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가던 유명욱은 두 사람이 들어서는 걸 보고 전화를 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이번 연구 내용은 꽤 인상 깊었어.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 이번 기회에 소개해 줄게.”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이번 연구는 국가 연구 과제로 정식 채택되었고, 이후의 행정적 절차나 관련 사항도 그 자리에서 간단히 조율되었다. 두 사람은 유명욱에게 남은 질문들을 이어가며 늦게까지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