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얼굴로 단톡방을 들여다보고 있던 소은정의 귓가에 익숙한 단어가 들려왔다.“수혁아...”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소은정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차갑게 굳어버렸다.서민영, 여기서 만나다니!박수혁은 비서인 이한석과 함께 직접 마중을 나와있었다. 박수혁의 얼굴을 확인한 서민영은 눈시울을 붉히며 달려갔다.서로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커플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소은정의 가슴은 또 욱신거렸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음에도 씁쓸함은 지워지지 않았다.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던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익숙한 향기... 그녀는 애써 밝게 웃으며 애교를 부렸다.“오빠, 유치하게 정말.”신이 정성스레 조각한 듯한 소은해의 얼굴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여자인 그녀조차도 질투가 나는 미모였다.소은해는 선글라스를 올리며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야, 너 많이 컸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어! 은해 오빠다!”누군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소녀팬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그녀들의 맹렬한 기세에 깜짝 놀란 소은정이 나지막이 물었다.“경호원은?”“휴가 줬는데?”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럼 어떡해?”“네가 오빠를 지켜야지...”소은해가 뻔뻔하게 말했다.소은해가 공항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들었다. 소은해는 동생이 인파에 휩싸일까 그녀의 어깨를 꼭 안았다. 수많은 카메라에서 터져 나오는 플래시가 소은정의 눈을, 끊임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가 소은정의 귀를 자극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안 오는 건데!사진에 찍히고 싶지 않아 소은정은 애써 손으로 얼굴을 막았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팬들이 찍은 사진은 SNS에 빠르게 퍼졌고 그녀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댓글을 남겼다.“소은해가 안고 있는 여자, 박수혁 대표랑 전 와이프 아니야?”“그러네. 진짜 소은정이잖아. 저 두 사람이 왜...”“설마 두 사람 사귀는 거야?”국내 최고의 톱스타와 전 재벌 며느리의 스캔
소은해는 차에 오르자마자 입을 열었다. 선글라스를 벗자마자 그의 찌푸려진 눈살이 드러났다. 그는 확실히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박수혁 그 개자식도 분명 공항에 있었다.소은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맞아, 전 애인이 돌아왔거든.”박수혁의 존재감은 누구든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소은해가 못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허, 옆에 끼고 있던 그 여자? 쯧쯧, 눈이 멀었구만.”소은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취향이지 뭐. 맞다, 공항 사진은 분명 인터넷에 퍼질 텐데… 사람 시켜서 제재해야 하는 거 아니야?”소은해는 아랑곳 않은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 동생이 얼마나 잘나가는지 사람들한테 보여줘야겠어!”박수혁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없었더라면 그는 소은정을 대중에 노출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수혁은 이미 모습을 드러냈고, 이렇게 된 이상 소은정이 얼마나 매력 있는 사람인지를 그에게 똑똑히 인식시켜야 했다.그녀가 수천수만 명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오라버니, 내가 요즘 얼마나 많은 스캔들에 휘말렸는지 알아요? 연예계 사람이라도 된 것 같다니까!”소은정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소은정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연예인들도 눈시울을 붉힐 수준이었다.“그럼 뭐 어때, 오빠가 여기 있잖아. 어떤 일에 휘말리던 걱정할 필요 없어!”공항 입구의 차 안, 그 내부의 공기는 무섭도록 가라앉아 있었다.이한석은 한참의 침묵 뒤에야 입을 열었다.“박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민영 아가씨 먼저 호텔로 모실까요?”서민영은 재빨리 시선을 박수혁에게로 옮겼다.“나는 집에 가보고 싶은데, 어머님 아버님 못 뵌 지도 너무 오래됐잖아. 두 분 드릴 선물도 챙겨왔어.”박수혁의 낯이 어두웠다.“성준상의 기일이 곧인데, 그쪽에 먼저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돌아온 것도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그의 제안에는 왜 인지, 서민영에 대한 반감이 느껴졌다.자
박수혁은 냉랭한 눈을 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이미 저지른 일은 절대 되돌리지 못해. 난 소은정을 대신해서 너를 용서해 줄 자격도 없고, 네 사과 따위는 받을 가치도 없다는 거 똑똑히 알아 둬!”서민영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박수혁은 더 이상 볼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거두고는 말했다.“뭘 기다리고 있지? 출발해!”“네, 대표님.”운전을 일초라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차는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서민영은 온몸이 굳은 채 떠나는 차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내 그녀의 억울함은 분노로 뒤바뀌었다.자신이 떠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박수혁이 저렇게나 냉담하게 변한단 말인가? 게다가 그는 제 눈앞에서 있지도 않은 소은정의 편을 들어주었다.소은정, 기량 하나는 끔찍이도 대단하구나!서민영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번호를 입력하였고, 곧 상대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예리야? 나 입국했어…….”소찬식은 아직 해외에 있었고, 소은호는 출장 중에 있었다. 그런데도 소은해는 죽자 사자 소은정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길 고집했다.두 사람은 투닥거리며 문 앞에 다다랐고, 소은정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관리인 아저씨께서 오빠 지낼 곳을 이틀 내내 깨끗하게 쓸고 닦았는데, 뭐 하러 꼭 여기서 지내겠다는 거야?”소은해가 그런 소은정의 귀를 죽 잡아당기며 말했다.“반대해도 소용없어. 거기는 하도 오래 비워 둬서 지내기 낯설어. 난 여기서 지낼 거니까 말리지 마!”소은정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출입문에 그의 지문까지 인식시켜 두었다. 그러고 나서야 소은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어깨를 으쓱여대며 실내로 들어섰다.안으로 들어선 그는 곧장 인테리어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수수한 듯하나 세련됨이 드러났으며 값비싼 물건들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서 다이아몬드의 빛이 일렁였다. 소은정이 가장 애정 하는 모란디 스타일이 곳곳에 스며 있었다.“좋
소은정은 전화를 끊고, 작은 소호랑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착하지…….”그 무렵 브랜드 매장 측은 소은정의 번호를 입력하여 고객 정보를 조회하였고, 직원은 깜짝 놀라 큰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소은정 아가씨?!”소은해는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샤워를 마친 뒤 재빨리 욕실을 나왔다. 어서 그 작은 호랑이를 더 보고 싶어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 때, 마침 현관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내가 주문한 스카프가 도착했을 거야. 결제는 오라버니가 해주는 거 잊지 말고!”소은해는 소파 위에 소호랑과 세상 편히 엎드려 누운 소은정을 째려보았다. 결코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맨몸에 샤워타올만 두른 채로 급히 현관으로 향하며 비아냥거렸다.“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현관문을 연 소은해의 말은 이어지지 않은 채 뚝 끊겼고, 그의 표정 또한 삽시간에 굳어졌다.“여긴 무슨 일이지?”공기가 한 순간 무거워졌다.표정이 안 좋아진 건, 박수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소은해에게 말했다.“그러는 그 쪽은, 여기 왜 있지?”제 앞의 소은해는 분명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모습을 하고있었다. 공항에서 나서자마자 여기로 곧장 왔다는 건가?공항에서 찍혔던 소은정과 소은해의 사진과 스캔들 기사는 이미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는 제재할 수준이 아니었다.박수혁은 수 많은 방법을 동원해 소은정의 현재 거처를 알아내었다. 그는 지난 3년의 빚을 갚을 의항이 있었고, 직접 만나 대화하길 희망했다.지난번 소은정의 제안, 서민영과 비취 담뱃대 둘 중 무엇을 택해야 하나?그는 도저히 결단을 내릴 수 없었고, 소은정을 찾아 분명하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조건들을 들이대어도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었다.그러나 이 상황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백주대낮부터 저 둘은 이곳에서 함께였다.저 둘이 무엇을 하고있었는지, 그의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그의 불난 속에 기름을 붓는 듯, 소은해는
세 사람은 그 소리에 벙찐 듯 했으나, 소은정은 곧 화난 얼굴을 하였다. 어쩐지 배신감이 드는 기분이었다. 실험실의 사람들이 ‘꼬마 배신자’ 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이 순간 그 별명의 이유가 더욱 확실해졌다.“소호랑!”소은정은 큰 소리를 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방금 주문한 몇 천만원 가치의 스카프들을 몽땅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박수혁은 굳은 얼굴을 유지한 채 몸을 숙여 소호랑의 한 발을 잡아 들어올렸다.“어떻게 네가 여기 있지?”소호랑은 이리저리 바둥대며 대꾸하였다.“신나리가 날 여기로 데려왔어. 난 여기가 좋아…. 그러니까 싸우지 마.”박수혁이 그 말에 잠시 멈칫한 순간, 소은해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소호랑을 낚아 채 소은정의 품에 안겨주었고 상황을 인지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닫아버렸다.단 몇 초만에 모든 임무를 완수 한 소은해였다.“우리 집 애완 호랑이를 남이 막 만지면 안되지!”곧 표정을 굳힌 소은해가 소은정의 품에 안긴 소호랑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오빠가 몇 일 교육 좀 시켜줄까?”소호랑은 소은정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그녀의 팔을 꼭 끌어 안았다.“마미, 나 무서워. 이 사람 나를 마미랑 뗴어놓으려고 하는 거야?”순간 화 났던 마음을 진정시킨 소은정이 소호랑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소은해에게 대답했다.“됐어. 내가 다른 방법 생각해볼게.”인공지능이니, 변화가 필요할 땐 당연히 인공지능이 필요한 것이였다.그런 생각을 막 하던 찰나, 소은정은 문 밖의 박수혁이 떠올랐다. 그래서 여기 온 목적이 뭐라는 거야?아니야, 됐다. 알고싶지 않았다. 해봤자 비취 담뱃대 얘기겠지. 서민영과 비취 담뱃대 둘 중에서도 못 고르겠다면, 안타깝지만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소은해는 여전히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으나 소은정은 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소호랑을 안아 들고 신나리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소호랑이 박수혁을 아빠라고 부르는 점은 무조건 고쳐야겠다
“됐고, 날 위해서라도 고쳐줘요.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괴로울 지경이니까….”소은정은 이마를 짚었다.신나리는 우물쭈물 손을 머뭇 거리다 입을 열 듯하더니 이내 입술을 앙 다물었다.“고치치 못하는 건가요?”사람이 만들었는데, 사람이 고치지 못할 리가…….“아니요. 이미 아름다움의 기준이 박수혁의 인상으로 남았을 테니… 고치고 싶다면 그의 존재를 대체할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방법이겠네요.”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둘은 아무 말도 없을 수밖에 없었다.차갑게 굳은 소은정을 보던 신나리가 큼 큼 헛기침하더니 입을 열었다.“소은해… 는 어때요?”소은정은 머리까지 지끈거려왔다. 왜 또 그 사람이지?신나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소은정에게로 화면을 비추었다.“봐요. 인터넷에 둘의 기사가 이렇게나 가득한 걸요? 다들 공식 입장을 기다리나본데…. 아무튼 박수혁만한 얼굴이고…. 어떻게 생각해요?”소호랑이 소은해를 아빠라고 부른다고…?소은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안돼!”그러나 제 주위에 박수혁만한 외모를 가진 이가 또 있던가…?두 사람은 한참을 고민에 빠졌고, 소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박수혁을 싫어하게 만드는 건 어때요?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소은정은 그저 박수혁만 도려내고 싶을 뿐이었다.신나리는 묵묵히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이내 두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안되는 건 아니예요. 그 인물에 대한 사고에 장벽을 세운다면…….”소은정은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다.“좋아요, 좋아요.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지금 바로 데리고 나올 게요.”“아, 아니예요. 제가 컴퓨터로 작업하면 돼요.”신나리는 노트북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것에는 브랜드의 로고도 없었기에 어느 회사의 물건인지 분간이 힘들었다. 게다가 시중의 노트북들과는 어딘가 모양새가 달랐다. 생각해보니 제 둘째 오빠인 소은찬 역시 비슷한 것을 하나 가지고 있던 것 같았다.신나리가 자
우연준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큰 오라버님께 말씀 드릴까요? 직접 손 쓰실 의항이 있으시다면, 제가 준비하겠습니다.”이를 회사에 맡긴다면 임상희는 곧 죽을 운명일 것이 분명했다.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고, 소은정을 지나치는 모든 이들이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했다.소은정은 기가 찬듯 웃었다. 뒤돌아서면 제 멋대로 떠들어댈 것이 분명한 저들이었다.“임상희, 최근 행적이 어떻게 되죠?”“최근 부호의 중년 여성과 어울리며, 그의 딸과도 친한 것으로 보입니다. 듣기로는 오늘 밤 모임이 있다던데….”소은정의 미간이 찌푸러졌다.“거기 주소 알아내서 나한테 보내줘요. 내가 가서 분위기 좀 띄워야겠어요.”“……네.”우연준에게는 어렵지 않은 지시였다.“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봐요. 큰오빠한테는 내가 직접 손 쓰겠다고 말해줘요.”“네, 본부장님.”소은정은 잠시 앉아 휴식하는 듯 하더니 이내 도준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곧 도준호의 음성이 들려왔다.“아가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비웃음 섞인 그의 말투는 떠들썩한 뉴스의 주인공인 소은정을 놀리는 듯 했다. 이에 소은정의 미간이 구겨졌다.“시끄러운 거 진정되게 좀 도와줘. 내 오빠라지만 정말….”도준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오빠가 널 많이 아끼나본데 뭐. 사진 중에 박수혁이 찍힌 사진도 있던데…. 네 오빠가 박수혁 일부러 골려먹은 거 아닌가?”박수혁이 왜 다른 남자와 있던 것에 화가 났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소은정은 잠시 침묵한 뒤 말했다.“난 그 사람이랑 같은 프레임 안에 있기조차 싫어…. 부탁 좀 하자.”“은정 아가씨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도준호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어쨌거나 자신의 아래에서 일 하는 직급이었으니, 그가 도움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전화를 끊은 뒤, 소은정은 자신에게 전송 된 주소지를 발견하였다. 그 곳은 주점가 근처의 고급 룸이었다.공교롭게도 그녀는 이 곳에 입장 가능한
푸르던 하늘이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냉랭한 공기가 불안감을 실어다 주었다.소은정은 예정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확인한 뒤 사무실에 딸려 있는 드레스 룸으로 향하였다. 어지간한 신상 의류들이 항상 구비되어 있었기에 입고 갈 의상을 고르는 데에 문제는 없었다. 톤다운 빛깔의 미니 드레스와 세련된 디자인의 하이힐, 한정판으로 출시되었던 가방까지 들고서 걸음을 옮겼다.만남이 예정된 장소에 도착하였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저 자신의 지인들과 열변을 토하기에 바빴다. 이 곳에는 주인이 따로 없었다. 부호들끼리 모여 교제를 가질 때 이 곳을 사용하곤 하였다.소은정은 작게 플레이팅 된 디저트를 하나 집고는 구석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때까지도 임상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오는 것은 아니겠지?“소은정?”그 때, 앞을 스쳐 지나가던 누군가가 물어왔다.소은정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성강희…? 여긴 어쩐 일로?”“우리 정말 인연인가본데….” 소은정은 그를 흘끗 째려보고는 말했다.“어서 말 해.”“우리 어머님께서 여기 파이가 드시고 싶으시대서 온 거야. 난 그냥 돌아다니는 거고.”성강희는 절레절레 손을 휘저었다.소은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어머니는 미식에 뛰어난 사람이었다.“그러는 넌?”“나……. 난 그냥 즐기려고? 근데 즐길 거리가 아직 안 왔네….”소은정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시 한번 시계를 들여다보았고,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음을 깨달은 소은정이 몸을 일으켰다. 그 때, 성강희가 자리를 뜨려던 소은정의 손목을 붙잡아왔다.“어디 가는데?”소은정은 핑계 거리를 생각해냈다.“별거 아냐. 화장실 좀 가려고. 갔다가 바로 돌아갈 거야.”그는 손에 힘을 슬쩍 풀었으나, 소은정에게 다가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기다릴게. 집까지 바래다 줄게 내가.”“나 운전해서 왔어.”“그럼 네가 나 집에 데려다 줘.”…….홀을 벗어나니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