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마친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하지만 그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계속 하연을 주시하던 사람 몇몇이 하연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걸 하연은 당연히 알 리 없었다.한편, 휴게실 안.“부 대표님, D시에서 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2천억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회사는 HY를 제외하면 우리 IM 그룹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계약을 계속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상혁은 직접적인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물론 현재로서 IM 그룹이 최적의 파트너라지만 상혁은 그걸 티 내지 않고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이번 협력이 우리 세 회사에 모두 중요한 거라 아무래도 조심스럽네요. 우선 고찰을 마치고 저희가 따로 위험평가를 진행한 뒤 상세히 얘기해 봅시다.”상혁은 자기의 패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아주 수준 높게 대답했다.강시원 역시 비즈니스 업계에서 오랫동안 있은 사람이기에 그걸 모를 리 없다.“지당한 말씁입니다. 협력 건은 나중에 천천히 얘기합시다. 하지만 우리 IM을 선택한 걸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그 뒤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혁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손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더니 강시원은 뒤로한 채 하연이 떠났던 방향으로 걸어갔다.그 상황에 강시혁은 어리둥절해서 다급히 뒤따랐다.“부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최 사장이 떠난 지 한참 되는데 왜 아직도 안 돌아왔죠?”상혁이 발걸음을 재촉하며 묻자 강시원은 그제야 상혁이 이러는 이유를 눈치챘다.‘그런데 부 대표님이 최 사장님을 이토록 신경 쓸 줄은 몰랐네. 혹시 만나는 사이인가? 전에 그런 소문 들은 적 없는데?’속으로 중얼거리던 강시원은 이내 상혁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세요. 광산이 워낙 커서 최 사장님이 길을 잃은 게 아닐까요?”상혁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그도 그럴 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불안감이 밀려왔으니까. 화장실 앞까지 다가간 상혁은 여자 화장실이건 뭐건 상관하지도 않고 안으로 쳐들
상혁은 핸드폰을 꺼내 하연의 위치를 추적했지만 신호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사라진 상태였다.사라진 위치는 바로 광산 안이다.“계속 찾아. 아직 광산 안에 있는 게 틀림없어. 못 찾으면 한 명도 나갈 생각 하지 마!”상혁은 명을 내라지마자 하민에게 전화했다.그로부터 반 시간도 채 안 되는 사이, 하민과 하성이 전용기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비행기 몇 대가 하늘에서 내려 멈춰 서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대단한 장면을 많이 봐온 강시원도 이토록 놀라운 장면은 처음 보는지라 하연의 신분에 감탄했다.하민이 데려온 경호원은 모두 엄격한 훈련을 받은 엘리트들이라 일반 경호원들보다 더 노련했고, 심지어 구조견도 파견했다. 전용기에서 내린 하민과 하성은 곧장 상혁과 합류했다.이윽고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 사람을 데리고 흩어져 하연을 찾기 시작했다.“하성, 넌 사람들 데리고 광산 주변 반경 5킬로미터 범위 이내를 샅샅이 뒤져. 무조건 하연이 찾아내야 해.”“알았어, 형.”하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사람을 파견했다.하지만 D시는 B시처럼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찾기 매우 어려웠다.때문에 광산 주변을 이 잡듯 뒤졌지만 결국 아무 소득도 없었다.속절없이 시간만 흐르자 상혁은 완전히 당황했다.“현재 갱 안을 제외하고 모두 찾았습니다.”강시원은 잔뜩 긴장해서 상황을 보고했다.그 말에 상혁은 오히려 동력이 생겨났다.“그럼 갱 안을 한 곳도 빠짐없이 찾으면 되겠네요.”하지만 강시원은 얼른 상혁을 막아 나섰다.“부 대표님, 갱은 위험합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이 내려갔다가 사고라도 나면 아무도 책임 못 집니다.”“위험하다고 해도 무조건 찾아야 해요.”옆에 있던 하민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섰다.그러자 하성도 뒤따랐다.“오늘 여기를 모두 뒤져서라도 하연이 무조건 찾아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D시를 아예 폭발시켜 버릴 테니까.”강시원은 너무 놀라 순간 멍해졌다.지금의 그로서는 이 세
“계속 찾아야지. 나머지 두 개의 갱에도 없으면 군의 도움을 받아야겠어.”하민의 분부에 상혁이 먼저 일어나더니 피곤함도 무릅쓰고 9번째 갱에 내려갔다.그리고 하늘은 노력한 자를 버리지 않는다고, 새벽 3시에 상혁은 끝내 마지막 갱에서 하연을 발견했다. 하지만 열 몇 시간 동안 탈수한 상태로 산소가 부족한 곳에 있어 하연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상혁이 하연을 업고 갱에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은 곧바로 하연을 병원으로 옮기며 응급처치를 시작했다.시간이 1분 1초 흐를수록,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는 하민과 하성은 이미 초조함에 속이 타들어 갔다.비록 밤새도록 하연을 찾느라 모두 탈진한 상태였지만 여전히 본인 상태는 뒤로한 채 하연의 상태에만 신경 썼다.“젠장! 누가 하연을 갱안으로 데려간 거야? 잡히기만 해봐, 내가 그놈 껍질을 벗겨낼 거야!”하성이 화를 내며 이를 갈았다.그에 반해 하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넋이 나가 있는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제대로 생가해 봐, 아까 혹시 무슨 상황이었어? 혹시 따로 미움을 산 사람이 있는 거야?”그 말에 눈을 든 상혁은 하민과 시선을 마주치며 대답했다.“HY 그룹.”얼마 전에 바로 HY 그룹과의 협력을 취소해 그쪽에서 보복했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생각을 정리한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래 직원을 시켜 HY 그룹을 처리하라고 명령했다.“날이 밝기 전에 HY 그룹 파산시켜.”하지만 하민과 하성은 이 정도 벌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다.“고작 파산으로 하연이 오늘 겪은 고통과 어떻게 비교해?”“이건 시작에 불과해.”상혁의 말에 하민과 하성은 그제야 개입하지 않고 모든 걸 상혁에게 일임했다. 그도 그럴 게, 상혁은 언제나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하기에 믿을 수 있었으니까.얼마 지나지 않아 주자철은 사람들에게 잡혀 비틀거리며 달려와 상혁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부 대표님, 최 사장님이 사라진 건 정말 저희랑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제발 HY 그룹을 그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상혁의 부하가 떠나자 주자철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이윽고 상혁이 손을 휘휘 젓자 다른 부하가 다가와 주자철을 끌어갔다.그 뒤로 한참 동안 꺼지지 않은 응급실 불을 보며 상혁, 하민과 하성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그러다 날이 밝자 응급실의 불은 끝내 꺼졌고, 세 사람은 동시에 응급실 문 쪽으로 달려갔다.마스크를 벗으며 나오는 의사를 보자 상혁이 맨 먼저 물었다.“상태가 어떻나요?”의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산소가 부족한 공간에 너무 오래 있어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의식을 회복하기가 어려울 겁니다.”그 말을 들은 순간 상혁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고, 목소리가 떨렸다.“지... 지금 뭐라고 했어요?”“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분이 식물 인간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그럴 리 없어!”하성이 시뻘게진 눈을 한 채 버럭 소리쳤다.“하연이 식물 인간이 되다니. 절대 그럴 리 없어.”이윽고 마치 이 사실이 믿기 힘든 것처럼 연신 부정했다. 이 순간 하성은 이미 이성을 잃었다.“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요?”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세 사람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그 말에 세 사람은 동시에 눈을 반짝이며 의사를 붙잡았다.“무슨 방법이죠? 하연을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없어요.”“하... 하지만 그분이 나서줄지가 미지수라.”“그게 누구죠? 어디 있어요? 제가 당장 사람을 시켜 찾아올게요.”하민이 다급히 따져 묻자 의사는 입을 꾹 다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그분은 의술이 뛰어나지만 신출귀몰하는 분이라 일반인들은 절대 찾을 수 없어요. 그리고 환자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아 시간을 지체하면 아마...”의사는 안타깝다는 듯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하성이 다급히 물었다.“골든 타임이 아직 얼마나 남았죠? 하연을 구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볼게요.”“6시간 남았습니다.”“6시간?”“네. 때문에 정말 어려워
상혁의 심각한 말투에 현승은 장난기 섞인 모습을 거두로 진지하게 물었다.“보스, 무슨 일인데 그래요?”“구해야 할 사람이 있어!”간단한 한마디에 현승은 이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 말 없이 떠나는 그를 보자 덩그러니 남겨진 미녀가 뒤에서 소리쳤다.“도련님, 어디 가는데요?”하지만 현승은 그 여자를 상대할 겨를이 없어 집에 가라는 말을 끝으로 곧장 전용기에 올라탔다.두 시간의 비행 끝에 현승은 겨우 D시 병원에 도착했다.“백... 백 교수님?”“헐,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정말 백 교수님이잖아!”“...”현승은 의료진들의 선망의 눈빛과 흥분 섞인 말투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비행 중에 이미 하연의 검사 보고서를 토대로 수술 방안을 구상한 현승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술복으로 환복하고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불이 다시 켜지자 하성이 걱정스레 물었다.“저 사람 정말 괜찮은 거 맞아?”“백현승이란 이름 세 글자가 의료계에서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어. 백 교수가 지금껏 실패한 수술이 없거든. 그런데 백 교수마저 실패하면 하연은...”하민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하연의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하민도 생각지 못했으니까.그때 상혁이 하민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 없을 거야.”“그래. 하연만 무사하면 이 일 제대로 갚아줄 거야. 하연이 다치게 한 사람은 한 놈도 용서할 수 없어.”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뒤에 검은 무리를 달고 안으로 들어왔다.“한 대표님, 가시면 안 됩니다.”“꺼져!”서준은 포악한 분위기를 풍기며 저를 막는 경호원들을 뿌리쳤지만 경호원 역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한 대표님, 저희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최하연 어디 있어?”서준의 물음에 경호원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하민이 다가와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한 대표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하민을 마주하자 서준은 성질이
“걱정 마세요. 제 손을 거친 수술이 실패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환자분은 이미 고비를 넘겨 곧 깨어날 겁니다.”그 말을 듣자 모든 사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상혁이 다가가 현승의 어깨를 두드렸다.“고생했어.”말이 떨어진 순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현승은 아예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듯 고개를 상혁의 어깨에 기댔다.“보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제가 얼마나 열심히 수술했는데, 고작 고생했단 한마디가 끝이라고요?”그 말에 상혁은 현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테니까.”“이건 보스가 직접 말했어요? 후회하면 안 돼요.”현승은 헤실 웃으며 말하더니 피곤한지 하품을 했다.“에너지 너무 소모했더니 피곤해 죽겠네. 저 먼저 한숨 자고 와서 상은 이따 받을게요.”상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경호원이 현승을 휴게실로 안내했다.한편, 수술실에 있던 의사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이 흘러나왔다.“와, 이게 가능해? 그렇게 오랫동안 뇌에 산소가 부족한 상태였는데 이렇게 바로 괜찮아졌다고?”“이건 의학계의 기적이야.”“역시 이래서 백 교수님 백 교수님 하는 거였네.”“이번 수술을 다음 논문의 참고 자료로 사용해야겠어. 백 교수님은 내 우상이야.”“...”사람들은 현승의 의술에 혀를 내두르며 열심히 학습했다.고비를 넘긴 하연은 이내 VIP실로 옮겨졌고, 그 과정에 상혁이 계속 곁을 지켰다.한편 병실 입구에서 하민이 하성을 가로막았다.“두 사람한테 시간을 좀 줘.”결국 하성은 마지못 해 입을 삐죽거리며 문 앞에서 중얼거렸다.“저 자식이 앞으로 하연이 배신하면 내가 저 자식 가죽을 벗길 거야.”그 말을 들은 하민은 하성의 어깨를 툭툭 내리쳤다.“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상혁은 믿을 수 있어. 그동안 상혁이 하연한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는 어린애도 다 알 텐데,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있을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일이잖아.”하성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이번에 하
“제가 여기 남든 말든 최 대표님과 상관없지 않나요?”서준이 제 태도를 표명하자 더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눈치챈 하민은 마지막으로 충고했다.“한 대표님, 버스를 놓쳤으면 다음 걸 기다리세요. 선 자리에서 지나간 버스를 아무리 기다려봤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요? 한 대표님도 잘 아실 텐데.”이윽고 하성을 데리고 병원을 나섰다.“형, 저 자식 저기 있게 그냥 두는 거야?”하성은 도무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간다고 버티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무슨 수로 내쫓아?”“그래도 하연이 저 자식 얼굴 꼴도 보기 싫어할 거 아니야!”“너도나도 하연이 믿어야 돼. 본인이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하연이도 남은 인생 누구한테 걸어야 할지 알 거야.”그 말에 하성의 마음은 이내 차분해졌다.“그러길 바라야지.”한편, 하연은 아주 긴 꿈을 꿨다.시간은 5년 전 서준을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갔는데, 그때 하연은 컬럼비아 대학 디자인 학과를 다니며 대학원생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처음으로 하연을 낯선 도시로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걱정했다.“하연아, 내가 너희 학교 맞은편에 집 하나 구입하고 경호원과 가정부도 고용했어. 밖에서 지내는 동안 절대 손해 보지 마.”하민이 전화로 신신당부하자 하연은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걱정 붙들어 매요. 그리고 이왕 공부하러 왔으니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돼요. 저 이미 다 커서 나를 돌볼 능력은 되거든요.”“아무리 그래도, 네가 우리 곁을 떠난 적 한 번도 없어 걱정돼서 그러지.”하연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저 벌써 스무 살이에요. 어린애 아니라고요. 언젠가는 커요...”하연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하민은 그제야 받아들였다.전화를 끊은 하연은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웬 사람 한 명이 하연에게 달려와 부딪쳤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중심이 무너져 버린 하연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고 곧이어 엉덩이에
그 남자와 다시 만난 건 약 한 달 정도 후였다.하연이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에서 나오자 한 무리 사람들이 키득키득거리며 다가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아시아인들은 다 너처럼 등신 같고 개 같아?”“예전부터 병을 몰고 다니더니 더러운 종자!”“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아시아인은 우리 발밑이야.”“...”사람들의 말에 하연은 속에서 열불이나 눈살을 찌푸렸다.‘이 왹국놈들 대체 뭐야? 이유도 없이 남을 욕하다니.’이윽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앞으로 다가가 반박하려 할 때, 옆에서 남자의 비명과 욕설이 들렸다.“젠장! 감히 나를 때려?”심지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대 더 얻어터졌다.“때렸다, 어쩔래? 감히 우리를 욕해? 오늘 제대로 얻어터져 봐!”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또다시 외국 학생의 얼굴을 후려쳤고 곧이어 꽥꽥거리는 비명이 들렸다.앞으로 다가가 보니 아시아인 남학생이 방금 하연을 비아냥거렸던 외국 학생들을 제대로 혼쭐 내주고 있었다.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몇 대 만에 외국 학생들을 모두 때려눕힌 남자는 몸을 일으켜 세우며 제 팔을 주물럭댔다.이윽고 눈을 내리깔며 귀찮은 듯 말했다.“같잖은 겉들이 어디서 잘난 척이야? 앞으로 나 만나면 돌아서 다녀. 안 그러면 볼 때마다 때릴 거니까.”말을 마친 남자가 뒤돌아서자 하연은 그제야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곧이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가리켰다.“어? 그쪽!”하연을 알아본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와 하연의 팔을 덥석 잡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아까 너무 멋지던데요? 나쁜 자식들! 감히 우리를 그렇게 욕해? 우리나라 경제가 지금은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데 아직도 무시하다니. 아까 그 자식들 쥐어팬 거 너무 속 시원했어요. 저도 당장 가서 때려주고 싶었다니까요.”“...”하연이 끊임없이 쫑알대는 사이, 남자는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그러다 조용한 곳에 도착하자 그제야 하연을 놓아주었다.“아까 계속 있었어요?”남자의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