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하민은 하연이 F국을 떠나는 걸 끝내 동의했다.B시로 돌아온 하연은 곧바로 안형준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그 시각, 안형준은 민성시립 대학교 교수 사무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번 하연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복장을 평가하고 있었다.“안 교수님, 이번 패션쇼가 성공리에 막을 내린 건 모두 메인 의상 덕분이었어요.”안형준의 제자인 주형민이 먼저 의견을 내비치자 안형준도 그 말에 동의했다.“맞아. 이번 디자인 무척 훌륭해. 벌써 해외 패션쇼의 초대도 받았어.”“정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패션쇼 열 수 있겠네요?”그 말에 다른 제자도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당연하지.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해?”“국제 패션쇼에서 예전에는 우리 작품 꺼리더니. 심지어 우리는 세계 무대에 설 만한 복장을 디자인하지 못한다고 무시도 했었잖아.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우리 실력을 제대로 증명했나 봐.”“어떡해, 너무 흥분돼.”“...”흥분한 듯 말을 보태는 학생들 속, 유일하게 한 사람만 기쁨이 아닌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디자인도 평범하고, 포인트도 없구먼. 다들 어쩜 보는 안목이 이렇게 없어?”그 말 한마디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서창섭,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우리나라 디자인 무시하는 거야?”서창섭이라 불린 사람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지연 선배는 어떻게 이겼나 몰라. 교수님, 대체 무슨 생각이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메인 디자이너로 선발하셨어요?”지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안형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다른 학생들도 지연의 이름에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서창섭, 자고로 말은 적게 하랬어. 말할 줄 모르면 조용히 닥치고 있는 게 어때?”“네가 지연 선배 짝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이번 일은 엄연히 따지면 지연 선배 잘못이야.”“잘못한 건 인정해야지. 편 들어주면 어떡해?”다른 학생들의 말에 창섭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너희가 뭘 알
“서창섭!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연 선배는 본인 실력으로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따냈거든. 패션쇼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회적으로 평가도 얼마나 좋은데, 이거로 하연 선배 실력은 증명된 거 아닌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동기의 충고에도 창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하, 고작 이게 뭐라고.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 최하연이여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서창섭, 그만해!”참다 못한 형민이 결국 나섰지만 창섭의 태도는 여전히 똑같았다.“최하연, 정말 이번 패션쇼에 본인 신분과 배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하연은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창섭을 확인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에 하연은 상대의 이런 적대적인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이번 메인 디자이너 선발은 공평하게 진행되었어요. 창섭 씨가 말한 더러운 수단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창섭은 큰 소리로 웃었다.“그 말을 누가 믿지? 너희는 믿어?”그때,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창섭, 메인 디자이너는 공정한 경쟁으로 선정한 거야.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하연 선배를 선택했고. 그러니까 소란 그만 피워!”그 말에 창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형민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모든 건 그가 지연한테서 들은 것과 완전히 달랐으니까.“서창섭,”그때 안형준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몰라도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주지. 하연 양의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확인하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선정된 거다. 오늘 너희가 모두 여기 모였으니 내가 솔직히 말하마.”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학생들은 모두 안형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안형준은 제자들의 시선 속에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양, 내가 패션쇼 전에 대충 얘기한 적은 있어도 제대로 설명은 안 했었죠?
“스승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싱긋 미소 지으며 내뱉은 하연의 대답에 모두가 함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차 한잔을 하연에게 건넸다.하연은 차를 받아 들고 안형준의 앞에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스승님, 절 받으세요.”안형준은 하연이 건넨 차를 받아 들더니 미리 봉투에 넣어 두었던 용돈을 하연에게 건넸다.“그만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입문 의식이 끝나자 안형준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자기 제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나 하더니 끝내 업계에서 친한 친구들한테 문자로 이 일을 자랑했다.마치 세상에 모두 알리기라도 하듯이....민성 시립대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하연은 저에게로 걸어오는 웬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운석이 먼저 하연을 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여신님! 귀국했네요?”피곤함에 찌든 운석의 모습에 하연은 놀라운 듯 물었다.“운석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운석은 대답 대신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본인이 할 말을 내뱉었다.“화재 사고를 당했다던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요?”“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하연의 대답에 운석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그동안 운석은 사업 때문에 D시에 있느라 B시의 소식을 여쭈어볼 새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했을 때, 하연이 화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때문에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왔고, 지금 하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거예요?”그때, 하연이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운석은 부정하지 않고 서류를 꺼내더니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이처럼 하연에게 그 서류를 모두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요. 제가 그동안 이룬 실적이에요.”“이렇게나 많이요?”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확인하더니 속으로 운석의 능력에 탄복했다.그러자 운석은 득의양양
“뭐? 남자 두 명이 여자 한 명을 놓고 싸우기는! 최 사장님과 제일 친한 사람 부 대표님이거든. 설마 잊었어? 최 사장님 현재 애인은 부 대표님이라던데.”“대박. 막장이 따로 없네!”“...”직원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발자국도 안 되는 위치에 서 있던 구동후가 막아 나섰다.“대표님, 저 사람들 함부로 지껄이는 거나 신경 쓰지 마세요.”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 밑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로부터 얼마 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올랐다.“하연 씨, D시에 아직 발전 공간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래서 나 앞으로 3년 동안 중점적으로 D시 쪽에 집중할 예정이에요”“괜찮은 생각이네요. D시 시장을 열 수만 있다면 이익이 엄청날 거예요.”“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오일은 우리가 앞으로 밀고 나갈 발전 방향이에요...”운석과 하연은 대화를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최 사장님, 이제야 오셨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운석은 하려던 말을 이내 멈췄고, 하연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곧이어 상대 쪽으로 걸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호 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최 사장이 죽다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상태도 살필 겸 왔죠. 몸은 괜찮아요?”‘웃겨 정말, 고양이가 쥐 생각하네.’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걱정과 관심 고맙습니다. 저는 무사합니다.”호현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배의 자태를 나타냈다.“괜찮다니 다행이군. 이번 최 사장님이 맡은 패션쇼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회사 실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데, 축하해요. 물론 제1분기 실적이 나온 걸 보니 최 사장님이 약속한 30퍼센트에는 한참 못 미치던데, 힘내요.”하연은 눈을 들어 조금도 밀리지 않는 눈빛을 보냈다.“이제 고작 제1분
이곳에서 서준을 만난 것에 현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한 대표님, 무슨 바람이 불어 DS 그룹에 다 오셨습니까?”“왜요? DS 그룹이 저를 환영하지 않나 봅니다?”서준의 말에 현욱은 미안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한 대표님도 참, 무슨 그런 말씀을. 그저 최 사장님이 지금 한 대표님 만나는 게 불편한 듯하여 이리 말씀드린 겁니다.”그 말은 아주 의미심장했다.평소 능구렁이처럼 행동하는 호현욱이 이 순간 서준의 마음을 읽어내는 건 일도 아니다.이에 서준은 시선을 돌려 함께 서 있는 하연과 운석을 보더니 스스럼없이 쏘아붙였다.“불편한지 아닌지는 호 이사님이 결정할 일 아니지 않나요?”그 말에 난감한 상황이 되어버린 현욱은 이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한 대표님 말씀이 맞네요.”하지만 서준은 더 이상 현욱을 보는 체도 하지 않더니 곧장 하연 쪽으로 걸어갔다.서준을 발견한 순간 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무시했다.“최하연...”심지어 서준이 저를 부르는데도 여전히 못 들은 척 사무실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때, 옆에 있던 동후가 어색한 듯 코를 쓱 만지더니 곧장 자리를 피했다.“한 대표님,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하지만 동후를 떠나보낸 서준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석훈이 그를 불러 세웠다.한때는 그래도 친구였던 지라 두 사람은 비슷한 분위기를 뿜어냈다.강한 기운이 서로 충돌하는가 싶더니 운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준,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왜? 지금 날 막는 거야?”운석은 곁눈질하더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했다.“하연 씨 너 만나고 싶지 않아 하니까 이만 돌아가.”그 말에 서준은 눈빛이 일순 어두워졌다. 타고난 오만함에 서준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쳐들며 되물었다.“네가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못 막아도 막을 거야. 오늘 너 여기 못 들어가.”두 사람은 서로 대치하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하, 나운석. 너와 내가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서준의 말에는 자조적인 의미가
그 사고로 하연이 다쳤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지어 F국까지 쫓아갔었다.하지만 최씨 가문에서 하연을 너무 꼭꼭 숨긴 탓에 그곳에 있는 열흘 동안 하연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그리하여 귀국한 뒤, 서준은 DS 그룹 로비에서 줄곧 하연을 기다렸다.그때, 하연이 자기의 모든 감정을 숨긴 채 가볍게 말했다.“지금 나 걱정해 주는 건가? 미안하지만 난 그딴 관심 필요 없어.”“그래도 괜찮은 거 이렇게 확인해서 다행이야.”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서준은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임성재와 합작하고 있는 나노기술 로봇 프로젝트가 현재 과열 단계야. 다음 달이면 신제품 런칭쇼가 있어. 이건 우리가 합작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니까 시간 나면 같이 보러 가자.”서준이 사업 얘기를 꺼내자 하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건 하연의 프로젝트이기도 했으니까.“그래, 시간 내서 갈게.”방금 전 하연과 현욱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 서준은 대충 하연이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대충 짐작했다.때문이 곧바로 화제를 그쪽으로 전환했다.“우리 HT 그룹에서 요즘 새로운 프로젝트 몇 개 준비하고 있으니 관심 있다면 협력할래?”하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필요 없어.”그 대답에 서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숨기며 눈을 내리깔았다.“그렇게 나랑 엮이기 싫어?”“왜 이래? 공과 사는 칼 같이 구분하던 사람이?”“아니면 나랑 협력할 용기도 없나?”“...”서준의 도발에 하연은 화를 내기는커녕 조금도 도용하지 않은 태도로 차분하게 말했다.“한 대표님 자신감은 역시 변함이 없네. 하지만 DS 그룹은 이미 FL그룹과 협력하기로 했어. 그러니 HT 그룹과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너무나도 선명한 거절 의사에 서준은 코웃음을 쳤다.“FL그룹 이제 막 설립된 회사 아닌가? 아직 제대로 자리도 못 잡았는데 벌써 달리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서준의 말속에는 경멸이 가득했다.“정말 예나 지금이나 남을 존중할 줄 모르네.”그 말에 서준의 표
그 말은 하연을 단번에 정신 차리게 했다.“네?”하연과 서준 사이의 묘한 기류를 느낀 운석은 서운한 듯 입을 열었다.“만약 다시 그 자식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하연 씨 선택 존중해 줄게요.”잔뜩 풀이 죽어 중얼거리는 운석을 보자 하연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요? 그렇게 자신 없어요?”“경쟁 상대가 서준 그 자식이면 져도 쪽팔릴 건 없어요. 그런데 생각 잘해요, 두 사람 사이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존재한다는 거. 같이 있으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요.”하연은 다급히 운석의 말을 잘랐다.“누가 한서준이랑 다시 시작한다 그래요?”그 말에 운석은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씨가 그 자식이랑...”하연은 고개를 저었다.“적어도 아직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어요.”“그렇다면 저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겠죠?”하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잔뜩 흥분한 듯한 운석과 눈을 마주했다.그러면서 오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렸다.“운석 씨, 정말 제가 운석 씨의 남은 평생을 맡길만한 상대가 확실해요?”“100퍼센트 확실해요.”운석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저 하연 씨를 원해요. 예전에는 눈이 삐어 한번 놓쳤지만, 저와 약혼한 상대가 하연 씨인 줄 알았다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하연은 눈을 내리깔았다.솔직히 운석이 저에 대한 마음은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단호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에 대답할 수는 없었기에 철저히 단념시킬 수밖에 없었다.“운석 씨, DS 그룹에서 나가요. 운석 씨처럼 능력 있는 사람은 더 큰 무대에 있어야 해요. NW그룹으로 돌아가도 여기보다는 나을 거예요.”“지금 저 내쫓는 거예요?운석은 뭔가 알아차린 듯 되물었다.“그런 뜻이 아니라 운석 씨가 여기 있는 거 너무 아까워서요.”“저는 상관없어요. 하연 씨 곁에만 남이 있을 수 있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요.”하연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저는 운석 씨가 본인의 행복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그 말에 운석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물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운석의 눈은 이미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그 뒤로 며칠 동안, 하연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패션쇼 준비 때문에 미루었던 일을 하느라 매일 야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자 겨우 한숨 돌리게 되었다.토요일 이른 아침, 하연은 강영숙의 연락을 받았다.“하연아, 너 오늘 고택에 올 수 있어?”솔직히 하연도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강영숙의 말투에 섞인 기대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끝내 승낙했다.“당연하죠, 오늘 할머님 생신인데, 시간 맞춰 갈게요.”긍정적인 답변을 들은 강영숙을 얼굴에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으마.”전화를 끊은 하연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 창문으로 흘러든 햇살은 따뜻한 색채를 띠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임이 틀림없었다.하연은 금고에서 지난번 경매에서 낙찰받은 에메랄드 보석을 꺼내자마자 가정부 장순영을 불러왔다.“이모님, 이 선물 포장해 주세요.”“네, 아가씨.”장순영은 숙련된 동작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선물을 예쁘게 포장하였다.리본이 묶여 있는 선물 상자를 보며 하연은 싱긋 웃었다.“이모님 손재주가 참 좋으시네요.”“저를 너무 띄워주시네요. 그런데 오늘 어디 가세요?”하연은 오늘 운전할 차를 하나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한씨 고택에요.”그 대답에 장순영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한편 차고에서 흰색 마세라티를 고른 하연은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홀연히 사라졌다.오늘 한씨 저택에는 알록달록한 등불과 장식들이 달려 있어 유난히 흥겨운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강영숙의 생일은 한씨 가문의 중요한 생사인지라 커다란 저택 밖에 이른 아침부터 가종 외제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선물을 들고 방문한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거실 안.사람들은 모두 강영숙 주변에 모여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