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이 세미를 향해 엄지를 내세웠다.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치던 세미는 의자에 앉은 뒤 대충 담요를 덮었다.우아한 손놀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인 세미가 고개를 돌렸다.“그 남자 사진은 봤어. 네가 점 찍어둔 애야?”세미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소은정은 한참 뒤에야 세미가 말하는 남자의 정체가 손호영임을 눈치챘다.“아, 아니야. 우리 회사 신제품 CF 모델인데 인지도가 너무 떨어져서 화보로 화제성 좀 끌어보려고. 우리 세미님 인기 좀 빌리자!”그녀의 말에 세미가 피식 웃었다.“그래? 마음껏 빌려가. 생긴 게 마음에 들어서 봐준다.”역시. 세미라면 내 부탁 들어줄 줄 알았어.세미의 화끈한 대답에 소은정은 미리 준비한 계약서를 꺼냈다.“내가 소유하고 있는 섬인데 별장 청소도 다 해뒀으니까 네가 가봐. 너 섬으로 휴가 가는 거 좋아하잖아. 난 어차피 회사 일 때문에 휴가도 잘 못 가. 나 대신 실컷 즐겨.”토지 계약서 내용을 확인한 세미의 표정이 확 밝아지더니 소은정에게 손키스를 날렸다.“은정아, 역시 웬만한 남자보다 네가 훨씬 더 낫다니까!”세미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하던 소은정이 소파에 앉았다.“내일 바로 촬영인데. 저녁에 파트너랑 미리 만나볼래?”“당연하지. 미리 만나야 감정도 돈독해지지.”오케이 제스처를 한 소은정은 루프탑 레스토랑을 예약했다.잠시 후, 세미는 소은정의 설득하에 코트 한 벌을 더 걸쳤다.누가 봐도 나 연예인이오 라는 차림의 세미와 함께 했다간 소은정도 다음 날 기사 톱 라인에 오를 것 같았으니까.소은정이 루프탑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손호영은 이미 창가쪽 자리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하늘하늘 내려오는 눈꽃과 어두운 조명이 어우러져 창밖을 내다보는 손호영에게 왠지 모를 우울감을 더해 주었다.우연준이 레스토랑 전체를 대여한 덕분에 레스토랑에 손님이라곤 손호영 한 명뿐.손 대면 톡 깨져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에 세미도 소은정도 조용히 눈을 감상하는 손호영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잠시 후, 직원 한
소은정이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호영 씨, 세미랑 같이 화보 촬영을 하는 게 얼마나 귀한 기회인지 알죠? 이번 기회 잘 잡도록 해요.”“네, 알겠습니다.”손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저녁 식사 분위기는 나름 화기애애했다.물론 세미가 가끔씩 선을 넘는 사적인 질문을 하며 손호영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그때마다 소은정이 사이에서 중재를 하고 화제를 돌린 덕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고 소은정은 오랜만에 만난 세미와 밀린 수다라도 나눌겸 자기 방에서 함께 잘 것을 권했지만 세미는 단호한 얼굴로 거절했다.“징그럽게 왜 여자랑 한 방을 써. 네 성적 취향은 잘 모르겠지만 난 남자만 좋아해. 괜히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남녀가 같이 자면 더 이상하지 않아?”외국인들은 다 그런가 싶어 소은정은 어깨를 으쓱했지만 세미의 고집에 결국 새로 방을 잡아주었다.잠시 후, 소은정이 호텔 방으로 돌아오고 소파에 앉자마자 전동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마이크는 괜찮아요? 사고 친 거예요?”“사고 안 쳤으면 내가 직접 갈 필요도 없었겠죠?”전동하가 헛웃음을 지었다.“애들은 원래 사고 치면서 크는 거랬어요.”벽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하늘하늘 내려오는 눈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여기가 무릉도원인가 싶은 소은정이었다.“하, 두 번 사고치면 아주 큰일나겠어요. 8살도 안 된 애가 폭발사고를 일으켰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전동하의 말에 소은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폭발사고요?”그녀에게만큼은 항상 부드럽던 전동하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분노가 담겨있었다.“뭐 건물의 강도를 테스트해 보는 실험이었다라나? 화학약품으로 폭발물을 만들어냈는데 그 덕분에 방 두개가 아주 박살났어요.”충격에 잠긴 소은정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다... 다친 사람은 없죠?”“하, 그 와중에 사람들은 다 밖으로 대피시켰더라고요. 자기가 실험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나 뭐라나...”그 광경이
말을 하면 할 수록 어이가 없는지 전동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게다가 내일 바로 등교하겠대요. 상처는커녕 이번 사건으로 학교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면서 되게 좋아하던데요?”하, 이게 요즘 애들의 패기인가?소은정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마이크가 씩씩하다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래도 기특하네... 위험할 줄 알고 사람들은 미리 대피시키고.“음,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이크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건 인지하고 있을 거예요. 너무 많이 혼내지 말아요. 어렸을 때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어른이 되면 그렇게 살고 싶어도 못 하니까.”그 뒤로 두 사람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아, 오늘 우연히 협력사 대표를 만났는데 박수혁 대표도 미국에 갔다면서요? 설마... 만날 일은 없겠죠?”전동하가 경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비록 소은정의 마음은 이미 그에게 기울여진 듯했지만 박수혁 성격에 소은정을 쉽게 포기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불안함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전동하의 날카로운 질문에 소은정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아... 그게 이미 만났어요.”그리고 공항에서 있었던 자초지종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소은정의 말이 끝났음에도 전동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내가 같이 갔어야 하는데... 이게 다 마이크 그 자식 때문이야!“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아무것도 없었어요. 저녁에는 세미랑 손호영 씨랑 같이 식사했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동하 씨 전화를 받았고요.”소은정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전동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그냥 그렇게 보냈다고? 박수혁답지 않은데.“내가 워낙 차갑게 나오니까 알아서 포기한 거겠죠. 아, 그게...”미간을 찌푸리던 소은정이 세미와 손호영 사이의 묘한 기류에 대해 얘기하려던 그때.누군가 호텔방 문을 두드렸다.우연준이 뭔가 주려고 온 건가 싶어 휴대폰을 든 채로 방문을 연 소은정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당신이 왜 여기에?”소
전기섭이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건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전기섭은 전인그룹의 대외적인 상속자, 비록 그 진짜 정체는 막장 그 자체였지만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전씨 일가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자란 늦둥이 아들이었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 터, 그런 그가 한국에서 여자에게 차인 것도 모자라 그가 가장 경멸하는 사생아 조카와 사귄다니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갈만도 했다.게다가 전동하는 전기섭을 감금하고 때리기까지 했으니 전동하에 대한 전기섭의 증오는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미국으로 돌아온 뒤로 전기섭은 평소 인연을 맺고 지냈던 사업 파트너들과 함께 전동하의 미국 자산을 빼앗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돈도 전부 빼앗고 주가 조작으로 감옥에까지 처넣으려 했지만 언제부터 눈치를 챈 건지 오히려 전동하에게 반격을 당하고 말았다.복수에 실패한 것도 모자라 자신과 친구들이 쏟아부은 투자금도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전인그룹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손해는 아니었지만 전기섭에 대한 주주들의 불만과 불신은 점점 더 몸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게다가 이번 작전에 참여했던 친구들 중 두 사람은 아예 파산 직전까지 몰렸고 얼마 남지 않은 인맥이라도 건지기 위해 전기섭은 사비로 그 구멍을 메꿔줄 수밖에 없었다.평생 돈 걱정이라곤 해보지 않은 전기섭이 처음으로 돈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수 밖에 없던 시간이었다.겨우 상황을 수습하고 다시 칼을 갈고 있던 전기섭에게 소은정이 미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그의 어두운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밀려나오기 시작했다.하지만 소은정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경멸이 다시 전기섭의 자존심을 갉아먹기 시작했다.알코올의 기운이 전기섭의 마지막 이성을 끊어버리고 전기섭은 거칠게 호텔문을 열기 시작했다.“아니면 나랑 단둘이 마시고 싶은 거예요? 그냥 방에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소은정... 오늘 무슨 일이
말을 마친 전기섭이 다시 거세게 문을 차며 호텔방으로 들어왔다.드디어 방에 진입한 전기섭은 주인이라도 된양 방의 인테리어를 둘러보았다.한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던 전동하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전기섭, 은정 씨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그제야 휴대폰을 든 소은정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 경찰에 신고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전인그룹은 정계와의 유착관계도 긴밀한 그룹이다.괜히 경찰에 신고를 했다간 상황이 오히려 더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말을 마친 소은정은 전화를 끊고 말없이 호텔 방문을 닫은 뒤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전기섭을 바라보았다.어느새 셔츠 단추를 푼 전기섭은 나름 자부심으로 느끼는 근육 라인을 살짝 드러냈지만 소은정은 이 모든 게 역겹게 느껴질 따름이었다.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술장 앞으로 걸어가며 짐짓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전 대표님이 지금 여기 계신 걸 또 누가 알고 있죠?”한편, 전기섭은 그제야 소은정이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기로 오기 전 수행비서 한 명을 제외하고 경호원은 한 명도 대동하지 않았다는 정보는 이미 입수한 상황.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앙칼진 여자도 재밌지만 난 고분고분한 계집이 더 좋단 말이지...싱긋 미소를 지은 전기섭은 소은정의 옷자락 너머를 꿰뚫어 볼 수 있기라도 하 듯 그녀의 매혹적인 몸매를 탐욕 가득한 시선으로 훑어보았다.“아무도 몰라요. 친구들이랑 한 잔 하다 생각난 김에 온 거라. 사실 친구들한테 은정 씨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뭐, 내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그의 대답에 피식 웃던 소은정이 전기섭에게 술잔을 건넨 뒤 넘칠 듯 양주를 따라주었다.찰랑거리는 술잔을 바라보던 전기섭이 미간을 찌푸렸다.“못 마시겠으면 말고요.”소은정의 자극에 전기섭은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단번에 원샷했다. 술기운에 눈동자와 얼굴이 순식간에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소은정이 눈을
콰직.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울리고 방금 전까지 술기운으로 빨갛던 전기섭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네가 감히...”하지만 전기섭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은정은 거칠게 뺨을 날렸다.전기섭의 하얀 뺨에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고 소은정이 몰래 돌려놓은 반지에 달린 다이아몬드가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며 긴 상처를 남겼다.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과 함께 뺨을 만지던 전기섭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감히... 감히 날 때려?”비록 팔 하나가 부러지긴 했지만 전기섭은 전혀 겁 먹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난 남자야. 저깟 연약한 여자 하나 못 제압할까 봐?하지만 어느새 뒤로 물러선 소은정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왜요? 오늘 여기로 온 거 누구도 모른다면서요?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당신을 죽여도 괜찮다는 말 아닌가요?”말을 마친 소은정은 방금 전 소파에 버려둔 스카프를 돌려 밧줄처럼 꼬았다.그 순간 전기섭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보통 이 정도 협박을 하면 꼬리를 내리는 게 당연한데... 저 여자는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당당한 걸까?미지에 대한 두려움에 점점 마음이 불안해진 전기섭이 뒷걸음질쳤지만 곧 소파에 움직임을 가로 막히고 말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소은정은 그의 가슴을 거세게 걷어찼다.순간 전기섭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옆에 놓인 캐비닛에 거칠게 부딪힌 뒤 그대로 꼬꾸라졌다.대충 만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전기섭의 착각이 완전히 엇나가는 순간이었다.바로 그때 문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안에 계십니까?”“대표님 괜찮으시죠? 문 좀 열어주세요.”사람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전기섭과 소은정 두 사람 모두 꽤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동하 씨가 부른 건가...하지만 소은정은 아직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다는 듯 하이힐로 전기섭의 어깨를 꽉 밟아눌렀다. 견갑골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전기섭은 결국 짐승 같은 비명소리를 터트렸다.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던 사람들은 소은정에게 무슨 일이라도
전기섭은 마치 도살 직전의 짐승처럼 힘없이 소은정의 손에 끌려갈 뿐이었다.정말 죽을 수도 있겠어...전동하가 그를 가두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느껴본 적 없는 전기섭이었다.전동하는 어디까지나 그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욕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면 소은정은 정말 그를 죽이려는 듯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다.이 여자... 전동하보다 훨씬 더 독종이잖아?숨 쉬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얼굴색은 붉은기를 넘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지만 소은정은 여기서 물려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베란다 물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왔다.뼈를 깎는 듯한 한기가 상반신은 이미 나체인 전기섭의 몸을 그대로 침식했다.잠시 후, 호텔 방문이 열리고 다급하게 호텔방으로 들어온 우연준 일행은 참혹한 상황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소은정은 망설임 없이 전기섭을 차버리고 종이장처럼 나풀거리며 떨어졌지만 스카프로 만들어진 고리가 베란다 난간에 걸려 다행히 추락은 막을 수 있었다.아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스카프 고리에 목이 묶인 전기섭은 더 강력한 질식감에 휩싸이고 말았다.어두운 밤, 잠깐 동안 이어진 죽음의 침묵은 전기섭의 짐승 같은 울부짖음에 의해 파괴되었다.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우연준이 베란다로 달려갔지만 소은정은 여전히 무표정일 뿐이었다.“대표님...”마른 침을 꿀꺽 삼킨 우연준이 말끝을 흐렸다.방금 전 다급해진 전동하는 바로 우연준과 미국에 있는 자신의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수십 명의 사람을 모집했다.하지만 그의 명령에 따라 호텔에 모인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도대체 누가 약자란 말인가.한편, 베란다에 대롱대롱 묶인 전기섭은 여전히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스카프를 푼다면 19층 빌딩에서 추락해 죽겠지만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곳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목이 졸려 죽을 것이냐 아니면 추락해서 죽을 것이냐.내 선택은 이 두 가지 중 하나뿐인 것인가...의식이
잠시 후, 경호원들과 다시 올라온 우연준은 엉망이 된 소은정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청소가 끝나고 혹시나 소은정에게 트라우마라도 남았으나 어쩌나 싶어 우연준이 먼저 물었다.“아, 여기서 지내는 게 불편하시면 다른 방으로 바꾸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다른 호텔로 옮기시는 것도 괜찮고요.”하지만 소파에서 일어 선 소은정은 여유로운 미소로 응했다.“아니에요. 오늘은 대충 여기서 묵고 내일 아침 바로 여길 뜨죠.”“도망치시는 겁니까?”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내뱉은 우연준은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어떡해.하지만 소은정은 화 대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네. 당연히 도망쳐야죠.”전기섭의 내뱉은 여러 가지 개소리 중 굳이 한 가지 정확한 말을 고르자면 미국은 확실히 전인그룹의 영역이었다.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걸 확인하긴 했지만 혹시나 전기섭이 그 사이에 죽기라도 한다면 일이 더 복잡해질 터.그쪽에서 소은정이 한 짓임을 알아내기 전에 먼저 이곳을 뜨는 게 어떻게 보나 현명한 선택이었다.소은정이 화를 내지 않자 우연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바로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소은정도 측과 세미에게 촬영 장소를 변경하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 물론 모든 비용은 그녀가 지불하는 조건으로 말이다.소은정이 제안한 새 촬영 장소가 더 끌리는 곳이기도 했고 모든 비용도 소은정이 부담하겠다고 했으니 양쪽 모두 별 이견 없이 그녀의 제안에 응했다.통화를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은정은 그제야 전동하에게서 총 89개의 부재중 전화가 도착해 있음을 발견했다.아, 걱정 많이 하고 있겠네.그녀가 전동하에게 전화를 다시 걸려던 그때, 휴대폰 액정이 다시 반짝였다.“여보세요?”“하... 드디어 받았네요. 괜찮은 거죠? 전기섭 그 개자식은요? 경호원들은 도착했어요?” 전동하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초조함이 고스란이 느껴졌다.그 목소리에 방금 전까지 그녀를 예민하게 만들던 날카로운 얼음가시가 사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