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혜와 허미숙이 노현숙 곁에 머무른 지 대략 삼십 분쯤 되었을 무렵, 경민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잠깐 나갔다 올게.”그동안 경민준은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편이었다.그가 일어나자, 노현숙은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갈 거면 얼른 가. 괜히 여기서 앉아 있어도 쓸모도 없으면서.”경민준은 대꾸 없이 병실을 나섰고, 그 뒤로도 삼십 분이 훌쩍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아까까진 정옥순이 과일이며 다과, 차까지 빠짐없이 챙기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허미숙이 들고 있던 찻잔 속 차가 다
연미혜와 허미숙은 먼저 차 쪽으로 걸어갔다. 막 차량에 타려는 순간, 임지유가 조수석 쪽 문을 열고 내려왔다.“아직 안 갔나 보네.”허미숙은 그녀를 흘긋 보고 시선을 다시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 못 본 줄 알았는데, 다 보고 계셨네...’연미혜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미숙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있었다.그 사이, 경민준은 자연스럽게 임지유 쪽으로 걸어갔다.그 모습을 본 허미숙은 경민준이 30분 동안 병실을 비웠던 것을 떠올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아주 죽고 못 사는 견우직녀 납셨다!”연미혜는 대꾸하지 않고 조
병원을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미숙이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민준이는 병원에 와 있었잖아. 다솜이는? 다솜이는 어디 있어?”연미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허미숙의 표정이 단숨에 굳었다.연미혜는 그 표정만 봐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임지유 만나러 병원에 온 김에 다솜이는 또 혼자 내버려뒀나 보지...’“민준 씨도 나름대로 잘 챙겼을 거예요.”연미혜가 담담히 말했지만 허미숙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또다시 다솜이 혼자 두고 놀러 다니면 진지하게 재판으로 끌고 가. 어떻게든 다솜이
“응.”경다솜은 말하다 말고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었다.“수연이는 제 친구예요. 수연이는 승태 삼촌을 외삼촌이라고 불러요.”“그래.”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나서 하루를 공유하는 경다솜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서 오늘은 뭐 하고 놀았어?”“우리 미로 찾기 했어요!”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솜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지만, 그 옆에 앉아 있던 허미숙은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처음에 경민준이 다솜을 데려간다고 했을 땐, 직접 아이를 챙기려는 줄 알았다.그런데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그는 임지유와 시간을 보
넥스 그룹은 염성민, 하승태 측과의 협업이 확정되었지만, 아직 일부 사업 부문은 파트너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이에 따라 회사의 노출도와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내부적으로 한동안 준비해 왔던 투자유치설명회를 월요일 아침에 공식 개최하게 되었다.그날 아침, 연미혜는 경다솜을 학교에 데려다준 뒤 설명회가 열리는 호텔로 향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김태훈을 비롯한 주요 임직원들이 도착해 있었다.곧 연미혜는 회사의 핵심 기술 개발자로서 연단에 올라 발표와 함께, 언론의 질문에도 응답해야 했다.그녀는 김태훈과 함께 무대 뒤에서 발표 흐
하지만 사람들은 임지유가 겸손해서 그렇게 말한다고 생각했다.잠시 소란을 피우던 프로젝트팀 사람들은 이내 흩어져 제자리로 돌아가 본격적인 업무에 집중했다.오늘 아침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가 있었다는 건 임지유도 알고 있었다. 다만 오전 내내 업무에 시달리느라 그 내용을 따로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잠깐의 여유가 생긴 틈을 타, 그녀는 휴대폰으로 관련 내용을 검색했다.“염 대표님, 오늘 아침 넥스 그룹 설명회에 다녀오신 거죠?”“네.”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회 영상을 재생했다. 마침 화면에는 연미혜가 제품과 기술을 소개
임해철은 통화를 마친 뒤,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거실 대형 스크린에선 여전히 넥스 그룹의 투자유치설명회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과일을 먹으며 여유롭게 TV를 보던 손아림은, 화면 속 연미혜가 그런 중요한 무대에서 유창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고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리모컨으로 화면을 꺼버렸다.“왜 하필 연미혜가 발표해?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 거잖아.”손수희는 그런 반응엔 별 감흥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
“알겠어요.”연미혜는 짧게 대답하고는 이어서 말했다.“엄마는 이제 회사 가야 돼. 끊을게.”“엄마... 다음에 만나요 그럼...”전화를 끊은 연미혜는 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회사를 향해 출발했다.어제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오늘도 만만치 않았다.다만 다행히 오후엔 비교적 일찍 퇴근할 수 있었고, 오랜만에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자 연씨 가문으로 향했다.하지만 집에 도착하자 허미숙의 표정이 어딘가 썩 좋지 않았다.거실 안을 둘러봐도 경다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미혜는 그녀가 경민준과 함께 있다는 걸 단번에
염성민은 오늘 있었던 일을 지현승에게 간단히 전했다.곧 지현승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아버지랑 할아버지는 미혜 씨하고 미혜 씨 외할머님에 대해 인상이 꽤 좋으셨어. 아마 그래서일 거야.]지현승의 말대로라면 지철호가 연미혜를 신경 쓰는 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지만 염성민은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았다.‘아무리 좋은 첫인상이었다 해도, 겨우 한두 번 본 사이에 그 정도로 각별할 수 있을까?’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현승에게 더 따져 묻는 건 의미 없었다.날씨 예보에 따르면 오늘 오후부터 비가 내릴 거라고 했
간담회가 끝난 뒤, 정부 측에서 참석한 기업 대표들에게 준비한 오찬 자리가 이어졌다.연미혜는 조용히 짐을 챙겨 일어났고, 경민준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곧 뒤따라 나왔다.회의실을 나서던 중, 염성민은 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지철호를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지씨 가문과 염씨 가문은 원래부터 교류가 있는 편이었고, 염성민과 지철호 역시 자주 마주치는 사이였다.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연미혜는 잠시 주춤했지만 곧 겸손한 자세로 다가가 지철호에게 고개를 숙였다.“장관님, 안녕하세요.”지철호는 눈가에 미소를
퇴근 후, 연미혜와 김태훈이 유명욱의 자택에 도착했을 때, 그는 통화를 하고 있었다심각한 얼굴로 통화를 이어가던 유명욱은 두 사람이 들어서는 걸 보고 전화를 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이번 연구 내용은 꽤 인상 깊었어. 너를 한 번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몇 있어. 이번 기회에 소개해 줄게.”연미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히 대답했다.“알겠습니다.”이번 연구는 국가 연구 과제로 정식 채택되었고, 이후의 행정적 절차나 관련 사항도 그 자리에서 간단히 조율되었다. 두 사람은 유명욱에게 남은 질문들을 이어가며 늦게까지 머
식사 도중 정범규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임지유를 향해 말을 건넸다.“참, 요즘 넥스 그룹에서 인재 충원 중이라던데... 혹시 다시 한번 지원해 볼 생각은 없어?”며칠 전까지만 해도 해외에 머물렀던 임지유는 그 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처음 접하게 되었을 때부터 꽤 솔깃했다.넥스 그룹의 기술력은 확실했기에, 다시 지원해서 합격할 수 있다면 앞으로의 커리어에 훨씬 더 유리했다.‘하지만 ’임지유가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정범규는 짐작하고 있었다.‘지유가 망설이는 건 연미혜 때문이겠지.’정범규는 그런 임지유의 속내를 들
경다솜이 연미혜에게 전화하자마자, 경민준이 보낸 픽업차가 곧바로 도착했다.결국 경다솜은 연미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차에 올라타 떠났다.방에 도착하자 경다솜은 경민준과 임지유의 품에 뛰어들며 외쳤다.“아빠, 지유 이모! 다솜이 왔어요!”경민준은 임지유가 백팩을 옆으로 치우는 것을 도와주는 동안 웃으며 머리를 문질렀다.룸에 들어서자, 하승태와 정범규, 그리고 손아림 모두 함께 있었다.경다솜이 경민준과 임지유를 보고 반가워하자, 정범규가 웃으며 말했다.“민준아, 내가 너희들보고 다솜을 데리고 해외여행 하라고 했잖
밤낮으로 바쁜 시간을 보낸 연미혜는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가기 전에 정리해야 할 내용을 정리해 김태훈에게 보냈다.김태훈은 연미혜가 보낸 재료를 읽고 흥분한 목소리로 답했다.“맞아, 이거야. 훌륭해, 훌륭해, 훌륭해!”연미혜는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먼저 낮잠을 자고 나중에 얘기할게요.”“그래.”연미혜는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잠을 잤다.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방의 카펫 위에서 스도쿠 게임을 하는 경다솜을 보았다.엄마가 깨어난 것을 본 경다솜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엄마 깨어났어요?”“응.”“목마르세요? 물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본 후 오락실 앞을 지나던 경다솜은 오랫동안 엄마와 게임을 안 한 것이 생각이 나 다시 그녀를 오락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쇼핑, 식사, 영화 감상,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기는 경다솜에게 매우 드물게 활동하였다.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연미혜와 함께 외출한 적이 없었고 이 모두 매우 이례적인 활동이었지만 즐겁게 지냈다.연미혜와 염용석은 저녁에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오락실에서 나온 연미혜는 약속 장소에 가기 전에 경다솜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경다솜은 연미혜 곁을 떠나기 싫어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
다음날.아침 식사를 마치고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경다솜은 경민중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돌아온 것을 본 경다솜은 고개를 들어 외쳤다.“엄마!”“응.”연미혜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컴퓨터를 켰다.전화기 반대편에서 경민준이 물었다.“오늘 일정은 뭐지?”경다솜은 침대에 엎드려 행복하게 말했다.“영화를 보고 싶어요, 점심에 엄마랑 같이 영화관에 갈 거예요!”연미혜는 어제 정리한 재료를 살펴보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잠시 후 경다솜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가와 말했다.“엄마, 아빠가 엄마한테 휴대전화를 주라고 했어요.
연미혜는 다솜이 넘어지지 않도록 손을 뻗어 안아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달려가자마자 임지유가 가지고 있는 향기가 다시 한번 그녀의 코끝을 스쳤다.그녀는 책가방을 꺼내 소파에 내려놓고는 침대로 달려가려는 딸을 뒤로 끌어당기며 물었다.“아직 샤워 안 했어?”“씻었는데요.”목욕했는데도 여전히 몸에서 임지유의 냄새가 났다는 것은 임지유가 경민준과 함께 살았거나, 아니면 조금 전까지 경민준과 임지유가 함께 있었다는 뜻일 수밖에 없었다.그들은 다솜과 함께 아파트에 들어 오지 않았을 뿐.연미혜는 무심하게 말했다.“더러워진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