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도 그제야 안도했다.“아, 다행이다.”곧이어 하연은 눈을 들어 무대 우의 서준을 바라봤다. 이 시각 서준은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마이크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그리고 서준의 멘트를 듣는 순간 하연은 서준의 의도를 파악했다.무려 15분이나 지속된 서준의 연설은 계획한 시간을 훨씬 초과했지만 객석에 앉은 기자들은 지루하거나 따분해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서준이 얘기한 HT그룹의 비전은 B시에 거주한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니까.모든 사람은 귀를 쫑긋 세우고 서준의 연설에 집중했다.“이사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한 대표님 연설이 왜 이렇게 길죠?”그때 진호가 호현욱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호현욱은 서준이 시간을 끌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고작 십몇 분 동안 결과가 바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혹시 따로 준비한 거 또 있어?”호현욱의 물음에 진호가 이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쇼를 망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뒀으니까.”아니나 다를까, 서준의 연설이 끝나고 1조 모델들이 무대에 오르기 바쁘게 현장 스태프가 헐레벌떡 하연에게 달려왔다.“최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청자 한복을 입기로 했던 모델분이 갑자기 발을 다쳤어요.”하연은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섰다.“무슨 일이죠? 모델분은 지금 어디 있어요?”하연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며 무대 뒤에 있는 라커룸에 도착했다. 그랬더니 청자 한복을 입기로 한 모델이 통증 때문에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게다가 모델의 발등 위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얼른 구급상자 가져와요.”하연의 부탁에 현장 스태프가 구급상자를 들고 나타났다.“대체 무슨 일이에요? 어쩌다 다쳤어요?”“저도 모르겠어요. 하이힐을 신었는데 안에 칼날이 있었어요. 이제 곧 제 차례인데 발이 이렇게 돼서 어떡해요?”하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모든 상황을 비추어 보면 분명 누군가 일부러 이런 일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 하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혹시 알아요? 세계 무대로 나갈지.”“...”주위 사람들이 수군대며 이번 패션쇼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을수록 호현욱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옆에 앉아 있던 진호 역시 연신 식은땀을 닦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메인 의상이 망가졌으니 이번 쇼는 망치게 되어 있어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인 의상을 입은 모델이 무대 위에 올랐다.메인 모델의 등장에 현장은 일순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하연이 현장에서 수선한 메인 의상은 과감한 컬러와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독특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다.“이건 얼른 찍어야 해! 어쩜 이렇게 입체적인 다자인이 나올 수 있지? 오늘 본 디자인 중에 단연 최고야.”“디자이너가 정말 대단한데!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 거잖아.”“끝나면 무조건 인터뷰 따야겠네.”“이렇게 독특한 의상을 만들어 우리나라 문화를 세상에 알리다니, 분명 남다른 애국심을 품고 있는 디자이너가 틀림없어.”“이런 디자이너는 우리가 나서서 홍보해 줘야지.”“...”사람들이 말하면 말할수록 호현욱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심지어 앉든 서든 어딘가 불편하기만 했다.무대 위의 의상을 보는 호현욱의 눈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최하연, 내가 널 얕잡아 봤네.’솔직히 하연이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린 옷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로 수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호현욱은 화를 못 이겨 연신 기침했다. 그걸 본 진호가 얼른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이사님, 괜찮으십니까?”하지만 호현욱은 콧방귀를 뀌며 진호를 밀어버렸다.“이게 네가 말한 좋은 일이야?”“이건... 저도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끝난 건 아니니.”그 말에 호현욱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하지만 다음 순간.고풍스러운 한복을 입은 하연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뭐? 한복 한 벌에 40억?][이건 완전히 내 인식을 뒤집네. 그런데 이렇게 보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네티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마지막 의상을 선보였다. 스텝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담겨 있어 아래에서 보는 기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훔쳤다.특히 멀지 않은 곳에서 패션쇼를 보고 있던 서준은 이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검은 눈동자에 오직 하연만 있을 뿐.워킹을 마친 하연은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마침 하성이 나타나 하연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갑자기 저를 품에 안은 상대를 확인한순간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요?하성은 하연을 풀어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선물 줄 거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계속 선물 확인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오는 수밖에.”하연은 그제야 하성이 말한 선물이 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와! 고마워요. 저 잠깐만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이따 패션쇼가 끝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게요.”“그래.”하성은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대답에 하연은 얼른 라커룸으로 달려갔고, 하연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던 하성은 뒤돌아서자마자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성은 콧방귀를 뀌며 이내 서준에게서 시선을 뗐다.이번 패션쇼는 매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심지어 끝나자마자 온갖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를 차지하였고, 심지어 해외에서마저 이번 패션쇼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보도했다.한순간, 패션쇼의 열기는 극에 치솟으면서 하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순간 수많은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하연 씨, 오늘 패션쇼에서 선보인 의상은 모두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입니까?”“혹시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이렇게 큰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미 조사했어.”그때 상혁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행사장에 있는 모든 CCTV를 확인한 결과 흔적을 찾아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뒷모습만 나와 아직 소재 파악이 어려워.”“네? 그렇다면 정말 누군가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뜻이잖아요!”예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뒷모습만으로 조사할 수 있어요?”상혁은 하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그놈은 절대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하연은 그제야 안심했다.“그동안 다들 고생했어요. 제가 룸 하나 예약했으니 오늘 저녁에는 다들 함께 즐깁시다.”상혁의 말에 스태프들과 모델들 모두 환호했다.“좋아요. 최 사장님 고마워요.”“부 대표님 고마워요!”“...”하연은 그 틈에 뒤돌아 하성을 잡아끌었다.“가요, 오늘 같이 축하 파티해요.”“그래.”하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했다.하지만 하성을 이렇게 가만둘 리 없는 하연은 얼른 가흔한테 전화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성도 온다는 말에 가흔은 곧바로 주소를 물었다.그로부터 한 시간 뒤, 모든 사람들은 노래방 VIP룸에 도착했다.그때, 하성을 본 가흔이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하성 오빠, 오랜만이에요.”“오랜만이네.”하성은 싱긋 웃으며 인사치레로 대답했다.반짝이던 가흔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 그때 하연이 마침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이윽고 말하면서 가흔을 끌어 하성의 옆에 앉혔다.“이봐요, 웨이터! 여기 술 좀 줘요.”예나가 웨이터에게 주문하는 사이, 여은은 옆에 앉아 노래를 골랐다.“하연, 무슨 노래하고 싶어? 내가 예약해 줄게.”“난 아무거나 다 돼.”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맨 앞에서 술을 나르던 직원이 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고객님, 주문하신 술 나왔습니다.”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하연은 눈을 들어 확인했고,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는 일순 조용해졌다.그대로 굳어버린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완선은 이런 곳에서,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하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아니에요.”“뭘 멍때리고 있어? 얼른 잔 채워!”그때 예나가 술잔을 들고 다가와 분위기를 띄웠다.“우리 이렇게 술만 먹으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게임 하는 거 어때요?”옆에 있던 여은은 맞장구치듯 게임을 제안하면서 가흔과 하성을 번갈아 봤다.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여은은 온통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이윽고 여은과 예나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연과 상혁도 게임에 끌어들였다.“무슨 게임 놀 건데?”하연의 물음에 여은이 싱긋 미소 지었다.“뭐긴 뭐야. 당연히 진실 게임이지.”“와! 좋아!”예나가 먼저 호응하자 사람들은 모두 한곳에 둘러앉았다.“우선 룰부터 설명할게요. 아주 간단해요. 이 술병을 돌려 입구가 누굴 향하면 반드시 질문에 답할지 아니면 벌칙을 고를 지 선택해야 해요. 절대 억지 부리면 안 돼요. 물론 실패 시 벌주를 마셔야 해요.”예나의 말이 끝나자 여은이 얼른 맞장구쳤다.“오케이! 이제 시작합니다.”그러면서 먼저 유리병을 돌렸다.“5, 4, 3, 2, 1!”하지만 결국 병 입구가 예나 본인을 향했다.“아! 뭐야? 처음부터 나라고?”“잔말 말고 선택해 질문에 답할래? 아니면 벌칙 고를래?”“당연히 질문이지.”예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은과 하연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국 하연이 질문했다.“3초 내로 좋아하는 사람 이름 대.”“뭐?”갑작스러운 질문에 예나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그딴 거 없어. 난 솔로가 좋거든, 술 마실게!”말을 마친 예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예나의 행동에 여은은 실망한 듯 혀를 끌끌 찼다.“화끈하긴 하네. 그런데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이 아니면 몇 배의 벌칙이 따를 거야!”“걱정하지 마. 내 말 진심이니까.”2라운드는 예나가 술병을 돌렸다. 그 결과 유리병 입구가 마침 상혁을 가리켰다.그 순간, 예나와 여은은 약속이라도 한 듯 환호를 질렀다.“와! 상
“주문하신 과일 세트 나왔습니다.”웨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 앞에 다가가 과일 접시를 놓고 재빠르게 룸을 빠져나갔다.하지만 그 웨이터가 나가면서 문을 잠그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문을 닫고 열쇠를 뽑은 완선은 음흉한 눈빛을 드러냈다.‘최하연,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니 다들 살 생각하지 마.’그리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휘발유를 문에 들이붓고 노래방 복도에 흩뿌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라이터를 휘발유 쪽으로 던졌다.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온 복도를 덮치는 순간, 완선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었다.‘최하연, 너 오늘 죽었어’“아! 불이야! 불이야!”잠시 뒤, 복도를 지나가던 웨이터 한 명이 불길을 발견하고 곧바로 화재 경보 시스템을 작동했다.복도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사람 살려! 불이야! 다들 도망쳐요!”그리고 그 시각, 룸 안에 있던 상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큰일 났어. 불 난 것 같아!”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낚아채 함께 문 쪽으로 도망치려 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사람들도 황급히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무슨 일이지? 문이 안 열리는데?”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성도 시도했지만 역시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지?”그 사이 룸 안에 어느새 연기가 흘러들기 시작했다.“다들 얼른 수건으로 코와 입 막아.”다들 이 상황이 당황했다.그도 그럴 게, 이 룸에는 문이 하나뿐인데, 만약 문이 잠겼다면 꼼짝 없이 이곳에 갇힐 수밖에 없었으니까.“얼른 전화해.”예나가 먼저 전화를 꺼내 들고 119에 신고했고 하연 역시 태훈에게 전화했다.“우리 여기 화재가 발생했으니 얼른 구조 지원 보내줘.”그 말에 태훈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속히 지원 인력을 물색했다.한편, 하성과 상혁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문을 힘껏 걷어찼지만 문은 미동도 없었다.오히려 방 안으로 스며드는 연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어떡해? 우리 못 나가는 거야?”예나
가흔은 심하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이윽고 눈을 뚝뚝 떨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하성 오빠, 저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저 오빠...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하지만 아쉽게도 하성은 가흔의 절절한 고백을 듣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가흔을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말하지 마. 산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말하면 숨이 막힐 거야.”가흔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이 순간 죽음의 기운이 점점 저를 덮쳐오는 것 같아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하성에게 몸을 기댔다.이게 마지막이라면 하성과 같이 있고 싶었다.그걸 본 사람들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즐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 지옥으로 변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시련을 내린 것만 같았다.그러던 그때.문밖에 있는 소화기를 발견한 상혁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벗어 머리에 덮어쓰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상혁 오빠!”상혁은 제 몸을 덮쳐오는 불길도 상관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소화기를 꺼내 불이 붙은 곳을 향해 힘껏 쏘아댔다.“하연아, 얼른 나와. 다들 얼른 나와!”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하나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밖에서 때마침 경보음이 들여왔다.“신가흔!”곧이어 하성의 울부짖음이 뒤따랐다.하지만 가은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한편.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눈조차 뜨지 못하던 하연은 점점 희박해진 공기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대로 쓰러졌다.이윽고 의식이 점멸되는 순간, 따뜻한 품속에 안긴 걸 느꼈다.그 순간 하연은 본인이 이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다.그 뒤로 긴긴 꿈이 이어졌다.그러다 하연이 눈을 떴을 때는 그 일이 있은 사흘 뒤였다.F국.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자랑하는 병원에 최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최동신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하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물었다.“하연이 대체 언제 깨어난다더냐?”“할아버지,
하민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할아버지는 네 걱정 때문에 꼬박 사흘 동안 눈도 못 붙이셨어.”하연은 미안한 눈빛으로 최동신을 바라봤다.“할아버지, 죄송해요.”“너도 참, 할아버지한테 미안해할 거 뭐 있어? 이번 사고 때문에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다행히 부씨 집안 그 녀석이 불길 속에서 너를 구해내서 다행이지.”상혁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상혁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하연은 이내 물었다.“할아버지, 상혁 오빠는 어디 있어요?”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민과 하성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민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부상혁 괜찮아. 팔과 등에 화상을 입어 치료받는 중이야. 이모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마.”그 말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뭐라고요? 상혁 오빠가 다쳤어요?”그 일을 떠올리자 하성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 하성은 가흔을 지켜주느라 하연을 잊는 바람에 벌써 할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이번에 하연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상혁 덕분이었다.때문에 상혁은 최씨 가문 은인이나 다름없다.“걱정하지 마.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치료해 주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너야말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저는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최동신이 막아 나섰다.“하연아, 너 어디 가려고 그러니?”“할아버지, 저 상혁 오빠 보러 갈래요. 너무 걱정돼요.”하연을 한참 설득하던 최동신은 설득하다 못해 끝내 하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간호사더러 휠체어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휠체어에 안자 가.”“필요 없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고집을 부리던 하연은 결국 최동신을 꺾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하민과 함께 상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진숙이 지키고 있었고, 상혁은 등에 화상을 입은 탓에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상혁 오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
슬기는 몇 가지 요리를 더 주문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또 만났네요, 최 사장님.” 하연은 너무나 어색해서 순간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이 두 사람이 저녁을 같이 먹고 있어?!’ 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술을 따라 잔을 들어 올리며 이현에게 권했다. “한 상무님, 한잔하시죠.” 이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하연에게 말했다. “부 대표님께서 이렇게 성의를 보이시는데, 시간도 아직 여유롭고, 함께 하시죠.” 하연은 도망칠 길이 없었다. “지난번 만남은 소울 칵테일에서였죠. 그때 이후로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가게 주인이 이제 한 회사의 상무님으로 변신하셨다니.” 상혁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이현에게 술잔을 건넸다. “그때 부 대표님의 배려 덕분에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이현은 잔을 들어 올리며 상혁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 술잔, 그때의 감사함을 표하는 겁니다.” “잠깐!! 술을 마시면 안 돼요!!” 하연은 상혁이 잔을 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외쳤다. 순간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제 말은...” 하연은 사람들 앞에서 어쩔 수 없이 해명했다. “비서가 일찍 퇴근했다고 하니까... 직접 운전해야 하니 술은 피하는 게 좋겠어요.”이현은 하연의 이 말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며 은근히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부대표님께서도 저를 너무 어렵게 하시진 않을 거라 믿습니다.”상혁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기운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최 사장님께서 한 상무님을 정말 많이 신경 쓰시나 봐요. 오늘 뉴스도 봤는데, 두 분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참 낭만적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더라고요.”슬기는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더했다.“이 잔은 제가 최 사장님께 바칩니다.”하연은 슬기를 무시하고 오직 상혁만을 바라봤다. 상혁
상혁의 눈 속에 ‘짙게 깔린 먹구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는 몸을 뒤로 기대면서 슬기가 내민 후추가 들어가 있는 국을 건드리지 않았다. 의사가 당부했듯이, 그의 위장은 매운 음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히 후추 같은 자극적인 음식은 더더욱 피해야 했다.이미 30분이 지나갔지만, 옆 방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옆 방에서는, 양국성은 무언가를 눈치챈 듯,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하연과 이현, 두 사람만이 남았는데,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하연은 자리에 앉아 말을 들은 뒤,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저도 이미 한명준 씨에 대해 조사했어요. 전에 한명준 씨가 팀 내에서 누군가의 모함을 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조금 전 말한 그 내용은 잘 알고 있었어요.”이현도 놀라지 않은 채 말했다. “하연 씨, 여전히 저를 신경 쓰고 있잖아요.”그의 직설적인 말에 하연은 당황했다. “전 그저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한명준 씨와 전혀 상관없었어요.”“B시에서 재판이 열리던 날, 저는 한서준을 만나러 갔어요. 그때의 상황에 관해 묻자, 한서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어요. 하연 씨는 그날, 학교에서 저를 만나지 못한 것에 화가 나서 B시까지 찾아왔고, 마침 저와 비슷하게 생긴 한서준을 보고 저라고 착각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수년 동안 한서준에게 저라고 믿으며 굽신거리며 살아왔다는 거였어요.”이 이야기를 할 때, 한서준은 분노에 찬 눈으로 피가 맺히듯 붉어진 눈을 하고 난간을 붙들고 고함을 질렀다.“이 말을 듣고 네가 만족했냐? 기뻤냐?”이현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몇 년 동안, 하연 씨 마음속에 정말 저에 대한 사랑은 없었던 거예요?”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하연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서준을 사랑하지 않았고, 한서준에게 느낀 감정은 단지, 그를 옛날의 한명준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서빙하는 직원은 방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모
하연이 예상했던 답과 똑같았다.하연은 입술을 꾹 누르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그러니까, 하연 씨는 진작부터 제 정체를 알고 있었던 거죠? 그 사실을 뒤늦게 안 게 아니고요.”“저는 왕씨 가문의 삶이 싫어해요.” “그런데 이제는 왕씨 가문으로 돌아갔잖아요.” 하연은 몸을 옆으로 돌려 정확하게 지적했다.이현은 자리에 앉아 술기운에 머리가 띵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 밖을 보았다. 남녀 한 쌍이 지나가는 게 보였고, 남자의 시선이 잠시 이현에게 떨어졌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그 남자는 바로 부상혁이었다.이현은 시선을 거두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제가 한명준으로 돌아가려면 왕씨 가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연 씨, 지금 저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지만, 괜찮아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 앞에 서서 아슬아슬한 거리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씨 가문의 부남준이 권력을 잡으려는 걸 들었어요. 누가 끝까지 웃을지 아직 몰라요. 하연 씨도 신중하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부 대표님, 이쪽입니다.” 반대편에서 주슬기가 웃으며 손짓했다.그 순간, 들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상혁이 본 것은 바로 하연과 ‘한명준’의 다정한 모습이었다.하연은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창가 쪽으로 가서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한 상무님, 제가 먼저 가야 할 것 같아요. 한 상무님은 정말 마음이 있다면 양 국장님에게 말씀을 좀 잘 드리세요. 한 상무님의 능력이라면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을 거예요.”“제가 그때 일부러 우리 약속했던 장소에 안 나온 게 아니에요. 누군가의 모함을 당한 거였어요.” 이현은 하연의 퇴장을 막으려는 듯 무겁게 말을 꺼냈다.하연의 등이 순간 경직되었다.“뭐라고요?” ...아무리 고급스러운 여자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참을 수 없었다.슬기는 수사 해당화 아래에서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제가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