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왜 자신이 그 사람의 뒷모습에 이렇게 큰 반응을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기사님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녀는 차문을 열고 나가 그 사람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이렇게나 빨리 자취를 감췄다니... 소은정은 왠지 모를 실망감을 느꼈다. 뭔가 중요한 걸 잊은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최성문이 차에서 내려 뭔가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소은정은 텅 빈 거리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낮은 목소리에 고독함이 묻어있었다. 착각이었을까? 한순간 그 뒷모습이 전동하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그는 늘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지 저렇게 초라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차에 다시 올라타 휴대폰을 확인했다. 수많은 문자 메시지를 보냈으나 더 이상의 답장은 없었다. “보고 싶어요. 왜 안 와요?” “오늘 새봄이가 학교에서 친구를 때렸어요. 당신이 좀 혼내줘요!” “오늘 당신이랑 되게 닮은 사람을 봤어요. 그쪽이 돌아온 줄 알았어요.” ... 모두가 잠든 밤, 소은정은 우유 한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눈앞에 놓인 약들을 보고 잠시 멈칫하다가 정신과의사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 선생님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새벽에 전화를 걸어도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다. “혹시 잠이 안 와요?”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면에 이상 없다고 하셨잖아요. 왜 오늘은 잠이 안 올까요? 혹시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외부에서 강한 자극을 받을 경우 그럴 수도 있거든요.” 소은정은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갑자기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친절한 선생님이야말로 그 적임자가 아닐까 싶었다. “그 사람이랑 굉장히 닮은 사람을 만났어요.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어도 그녀는 아마 그와 함께 했을 것이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박수혁과 함께한 3년은 수없이 후회했지만 전동하와 함께한 매 순간 그녀는 슬프고 속상했던 적이 없었다. 전동하는 그녀에게 기쁨과 행복만을 안겨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함께할 걸 그랬어요.” 문자를 보내고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문제의 해답을 찾았으나 그는 보지 못한다. 휴대폰을 수리하지 않은 채 본가에 두고왔기에 그녀의 문자메시지를 받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만 깜박거렸다. 곧 시들어갈 백합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처량한 모습이었다. 그 시각 박수혁도 부하의 말을 들으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못 찾았다고? 그럴 리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절름발이였어. 나이는 5,60은 되어보였고 모자랑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누가봐도 수상해 보였어. 주위 노숙자들까지 다 찾아봤어?” “찾아봤는데 방금 설명하신 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비슷하게 생긴 사람조차 찾지 못했어요. 말씀하신 대로 다리가 불편하다면 멀리 가진 못했을 거고 주위에 목격자가 분명 있었을 텐데 누구도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잡아뗐습니다.” 박수혁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cctv는 찾아봤어? 이렇게 큰 도시에 cctv가 없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대표님이 말씀하신 위치의 cctv는 다 확인해 봤는데 얼마 전 해킹당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경찰서에서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아서 계속 관리를 안 하고 있었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cctv에서는 이상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대표님이 잘못 보신건 아닐까요?” 박수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내 눈이 잘못됐다는 건가?” 부하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박수혁이 이를 꽉 깨물며 차갑게 말했다. “아니,
옆의 남성도 일어나서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 모두 문 씨 성을 가진 것도 신기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소은정은 웃으며 손을 맞잡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준서는요? 부모님 되게 보고 싶어 했는데 왜 보이지 않죠?” 문선과 문예성이 눈을 마주쳤다. 문예성이 말했다. “저번에 저희가 급한 일이 생겨서 애를 보낸 거였거든요. 화났는지 저희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네요.” 소은정이 웃었다. “괜찮아요, 조금만 있으면 먼저 올 거예요. 그렇게 속 좁은 애가 아니니까.” 문선이 따라 웃었다. 눈빛에 진심 어린 고마움이 묻어났다. “아버지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희 애 잘 보살펴주셔서 감사해요. 어떻게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희가 너무 바빴어요. 근데 저번에 그 일이 있고나서 아버지가 저희를 호되게 혼내시더라고요. 꼭 애랑 시간 보내고 오라고 하시면서요. 그래서 남편이랑 며칠을 상의해서 오늘에서야 시간이 났네요. 애 데리고 나갔다 오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소은정이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요, 저한테 물을 필요가 있나요? 바쁘신 거 다 알아요. 그래서 이번 출장 때 준서를 데리고 온 거고요. 부모님이랑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요. 준서는 영리하고 기특한 애예요. 제 아들이나 다름없는 애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세요. 언제 데리고 오든지 상관없어요.” 문선이 감격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고마워요. 저희가 애한테 빚진 게 많아요. 부모로서 애랑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게 애한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아는데 방법이 없네요. 저랑 남편이 일생을 바친 일이라 쉽게 떠날 수가 없어요.” 문예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어르신이 도와주셨는데 이젠 그쪽의 도움을 받게 되네요. 저희는 그래서 큰 걱정 안 합니다. 그저 저희 애가 민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에요, 제 딸도 준서를 엄청 좋아해요. 아이들이 많으니 집안이 흥성흥성 하네요. 전혀 민폐가 아니에요.”
소은정은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건네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건 아마 새봄이 처음으로 겪는 타격일 것이다. 준서와 부모님이 떠나자 새봄이는 혹시나 소은정이 책을 자기에게 주기라도 할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다. 할 말을 잃은 소은정을 보면서 우연준이 웃었다. “제가 가르칠까요?”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이젠 어린 아이도 아니니 자기를 통제할 줄도 알아야죠. 사람을 많이 만나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나중에 유치원에 가서도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을거예요.” 우연준이 웃으며 소은정을 바라봤다. “아가씨는 사람도 패는데 사람 앞에 나서는 걸 두려워할까요?” 소은정이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자 우연준이 급히 말을 바꿨다. “대표님은 항상 생각이 깊으시네요. 그럼 전 아가씨가 입을 옷을 준비해 드리러 가겠습니다.” 우연준이 도망치듯 떠나가자 소은정은 책을 탁자우에 올려두고 식당으로 갔다.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윤이한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웠지만 소은정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사를 건넸다. “식사는 하셨어요?” “네, 전 다 먹었습니다. 천천히 식사하세요.” 왠지 모르게 넋이 나간듯한 모습으로 윤이한이 방으로 들어갔다. 옷은 구깃구깃했고 외투도 어제 입고 나간 그대로였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소은정은 거기에 대해 더이상 캐묻지 않고 우연준을 불렀다. “혹시 윤이한 씨랑 무슨 일 있었어요?””아니요, 저흰 그저 파트너일 뿐인걸요.” 소은정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혹시 어제 안 들어왔나요?” “어제 안 들어왔다고요?”우연준이 놀라며 말했다. 소은정이 할 말을 잃은 듯 우연준을 바라보자 그는 그제야 말을 보탰다.“아니 저야 모르죠!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어제 돌아왔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는걸요!”소은정은 한숨을 쉬었다. 아까 눈치가 빠르다고 했던 말은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대표님, 혹시 수상하다고 생각되시면 오늘 밤엔 저랑 가시죠. 저도 대표님 혼자 보내는
관리인은 세심하게도 그런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고 황급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이 순식간에 사막으로 변했다. 사막에는 오아시스도 보였고 바람 따라 날리는 모래알과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소은정은 좀 전에 느꼈던 공포감을 한순간에 잊어버렸다. 그녀는 놀라서 물었다. “바닷속이 아니었네요?” 좀 전에 바다속인 줄 알았던 장면도 사실 가짜였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요트 안 여기저기에 쓰인 최첨단 기술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쨌거나 바다가 아닌 사막을 보고 있으니 그녀의 상태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관리인이 웃으며 말했다. “바닷속이 맞습니다. 개인 잠수함으로 찍은 고화질 화면을 송출한 거예요. 육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을 담았죠. 손님들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루 할까 봐 준비한 겁니다.” 소은정이 웃었다. “그럼 이 사막도 다 촬영한 거겠네요?” “네, 거리가 멀어서 송출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리얼하게 연출했습니다. 아, 그리고 우주를 찍은 것도 있어요. 대표님이 협찬한 통신위성으로 촬영했답니다.” 얘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레드카펫이 금빛으로 가득한 연회장까지 이어져있었다. 내부의 분위기는 조용했지만 교향곡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게 중점이 아니었다. 관리인은 소은정을 데리고 들어갔다. 대부분의 손님들이 이미 와있는 것 같았다. 열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서로 인사를 건넸다. 관리인도 그 틈을 타 눈치 있게 물러났다. 소은정이 입장하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소은정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소은정은 만난 적은 없지만 이 사람들에 대해서 그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예의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몇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유명인사였다. 각종 유명한 잡지에 메인으로 걸리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소은정은 마지못해 웃었다. 마음속 깊이 숨겨두었던 무언가가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전동하가 이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없으니 아마 안 친한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진기종이 얘기하는 것만 들었을 때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막역해 보였다. 또 진기종은 사람을 편하게 대하는 재주가 있어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이제 그녀와 전동하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진기종을 대하는 태도가 저도 모르게 많이 누그러졌다. “네, 하지만 이젠 그쪽으로 자주 가지 않더라고요. 전동하가 있을 때가 그리워요. 아 맞아요, 제가 어떻게 은정 씨를 알게 됐는지 알아요?”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 “이상준이요! 그쪽에서 남아프리카의 석유사업에 투자를 할 때 바로 제 주식을 샀었거든요. 그러다가 대영그룹에서 일이 터지면서 주식을 팔았어요. 저만 땡잡은 거죠.” 진기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영업비밀을 공개했다. 소은정이 웃었다. “그래요? 이상준 씨랑도 아는 사이셨군요.” “알다마다요, 제 조카예요. 이보다 더 가까울 수 없죠. 단지 저희의 발전방향이 다를 뿐이에요. 전 해외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걸 추구하는데 저쪽은 국내를 포기하지 못하니까 연락을 자주 못하는 거죠.” 소은정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영그룹이 비록 국내에서 큰 권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세력이 큰 친척이 있다는 사실은 좀 놀라웠다. “혹시 그거 들으셨어요? 오늘 성세가 준비한 게 유럽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기술이래요. 그런데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진기종과 소은정은 소곤소곤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기도 하고 웃고 떠들기도 했다. 박수혁은 옆에 우두커니 서서 진기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기종은 여유로운 사람이니만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았다. 심지어 박수혁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박수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헛기침을 하며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진대표님, 세 번째 부인이 곧 둘
성세가 멈칫했다. 휠체어에 앉아있던 남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은정을 쳐다봤다. 눈매가 매우 깊고 쓸쓸해 보였다. 처음 보는 눈이었다. 하지만 소은정은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가 실례지만 마스크를 벗겨보려 했다. 하지만 남성이 단번에 그 손길을 제지했다. 거친 손에 꽤 많은 흉터들이 남아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전동하의 길고 가는 그 예쁜 손과 완전히 달랐다. 그 사람은 분명 밝은 사람이었는데 눈앞의 이 남성은 너무도 어둡다. 그는 마스크에 손을 올리더니 천천히 마스크를 내렸다. 소은정은 잔뜩 긴장해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마스크를 벗은 그 얼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오관이 또렷했으나 안색이 창백했다. 몸이 매우 허약한 모습이었다. 눈가 주위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있었다. 소은정은 손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은 제니퍼는 전혀 그녀를 책망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제가 결례를 범했네요,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의심스러우셨을 거예요. 몸이 안 좋아서 주목받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랬습니다. 죄송해요.”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따뜻한 사람이었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장애인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부담스러워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소은정은 방금 자신이 너무 충동적이었고 또 무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사람이 많지 않아 제니퍼는 크게 방해받지 않았다. 다들 간단히 인사를 하고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성세는 웃으면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확실히 모르는 분이시죠?”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나마 기대했던 마음이 또다시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버렸다. 희망을 보았다가 다시 실망에 젖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확실히 전동하가 아니었다. 그녀는 철저히 마음을 접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는 것 같았다. 그녀는 마음속의 환상을 낯선 이에게 투영했다. 저 남성은 전동하가 아니었다. 그녀의 실망
박수혁은 눈썹을 찡그리며 안색이 어두워졌다.“은정아, 나 믿어. 진짜로 내가 그 자식이 몰래 너를 미행하는 걸 봤다니까.”소은정은 냉담한 얼굴로 미안하다는 듯이 성세와 제니퍼를 쳐다보고는 돌아서서 이곳을 떠나 진기종이 있는 데로 갔다.그녀는 갑자기 진기종이 박수혁처럼 말을 귀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다고 느껴졌다!그는 이미 미쳐있었다!제니퍼는 소은정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슬쩍 엿보는데 눈빛을 차분하게 거둬들이고는 차갑게 박수혁을 바라보며 미지근한 어투로 말했다.“내가 왜 그곳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목적을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박 대표님이 궁금하셔서 한마디 할게요. 나는 거기서 친구를 기다렸고, 친구가 마중 와서, 친구 차를 타고 바로 떠났거든요. 박 대표님과 소 대표님은 아예 보지 못했거든요. 그런 와중에, 박 대표님은 참말로 저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아무렇게나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쪽한테 떠돌이 취급 받아야 합니까?”박수혁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데 성세가 옆에서 기침 소리를 한번 내며 말을 뗐다.“됐어요 됐어요. 다 오해잖아요. 그만하세요. 두 분 개인적인 원한도 없는데 볼썽사납게 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소 대표님이 많이 난처해하신다고요. 박 대표님, 눈치채지 못하셨나요?”그가 이렇게 주의를 주자 박수혁의 안색이 약간 변하기 시작했다.그는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소은정이 떠날 때의 어이가 없는 눈빛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그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말했다."내가 쓸데없는 생각 했다면 사과할게요,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네요."박수혁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성세가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휠체어를 밀어보는데 휠체어가 앞으로 나가지 않자 그제야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제니퍼의 휠체어는 타인의 도움 없이도 직접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제니퍼, 기분 상해 하지 마요. 제니퍼가 와준 것만으로 난 기뻐요.”제니퍼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가서 일 보세요. 본격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