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기자가 전보다 많이 수그러진 말투로 물었다.“그럼 문강훈 교수가 발표한 영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소은정이 지사의 표절을 인정한다는 건 문강훈 교수가 허위 발표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뭐 어느 업계에서나 거짓말은 질타를 받을만한 일이지만 특히 학계에서 연구 성과 표절 및 허위 발표는 말 그대로 금기였다.소은정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대답했다.“거성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은 문강훈 교수가 개발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빌려 해당 기술의 핵심 개발자, 천재 물리학자 소은찬 씨를 소개합니다.”소은찬? 생각지 못한 이름에 기자들은 리액션조차 할 수 없었다.이때 기자 회견장의 문이 열리고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천천히 들어왔다. TV나 잡지에서나 보던 소은찬이 지금 바로 눈앞에 있다. 사람들은 보통 과학자라면 두꺼운 안경, 벗겨진 머리, 피곤한 얼굴 등을 연상하게 되지만 소은찬은 지금 당장 화장품 CF를 찍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깔끔한 이미지였다. 매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소은찬이 이런 일로 직접 기자 회견장에 나타나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소은찬의 등장과 함께 문강훈 교수의 영상이 조작이라는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밝혀졌다.유명한 학자, 존경받는 교수... 이 모든 타이틀은 천재 소은찬 앞에서 모두 무력하게 느껴질 뿐이었다.소은찬을 건드린 이상, 아마 문강훈 교수는 학계에서 영원히 퇴출될 테지.소은찬은 기자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잠깐 멈춰 선 뒤 단상 위로 올라갔다.“앉아...”서로 시선을 마주친 두 남매가 싱긋 웃었다. 물론 기자들이 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뭐야, 이 달달한 분위기...”“설마 은찬님과도...?”“저도 은찬님 만나고 싶어요!”“은찬님 사랑해요!” 자리에 착석한 소은찬은 싱긋 웃으며 이번 사태를 해명하기 시작했다. 한편,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임춘식과 박수혁은 표정이 복잡미묘했다.임춘식이 박수혁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진짜 소은찬 씨를
소은정의 말에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기자들은 몇 초 뒤에야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기 시작했다.“헐! 대박 반전이잖아!”“뭐야, 남매였어? 그럼 은찬님, 저랑 결혼해 주세요.”“은정 언니는 전생에 무슨 나라를 구했길래 오빠 세 명이 다 저렇게 잘생긴 걸까? 우리 엄마 아들이랑 너무 비교된다...”“은찬님이 재벌 2세였다니! 몰랐어!”“평생 놀고먹을 수도 있을 텐데 과학기술 발전에 이바지하시는 은찬님, 존경합니다!”“언니, 저희 준열 오빠 아직 기억하고 계시죠?”......소은정의 발언에 댓글장도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자회견은 뜻하지 않게 30분 더 연장되었다.임춘식이 박수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들었어요?”박수혁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두 눈을 번쩍 떴다. 머릿속에는 방금 전 소은정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되어 울려 퍼졌다.소은정, 소은찬... 같은 성, 같은 돌림자... 딱 봐도 남매인데... 평소의 그였다면 진작 의심하고 눈치챘겠지만 질투에 눈이 멀어 방금 전에야 알게 되다니...공식적인 자리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눈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방금 전, 소은정이 소은찬의 손을 잡는 순간, 기자 회견장에서 박차고 나갈 뻔했다.“남매사이일 줄은 몰랐네요. 전 또 소은정 씨가 저런 스타일 좋아하는 줄 알았죠...”임춘식의 깐죽거리는 목소리도 더 이상 짜증스럽게 들리지 않았다.“은정이는 워낙 눈이 높으니까요...”눈이 높으니까 날 좋아했지.박수혁의 말에 임춘식은 고개를 저었다. 이 무슨 왕자병 말기 환자 같은 발언이란 말인가?오늘의 기자회견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박수혁 대표의 보기 드문 미소와 소은찬의 등장, 그리고 드디어 밝혀진 소은정, 소은찬 두 사람의 사이까지. 예상치 못한 수확에 기자들도 싱글벙글이었다.기자회견을 한 이상,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회사로 돌아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거늘, 속이 타들어가는 임춘식의 비서와 달리 박수혁, 임춘식은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이었다.현장
뭐?당황한 소은정이 고개를 들었다.아니야, 별말씀을... 당연히 이렇게 말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미친 자식의 행보는 예측하는 게 아닌가 보다.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응, 말로만.”말을 마친 소은정이 돌아서자 박수혁이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네가 믿든 안 믿든 그날 밤 송지현이 꾸민 일... 정말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박수혁은 이런 일을 일일이 마음에 담아둘 만큼 소심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그럴 시간도 없었다. 하지만 소은정과 관련된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잊혀지지 않았다.그를 향한 불신의 눈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신뢰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임을 느낀 박수혁은 이렇게라도 변명을 하고 싶었다.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표절 사건이 터져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 밤 일이 다시 떠올랐다.박수혁이 왜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해명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박수혁과 연관이 있든 없든 상관없다고 소은정은 생각했다.“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다 지난 일이잖아?”기자회견이 끝나고 문강훈은 학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칩 관련 기술 파일을 빼돌린 범인은 바로 문강훈 교수의 상간녀, 거성그룹의 인턴 직원이자 심채린과는 먼 친척 사이였다.범인은 경찰에 연행되었고 진한 지사는 파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에 소찬학은 몇 번이나 회사 앞으로 찾아와 소찬식을 만나겠다며 난리를 피웠다.“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나도 소씨 집안 사람이라고!”그 소란에 사무실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던 소은정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경비라도 불러서 내보낼까요?”우연준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회장님의 동생이라 대놓고 말은 못 하지만 다른 직원들의 불만도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소은정은 진한 지사에서 보낸 사진을 바라보다 무겁게 입을 열었다.“삼촌더러 들어오시라고 하세요.”우연준은 살짝 의아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하, 이제야 날 만나주는 거냐? 넌 피도 눈물도 없어
소은정의 말에 소찬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 그걸 알고 있었어?”지분이 얼마 없는 주주들과 접촉하며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다니.“삼촌, SC그룹은 저희 가문의 가업이 아니에요. 온전히 아빠 스스로 자수성가로 이루신 거죠. 솔직히 삼촌에게 돈 한 푼 주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요. 삼촌이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아빠는 전부 알고 계세요. 그럼에도 가만히 계셨던 건, 삼촌과의 우애 때문이었죠.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하세요. 남아있는 일말의 가족의 정마저 사라지기 전에.”소찬학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어깨는 축 처져 있었고 눈동자는 후회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삼촌도 저희 집안이 돈이 그 두 여자 손에 들어가는 건 싫으시죠?”소은정의 질문에 소찬학은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떴다. 그제야 소은정은 소찬식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제 집에 돌아오셔도 돼요!”사무실로 들어온 우연준이 물었다.“심청하 모녀를 당장 수배할까요?”진한 지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자산을 들고 튄 사람들이다. 이대로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아니요. 삼촌이 하게 내버려 둬요.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 더 뼈저리게 느끼실 테니까.”지금까지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통해 그룹의 직원, 이사들은 더 이상 소은정을 낙하산, 곱게 자란 아가씨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룹의 명예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도 꽤나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소은호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소은정의 칭찬을 늘어놓을 정도였다.태한그룹, 박수혁이 회의실에서 나오자 이한석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대표님, 글로벌 비즈니스 회의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미리 스케줄 조정할까요?”글로벌 비즈니스 회의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가들이 모이는 프라이빗 파티로 극소수의 회원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고급스러운 블랙톤의 초대장을 힐끗 바라보던 박수혁이 물었다.“다른 회원과 함께 참석할 수도 있다고 했었지?”이에 이한석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그
소은정의 대답에 우연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박수혁 대표가 있는 곳이라면 천국이라도 마다하실 것 같던 분이 이런 결정을 내리시다니.소은정은 초대장을 꽉 쥔 채 생각에 잠겼다.박수혁이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잘해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온다면 네 영혼까지 쪽쪽 빨아먹고 버려주겠어.“비행기 티켓 예매해 줘요...”“아, 그게... 이 비서 말로는 박수혁 대표가 대표님 티켓까지 전부 예매하셨답니다. 바로 공항으로 가시면 된다고...”우연준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내가 무조건 갈 줄 알고 있었단 말이지? 여우 같은 자식...소은정은 초대장을 들고 소은호의 사무실로 향했다.“오빠, 박수혁 그 자식이 나한테 이런 걸 보냈는데 나도 가보고 싶어.”초대장에 적힌 글귀를 확인한 소은호가 피식 웃었다.“좀 더 경력을 쌓으면 오빠가 직접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뭐 네가 정 원한다면야 얼마든지.”“그럼 오빠도 이번에 같이 가는 거야?”소은정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소은호는 서랍을 열더니 지금까지 받은 초대장들을 펼쳐놓으며 말했다.“해마다 이렇게 초대장을 보내긴 하는데. 한 번도 안 갔어. 난 그런 데 가면 그렇게 기가 빨리더라.”그녀가 욕심내는 기회가 소은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파티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에 소은정은 짐짓 입을 삐죽거렸다.이틀 후, 소은정은 Malo 숄을 걸친 소호랑과 함께 공항에 나타났다.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끌까 싶어 꽁꽁 감싸두었지만 처음 와보는 공항이 신기한지 몰래 고개를 쏙 내밀곤 했다.“착하지. 도착하면 마음껏 놀게 해줄 테니까 조금만 참자?”하지만 아무리 숨겨도 소호랑의 존재는 역시나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소은정은 그저 호랑이 모양의 스마트 스피커일 뿐이라고 해명했고 소호랑도 이에 장단을 맞추며 소은정의 손바닥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란 끝에 체크인에 성공한 소은정이 속삭였다.“잘했어.”비행기에 오른 소은정이 텅 빈 비즈니스석을 보고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문자 알람이
태한 그룹.박수혁이 사무실을 나왔을 땐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창밖 나뭇가지에는 붉은 석양이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퇴근길이었으나 그는 40분 후 프랑스 행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소은정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그가 이한석에게 서명할 서류를 가져오라 요청하였고, 노크를 하고 들어올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그는 허둥지둥 사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오랫동안 그를 보좌하며 단 한 번도 이런 추태를 보인 적 없던 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대, 대표님…….”그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무덤덤한 얼굴을 띄고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한 시간 전에 연락을 받았는데… 소은정 아가씨께서 타신 비행기에 사고가 났다고…. 알아본 결과 생존자는 없다고… 합니다.”이한석의 목소리는 점점 먹어 들어가 끝에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박수혁의 뒤로 크게 뚫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석양 빛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붉은 태양빛과 정반대로 사무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갑고 어두웠다.그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윽하던 눈동자는 폭풍을 맞닥뜨린 듯 흔들려왔다.“지금 뭐라고 했지?”그의 목소리는 곧장 가라앉았고, 눈에는 핏발이 섰다.분명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라 믿고 싶었다.이한석은 자신이 했던 그 말을 다시 내뱉을 기운조차 없었다. 이내 곧 눈시울이 붉어졌다.“사망자 명단에서 소은정 아가씨의 이름을 찾았습니다……. SC그룹 쪽에도 소식이 닿았고, 곧바로 입국하신 소찬식 회장도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가셨다고…….”그의 말이 끝났고, 사무실의 분위기는 더욱더 어두워졌다. 차가운 공기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박수혁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한석이 서있는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심장이 마치 둔기에 찔린 듯 아파왔다. 피가 끝없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알 수 없는 저림과 떨림만이 느껴졌다.온몸
SC그룹에서는 사고가 난 해역 수색을 위해 10여 대의 자가용 비행기와 수십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인양 작업을 실시하는 등 희망을 놓지 않았다.그럼에도 모자랐는지 누군가가 손을 써 해역의 수색 범위를 더욱 넓혔고, 상공의 비행기는 곧 백 대가 넘어갈 듯 보였다. 어마어마한 규모는 다국적 기업의 영향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수색에 협력한 이는 박수혁이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소은정은 이 일을 겪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자책했다. 두려움에 떨지도, 사고를 겪지도, 실종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비행기가 추락하는 순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 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어쩌면, 박수혁을 더욱 원망했을지도 모른다.세상 천지 두려울 것 없던 그 당찬 소은정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차라리 자신이 비행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바램과 달리 수색대는 며칠째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깊은 해저에서 인양된 비행기의 잔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부서지고 그을린 잔해물의 형태는 그 순간의 참혹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잔해를 마주한 박수혁은 그나마 남아있던 힘이 전부 풀려버린 듯 휘청거렸다. 헬리콥터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끝없이 넓었고, 검푸르고 깊었다. 이따금씩 파도가 휘몰아치며 비릿하고 짠 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 순간, 그는 생명이 이렇게나 보잘것없었나, 회의감이 들었다.헬기의 문고리를 잡은 채 잘게 떠는 박수혁의 모습에 이한석이 성큼 나서 그를 붙잡았다.소은정과 지냈던 3년 동안냉담했던 박수혁과 달리 이한석은 소은정과의 접촉이 잦았다. 그는 그녀의 절망과 성장을 곧이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경험을 응원했고, 강인하게 탈바꿈 한 그녀의 모습에 기뻐했다.그런 그녀의 비보에 누구보다 숨이 막혔던 이한석이다.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구조대를 따라 수색에 참여했다. 죄책감과 자책을 느끼면서도 그녀를 찾는 것이 자신이 살아있는 명분임을 알았다.“대표님, 회사에 처리하실 일이 많습니다. 먼저 돌아가시고, 소식이 있다면 제가 즉시 알려드리도
수색 구역에서 몇 천리쯤 떨어졌을까. 망망대해 가운데, 인적이 완전히 끊긴 섬이 자리잡고 있었다. 빽빽한 나무들은 푸른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울창했으며, 숲의 바깥은 파도와 바람만이 존재했다.소은정은 살아있었다. 이 숨겨진 섬을 3일 째 맴돌고 있었다. 목을 제대로 축일 수도 없었고, 당연히 음식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소호랑의 애착 스카프는 소은정의 어깨 숄이 되었다. 소호랑은 그녀의 널찍한 코트 주머니 안에 웅크려 있었다.다행히도 그녀는 남들보다 대처가 빨랐다. 비행기가 폭발할 것이라 감지한 그녀는 지체없이 낙하산을 메고는 탈출구의 문을 열었다.처음에는 참사에 휘말린 이들을 불쌍해했으나, 지금은 자신마저 죽을 위기였다. 핸드폰은 진작 바다에 빠져 통신구라고는 없었다.소호랑은 떨어지며 충격이 컸던 것인지 내부의 지능 시스템에 장애가 생긴 듯 보였다. 애초에 신호라 할 것도 없었기에 외부와의 연결은 어려워 보였다.그저 구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물이 부족한 상황에서 사람은 일주일은 살 수 있다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녀에겐 곧 한계였다.암초에 털썩 걸터앉은 소은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에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왜 아무도 날 구하러 오지 않는 거야?며칠이나 지났는데, 이렇게나 아무 소식이 없다니. 정말 자신이 죽은 줄 아는 걸까?망할 박수혁은 정말 자신에게 황천길을 맛 보여주고 싶던 걸까? 정말이지 이런 악연이 따로 없었다. 그를 저주하라면 만 번이라도 할 수 있었다.저주도 우선은 살아야만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을 구하러 와준다면 과거의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그 때, 소호랑이 코트 주머니에서 머리를 쏙 내밀었다. 작은 발톱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그 장난기 많던 아기 호랑이가 풀이 다 죽어 있었다. 머리 위 하얗던 털이 잿빛으로 얼룩져 마치 어딘가 버려진 아이 같았다.“기분 안 좋아 보여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