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알아요? 세계 무대로 나갈지.”“...”주위 사람들이 수군대며 이번 패션쇼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을수록 호현욱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옆에 앉아 있던 진호 역시 연신 식은땀을 닦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메인 의상이 망가졌으니 이번 쇼는 망치게 되어 있어요.”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메인 의상을 입은 모델이 무대 위에 올랐다.메인 모델의 등장에 현장은 일순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눈길은 일제히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하연이 현장에서 수선한 메인 의상은 과감한 컬러와 세련된 스타일을 자랑할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독특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집중시켰다.“이건 얼른 찍어야 해! 어쩜 이렇게 입체적인 다자인이 나올 수 있지? 오늘 본 디자인 중에 단연 최고야.”“디자이너가 정말 대단한데!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 거잖아.”“끝나면 무조건 인터뷰 따야겠네.”“이렇게 독특한 의상을 만들어 우리나라 문화를 세상에 알리다니, 분명 남다른 애국심을 품고 있는 디자이너가 틀림없어.”“이런 디자이너는 우리가 나서서 홍보해 줘야지.”“...”사람들이 말하면 말할수록 호현욱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심지어 앉든 서든 어딘가 불편하기만 했다.무대 위의 의상을 보는 호현욱의 눈에는 이미 거센 파도가 휘몰아쳤다.‘최하연, 내가 널 얕잡아 봤네.’솔직히 하연이 그토록 엉망이 되어버린 옷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로 수선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그것도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호현욱은 화를 못 이겨 연신 기침했다. 그걸 본 진호가 얼른 그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이사님, 괜찮으십니까?”하지만 호현욱은 콧방귀를 뀌며 진호를 밀어버렸다.“이게 네가 말한 좋은 일이야?”“이건... 저도 왜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끝난 건 아니니.”그 말에 호현욱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하지만 다음 순간.고풍스러운 한복을 입은 하연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무대 위에 나타났다.가냘프고 여리여리한
[뭐? 한복 한 벌에 40억?][이건 완전히 내 인식을 뒤집네. 그런데 이렇게 보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네티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리 없는 하연은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마지막 의상을 선보였다. 스텝 하나하나 동작 하나하나에 기품이 담겨 있어 아래에서 보는 기자들의 마음을 단번에 훔쳤다.특히 멀지 않은 곳에서 패션쇼를 보고 있던 서준은 이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검은 눈동자에 오직 하연만 있을 뿐.워킹을 마친 하연은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마침 하성이 나타나 하연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갑자기 저를 품에 안은 상대를 확인한순간 하연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요?하성은 하연을 풀어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선물 줄 거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계속 선물 확인하지 않으니 내가 직접 오는 수밖에.”하연은 그제야 하성이 말한 선물이 본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와! 고마워요. 저 잠깐만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이따 패션쇼가 끝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게요.”“그래.”하성은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그 대답에 하연은 얼른 라커룸으로 달려갔고, 하연이 시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던 하성은 뒤돌아서자마자 서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하지만 하성은 콧방귀를 뀌며 이내 서준에게서 시선을 뗐다.이번 패션쇼는 매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심지어 끝나자마자 온갖 사이트의 인기 검색어를 차지하였고, 심지어 해외에서마저 이번 패션쇼에 대한 기사를 앞다투어 보도했다.한순간, 패션쇼의 열기는 극에 치솟으면서 하연이 옷을 갈아입고 나타난 순간 수많은 기자들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하연 씨, 오늘 패션쇼에서 선보인 의상은 모두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입니까?”“혹시 어디서 영감을 받았나요?”“이렇게 큰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마친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이미 조사했어.”그때 상혁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하연의 앞에 멈춰 섰다.“행사장에 있는 모든 CCTV를 확인한 결과 흔적을 찾아내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뒷모습만 나와 아직 소재 파악이 어려워.”“네? 그렇다면 정말 누군가 일부러 망가뜨렸다는 뜻이잖아요!”예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뒷모습만으로 조사할 수 있어요?”상혁은 하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그놈은 절대 도망가지 못할 테니까.”하연은 그제야 안심했다.“그동안 다들 고생했어요. 제가 룸 하나 예약했으니 오늘 저녁에는 다들 함께 즐깁시다.”상혁의 말에 스태프들과 모델들 모두 환호했다.“좋아요. 최 사장님 고마워요.”“부 대표님 고마워요!”“...”하연은 그 틈에 뒤돌아 하성을 잡아끌었다.“가요, 오늘 같이 축하 파티해요.”“그래.”하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동의했다.하지만 하성을 이렇게 가만둘 리 없는 하연은 얼른 가흔한테 전화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성도 온다는 말에 가흔은 곧바로 주소를 물었다.그로부터 한 시간 뒤, 모든 사람들은 노래방 VIP룸에 도착했다.그때, 하성을 본 가흔이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하성 오빠, 오랜만이에요.”“오랜만이네.”하성은 싱긋 웃으며 인사치레로 대답했다.반짝이던 가흔의 눈은 일순 어두워졌다. 그때 하연이 마침 나타나 인사를 건넸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이윽고 말하면서 가흔을 끌어 하성의 옆에 앉혔다.“이봐요, 웨이터! 여기 술 좀 줘요.”예나가 웨이터에게 주문하는 사이, 여은은 옆에 앉아 노래를 골랐다.“하연, 무슨 노래하고 싶어? 내가 예약해 줄게.”“난 아무거나 다 돼.”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맨 앞에서 술을 나르던 직원이 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고객님, 주문하신 술 나왔습니다.”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에 하연은 눈을 들어 확인했고, 상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공기는 일순 조용해졌다.그대로 굳어버린 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완선은 이런 곳에서,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하연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아니에요.”“뭘 멍때리고 있어? 얼른 잔 채워!”그때 예나가 술잔을 들고 다가와 분위기를 띄웠다.“우리 이렇게 술만 먹으면 너무 재미없잖아요. 게임 하는 거 어때요?”옆에 있던 여은은 맞장구치듯 게임을 제안하면서 가흔과 하성을 번갈아 봤다.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여은은 온통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이윽고 여은과 예나는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연과 상혁도 게임에 끌어들였다.“무슨 게임 놀 건데?”하연의 물음에 여은이 싱긋 미소 지었다.“뭐긴 뭐야. 당연히 진실 게임이지.”“와! 좋아!”예나가 먼저 호응하자 사람들은 모두 한곳에 둘러앉았다.“우선 룰부터 설명할게요. 아주 간단해요. 이 술병을 돌려 입구가 누굴 향하면 반드시 질문에 답할지 아니면 벌칙을 고를 지 선택해야 해요. 절대 억지 부리면 안 돼요. 물론 실패 시 벌주를 마셔야 해요.”예나의 말이 끝나자 여은이 얼른 맞장구쳤다.“오케이! 이제 시작합니다.”그러면서 먼저 유리병을 돌렸다.“5, 4, 3, 2, 1!”하지만 결국 병 입구가 예나 본인을 향했다.“아! 뭐야? 처음부터 나라고?”“잔말 말고 선택해 질문에 답할래? 아니면 벌칙 고를래?”“당연히 질문이지.”예나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여은과 하연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국 하연이 질문했다.“3초 내로 좋아하는 사람 이름 대.”“뭐?”갑작스러운 질문에 예나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싱긋 웃었다.“그딴 거 없어. 난 솔로가 좋거든, 술 마실게!”말을 마친 예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예나의 행동에 여은은 실망한 듯 혀를 끌끌 찼다.“화끈하긴 하네. 그런데 진실을 말해야 해. 진실이 아니면 몇 배의 벌칙이 따를 거야!”“걱정하지 마. 내 말 진심이니까.”2라운드는 예나가 술병을 돌렸다. 그 결과 유리병 입구가 마침 상혁을 가리켰다.그 순간, 예나와 여은은 약속이라도 한 듯 환호를 질렀다.“와! 상
“주문하신 과일 세트 나왔습니다.”웨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 앞에 다가가 과일 접시를 놓고 재빠르게 룸을 빠져나갔다.하지만 그 웨이터가 나가면서 문을 잠그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문을 닫고 열쇠를 뽑은 완선은 음흉한 눈빛을 드러냈다.‘최하연, 네가 나를 이렇게 괴롭히니 다들 살 생각하지 마.’그리고 어디서 났는지 모를 휘발유를 문에 들이붓고 노래방 복도에 흩뿌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라이터를 휘발유 쪽으로 던졌다.불길이 치솟아 오르면서 온 복도를 덮치는 순간, 완선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크게 웃었다.‘최하연, 너 오늘 죽었어’“아! 불이야! 불이야!”잠시 뒤, 복도를 지나가던 웨이터 한 명이 불길을 발견하고 곧바로 화재 경보 시스템을 작동했다.복도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사람 살려! 불이야! 다들 도망쳐요!”그리고 그 시각, 룸 안에 있던 상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큰일 났어. 불 난 것 같아!”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낚아채 함께 문 쪽으로 도망치려 했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사람들도 황급히 일어나 문 쪽으로 달려갔다.“무슨 일이지? 문이 안 열리는데?”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성도 시도했지만 역시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지?”그 사이 룸 안에 어느새 연기가 흘러들기 시작했다.“다들 얼른 수건으로 코와 입 막아.”다들 이 상황이 당황했다.그도 그럴 게, 이 룸에는 문이 하나뿐인데, 만약 문이 잠겼다면 꼼짝 없이 이곳에 갇힐 수밖에 없었으니까.“얼른 전화해.”예나가 먼저 전화를 꺼내 들고 119에 신고했고 하연 역시 태훈에게 전화했다.“우리 여기 화재가 발생했으니 얼른 구조 지원 보내줘.”그 말에 태훈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속히 지원 인력을 물색했다.한편, 하성과 상혁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문을 힘껏 걷어찼지만 문은 미동도 없었다.오히려 방 안으로 스며드는 연기 때문에 일행은 모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어떡해? 우리 못 나가는 거야?”예나
가흔은 심하게 기침하며 고개를 저었다.이윽고 눈을 뚝뚝 떨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하성 오빠, 저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저 오빠... 오래전부터 좋아했어요.”하지만 아쉽게도 하성은 가흔의 절절한 고백을 듣지 못한 채 괴로워하는 가흔을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말하지 마. 산소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말하면 숨이 막힐 거야.”가흔은 그런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그저 이 순간 죽음의 기운이 점점 저를 덮쳐오는 것 같아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하성에게 몸을 기댔다.이게 마지막이라면 하성과 같이 있고 싶었다.그걸 본 사람들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즐거웠던 분위기가 한순간 지옥으로 변해 모든 사람에게 죽음의 시련을 내린 것만 같았다.그러던 그때.문밖에 있는 소화기를 발견한 상혁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옷을 벗어 머리에 덮어쓰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상혁 오빠!”상혁은 제 몸을 덮쳐오는 불길도 상관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소화기를 꺼내 불이 붙은 곳을 향해 힘껏 쏘아댔다.“하연아, 얼른 나와. 다들 얼른 나와!”상혁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사람들은 하나둘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 밖에서 때마침 경보음이 들여왔다.“신가흔!”곧이어 하성의 울부짖음이 뒤따랐다.하지만 가은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한편.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눈조차 뜨지 못하던 하연은 점점 희박해진 공기 때문에 숨 쉬는 것조차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대로 쓰러졌다.이윽고 의식이 점멸되는 순간, 따뜻한 품속에 안긴 걸 느꼈다.그 순간 하연은 본인이 이대로 죽었다고 생각했다.그 뒤로 긴긴 꿈이 이어졌다.그러다 하연이 눈을 떴을 때는 그 일이 있은 사흘 뒤였다.F국.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자랑하는 병원에 최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최동신은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침대에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하연을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물었다.“하연이 대체 언제 깨어난다더냐?”“할아버지,
하민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할아버지는 네 걱정 때문에 꼬박 사흘 동안 눈도 못 붙이셨어.”하연은 미안한 눈빛으로 최동신을 바라봤다.“할아버지, 죄송해요.”“너도 참, 할아버지한테 미안해할 거 뭐 있어? 이번 사고 때문에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다행히 부씨 집안 그 녀석이 불길 속에서 너를 구해내서 다행이지.”상혁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상혁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하연은 이내 물었다.“할아버지, 상혁 오빠는 어디 있어요?”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민과 하성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민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부상혁 괜찮아. 팔과 등에 화상을 입어 치료받는 중이야. 이모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마.”그 말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뭐라고요? 상혁 오빠가 다쳤어요?”그 일을 떠올리자 하성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 하성은 가흔을 지켜주느라 하연을 잊는 바람에 벌써 할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이번에 하연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상혁 덕분이었다.때문에 상혁은 최씨 가문 은인이나 다름없다.“걱정하지 마.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치료해 주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너야말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저는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최동신이 막아 나섰다.“하연아, 너 어디 가려고 그러니?”“할아버지, 저 상혁 오빠 보러 갈래요. 너무 걱정돼요.”하연을 한참 설득하던 최동신은 설득하다 못해 끝내 하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간호사더러 휠체어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휠체어에 안자 가.”“필요 없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고집을 부리던 하연은 결국 최동신을 꺾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하민과 함께 상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진숙이 지키고 있었고, 상혁은 등에 화상을 입은 탓에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상혁 오
“그래, 그런 사람은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이 일은 너희들한테 맡길게.”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무언중에 협의를 달성하는 순간, 구완선의 최후는 이미 정해졌다.며칠 뒤.완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음습한 방 안에 갇혀 있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입에는 냄새 나는 양말이 물려 있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방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애원하는 듯했다.하연은 방 안에 서서 처참한 몰골의 완선을 내려다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나야, 최하연.”말소리가 들리자 마구 버둥대던 완선은 동작을 멈췄다.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가린 검은 천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연이 손을 뻗어 그 천을 풀어주자 공포로 가득한 완선의 두 눈이 드러났다. 심지어 몸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하연은 완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왜? 무서워? 애초에 방화할 때는 이럴 거라는 거 생각 못 했나 봐?”완선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공포에 젖은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하연이 자비 없는 태도로 완선의 입을 막고 있던 양말을 빼내자 완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최하연,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제발 한 번만 봐줘.”하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그 웃음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봐 달라고? 너는 나 봐준 적 있어?”그때 완선은 분명 하연의 목숨을 노렸다.그날 만약 구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든 사람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다.‘그런데 봐달라고? 꿈도 야무져.’“최하연,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너무 화나서 그랬어, 너무 화나서 너한테 겁만 주려고 한 거였어. 다른 의도는 정말 없었어. 나 풀어줘, 응? 나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못 있겠어.”완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바퀴벌레와 쥐가 지나다녔는지 모른다. 심지어 더러운 썩은 냄새가 코를 자극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며칠 동안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
허징인이 상혁을 찾았다는 소식은 남준에게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만나지는 않은 것 같아. 물론 앞으로도 절대 마주할 일이 없을 테니까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야.’남준은 마음을 다잡았지만, 속내에서는 의문이 피어올랐다.‘내가 오래 지켜본 부상혁이라면, 이유 없이 움직일 리가 없는데...’하지만 상혁이 허징인을 언급했다는 것 자체가 심상치 않았다.남준은 조용히 시선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그 자체로 압도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왕좌에 앉은 자처럼, 이 남자의 존재만으로도 숨이 막힐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혹시... 무언가 알고 있는 건가?’의심이 한 번 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간다. 그러나 남준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급히 뛰어 들어온 부하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했다.“상무님, 교도소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남준은 정다영의 집에 인사를 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옷깃을 정리하던 손이 멈춰 섰고, 표정이 굳어졌다.“무슨 일인데 그래?”부하는 다급한 얼굴로 모든 걸 털어놓았다.“정규인이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변호사를 불러서 항소재판을 열겠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남준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순식간에 부하의 멱살을 움켜쥐며 낮은 목소리로 윽박질렀다.“잘 갇혀 있던 놈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건데?”부하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혹시... 어쩌면 허징인과 그 아들...”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준이 단칼에 잘라버렸다.“말도 안 돼. 이 일은 우리 쪽만 알고 있어. 교도소 안에 있는 정규인이 대체 어떻게 알겠어?”부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맞습니다. 우리 쪽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외부와 접촉할 방법은 없습니다.”그러나 의구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정규인,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남준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멱살을 놓았다.‘이상한 일이 벌어지면 반드시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