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는 유명욱 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하지만 그는 허미숙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아직 연미혜에게 눈길을 줄 틈이 없었다.연미혜는 고개를 살짝 돌려 김태훈에게 속삭였다.“고마워요.”유명욱이 온 뒤, 외할머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 걸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김태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교수님께서 네가 최근에 제안했던 프로젝트 구상 보고 연락해 주셨어. 그 타이밍에 얘기 꺼냈더니 직접 오신 거지. 그러니까 결국 널 보고 온 거야.”연미혜가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누군가가 작게
“맞아.”손아림은 콧소리를 내며 비웃었다.“진짜 뻔뻔하다니까.”그러곤 또 툴툴거리듯 말했다.“그런 대단한 인물이 그 늙은이 칠순 잔치에 갔다고? 원래 그렇게 친한 사이였어?”“아니.”임지유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서로 겨우 안면 정도 있는 사이야.”임지유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연미혜는 어디까지나 김태훈 덕분에 유명욱과 연결됐을 뿐이야! 오늘 유명욱이 연씨 가문에 나타난 것도, 결국 김태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그럼 다행이네.”그때, 임지유 뒷자리 근처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하승태가 흠칫했다. 누군가
경민준이 연씨 가문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임지유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허미숙과 노현숙, 두 사람은 오래된 지기였다.노현숙이 직접 참석하진 못해도, 경민준에게 대신 다녀오라고 했을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었다.아무리 명분이 있다 해도 함께 준비한 중요한 자리에, 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내심 불쾌했다.게다가 현장 분위기까지 묘하게 흐르자, 임지유는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경씨 가문 어르신과 연씨 가문 어르신이 예전부터 인연이 깊으세요. 민준 씨는 할머
이후 두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연미혜의 사촌 동생들은 예전에도 경민준을 만난 적 별로 없었기에 실물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조금 궁금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경민준은 늘 상위포식자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었던지라 아무리 아무런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고 해도 그의 사소한 행동에서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경민준을 힐끗 보자 경민준도 시선을 돌려 그들을 보았다.감히 눈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은 그들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휙 피해버렸고 더는 경민준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경민준도 딱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유명욱은 흔쾌히 대답했다.“그래요.”고개를 끄덕인 경민준은 다시 연미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이따가 집으로 갈 거지?”연미혜는 아직도 경민준과 유명욱이 나눴던 대화를 머릿속에 되새기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말 걸어온 경민준을 보며 멈칫하다가 대답했다.“안 가.”경민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알았어. 다솜이는 내가 이따가 데리러 갈게.”이곳을 떠나려는 게 분명한 그의 말에 연미혜는 차갑게 말했다.“어.”경민준은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허미숙의 앞으로 다가갔다.“할머니, 전 다른 일도 있어
경다솜은 연미혜의 목에 팔을 꼭 두르고 추위를 피해 작은 얼굴을 목덜미에 파묻었다. 연미혜의 옷은 부드럽고 따듯해 경다솜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비비적거리고 싶었다.경민준은 시간을 아주 철저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연미혜가 경다솜을 안은 채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마침 경민준의 차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왔고 연미혜 앞에 멈춰 섰다.차가 멈춰 섰지만 경다솜은 연미혜의 품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열린 창문으로 차 안에 있는 경민준을 향해 애교를 부렸다.“아빠, 안아주세요.”경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려 경다솜을
아마도 연미혜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하승태가 말했다.“약속할 수 있어요. 절대 사적인 일로 미혜 씨 외삼촌 일을 들먹거리며 이용하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연미혜가 입을 열었다.“정말이에요?”“네. 정말이에요.”연미혜는 연창훈의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라 조금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네. 그럼 그럴게요.”“그럼 시간 될 때 저한테 연락해주세요. 제가 약속 시간이랑 장소를 정할게요.”“알겠어요.”연미혜가 말을 마치자 하승태는 서늘한 밤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보
점심이 되어서야 쉴 틈이 생겨 점심도 먹게 되었다. 이때 연미혜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후에 함께 스키 타러 가지 않겠냐는 차예련의 문자였고 문자를 작성하기 귀찮았던 연미혜는 음성으로 메시지를 보냈다.“나 오늘은 안 돼. 바빠서 못 가니까 너 혼자 가.”차예련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알았어.]그날 오후 연미혜는 유명욱의 서재에서 나와 물 한 잔 마시고 있을 때쯤 또 차예련의 문자를 받게 되었다. 이번에 받은 것은 사진 몇 장이었다. 사진 속에는 경민준과 임지유, 경다솜, 그리고 하승태와 수연이, 총 다섯 명이 찍혀 있었고 이
월요일 아침, 연미혜가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AI 학술지에서 그녀의 논문이 정식 게재 승인되었다는 메일이 도착했다.잠시 후, 김태훈이 업무 관련해서 찾아왔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논문 게재 승인되었어요.”“난 예상했어.”그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유명욱 교수가 검토하고 좋다고 한 논문이라면 당연히 통과됐을 거라 믿고 있었다.업무 이야기를 마무리하던 연미혜가 시계를 흘끗 보며 물었다.“점심 같이 드실래요?”김태훈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오늘은 안돼. 약속 있어.”“무슨 약속이요?”“소개팅.
연미혜는 김태훈의 말을 듣고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김태훈은 이력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력서는 깔끔하게 잘 만들었네. 실력은 어때?”“수준급이었어요. 인공지능 쪽에 입문한 지는 2년도 안 됐는데, 이미 대부분 박사급 개발자보다 뛰어나요.”“오... 그 정도야?”김태훈은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진짜 타고났네. 마음에 들어?”“후보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며칠 못 가고 훌쩍 떠날까 봐 걱정이지?”“맞아요...”물론 CUAP이든 Infinite-CM이든, 구진원은 정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게
“봐야죠. 면접 끝까지 봐야죠.”그는 능청스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구진원입니다. 진실의 진, 원할 원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연미혜는 간단히 악수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이력서 봤어요.”연미혜는 이력서에서 눈을 떼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이제부터 제가 구진원 씨를 면접해 보는 건가요? 아니면 계속해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인가요?”그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전 뭐, 둘 다 괜찮습니다.”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알고리즘에 강점을 둔다고 했다.연미혜는 그가 데이터 정제, 특성 엔지니어링, 하이퍼파라미터
경민준이 말을 이었다.“할머니한테 네가 직접 말씀드릴래?”연미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할머니는 내가 무일푼으로 이혼하는 걸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연미혜는 되물었다.“그러면 협의서 내용을 안 건드리면 이혼 절차는 언제쯤 마무리될 것 같아?”“올해 안엔 가능할 거야.”이제 갓 3월이 시작됐으니, 연말까지는 아직 한참 많이 남아있었다. 차분히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은 아니었다.“우리 이혼에 대해 또 궁금한 거 있어?”연미혜는 대답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통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배지호는 연미혜의 말에 흠칫 놀랐다.“진짜 전부 포기하실 거예요?”배지호는 한동안 침묵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경민준이 연미혜에게 약속한 이혼 합의 재산은 그녀가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큰 금액이었다.그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겠다는 말에, 배지호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연미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네. 확실해요.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애초에 그의 재산에 욕심을 낸 적이 없었다. 경민준이 뭘 주든 안 주든, 받아도 미련 없고 안 받아도 아쉬울 게 없었다.‘다만...’예전에 노현숙이 갑
연미혜, 김태훈과 전현재, 세 사람은 따로 소통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었다.오늘 벌어진 일은 워낙 충격적인 데다 화제성도 커서, 전현재는 특유의 ‘소문 레이더’ 본능을 억누르지 못한 채 가장 먼저 그 내용을 공유했다.임지유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줄을 서 있는지, 그 남자들이 그녀를 두고 얼마나 광기를 부리는지 일일이 ‘브리핑’했다.하지만 연미혜와 김태훈은 그 얘기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오후, 전현재는 또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참, 아까 경 대표님 딸이 회사에 와서 임 이사님을 찾아왔었어요. 전에 임 이사님이 다솜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