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전동하는 참았던 모든 말들을 억지로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엄하게 굴려다가도 아이의 귀여운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으면 아무 데도 안 보내고 내 옆에 꼭 잡아두고 있었을 텐데...’하지만 곧 전동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아니야. 정신차려. 애교 공세에 넘어가지 말자.’아이의 엉덩이를 톡 때린 전동하가 물었다.“정말 보고 싶었던 거 맞아?”“그럼요.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마이크가 전동하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아빠도 너 보고 싶었어... 하지만...’한편, 마이크는 전동하의 엄한 눈동자가 풀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애교를 부려댔다.아들의 얄팍한 수작이라는 걸 전동하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보내는 부자만의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말썽 피우면 바로 해외로 보내 버릴 거야. 은정 씨, 임신까지 했단 말이야. 화 나게 하면 안 돼. 알겠지?”“뭐... 뭐라고요?”마이크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였다.이에 전동하가 아이의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너 동생 생겼다고. 안 좋아?”한참을 생각하던 마이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좋... 좋아요.”“그래. 마이크가 축하해 줘서 아빠도 기쁘네? 걱정하지 마. 동생 생겨도 마이크에 대한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마이크는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었다.마이크에게 소은정은 나름 첫사랑이나 다름 없었다.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 첫사랑을 빼앗아간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니!게다가... 임신이라니!하지만 똑똑한 마이크는 곧 이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아니, 첫사랑을 잃은 슬픔보단 소은정을 닮은 동생이 생길 거란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나 여신님한테 축하 인사 하고 올게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이크가 쪼르르 방을 나섰다.‘역시 애는 애라니까...’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잠
전동하의 말을 곰곰히 되새기던 소은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우리가 시간 내서 자주 만나러 가요. 아, 휴가 내서 여행 가는 건 어때요? 요즘 애들 맨날 공부 공부, 오랜만에 방학인데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야죠.”다음 날.전동하가 회사로 출근하자 소은정은 바로 기사에게 부탁해 마이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깔끔한 멜빵바지를 입은 마이크는 꼭 동화책에서 나오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예쁜 누나, 오늘은 우리 두 사람만 노는 거예요?”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건드린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그럼. 우리 오늘 놀이동산 갈까?”놀이동산.마이크 또래 아이들 중에 놀이동산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네!”마이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출발합시다...”그 모습에 기사마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는 내내 옆에서 재잘대는 마이크를 보고 있자니 소은정의 기분도 덩달아 붕 떠올랐다.‘다행이야. 동하 씨랑 결혼한 것도 내가 임신한 것도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줘서.’잠시 후, 놀이동산에 도착한 마이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다시 돌아온 마이크가 손가락으로 바이킹을 가리켰다.“나 저거 타고 싶어요!”고개를 든 소은정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손이 저도 모르게 배로 향했다.평소라면 온갖 스릴있는 놀이기구들을 놀아제꼈겠지만 지금은...그녀의 망설임을 눈치 챈 건지 마이크가 말을 이어갔다.“나 혼자 가서 놀 테니까 예쁜 누나는 여기서 기다려요!”“조심해야 해. 누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 타면 바로 여기로 오는 거야?”“네!”고개를 끄덕인 마이크가 다시 눈앞에서 홱 사라지고 소은정은 바이킹이 보이는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이때 여자 한 명이 스르륵 소은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만삭의 임산부, 몸은 좀 불어난 모습이었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청순함이 넘치는 여자의 정체는 바로 추하나였다.“소은정 대표님?”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추하나가 조심스레 입
추하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절 기억하고 계시네요.”“그럼요. 배가 많이 불렀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하긴... 그 사이에 나도 임신했으니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어서 앉아요. 이제 곧 예정일이죠?”소은정의 호의에 벤치에 앉은 추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도 뱃속의 아이를 느낄 때만큼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네, 열흘 뒤가 예정일이에요.”그녀의 대답에 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아니, 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와도 괜찮아요? 남편은요?”“남편은 회사 갔죠. 조카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같이 나왔어요. 집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요. 워낙 가깝기도 하고.”“그래도 조심해요.”“전동하 대표님이랑 결혼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고마워요. 하나 씨도 엄마 된 거 축하해요.”아무리 입에 발린 말이라도 차마 강서진과 재결합한 걸 축하한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엄마가 된 걸 축하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여기 무슨 일로...”턱끝으로 바이킹을 가리킨 소은정이 대답했다.“저도 아이랑 데이트 중이에요.”사람들로 붐비는 바이킹 쪽을 힐끗 바라보던 추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전 대표님 아들이요?”“네.”이에 추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동하 대표님 좋은 분이시죠. 잘 생기시고 능력도 출중하시고 무엇보다 대표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시니까요. 그런데...”“그런데 뭐요?”“아들이 있는 게 좀... 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새엄마가 된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이 비위 맞추느라 힘드시죠?”추하나의 눈동자에는 동정과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소은정에게도 남 모를 고민이 있겠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아낼 수 없을 뿐...이런 생각에 추하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한편, 어딘가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는 추하나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걸 지적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지라
순간 추하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바로 불쾌하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만도 한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왜 강서진 얘기를 하시는 거지...’입술을 꽉 깨문 추하나가 입을 열었다.“네. 이상하리만치요.”잠깐 망설이던 추하나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절 위해 로펌까지 차려주셨는데... 전 결국 모든 걸 포기해 버렸네요. 제 삶은 그대로예요. 강서진 그 인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제 삶은 딱히 바뀐 게 없어요.”강서진의 얼굴을 떠올리는 이 순간에도 추하나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행복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고개를 끄덕이는 강서진이었지만 추하나는 그런 그에게 일말의 고마움마저 느낄 수 없었다.추하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은정이 다시 바이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늘 높이 치솟는 바이킹, 스릴을 즐기며 꺅꺅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다른 세상에 있는 듯 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투자에 실패하긴 했지만... 솔직히 수익을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대표님 덕분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지... 솔직히 제가 한순간이나마 그렇게 당당하게 살지 않았다면 강서진이 다시 저한테 대시했을까요? 그 사람들 손짓 한번이면 저 같은 건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을 텐데... 대표님 도움이 컸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해요.”추하나가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그녀의 말에 피식 웃던 소은정이 눈초리로 추하나를 힐끗 바라보았다.“아닙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됐겠어요. 다행이네요. 추하나 씨도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잖아요? 과거 일은 잊고 행복하게 살아요.”“새로운 인생... 이요?”소은정의 말을 되뇌이던 추하나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새로운 인생... 그딴 건 없어요. 제 인생은 여전히 지옥이에요. 그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지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소은정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우혁이랑 좋았잖아요. 왜 갑자기 헤어진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는 거라면 대화로 풀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강서진 씨랑 재결합을 해버리다니...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말을 마친 소은정이 조심스레 추하나의 눈치를 살폈다.그녀의 말에 추하나는 꽤 착잡한 표정이었다.그 기억이 추하나에겐 판도라의 상자 같은 존재인 모양이었다.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내가 너무 무례했나?’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한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하긴, 자기 인생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평가를 하겠어.’이런 생각과 함께 소은정이 마이크의 모습을 찾던 그때, 추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저랑 우혁이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연애랑 결혼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우혁이 집안에 대해선 대표님이 잘 알고 계시겠죠. 게다가... 강서진은 박수혁 대표와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고... 제가 강서진 와이프였다는 걸 아셨는지 반대가 심하셨어요. 그 덕분에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고요.”순간 추하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모욕...소은정은 3년간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아마 추하나가 당한 꼴도 그와 다를 바가 없을 테지.고통스러운 기억에 추하나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혁이가 너무... 우혁이는 다른 사람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영혼이잖아요? 저한테도 신경 쓰지 말라고 괜찮다고 하는데... 전 못 견디겠더라고요. 로펌까지 찾아온 어머니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더라고요. 제발 자기 아들 좀 놔달라고 애원하시는데... 그 기분 정말 참담했어요. 차라리 다 뒤엎고 행패를 부리셨더라면 제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 것 같아요. 그럼 제가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그런데도 우혁이는 평생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속 편한 소리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유
눈물을 닦은 추하나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잘못한 거예요? 전 그냥... 우혁이가 주는 거니까 아무 의심없이 마셨는데... 그렇게 헤어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우혁이가 집 앞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날 술에 약을 탄 사람... 우혁이 어머니가 매수한 거였대요. 나랑 결혼하자고 하는 우혁이한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른 남자 아이를 가졌다는 말뿐이었어요.”“그래서... 싫다고 했나요?”추하나가 고개를 저었다.다시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려는 듯 추하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1분 정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1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어요.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 당하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용서해 달래요. 그런데... 전... 도저히 그게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강서진을 선택한 거예요. 적어도 강서진한테는 아무 감정도 없으니까 그 사람한테서 상처받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그런데 우혁인... 도저히 다시 마주할 수가 없더라고요. 날 심연속에서 끌어내준 손으로 다시 지옥으로 밀어버린 그 사람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추하나도, 소은정도 한참을 침묵했다.‘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소은정의 마음 역시 무겁기만 했다.지금까지 소은정이 들었던 건 그저 결론일 뿐, 그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하나 씨는 계속 발버둥치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거야. 모든 사람이 나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건 아니니까.’먼저 침묵을 깬 건 추하나였다.“많이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아이를 봐서라도... 지금의 삶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요. 강서진도 많이 변했어요. 퇴근하면 바로 집에 오고 집안일도 도와주고 매일 꽃다발도 선물로 주고... 한때 제가 그렇게 바랐던 결혼생활이었는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래도 앞으로 우리 세
하지만 깊게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마이크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얼른 저쪽으로 가요.”“그래.”이에 소은정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됐다. 어차피 다 자기 인생 사는 거지 뭐. 내가 무슨 자격으로 조언을 하겠어. 게다가 우혁이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고.’잠시 후, 한참을 뛰어놀던 마이크가 드디어 지친 기색을 드러내고 두 사람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오랜만에 논다는 사실이 어찌나 좋은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이동산을 누비고 다니던 마이크는 여전히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소은정이 휴대폰으로 마이크의 영상을 보내주었다.“이 자식... 안 되겠네요. 스페인 선생님 모셔오는 걸로 하죠...”전동하의 답장을 확인한 소은정이 눈을 흘기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요즘 대치맘이네 애들 학원 죽어라 보내는 엄마들이 그렇게 많다더니. 우리 집은 아빠가 더 유난이네.’한편, 스테이크를 써는 마이크의 입꼬리는 여전히 귀까지 올라가있었다.“오늘 재밌었어?”소은정의 질문에 마이크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재밌었다니 누나도 기쁘네. 다음엔 아빠랑도 같이 오자.”“아빠랑은 됐어요...”마이크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가 무서워? 그러지 마. 우리 마이크 사실은 아빠 많이 좋아하잖아. 마이크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아빠 사실 되게 쉬운 남자다? 몇 마디 달래주면 화 났다가도 바로 풀리고 그래.”하지만 소은정의 말에도 마이크는 그저 묵묵부답인 채로 애꿎은 고기만 썰어댔다.한참 먹던 마이크가 옆에 뒀던 아이패드를 집어들었다.“아, 예쁜 누나. 내가 우리 스페인어 선생님 보여줄까요? 되게 잘생겼어요!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죠!”마이크의 말에 완벽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어떻게 생겼나 싶어 소은정이 목을 빼들었다.아이패드 속 사진을 확인한 소은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전형적으로 잘생긴 유럽인의 외모, 할리우드 톱스타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얼굴이었다.“이분이 스페인어 선생님이시라고?”고개를
진심어린 소은정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내가 예쁜 누나를 속상하게 만들었구나... 그건 안 되지. 다른 건 몰라도 누나가 날 싫어하게 되는 건 죽을만큼 싫어. 어쩔 수 없네. 앞으론 고분고분 말 들어야겠다. 아, 난 언제쯤 성인이 되는 걸까? 빨리 어른이 되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안 봐도 괜찮을 텐데.’한편, 마이크의 긍정적인 대답에 소은정은 싱긋 웃으며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얼른 먹어. 다 먹고 우리 집에 가는 거다?”“네!”마이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누나랑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숙제도 안 해도 되고 캠프도 안 가도 되고!’...다음 날 오후.전동하가 마이크의 스페인어 선생님과 영상통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스페인어와 한국어가 반쯤 섞인 신박한 광경에 과일을 내오던 소은정이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인기척을 느낀 전동하가 바로 영상통화를 꺼버리곤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케빈 선생님이죠?”고개를 끄덕인 전동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그걸 은정 씨가 어떻게...”‘마이크의 교육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은정 씨가 이렇게 정확하게 선생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설마...’전동하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지났다.전동하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은 소은정이 딸기 하나를 입에 문 채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동하 씨가 알려줬잖아요.”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마이크 이 자식... 은정 씨한테는 케빈의 케자도 꺼낸 적 없다고!’잠깐 고민하던 전동하가 케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케빈, 마이크 스페인어 선생님 여자 선생님으로 바꾸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아, 설마 제 수업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그게 아니라 여자 선생님이면 마이크가 더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서요.”...한편, 메일로 급한 파일을 결재하던 소은정이 끝없이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미간을 찌푸렸다.“어, 유라야. 왜 또 무슨 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