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전동하는 참았던 모든 말들을 억지로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엄하게 굴려다가도 아이의 귀여운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으면 아무 데도 안 보내고 내 옆에 꼭 잡아두고 있었을 텐데...’하지만 곧 전동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아니야. 정신차려. 애교 공세에 넘어가지 말자.’아이의 엉덩이를 톡 때린 전동하가 물었다.“정말 보고 싶었던 거 맞아?”“그럼요. 아빠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요!”마이크가 전동하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아빠도 너 보고 싶었어... 하지만...’한편, 마이크는 전동하의 엄한 눈동자가 풀어질 때까지 한참 동안 애교를 부려댔다.아들의 얄팍한 수작이라는 걸 전동하가 눈치 못 챌 리가 없었지만 오랜만에 보내는 부자만의 시간이 싫지만은 않았다.“여기서 지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하지만 말썽 피우면 바로 해외로 보내 버릴 거야. 은정 씨, 임신까지 했단 말이야. 화 나게 하면 안 돼. 알겠지?”“뭐... 뭐라고요?”마이크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충격으로 일렁였다.이에 전동하가 아이의 밤톨 같은 머리를 쓰다듬었다.“너 동생 생겼다고. 안 좋아?”한참을 생각하던 마이크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좋... 좋아요.”“그래. 마이크가 축하해 줘서 아빠도 기쁘네? 걱정하지 마. 동생 생겨도 마이크에 대한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하지만 마이크는 마음이 착잡할 따름이었다.마이크에게 소은정은 나름 첫사랑이나 다름 없었다.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지만 그 첫사랑을 빼앗아간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니!게다가... 임신이라니!하지만 똑똑한 마이크는 곧 이 사실을 덤덤히 받아들였다.아니, 첫사랑을 잃은 슬픔보단 소은정을 닮은 동생이 생길 거란 즐거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나 여신님한테 축하 인사 하고 올게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마이크가 쪼르르 방을 나섰다.‘역시 애는 애라니까...’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잠
전동하의 말을 곰곰히 되새기던 소은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럼 우리가 시간 내서 자주 만나러 가요. 아, 휴가 내서 여행 가는 건 어때요? 요즘 애들 맨날 공부 공부, 오랜만에 방학인데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야죠.”다음 날.전동하가 회사로 출근하자 소은정은 바로 기사에게 부탁해 마이크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깔끔한 멜빵바지를 입은 마이크는 꼭 동화책에서 나오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예쁜 누나, 오늘은 우리 두 사람만 노는 거예요?”아이의 통통한 볼을 살짝 건드린 소은정이 싱긋 웃었다.“그럼. 우리 오늘 놀이동산 갈까?”놀이동산.마이크 또래 아이들 중에 놀이동산을 싫어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네!”마이크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출발합시다...”그 모습에 기사마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가는 내내 옆에서 재잘대는 마이크를 보고 있자니 소은정의 기분도 덩달아 붕 떠올랐다.‘다행이야. 동하 씨랑 결혼한 것도 내가 임신한 것도 이렇게 쉽게 받아들여줘서.’잠시 후, 놀이동산에 도착한 마이크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한참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다시 돌아온 마이크가 손가락으로 바이킹을 가리켰다.“나 저거 타고 싶어요!”고개를 든 소은정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손이 저도 모르게 배로 향했다.평소라면 온갖 스릴있는 놀이기구들을 놀아제꼈겠지만 지금은...그녀의 망설임을 눈치 챈 건지 마이크가 말을 이어갔다.“나 혼자 가서 놀 테니까 예쁜 누나는 여기서 기다려요!”“조심해야 해. 누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 타면 바로 여기로 오는 거야?”“네!”고개를 끄덕인 마이크가 다시 눈앞에서 홱 사라지고 소은정은 바이킹이 보이는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이때 여자 한 명이 스르륵 소은정의 곁으로 다가왔다.만삭의 임산부, 몸은 좀 불어난 모습이었지만 이목구비만큼은 청순함이 넘치는 여자의 정체는 바로 추하나였다.“소은정 대표님?”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추하나가 조심스레 입
추하나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절 기억하고 계시네요.”“그럼요. 배가 많이 불렀네요. 못 알아볼 뻔했어요.”‘하긴... 그 사이에 나도 임신했으니까. 한치 앞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더니...’“어서 앉아요. 이제 곧 예정일이죠?”소은정의 호의에 벤치에 앉은 추하나가 배를 쓰다듬었다.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도 뱃속의 아이를 느낄 때만큼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네, 열흘 뒤가 예정일이에요.”그녀의 대답에 소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아니, 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와도 괜찮아요? 남편은요?”“남편은 회사 갔죠. 조카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같이 나왔어요. 집에만 있었더니 답답해서요. 워낙 가깝기도 하고.”“그래도 조심해요.”“전동하 대표님이랑 결혼하셨다면서요? 축하드려요...”“고마워요. 하나 씨도 엄마 된 거 축하해요.”아무리 입에 발린 말이라도 차마 강서진과 재결합한 걸 축하한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아 엄마가 된 걸 축하한다는 말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대표님은 여기 무슨 일로...”턱끝으로 바이킹을 가리킨 소은정이 대답했다.“저도 아이랑 데이트 중이에요.”사람들로 붐비는 바이킹 쪽을 힐끗 바라보던 추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전 대표님 아들이요?”“네.”이에 추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동하 대표님 좋은 분이시죠. 잘 생기시고 능력도 출중하시고 무엇보다 대표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시니까요. 그런데...”“그런데 뭐요?”“아들이 있는 게 좀... 아,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솔직히 새엄마가 된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이 비위 맞추느라 힘드시죠?”추하나의 눈동자에는 동정과 안쓰러움으로 가득했다.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소은정에게도 남 모를 고민이 있겠지, 그저 다른 사람들이 보아낼 수 없을 뿐...이런 생각에 추하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졌다.한편, 어딘가 그녀를 불쌍하다는 듯 바라보는 추하나의 말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걸 지적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지라
순간 추하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바로 불쾌하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만도 한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왜 강서진 얘기를 하시는 거지...’입술을 꽉 깨문 추하나가 입을 열었다.“네. 이상하리만치요.”잠깐 망설이던 추하나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다시 한번 사과드릴게요. 절 위해 로펌까지 차려주셨는데... 전 결국 모든 걸 포기해 버렸네요. 제 삶은 그대로예요. 강서진 그 인간,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제 삶은 딱히 바뀐 게 없어요.”강서진의 얼굴을 떠올리는 이 순간에도 추하나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행복감도 보아낼 수 없었다.그녀의 말이라면 뭐든 고개를 끄덕이는 강서진이었지만 추하나는 그런 그에게 일말의 고마움마저 느낄 수 없었다.추하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은정이 다시 바이킹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하늘 높이 치솟는 바이킹, 스릴을 즐기며 꺅꺅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다른 세상에 있는 듯 했다.“사과할 필요 없어요. 투자에 실패하긴 했지만... 솔직히 수익을 바란 건 아니었으니까.”“대표님 덕분에 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었을지... 솔직히 제가 한순간이나마 그렇게 당당하게 살지 않았다면 강서진이 다시 저한테 대시했을까요? 그 사람들 손짓 한번이면 저 같은 건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 있었을 텐데... 대표님 도움이 컸다는 거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해요.”추하나가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그녀의 말에 피식 웃던 소은정이 눈초리로 추하나를 힐끗 바라보았다.“아닙니다. 제가 무슨 도움이 됐겠어요. 다행이네요. 추하나 씨도 이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잖아요? 과거 일은 잊고 행복하게 살아요.”“새로운 인생... 이요?”소은정의 말을 되뇌이던 추하나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새로운 인생... 그딴 건 없어요. 제 인생은 여전히 지옥이에요. 그 어떤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지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소은정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우혁이랑 좋았잖아요. 왜 갑자기 헤어진 거예요?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는 거라면 대화로 풀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강서진 씨랑 재결합을 해버리다니... 솔직히 많이 놀랐어요.”말을 마친 소은정이 조심스레 추하나의 눈치를 살폈다.그녀의 말에 추하나는 꽤 착잡한 표정이었다.그 기억이 추하나에겐 판도라의 상자 같은 존재인 모양이었다.한동안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내가 너무 무례했나?’그녀의 말에 대한 대답을 듣는 걸 포기한 소은정이 고개를 돌렸다.‘하긴, 자기 인생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평가를 하겠어.’이런 생각과 함께 소은정이 마이크의 모습을 찾던 그때, 추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저랑 우혁이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연애랑 결혼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요. 우혁이 집안에 대해선 대표님이 잘 알고 계시겠죠. 게다가... 강서진은 박수혁 대표와 친한 친구 사이기도 하고... 제가 강서진 와이프였다는 걸 아셨는지 반대가 심하셨어요. 그 덕분에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고요.”순간 추하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모욕...소은정은 3년간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아마 추하나가 당한 꼴도 그와 다를 바가 없을 테지.고통스러운 기억에 추하나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우혁이가 너무... 우혁이는 다른 사람 시선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영혼이잖아요? 저한테도 신경 쓰지 말라고 괜찮다고 하는데... 전 못 견디겠더라고요. 로펌까지 찾아온 어머니가 제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더라고요. 제발 자기 아들 좀 놔달라고 애원하시는데... 그 기분 정말 참담했어요. 차라리 다 뒤엎고 행패를 부리셨더라면 제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 것 같아요. 그럼 제가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그런데도 우혁이는 평생 결혼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속 편한 소리만 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대화도 없이 유
눈물을 닦은 추하나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제가 잘못한 거예요? 전 그냥... 우혁이가 주는 거니까 아무 의심없이 마셨는데... 그렇게 헤어졌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 우혁이가 집 앞에 찾아왔더라고요. 그날 술에 약을 탄 사람... 우혁이 어머니가 매수한 거였대요. 나랑 결혼하자고 하는 우혁이한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다른 남자 아이를 가졌다는 말뿐이었어요.”“그래서... 싫다고 했나요?”추하나가 고개를 저었다.다시 터져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려는 듯 추하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1분 정도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1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어요.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채 능지처참 당하는 기분이었달까요?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용서해 달래요. 그런데... 전... 도저히 그게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강서진을 선택한 거예요. 적어도 강서진한테는 아무 감정도 없으니까 그 사람한테서 상처받지 않을 자신 있어요. 그런데 우혁인... 도저히 다시 마주할 수가 없더라고요. 날 심연속에서 끌어내준 손으로 다시 지옥으로 밀어버린 그 사람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이 말을 마지막으로 추하나도, 소은정도 한참을 침묵했다.‘내가 괜한 말을 꺼냈네...’소은정의 마음 역시 무겁기만 했다.지금까지 소은정이 들었던 건 그저 결론일 뿐, 그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을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하나 씨는 계속 발버둥치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 손을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거야. 모든 사람이 나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건 아니니까.’먼저 침묵을 깬 건 추하나였다.“많이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요. 아이를 봐서라도... 지금의 삶을 포기할 생각도 없고요. 강서진도 많이 변했어요. 퇴근하면 바로 집에 오고 집안일도 도와주고 매일 꽃다발도 선물로 주고... 한때 제가 그렇게 바랐던 결혼생활이었는데...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래도 앞으로 우리 세
하지만 깊게 생각을 하기도 전에 마이크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얼른 저쪽으로 가요.”“그래.”이에 소은정은 결국 고개를 돌렸다.‘됐다. 어차피 다 자기 인생 사는 거지 뭐. 내가 무슨 자격으로 조언을 하겠어. 게다가 우혁이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고.’잠시 후, 한참을 뛰어놀던 마이크가 드디어 지친 기색을 드러내고 두 사람은 근처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오랜만에 논다는 사실이 어찌나 좋은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이동산을 누비고 다니던 마이크는 여전히 신난 기색이 역력했다.소은정이 휴대폰으로 마이크의 영상을 보내주었다.“이 자식... 안 되겠네요. 스페인 선생님 모셔오는 걸로 하죠...”전동하의 답장을 확인한 소은정이 눈을 흘기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요즘 대치맘이네 애들 학원 죽어라 보내는 엄마들이 그렇게 많다더니. 우리 집은 아빠가 더 유난이네.’한편, 스테이크를 써는 마이크의 입꼬리는 여전히 귀까지 올라가있었다.“오늘 재밌었어?”소은정의 질문에 마이크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네!”“재밌었다니 누나도 기쁘네. 다음엔 아빠랑도 같이 오자.”“아빠랑은 됐어요...”마이크가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가 무서워? 그러지 마. 우리 마이크 사실은 아빠 많이 좋아하잖아. 마이크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아빠 사실 되게 쉬운 남자다? 몇 마디 달래주면 화 났다가도 바로 풀리고 그래.”하지만 소은정의 말에도 마이크는 그저 묵묵부답인 채로 애꿎은 고기만 썰어댔다.한참 먹던 마이크가 옆에 뒀던 아이패드를 집어들었다.“아, 예쁜 누나. 내가 우리 스페인어 선생님 보여줄까요? 되게 잘생겼어요! 완벽한 외모의 소유자죠!”마이크의 말에 완벽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어떻게 생겼나 싶어 소은정이 목을 빼들었다.아이패드 속 사진을 확인한 소은정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전형적으로 잘생긴 유럽인의 외모, 할리우드 톱스타들과 견주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얼굴이었다.“이분이 스페인어 선생님이시라고?”고개를
진심어린 소은정의 말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마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내가 예쁜 누나를 속상하게 만들었구나... 그건 안 되지. 다른 건 몰라도 누나가 날 싫어하게 되는 건 죽을만큼 싫어. 어쩔 수 없네. 앞으론 고분고분 말 들어야겠다. 아, 난 언제쯤 성인이 되는 걸까? 빨리 어른이 되면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안 봐도 괜찮을 텐데.’한편, 마이크의 긍정적인 대답에 소은정은 싱긋 웃으며 아이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얼른 먹어. 다 먹고 우리 집에 가는 거다?”“네!”마이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역시 누나랑 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숙제도 안 해도 되고 캠프도 안 가도 되고!’...다음 날 오후.전동하가 마이크의 스페인어 선생님과 영상통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스페인어와 한국어가 반쯤 섞인 신박한 광경에 과일을 내오던 소은정이 고개를 살짝 들이밀었다.인기척을 느낀 전동하가 바로 영상통화를 꺼버리곤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케빈 선생님이죠?”고개를 끄덕인 전동하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그걸 은정 씨가 어떻게...”‘마이크의 교육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던 은정 씨가 이렇게 정확하게 선생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설마...’전동하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지났다.전동하의 질문에 어색하게 웃은 소은정이 딸기 하나를 입에 문 채 서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동하 씨가 알려줬잖아요.”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전동하가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마이크 이 자식... 은정 씨한테는 케빈의 케자도 꺼낸 적 없다고!’잠깐 고민하던 전동하가 케빈에게 문자를 보냈다.“케빈, 마이크 스페인어 선생님 여자 선생님으로 바꾸고 싶은데 가능할까요?”“아, 설마 제 수업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그게 아니라 여자 선생님이면 마이크가 더 말을 잘 들을 것 같아서요.”...한편, 메일로 급한 파일을 결재하던 소은정이 끝없이 울리는 휴대폰 진동에 미간을 찌푸렸다.“어, 유라야. 왜 또 무슨 일인데.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문준서는 그녀의 눈물을 보고 죄책감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새봄이가 점차 울음이 잦아들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새봄이는 길게 심호흡하고 감정을 식혔다.준서에게는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문준서는 울어서 빨갛게 부은 새봄이의 눈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커피 계속 마실 거야? 안 마실 거면 우리 집에 올래? 내가 맛있는 커피 만들어 줄게!”새봄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준서는 소녀의 손을 잡고 핸드백을 챙긴 뒤, 밖으로 나갔다.커피숍 직원들마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새봄이는 그와 손을 잡고 걷고 있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설레었다.어릴 때는 항상 손을 잡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딘가 어색했다.어린 문준서는 항상 새봄이를 우선으로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럴까?문준서는 소녀가 기억하는 어린 준서가 아니었다. 그의 거대한 뒷모습은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문준서가 웃으며 소녀에게 물었다.“뭘 그렇게 뚫어지게 봐?”“키 몇이야?”“192, 만족해?”새봄이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키 큰 사람 별로라고 하면 뼈라도 깎을 거야?”문준서는 웃으며 소녀의 손을 잡아끌었다.“응. 네가 집도해.”새봄이도 덩달아 웃었다.10여 년을 떨어져 지내다 보니 처음에는 정말 보고 싶었지만 점차 감정은 옅어져 갔다. 매번 부모님에게 준서의 안부를 물을 때면 그들은 머리만 흔들었다.그 뒤로 새봄이는 더 이상 준서를 찾지 않았다.말없이 사라진 그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가 해외에서 무사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던 것 같았다.문준서는 길가에 세워진 스포츠카로 다가갔다.차도 주인을 닮아 검은색으로 차분하고 화려하지 않은 디자인이었다.처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새봄이는 그가 문준서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티없이 맑고 순수했던 눈동자는 어릴 때와 비교해 변한 게 전혀 없었다.하지만 소녀
새봄이가 떠난 뒤로 전동하는 한숨을 달고 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학교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따분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곱게 자란 새봄이지만 거만하지 않고 성격이 활발했기에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아이는 가끔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파티를 벌였다.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즐겼다.가끔 센 강변에 가서 산책도 하고 석양을 감상하며 오리에게 먹이를 주기도 했다.그런데 가끔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주변에 수시로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새봄이는 아이스크림을 들고 홀로 석양 아래에서 산책을 즐겼다. 손에는 엄마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한정판 명품백이 들려 있었다.이목구비가 화려한 동양소녀가 길을 걷고 있자 무수히 많은 시선들이 따라다녔다.하지만 프랑스의 치안은 별로 좋지 못했다.새봄이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이 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남자가 소녀의 핸드백을 가로채서 사람들 틈으로 도주했다.놀란 새봄이는 다급히 남자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도둑이야!”안타깝게도 유럽에서 비슷한 사건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아무도 핸드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했다.새봄이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기에 끝까지 남자를 쫓아갔다.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뒤를 돌아보며 뭐라고 욕설을 지껄이더니 골목으로 진입했다.새봄이가 쫓아갔을 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소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을 때, 갑자기 옆 골목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남자는 바로 새봄이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손이 소녀에게 닿기도 전에 누군가가 달려와서 남자를 걷어찼다.새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훤칠하고 잘생긴 동양인 남자가 등 뒤에 서 있었다.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새봄이의 앞으로 다가갔다.그에게서 익숙한 우드향이 풍겼다.그는 천천히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가늘고 예쁜 손이었다.녹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
전동하는 그날 밤 새봄이에게 해외유학 얘기를 꺼냈다.새봄이는 고민도 해보지 않고 바로 동의했다.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프랑스만 제외하고 아무데나 괜찮다고 했다.전동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준서 때문에 프랑스에 가기 싫은 거야?”새봄이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걔가 누군데? 하나도 기억 안 나! 걔 얘기하지 마!”아이는 억울함을 토로했다.줄곧 아이의 옆을 지켜주던 오빠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더 이상 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오빠는 없었다.아이는 준서가 보고 싶었지만 준서는 떠날 때 편지 한장 남기지 않았다.전동하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새봄이도 이제 컸잖아. 준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연락이 없던 것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나중에 준서 만나도 너무 준서를 욕하지 마.”새봄이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버렸다.부모의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끔 딸이 울기라도 하면 전동하는 항상 달려와서 딸을 위로해 주었다.태어날 때부터 다이아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그런데 어느 날 오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준서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아이는 버려진 느낌을 받았다.출국이 결정되었으니 전동하는 아이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결국 새봄이는 유럽을 선택했다.마치 누군가가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것처럼.떠나기 전, 아이는 일곱 남자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아이가 출국하는 날, 온가족이 나와서 새봄이를 배웅햇다.새봄이는 딱히 슬프거나 아쉬운 티를 내지 않았다. 마치 부모님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아이는 활짝 웃으면서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전동하와 소은정은 영지까지 데리고 같이 프랑스로 출국하기로 했다.일가족이 탑승수속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뒤에서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새봄아!”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허겁지겁 이쪽
눈 깜짝할 사이에 새봄이는 어엿한 숙녀로 자라났다.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녀에게는 남자친구가 생겼다.새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렸다.소은정은 딱히 말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이런저런 경험을 다 해보는 게 아이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새봄이가 진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전동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그는 아이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새봄이의 반응은 시큰둥했다.“친구들이 다들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나만 솔로면 유행에 뒤떨어지잖아. 그래서 만나보기로 했어.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잖아! 중학교 때부터 연애하는 애들도 많다고!”전동하는 인내심 있게 아이를 타일렀다.“그래도 넌 아직 너무 어려. 밖으로 나가 사람들과 더 많이 접촉해 보면 알게 될 거야. 남자는 다 믿을 놈이 못 돼….”“그럼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도 사랑에 눈이 멀어서 만난 거겠네?”어릴 때부터 말싸움에는 절대 지지 않던 새봄이는 미소가 소은정을 닮은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성장했다.그리고 총기 있는 눈동자와 말빨, 그리고 큰 키는 전동하를 많이 닮았다.소은정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딸이 나중에 남자 여럿을 울릴 거라는 것을 알기에 아이에게는 사랑을 하면 꼭 아빠랑 엄마처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라고 강조했다.새봄이는 전동하가 말이 없자 달려가서 그의 팔짱을 꼈다.“아빠, 걱정하지 마. 그냥 연애는 어떤 느낌인가 궁금해서 해보는 거야.”“그래서 그 남자친구는… 어떤 사람이야?”“어느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전동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몇이나 사귀었는데?”“다른 애들은 다 한명하고만 사귀는데 난 다른 애들 따라하기 싫어. 그래서 하루에 한 명, 일주일에 일곱 명이야! 주일을 정해서 따로 만나!”새봄이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전동하는 입을 뻐금거리며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사랑에 깊이 빠지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점이랄까.
다른 CCTV에서 정황이 포착되었다. 직원이 그쪽으로 다가가다가 발을 헛디디며 하마터면 술잔을 쏟을 뻔한 정황이었는데 그때 잔을 안쪽으로 옮기며 위치가 바뀐 것 같았다.독극물 검사결과도 나왔다.청산가리였다.심청하의 몸에서 나온 독극물과 약병에 있던 독극물 성분이 일치했다.살인을 계획했던 심청하가 제 꾀에 당한 상황이었다.아마 그녀는 죽을 때까지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 몰랐을 것이다.형사들은 밤을 새워 CCTV를 확인하면서 이 약병의 출처가 남유주의 큰어머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그렇게 큰어머니가 경찰에 소환되었다.큰어머니는 숨김없이 사건의 경과를 진술했는데 심청하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넘어지는 틈을 타 약병을 바닥에 버렸다고 했다.심청하가 포기를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다가 제 꾀에 당했다는 말도 했다.형사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물었다.“그랬다는 증거 있나요?”“당연히 있죠.”큰어머니는 딸인 남연을 호출했다.“형사님이 묻는 대로 사실을 대답해! 떨지 말고!”남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냈다.그리고 차 안에서 심청하와 대화했던 녹음을 재생했다.“그 여자가 아빠랑 엄마를 죽이겠다며 협박했어요. 그 파티 초대장은 제가 거금을 주고 산 거예요. 우린 태한그룹 사모님과 친척관계에요. 평소에 왕래는 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고요!”남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형사님, 제가 아는 건 다 얘기했어요.”형사는 그녀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을 포착했다.“전에 남유주 씨를 해하려 한 적이 있죠?”“그래! 너도 직접 남유주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왜 쏙 빼고 말해?”녹음본에 담겼던 심청하의 목소리였다.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파일은 편집을 거치지 않았다.남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것도 심청하가 협박해서 했어요. 하지만 언니 앞에서 이미 잘못을 인정했고 사과도 했어요. 언니는 저를 용서했고요.”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건 박수혁 대표와
심청하는 한참 침묵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무슨 방법을 쓰든 그 사람들과 걔를 만나게 해. 안 그러면 이 약은 네 부모님 배 속으로 들어갈 거야!”남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알겠어요.”결국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명령을 받아들였다.며칠 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오늘은 자선회가 열리는 날이었는데 박수혁은 남유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자선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자선회에서 많은 보석과 골동품을 구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자선회가 끝나고 파티가 이어졌다.남연의 부모는 힘겹게 초대장을 입수했다.심청하는 파티홀에서 이어질 장면을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남연의 부모는 뒤늦게 파티에 참석했고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파티가 다 끝난 뒤였다.심청하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는 언제가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SC그룹에서는 지분 사건으로 그들을 물고늘어질 것이다.본사에서 움직이기 전에 남유주를 제거해야 했다.잠시 후, 남유주의 큰어머니는 사람이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그리고 약을 꺼내 술병에 쏟아넣으려고 했다.마침 취객이 그녀의 어깨를 부딪히고 지나가며 그녀가 바닥에 쓰러졌다.남유주 큰어머니가 고통에 신음을 흘리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약병은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구석진 곳으로 굴러갔다.심청하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정말 뭐 하나 일을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일가족이었다.남유주의 큰아버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다급히 다가가서 아내의 손을 잡고 구급차를 호출했다.호텔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이 달려왔고 큰어머니를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호송했다.심청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그녀는 구석진 곳으로 가서 아무도 안 보는 틈을 타 약병을 손에 쥐었다.그리고 기회를 봐서 약을 와인에 쏟고 흔들었다.모든 게 끝난 뒤, 심청하는 손에 난 땀을 닦았다.이미 살인을 하기로 마음먹은 그녀였지만 직접 모든 일을 끝내고 나니
남유주는 미소를 지으며 소은정과 박수혁 사이를 스스럼없이 얘기했다.남유주는 지나간 둘의 과거를 신경 쓰지 않았다.박수혁은 소은정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고 그들은 각자 다른 사람과 행복한 삶을 살기로 했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남유주가 건넨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팔찌가 있었다, 반짝이며 아름다운 화려한 목걸이의 모든 보석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본연의 미와 섬세함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느낌이 들게 했다.그녀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몇 년 동안 이런 것을 모으기를 좋아했는데... 고마워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남유주는 화해의 의미로 소은정에게 팔찌를 건넸다.소은정은 미소를 지으며 팔찌를 착용했다."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우린 서로 용서하는 게 어때요?"소은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안타깝게도 난 어떤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네요…"그녀는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고 남유주에게 건넸다.남유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류 내용을 살펴보았다."이게 뭐예요?""원래는 소찬학의 주식이었지만 몇 년 전에 회사 소유로 되었어요. 아빠가 나이도 있고 해서 주식 대신 배당금을 주기로 했었어요, 근데 더는 그 사람의 것이 아니니까, 아빠가 유주 씨한테 넘기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는 작은 선물이니까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굳었던 남유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계약서를 다시 내밀었다."전 받지 않을래요.""유주 씨, 이게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요? 술집을 사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이 돈으로 그 건물 같은 거 열 개는 살 수 있어요."소은정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남유주는 웃음을 참고 머리를 흔들었다."이걸 받으면 소찬학이 내 생부라는 것을 인정하는 거잖아요, 끊을 수 없는 혈연관계를 받아들여야 하고, 내가 관여하지 않은 과거의 강탈과 억압을 직면해야 해요. 태어난 이래로 부모가 없는 존재로 살아왔고, 아직 그것을 원하지 않아요.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소씨 가문과 혈연적인 관계가
거침없이 내뱉는 심청하의 태도에 소찬식이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소씨 가문의 주식은 애초에 저희 집안 거에요. 그리고 둘째 삼촌이 직접 주식을 그룹 소유로 돌리겠다고 서명까지 했어요. 자기는 주식 배당만 챙기겠다고, 회사를 떠난 지금 삼촌한테 배당금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이모가 한 계산은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 주식들은 재산 분할과 관련이 없어요. 설령 분할을 한다 해도, 먼저 그룹의 이익을 보호하는 게 우리의 원칙이고요."심청하는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저는 어떻게 해요? 그이가 감옥에 가고,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굶어 죽으라는 거예요? 주식을 전부 넘겨주세요, 그럼 더는 따지지 않을게요!" 그녀는 무례한 태도로 단호하게 앉아 있었다.소찬식의 표정이 음울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한번 쳐다보았다."그만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경찰 소식 기다리세요. 찬식이 회사 자금을 자기 돈처럼 써버렸고 수억 달러를 횡령했어요. 그럼에도 그룹이 이 돈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돈을, 주식을 요구할 수 있어요?" "나는 찬식 씨가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모르겠고, 누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관심없어요."그는 말을 마친 뒤 옆에 서 있는 집사에게 눈짓했다."손님을 내보내.""네."집사의 대답에, 심청하는 일어서서 조급하게 말했다. "아주버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형제들끼리 어떻게 이렇게 매정하게 굴어요? 이 일을 언론에 알리면 어떻게 될지 저도 기대되네요, 아마 언론도 이 일에 엄청난 관심을 둘 것 같거든요!"소찬식의 표정은 신경질적으로 굳어졌다,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공기 안에는 침묵이 깔렸다.소은정은 갑작스럽게 직감했다. 심청하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을 눈치챘다.하지만 그들은 타협할 수 없었다. 한 푼이라도 더 주면, 그녀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더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그녀는 절대로 이번 한
심청하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다 해봐야죠, 우선 믿을 만한 변호사를 찾아서 형량부터 줄여줘요."옆에서 듣고 있던 소은정이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으며 소리를 냈다.소은정이 입을 열었다."마침 잘 오셨어요, 우리도 지금 삼촌을 어떻게 구할지 토론하고 있었거든요!"심청하는 의아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쳐다보았다. "그러면... 어떤 방법을 논의했는데?"전동하는 멋도 모르고 웃었다. 그는 소은정의 대답을 기다렸다.소은정은 청량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사실 우리가 변호사를 찾아서 물어봤어요. 판결이 심하게 나면, 사형이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두 사람을 죽인 거니까.그래도 방법이 있어요, 둘째 삼촌은 그때 혼인 상태였잖아요?법정에 나서서 전부 둘째 삼촌이 한 게 아니라고 증언하면 돼요. 삼촌은 줄곧 숙모랑 함께 있었고, 그런 일을 꾸밀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고!"심청하는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일어섰다."너... 나보고 거짓 증언을 하라는 거야, 말이 되니? 그거야말로 불법이야!"소은정은 차가운 눈빛으로 비웃었다."불법이라는 것도 알고 계셨네요? 근데 왜 저희 아버지한테 당당하게 그런 짓을 요구하는 거예요?"심청하는 그제야 자신이 소은정에게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화가 난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은정아, 너 말 이상하게 하는 구나, 내가 마음이 너무 급해서 나온 말을 꼬투리 잡는 거니? 그리고 너희 삼촌 아직 유죄 판결도 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더 노력하면 돼."소은정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럼 혼자 잘 해보세요! 우린 응원이나 하고 있을게요!""너 지금 뭐하자는 거니?" 심청하는 화를 내며 소찬식을 바라보았다."진짜 이렇게 내버려두실 거예요?"소찬식의 눈빛이 어둡게 깔렸다."자기가 한 일에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저희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제수씨도 저희를 그만 찾아오세요."심청하는 소찬식의 태도가 이렇게 차갑고 딱딱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