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동하는 단 한 번도 대놓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거절당하는 게 두려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 없을까 항상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남자였다.그런데 그 바보 같은 남자가 그녀를 위해 수혈을 해줬다는 말에 소은정은 가슴이 욱신거렸다.어쨌든 또 누군가에게 목숨을 빚지고 말았다는 생각에 소은정은 마음이 무거워졌다.“의사 말로는 고비는 넘겼지만 오른쪽 다리가 골절이라 한동안 깁스를 하고 계셔야 한다는군요. 서산시 대학병원에 연락해 뒀으니 지금 돌아가시죠...”의료시설도 서산시가 더 훌륭한데다 가족들이 곁에 있으니 회복이 더 빠를 거란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이 대답했다.“전 대표가 깨어나면 함께 돌아가죠.”그제야 소은정은 부러졌다는 오른쪽 다리를 바라보았다. 마취제가 들어가서인지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은정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구치소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킬러를 움직이다니 그녀가 장일성의 세력을 과소평가한 탓에 일어난 사고였다.가시 같이 거슬리는 존재를 어떻게든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소은정은 몰래 주먹을 쥐었다.한편, 역시 소은정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입수한 박수혁은 미팅이 늦은 시간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밤새 직접 운전을 해 S시로 달려왔다.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온 병실 앞에 멈춰 선 채 쿵쾅대는 심장을 잠재웠다.소은정을 잃을 뻔했다는 공포와 불안감에 휩싸이면서도 누군가 감히 그녀를 죽이려 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은 복수의 불길로 다시 뜨거워졌다.겨우 마음을 다잡고 병실로 들어가려던 그때,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우연준의 말에 박수혁은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전동하 대표가 은정이랑 같은 혈액형이라고?수혈이라는 단어에 박수혁도 잊고 싶었던 과거를 다시 떠올렸다.애초에 서민영에게 수혈을 해주기 위해 소은정과 결혼을 했었고 결혼 생활 내내 소은정을 혈액고 취급이나 했었지...그리고 이번 사고에서도 그녀를 구한 것도 헌혈을
이번 사고는 장일성이 사주한 게 분명했지만 킬러와의 연관성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했다.“경찰쪽에서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기사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모양입니다...”소은호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경찰만 믿고 있을 수는 없어. 그 운전기사란 사람에 관한 정보 전부 찾아. 가족이든 뭐든 좋으니까. 운전기사도... 장일성도...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 거니까...”소은정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소은호였다. SC그룹을 맡기긴 했지만 그룹 일 때문에 소은정이 다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반면 길거리를 떠돌던 날라리에서 지금의 진중한 우 비서가 될 때까지 곁에서 소은호를 모셨던 우연준은 겉보기에는 젠틀해 보이지만 소은호도 박수혁과 잔인한 면이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들의 소중한 것을 건드린 이에게는 잔혹할 정도로 냉정해지는 게 두 사람이었다.장일성이 아무리 조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SC그룹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일성은 진짜 몰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잠이 들었다 다시 부스스 눈을 뜬 소은정의 시야에 소은해의 얼굴이 들어왔다.소은정이 깨어난 걸 발견한 소은해가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다리를 가리켰다.“은정아, 내가 여기에 사인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깁스라고 볼 수 있지!”사인에 알록달록한 낙서로 얼룩진 깁스를 확인한 소은정이 구시렁댔다.“하, 100원에 팔 거야. 갖고 싶으면 갖든가.”소은해가 바로 반박하려던 그때, 소찬식이 눈물을 글썽인 채 다가왔다.“은정아, 괜찮아? 아프진 않고? 이만하길 천만다행이긴 한데...”하마터면 가족들과 영원히 헤어질 뻔했다는 생각에 소은정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두 부녀의 뜨거운 눈물을 바라보던 소은해가 어깨를 으쓱했다.아니, 골절이라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해?몇년 전, 촬영장에서 추락 사고로 부상을 입어 허리를 크게 다쳤을 때 눈물 한 방울도
딸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란 생각에 소찬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전 대표, 푹 쉬지 왜 여기까지 왔어?”깁스를 하고 있는 소은정을 발견한 전동하의 미소가 순식간에 굳어버렸다.“그냥 부러진 거예요.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요...”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말이었다.그 순간 전동하가 아니었다면 소은정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테니까.소은정의 씩씩한 모습에 전동하의 창백한 얼굴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괜찮은 모습 보니까 마음이 놓이네요.”두 사람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소은해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두 사람끼리 대화 좀 하게 방해꾼들은 나가죠.”전동하가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소은해를 바라보던 그때, 소찬식이 소은해의 뒤통수를 때렸다.“헛소리! 아플 때일수록 옆에 가족들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전 대표는 가족들이 곁에 없으니 우리가 가족이나 마찬가지고! 두 사람 중에 또 누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아버지의 말에 소은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역... 역시 아버지세요.”“흥!”소은해를 흘겨본 소찬식은 전동하를 부축했다.“전 대표, 서산 대학병원에 연락해 뒀으니까 일단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리고 회장님이 뭐야. 편하게 아버님이라고 불러.”전동하와 소은정이 같은 혈액형이라는 말을 들은 뒤로 그를 바라보는 눈빛 자체가 달라진 소찬식이었다.전동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찬식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고 소은정은 묘한 눈빛으로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소은정을 좋다고 하는 남자들에게 항상 형식적인 친절함만 보여주던 아버지다. 박수혁조차도 아직 회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아버님이라고 부르라니...소은정이 전동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우리 아버지가 워낙 정이 많으셔서 그래요. 편하게 지내세요.”친절? 전동하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 아버님.”“아니야, 아니야!”소찬식이 부른 기사가 롤스로이스를 운전한 채 나타나고 소은호, 전동하가 한 차량
전동하의 대답에 흠칫하던 소은호가 물었다.“혹시... 은정이 좋아하세요?”창백한 전동하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피어올랐다.“네. 제가 쫓아다니는 중입니다.”SC그룹을 세계 일류 그룹으로 만든 소은호에게 거짓말이 통할 리가 만무했고 일이 잘 풀리면 형님이 될지도 모르니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전동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역시나 소은호는 예상대로라는 듯 피식 웃었다.“은정 씨가 마음을 열 것 같으세요?”전동하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알게 모르게 전동하를 밀어내는 소은정의 모습에 소은호에게서라도 자신감을 얻고 싶은 전동하였다.소은호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면 언젠가 소은정에게 자기 칭찬 한 마디라도 더 해줄지도 모르니 말이다.전동하의 질문에 소은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전 대표님, 마음은 알겠지만 저희 집안에서 은정이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사람도, 은정이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답니다.”3년 전, 다짜고짜 박수혁과 결혼을 하겠다는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소은정과 결국 가족들과 의절하는 걸 선택했다. 그 뒤로 가족들 모두 감히 소은정의 연애 문제에 조언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버리고 말았다.그저 한번 결혼에 실패한 소은정의 다음 사랑은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랄 뿐이었다.씁쓸한 미소를 짓는 소은호의 모습에 전동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차량은 달리고 달려 곧 서산에 도착했다.서산 대학병원 원장과 친한 사이인 소찬식 덕분에 소은정, 전동하는 VIP 병실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격은 어마무시하지만 말이다.병원에 도착한 소은정은 다시 검진을 받았다. 워낙 다리가 심하게 부러진 탓에 간호사가 끄는 휠체어에 이끌려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병실 앞에 도착한 소은정은 그녀의 병실에 앉아있는 전동하를 발견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운지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에 전동하는 왠지 마음이 복잡해졌다.그녀에게 수혈을 해줬다는 얘기를 들은 뒤로 전동하를 볼 때
하긴,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있을 리가.“참, S시에는 왜 오신 거예요? 저 때문에 일정도 다 못 마치신 건 아니죠?”“은정 씨 만나려고 갔던 거예요.”전동하의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일까. 소은정은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든 소은정은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왜요?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셨어요?”은하수를 담은 듯 눈부시게 반짝이는 전동하의 눈동자가 소은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은정 씨를 좋아하니까.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만나러 가고 싶은 거죠.”전동하가 이렇게 대놓고 호감을 표시한 건 처음이라 소은정도 흠칫하고 말았다.어...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소은정의 난처함을 눈치챘는지 전동하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너무 감동한 건 아니죠? 그럼...”“한 원장, 우리 딸 잘 부탁해. 퇴원할 때는 예전처럼 폴짝폴짝 잘 뛰게 만들어줘야 해.”소찬식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레 중단되었다.“걱정하지 마. 은정양 괜찮아. 남자친구를 잘 둔 덕분이지 뭐. 어쩌다 같은 혈액형을 가진 남자를 찾았대? 천생연분이야!”뒤이어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병실문이 열렸다.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소은정이 중년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한 원장님, 오랜만이에요.”어렸을 때부터 아플 때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터라 소은정도 한 원장과 잘 아는 사이였다.“은정아, 너희 아버지가 너 잘 모시라고 아주 난리다. 이번 기회에 푹 쉬어!”“네, 담당 의사선생님도 몇 달 푹 쉬면 괜찮을 거라 하시던 걸요.”한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소찬식이 싱글벙글 웃으며 소은정의 곁으로 다가갔다.“그래, 이제 우리 딸 좀 쉬게 자네는 좀 나가 봐!”한 원장이 병실을 나서고 전동하가 입을 열었다.“아버님, 제가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시 회사로 들어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후쯤에 제 비서가 데리러 올
소은호는 진지한 얼굴로 소은정에게 파일을 건넸다.“운전기사는 장일성의 부하가 맞았어. 그 동안은 시공 기한을 연장하기 위해 공사현장에서 일부러 사고를 낸 거고.”소은호의 말에 소은정의 표정도 차갑게 굳었다.하, 돈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죽여왔던 거라고?“하, 이 자식이 아주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구만! 가만히 내버려 둘 수야 없지! 경찰에 구속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잡아야 한다고!”소은해를 힐끗 바라보던 소은호의 표정은 왠지 복잡미묘했다.“나도 그럴 생각으로 뒷조사를 해봤는데... 딸이 암 환자더라고. 딸 치료비를 벌기 위해 장일성의 킬러로 일하게 된 것 같아... 최근 항암치료 비용도 전부 장일성이 입금해 줬더라고.”소은호의 말에 병실은 적막이 감돌았다.딸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의 길에 들어서게 된 아버지라...누가 들어도 씁쓸해질 수 없는 화제였다.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린 건 소은해였다. 배우로 일하며 온갖 막장 시나리오를 많이 있어서일까 다혈질인 평소 성격답지 않게 차가운 목소리였다.“자기 딸 구하겠다 남의 집 귀한 딸을 건드려? 그게 아버지의 사랑이야? 하, 웃기지 말라고 그래! 딸이 알면 퍽이나 아이고 아버지 사람 죽인 돈으로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겠다!”아무리 사정이 있다 해도 운전기사의 행동은 엄연한 범죄다.소은정 역시 죽음의 위협을 피부로 느껴서일까 운전기사의 불행한 처지를 향한 동정심이 딱히 샘솟지 않았다.“악마와 거래를 했으니 지옥에 떨어질 각오는 했겠지. 그리고 우리는 그렇다고 쳐. 그 공사현장에서 죽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무슨 죄인데? 경찰에 넘겨. 봐줄 이유도 봐줄 수도 없어.”소은정의 이성적인 목소리에 소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운전기사의 사정을 알고 나서 소은정의 마음이 약해지면 어쩌나 걱정했었던 소은호였다. 만약 소은정이 경찰에 넘기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녀 몰래 어둠의 방법으로 운전기사를 처단할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여동생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했고 단단했다.“그래,
해외 유명 디자이너의 인테리어 덕분에 서산 대학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커다란 별장 같은 느낌이 더 크다.한옥의 스타일의 건물과 아늑한 정원까지 병원의 경치만 바라봐도 건강해질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게 바로 이곳이다.간호사들의 팬심 가득한 눈빛을 즐기며 걸어가던 소은해는 병원 복도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한 남자를 발견한다.뭐야? 박수혁?평소 포스 넘치는 모습과 달리 오늘 박수혁의 뒷모습은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소은정을 구한 게 전동하라는 점, 소찬식의 달라진 태도, 두 사람의 같은 혈액형까지...마음이 편치 않을 테지...고개를 든 박수혁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소은해를 발견했다.“박 대표님, 여기서 다 보네요.”며칠 동안 눈도 붙이지 못한 듯 눈은 빨갛게 충혈된데다 턱에는 까칠한 수염까지, 이렇게 망가진 박수혁의 모습은 처음인지라 소은해의 입가에 실렸던 장난기 넘치는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말았다.“은정이는... 괜찮나요?”역시, 은정이 때문에 왔구만?소은해는 한숨을 푹 내쉬곤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많이 좋아졌어요. 아직 걷는 데는 무리가 있지만 다른 곳은 괜찮다니까 걱정 말아요.”소은해의 말에도 박수혁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왜요? 들어가 보시지.”소은해가 눈썹을 치켜세웠다.불도저처럼 일단 들이대고 보는 게 박수혁 스타일 아니었나?소은해의 말에 박수혁이 흠칫했다.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소은정을 만나러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하지만 전동하와 소은정이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이 커다란 가시처럼 박수혁의 마음에 박혀버렸고 막연한 불안함으로 다가왔다.그래서 병실 앞을 한참이나 서성이다 복도에 멍하니 앉게 된 것이었다.한참을 망설이던 박수혁이 겨우 입을 열었다.“아니에요. 다음에요...”말을 마친 박수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분명 몇 발자국만 걸으면 그녀의 병실인데 왠지 다른 세상에 있는 듯 멀게 느껴졌다.“하긴, 볼 면목이 없겠죠. 3년 동안 서민영인가 뭔가 하는 여자를 위해서 우리 은정이한테 어떻게 했는지
소은해의 말은 박수혁의 가장 아픈 구석을 콕콕 찔러댔다. 잊고 싶은 기억이겠지. 하지만 그럴 수록 난 더 건드릴 거야. 우리 은정이랑 다시 시작하려고? 그렇다 해도 네가 저지른 짓이니까 감당해.차가운 시선으로 소은해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좀 더 속을 뒤집어 버리고 싶었지만 주인 잃은 개처럼 시무룩한 모습을 보니 왠지 동정심이 피어올랐다.휴, 이쯤하는 게 좋겠어.“박 대표가 우리 은정이를 많이 도와준 건 알고 있어요. 아마 완전히 끊어내긴 힘들겠죠. 그런데 이거 하나는 명심해요. 은정이가 전동하 대표와 사귀기로 한다면 다시는 우리 은정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죠?”박수혁 같은 사람이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된 사람에게 집착할 리가 없다는 게 소은해의 생각이었다. 하지만...소은해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히요.”박수혁의 새카만 눈동자가 소은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하, 뭐가 저렇게 자신만만해?“형님, 그럼 전 은정이 보러 가보겠습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아서요. 뺨이라도 날리면 기꺼이 맞아주려고요.”자리에서 일어선 박수혁의 얼굴은 평소처러 무뚝뚝했다. 소은해의 말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투지를 불러일으킨 듯했다.전동하, 너한테 은정이를 빼앗길 수는 없어. 아니, 네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안 돼.이미 지난 과거는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것, 그렇다면 손 놓고 슬퍼하는 것보다 어떻게든 견디고 이겨내는 게 바로 박수혁이었다.단호한 박수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은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뭐? 형님? 미친 자식 아니야?박수혁이 성큼성큼 다가가 소은정의 병실 앞에 선 순간, 전동하가 병실에서 걸어나왔다.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니 박수혁의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웠다. 역시 박수혁을 발견한 전동하가 미소를 지었다. 수혈 때문인지 왠지 모를 병약미까지 더해진 모습에 박수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박 대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