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연미혜는 누군가 인사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임지유와 시선이 맞닥뜨렸다.입가에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고 있던 임지유는 연미혜를 발견하는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이내 눈길을 피하고 그녀를 무시한 채 김태훈을 향해 웃으면서 말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김태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연미혜를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미혜야, 임지유 씨랑 인사 나눌래?”그의 말에 세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다.첫째는 연미혜와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둘째는 두 여자의 원한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셋째는 바로 입장
김태훈이 말했다.“그래서요?”“이런 사람은 원래 상류층에 얼씬거리지도 못하죠. 경씨 가문을 비롯한 재벌가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임지유 씨는 손쉽게 상위 그룹에 합류했을뿐더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정말 대단하지 않아요? 경민준이 제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해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임지유 씨에게 지인을 소개해주기 위해서였죠. 경민준이 직접 나서서 인맥 관리할 정도라니, 게다가 하승태까지 데려온 이상 임지유 씨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죠. 그저 데리고 놀다가 버리는 정도에 불과하다면 이렇게까지 안 하겠죠
이때, 문밖에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경민준이 돌아왔다.“아빠!”“솜아.”경민준이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로 걸어갔다.연미혜는 경다솜을 내려놓고 경민준에게 자리를 내주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품에 안긴 채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경민준이 다가와서 경다솜을 안아 올렸다.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에 불과했고 그의 몸에서 익숙한 남자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하지만 낯익은 향기를 뚫고 은은한 여자 향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다름 아닌 오늘 저녁 연회에서 맡았던 임지유의 향수 냄새였다.연미혜는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서 나온 연미혜는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 경민준을 발견했다.경민준은 그녀를 흘긋 쳐다보더니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연미혜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예전 같았으면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다가가서 옆에 앉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었다.이내 뒤돌아서 계단을 올라갔고 경민준도 침묵으로 일관했다.연미혜는 의혹을 감추지 못했다.김태훈과 한 편이 되어 임지유에게 굴욕을 안겨준 일 때문에 잘못을 추궁할 거로 생각했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2층에 도착하
경다솜은 욕실을 바라보는 경민준을 향해 말했다.“안에 엄마 있어요.”“그래?”경민준이 되물었다.“네가 엄마한테 방에서 샤워하라고 했어?”“아니요. 엄마가 잠옷을 들고 왔던데요?”경민준은 더는 묻지 않고 딸아이와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일찍 쉬라고 당부하고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욕실에 있던 연미혜는 인기척을 느끼고 경민준이 왔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아직 감기 기운이 남은 경다솜은 약을 먹자 졸음이 몰려왔다. 시간도 늦었는지라 연미혜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같이 누웠다.경다솜이
연미혜는 아무 말 없이 방아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모가 데려다줬다고 솜이한테 얘기하면 안 돼, 알겠지?”방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물론이죠.”지난번에 연미혜를 끌어안았다는 이유로 경다솜이 노발대발한 적이 있었기에 지레 겁을 먹고 평소 대화도 잘 나누지 않았다.게다가 아직도 화가 덜 풀렸는지 매번 뾰로통해서 그녀를 째려보았다.경민준과 임지유, 경다솜은 행복한 세 식구의 모습이 따로 없었다.연미혜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셋이야말로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생각이 스쳤다.이내 시선을 돌렸다.잠시 후 경민준과 임지유가 떠
연미혜를 본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누군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벌떡 일어나 물었다.“대표님, 이 분이 새로 입사한 직원인가요?”“소문이 빠르네요.”김태훈이 웃으면서 소개를 이어갔다.“이름은 연미혜, 우리 회사의...”하지만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정혁이 불쑥 끼어들었다.“대표님, 제 후배를 내친 이유가 이 여자 때문인가요?”김태훈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왜 그런지는 나중에 설명을...”신정혁은 그의 말은 안중에도 없는 채 연미혜를 바라보며 말했다.“제 후배는 올해 25살에 불과하지만 세계 랭
“괜찮아요. 넥스 그룹에 다시 지원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신정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연미혜도 능력자를 높이 평가했다.이내 김태훈을 바라보자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물론 유능한 사람이라 인재 한 명을 잃었다는 생각에 사뭇 아쉬웠다.하지만 임지유를 처음 만난 날 신정혁이 그녀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어디까지나 사적인 문제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그러나 임지유 때문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연미혜의 합류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선을 넘고도
“응.”경다솜은 말하다 말고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수연이는 제 친구예요. 수연이는 승태 삼촌을 외삼촌이라고 불러요.”“그래.”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나서 하루를 공유하는 경다솜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우리 미로 찾기 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지만, 그 옆에 앉아 있던 허미숙은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처음에 경민준이 다솜을 데려간다고 했을 땐, 직접 아이를 챙기려는 줄 알았다.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임지유와 시간을 보
병원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미숙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민준이는 병원에 와 있었잖아. 다솜이는? 다솜이는 어디 있어?”연미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미숙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연미혜는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지유 만나러 병원에 온 김에 다솜이는 또 혼자 내버려뒀나 보지...’“민준 씨도 나름대로 잘 챙겼을 거예요.”연미혜가 담담히 말했지만 허미숙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또다시 다솜이 혼자 두고 놀러 다니면 진지하게 재판으로 끌고 가. 어떻게든 다솜이
연미혜와 허미숙은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막 차량에 타려는 순간, 임지유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내려왔다.“아직 안 갔나 보네.”허미숙은 그녀를 흘긋 보고 시선을 다시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못 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계셨네...’연미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미숙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그 사이, 경민준은 자연스럽게 임지유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본 허미숙은 경민준이 30분 동안 병실을 비웠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아주 죽고 못 사는 견우직녀 납셨다!”연미혜는 대꾸하지 않고 조
연미혜와 허미숙이 노현숙 곁에 머무른 지 대략 삼십 분쯤 되었을 무렵, 경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게.”그동안 경민준은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편이었다.그가 일어나자, 노현숙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갈 거면 얼른 가. 괜히 여기서 앉아 있어도 쓸모도 없으면서.”경민준은 대꾸 없이 병실을 나섰고, 그 뒤로도 삼십 분이 훌쩍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아까까진 정옥순이 과일이며 다과, 차까지 빠짐없이 챙기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허미숙이 들고 있던 찻잔 속 차가 다
경다솜이 떠난 후, 연미혜는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노트북을 켜고 자기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약 한 시간쯤 지나, 배지호 변호사에게서 새로 작성된 이혼 협의서와 관련된 문서들이 도착했다.연미혜는 곧장 파일을 열어 확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추가로 명시된 세 채의 부동산이었고, 위치까지 상세히 기재돼 있었다.그 위치를 확인한 순간, 연미혜의 손길이 멈췄다. 그 부동산들 모두 연씨 가문 근처 단지 내의 공실들인 데다가 거리도 가깝고, 연씨 가문과도 인접해 있었다.사실, 경민준이 예전에 연씨 가문 앞집을 사줬을 때도
연미혜는 아이들과 점심을 먹은 뒤, 연미혜가 미리 예매해 둔 영화표로 영화를 봤다.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근처 백화점으로 발길을 옮겼다.연유라가 옷을 보러 들어가고, 연이찬이 혼자 피규어 판매장을 구경하러 갔을 때 연미혜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경다솜에게 조용히 말했다.“이따가 엄마가 집으로 데려다줄게.”“데려다줘요? 집으로요?”경다솜은 연미혜의 옆에 붙어 앉으며 고개를 갸웃했다.“저 집에 안 가요. 오늘 밤도 외증조할머니 댁에서 잘 거예요. 집엔 내일 밤에 가면 돼요.”연미혜는 물 한 모금 마신 뒤, 담담히 말했다.“유
한효진은 다급하게 말했다.“노현숙 어르신이 다친 이틀, 사흘 사이에 민준이가 연미혜는 물론이고, 연씨 가문에도 꽤 자주 연락했다더라? 어제는 민준이가 연씨 가문 어르신이랑 같이 식사까지 하는 걸 본 사람도 있었대. 미혜랑 혹시 다시 잘 돼가는 거 아니겠지?”임지유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처음부터 잘 된 적이 없는데, ‘다시’라니요...”겉으로는 차분했지만, ‘다시 잘 된다’는 표현 자체가 못마땅한 기색이었다.한효진이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임지유는 어쩔 수 없이 덧붙였다.“민준 씨 할머니가 연씨 가문 어르
연미혜는 경민준을 바라보며 말했다.“외삼촌 말로는 경문그룹에서 누가 연락해 왔다고 해. 프로젝트 제안 받았대.”경민준이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우리한테 빚지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 병문안한 게 고마워서 보답하려는 그 마음도 이해해. 그런데 우린 민준 씨 때문에 간 게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 프로젝트는 사양할게.”만약 연씨 가문이 경문그룹 쪽 사업을 맡게 된다면, 임씨 가문이나 손씨 가문이 가만있을 리 없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또 무슨 소란을 피울지 모를 일이었다.
경다솜이 냉큼 달려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와, 먹을 게 엄청 많아요! 밀크티도 있어요!”“다솜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경민준이 담담히 말했다.“다솜이가 온다기에 좀 준비해 뒀어.”그 말과 함께 고개를 돌려 연미혜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외면한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제야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연유라와 연이찬 쪽으로 옮겨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여기 앉아.”경민준 특유의 센 기운에 연유라와 연이찬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두 아이는 노현숙에게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