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오랜 경험에서 나온 근엄함과 위압감, 그건 누가 가르친다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민하준은 자신이 어르신의 모든 인맥과 자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했다.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일 뿐이었다.어르신은 한바탕 분노를 터뜨리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그리고 낮고 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놈이 데려간 거 맞아. 내가 소홀했어. 어떻게든 그 아이는 내가 구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구해준다고 했으면 이 목숨 던져서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할게!”말을 마친 어르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그는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구경태는 다급히 다가가서 노인을 부축했다.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바깥이 소란스러웠다.문밖을 지키던 어린 직원이 들어와서 보고했다.“유 사장님 오셨습니다.”구경태가 인상을 쓰고 있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어르신이 구경태를 보며 말했다.“자네가 가. 경한이가 뭘 원하는지 알아. 경한이 시켜서 한유라 데려오라고 해. 서로 개처럼 물어뜯게 해보자고!”구경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사무실을 나갔다.그는 미소를 지으며 유경한에게 다가갔다.“유 사장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유경한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민하준이 영감님 여자를 데려갔다면서? 불의를 보고 모르는 척할 수 없어서 내가 왔지. 민하준 요새 좀 잘나간다고 안하무인이네. 이럴 때 기강을 잡지 않으면 하늘 높은 줄 몰라! 어떻게 한유라를 말없이 빼돌릴 야무진 생각을 했지? 영감님을 대놓고 무시한 거잖아?”구경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래. 안 그래도 내가 영감님께 우리가 호랑이새끼를 키운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영감님께 대놓고 선전포고한 거잖아!”유경한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돼. 애가 주제를 몰라. 구 실장, 우리야 영감님 모신지 오래 됐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잖아. 미꾸라지새
바깥에서 총탄이 빗발치고 매캐한 탄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한유라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여기서 죽고 싶지 않았다.민하준은 든든하게 그녀의 전방을 지키고 있었다.이렇게 빨리 위험이 찾아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그리고 사람이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조금 전까지 총을 들고 적과 대치하던 어린 청년이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져 시체로 나뒹굴었다.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후방을 바라보았다.곽현은 최전방으로 달려나가 길을 트고 있었다.하지만 유경한의 인원들은 집요하게 민하준을 잡으려는 듯, 포위망을 점점 좁히고 있었다.민하준은 영감이 보냈다는 것을 직감했다.하지만 그래서 뭐?여기까지 오면서 도덕과 양심은 이미 개나 줘버렸다.그는 무자비하게 총을 갈겼고 적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한유라는 구석에 숨어 온몸을 떨고 있었다.그녀는 멍하니 민하준의 귓가로 총탄이 스쳐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지금 민하준의 등을 떠밀면 총 맞고 죽지 않을까?이 인간만 죽으면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닐까?그러면 힘겹게 증거를 수집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거래 시간을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민하준만 죽는다면.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민하준을 잡고 있던 손을 빼려고 힘을 썼다.그리고 그 동작을 민하준도 눈치챈 건지 잡고 있는 손에 힘을 꽉 주며 그녀에게 말했다.“유라 겁먹지 마. 내가 다 해결할 수 있어.”말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총을 쏘았다.한유라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전방에 있던 곽현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바라보다가 소리쳤다.“뒤 조심해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총성이 울렸고 이어서 한유라의 자지러진 비명소리가 저택을 울렸다.놀라운 점은, 한유라의 등을 노리던 총탄에 민하준이 맞았다는 점이었다.그는 순식간에 몸을 놀려 자신의 몸으로 한유라를 감쌌다. 총탄을 맞은 그의 어깨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곽현의 눈빛이 복잡해졌다.노경우가 어디서 난 건지 수많은 인원들을 데리고 전장에 뛰어들었다.유경
그 말을 들은 곽현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눈물을 질질 짜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의지는 확고했다.그녀의 시선은 집요하게 민하준을 쫓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를 엄청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내뱉은 말은 칼 같고 단호했다.곽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어차피 그녀의 의지를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그는 민하준이 한유라를 구하다가 다친 일 때문에 그녀가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져서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한유라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민하준을 더 증오하고 있었다.바깥.민하준은 음침한 눈빛으로 유경한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아저씨, 그만 나와요.”차 뒤에 숨어 있던 유경한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서서히 일어났다.“하준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졌어. 앞으로 네가 하는 일에 더 이상 방해하지 않을게.”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한테 투항하는 건 모양새가 빠지지만 일단은 목숨을 부지하는 게 우선이었다.유경한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하준아, 나도 선동에 당한 거야. 사실은 말이지….”민하준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유경한은 질질 끌려 나와서 쓰러진 노경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유경한은 시체를 보고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우리 애들도 많이 죽었어. 그러니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자.”“웃기는 소리 하네! 내 남자를 죽인 주제에 자기는 살겠다고 넘어가자고?”2층에서 눈물범벅이 된 여자가 뛰어나오며 욕설을 퍼부었다.그녀는 총격전이 시작했을 때부터 2층에 숨어 있었기에 다치지 않았다.하지만 노경우가 쓰러지는 모습을 봤을 때, 가슴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몰려왔다.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쓰러진 사람에게서 권총을 빼앗아 유경한의 머리를 겨누었다.“죽여 버릴 거야!”그렇게 소리치는 그녀의 눈빛에 깊은 절망이 담겼다.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노경우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도 일
잠시 후, 의사가 도착했다.민하준은 출혈과다로 기절했다.부하들이 그를 침실로 옮겼다.주변에 온통 그의 부하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한유라는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그녀는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막았다.아직도 총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악몽이었다.예전에 소은정이 사고를 당할 뻔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 그녀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그녀는 항상 평화주의를 외치고 다녔다.그런데 정작 자신이 이곳에 와보니 여태 알았던 세계관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소은정은 아마 그녀에게 경험담을 말할 때도 잔인한 장면은 숨기고 말했을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신은 말짱한테 괴로웠다.“다 나가세요. 환자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요!”의사는 잔뜩 긴장했으면서도 단호하게 사람들을 내쫓았다.부하들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의사를 쏘아보았다. 마치 실수라도 하면 당장 목을 치겠다는 태세였다.언젠가부터 민하준에게도 힘이 생겼다.부하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이 곧 그의 힘이었다.주방장이 나서서 그들을 바깥으로 내보냈다.“다 나가. 여기서 버티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긴장해서 진료를 못 보잖아. 여긴 나랑 한유라 씨가 지키고 있을 테니 걱정들 하지 마!”부하들 중 한 명은 구석에서 떨고 있는 한유라를 힐끗 보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형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저 여자를 못 믿겠어서 그러죠. 저 꼬라지 좀 보세요.”부하들은 너도나도 한유라를 비웃었다.유독 곽현만 웃지 않았다.주방장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살생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누군들 안 무섭겠어? 게다가 여자야. 형님이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몰라? 이러다가 형님 깨면 한유라 씨가 너희들이 자기 비웃었다고 고자질하면 어쩌려고 그래?”부하들은 분노한 눈빛으로 방시혁을 쏘아보았다.“이거 너무한 거 아니오?”주방장은 힘껏 사람들을 밖으로 밀었다.“다 나가! 의사 선생님 진료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까 가서 샤
한유라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안으로 들어가서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주방장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웃으며 말을 건넸다.“맛있는 냄새가 나서 와봤더니 유라 씨가 있었네요. 형님이 이 사실을 알면 아마 사발도 씹어 드실 겁니다!”한유라는 최대한 죄책감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날 구하다가 다쳤잖아. 이런 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주방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요. 형님이 한유라 씨를 데려온 과정이 좀 과격하기는 해도 결국엔 미련을 놓지 못해서잖아요. 그러니까 형님한테 잘해줘요.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준 남자잖아요!”한유라는 슬픔을 머금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다 지나간 일인걸. 이거로 우리 서로 빚진 거 없는 거야. 이제 과거로 돌아가지도 못하잖아. 사람들이 심해그룹 사모님이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하면 다들 비웃을 거야. 아마 그 집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겠지.”주방장은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한유라 씨는 똑똑한 사람이니까 이해할 거예요. 우리가 하는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인 건 알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아무도 한유라 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한유라 씨가 원하는 건 형님이 다 해주실 거고 형님 신변에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내조자가 필요하죠. 서로 원하는 걸 얻었으니 된 거죠, 뭐. 우리가 하는 일이 범죄 행위이긴 하지만 그건 국내 한정이고 해외에서는 아무도 이런 일을 신경 쓰지 않아요.”말을 마친 주방장은 그녀에게 가서 쉬라고 하고 자기가 가스레인지 앞에 마주섰다.그는 형님과 이 여자가 더 가까워지기를 바랐다.그녀가 독을 타거나 그런 걸 걱정한 건 아니었다.어차피 그녀의 일거일동은 전부 민하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으니 독을 타려고 해도 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한유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준이가 너무 위험한 일을 하고 있어서 걱정돼. 노경우도 허무하게 갔잖아.”주방장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그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곽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그럼 우리한테 불리하잖아요. 우리가 여기를 먹은지 얼마되지도 않았고 아직 고객과의 신뢰도 쌓지 못했는데 영감님 쪽에서 손을 쓰면 주도권을 빼앗기는 게 아닌가요?”민하준은 매서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곽현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급한 기색을 내비쳤다.“형님, 우리도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저쪽에서 움직이면 승산이 거의 없어요. 유일한 방법은….”“그게 뭔데?”“독사를 우리 고객으로 만드는 거죠. 동남아에서는 꽤 탄탄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만약 그쪽이랑 손을 잡으면 영감님 쪽에서 먼저 공격해 올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죠.”한유라는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그녀는 신중한 표정으로 곽현의 눈빛을 살폈다.겉으로 보면 모든 게 민하준을 위해서, 걱정해서 이러는 것 같았다.민하준도 그를 엄청 신임하고 있었다.잠시 정적이 흘렀다.한유라는 숨을 죽이고 그들의 대화를 기다렸다.민하준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오늘 독사를 만났어. 생각처럼 교활한 놈이더라고. 말하는데 빈틈을 주지 않아. 영감님하고 오래 거래하기도 했고. 그쪽보다 더 높은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 한, 우리 쪽으로 완전히 넘어올 것 같지는 않아.”“일단 손해보는 장사부터 시작해야겠군요.”민하준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쪽에 사람을 보내서 시간과 장소 확인하고 내가 직접 나갈 거야.”곽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직접 가신다고요? 너무 위험해요. 그런 건 제가….”민하준이 그의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이번에는 내가 직접 가야 해. 걱정하지 마. 여긴 국내도 아니고 지키는 사람이 몇 없어. 그쪽이랑 장소만 잘 확인하면 안전할 거야.”곽현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같이 가겠습니다.”“그래.”민하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유경한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어?”“아직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여자한테 총 맞아 뒤지는 종말이라니. 찌질하긴 해도 본인
옆에 있던 부하들이 웃음을 터뜨렸다.한유라는 얼굴을 붉히며 자리를 떴다.여기 오기 전까지 겪었던 일이 아니었으면 민하준의 이런 배려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사실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민하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주방에서 요란하게 요리를 준비하던 주방장이 한유라를 반기며 말했다.“한유라 씨, 어서 먹어요. 이건 형님이 특별히 부탁하신 특제 메뉴인데 맛있어요.”한유라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아 식사에 집중했다.현지 요리는 그리 맛이 없었다. 다행히 주방장이 요리를 잘해서 다른 반찬은 먹을만했다.그녀는 별장에서 하루를 보냈다.민하준은 다음 날에 같이 데이트나 나가자고 했다. 정말 데이트가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그들을 따라 나온 자는 곽현과 주방장 둘뿐이었다.그녀는 곽현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기회가 없었다.그들은 하루종일 현지 관광지를 돌아다니며 여가를 즐겼다.그렇게 2주가 흐른 어느 날.쇼핑을 하다 지친 한유라는 크루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잠시 낮잠을 자는데 민하준이 그녀를 깨웠다.한유라가 인상을 쓰자 그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가자. 중요한 자리에 가기로 했어.”한유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어디 가는데?”“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민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밖에는 차가 이미 대기 중이었다.평소처럼 나들이가 아닌 검은색 제복으로 무장한 민하준의 부하들과 수십 대의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한유라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별장에서 안면을 텄던 사람들은 아니었다.온몸에서 살기를 내뿜는 것이 잘 훈련된 용병 같았다.민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고는 손을 잡고 차량을 향해 걸어갔다.방탄복으로 갈아입은 주방장이 평소보다 근엄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어주었다.한유라는 그를 힐끗 보고는 긴장한 마음으로 차에 올랐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움직인다는 건 일반 행사는 아닌 것 같았다.
차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한유라는 휘청거리며 의자를 잡았다.한유라의 다리에 자그마한 가방 하나가 나타났다.그녀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번 거래, 저쪽에서 널 지목했어. 안 그러면 우리를 못 믿겠대.”한유라는 불에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뜨끔했다.“이게 무슨….”남자는 건조한 손으로 그녀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온몸에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걱정하지마. 나랑 시혁이가 뒤에서 엄호해 줄게. 그리고 우리가 데려온 애들도 있는데 뭐가 두려워?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게.”부드럽지만 단호한 말투였다.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한유라를 더러운 지옥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한유라는 독사가 숨통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이제는 조금 믿어줄 줄 알았는데 여전히 그녀의 마음을 가지고 계산질이나 하고 있었다니.처음부터 자상하게 대한 것도, 그녀를 위해 총을 맞은 것도 연기로 보였다.한유라는 굳은 표정으로 방시혁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들었다.“한유라 씨, 어차피 이제 형님 사람이잖아요. 뭔가를 증명해야 애들이 한유라 씨를 진짜 가족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장민이도 한유라 씨가 못 미더워서 싸가지 없게 대한 것 아닙니까?”“한유라 씨가 직접 물건을 거래하고 오면 앞으로 다들 형수님이라고 불러드릴 거예요. 모두가 형수님 말을 형님 말처럼 믿고 따르게 될 거라고요!”한유라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누가 그런 걸 바란대? 난 처음부터 너희들과 같은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었어. 그런데 범죄에 날 끌어들이겠다고? 내가 언제 너희들 인정이 필요하다고 했어?”민하준은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한유라, 별거 아니야. 정말 간단한 거야. 몇 분만 딱 참으면 끝나. 다른 의도는 없어. 어차피 널 놓아줄 생각도 없으니 내 옆에서 마음 편히 살아. 하지만 애들에게도 뭔가는 보여줘야 하잖아? 노경우 애인이 왜 애들한테 인정을 받았는지 알아?”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하준을 노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