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민의 눈빛은 살짝 어두워지더니 입을 열었다.“하연아,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할아버지는 네 걱정 때문에 꼬박 사흘 동안 눈도 못 붙이셨어.”하연은 미안한 눈빛으로 최동신을 바라봤다.“할아버지, 죄송해요.”“너도 참, 할아버지한테 미안해할 거 뭐 있어? 이번 사고 때문에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다행히 부씨 집안 그 녀석이 불길 속에서 너를 구해내서 다행이지.”상혁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하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디에도 상혁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하연은 이내 물었다.“할아버지, 상혁 오빠는 어디 있어요?”그때 뒤쪽에 서 있던 하민과 하성이 눈빛을 교환하더니, 하민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부상혁 괜찮아. 팔과 등에 화상을 입어 치료받는 중이야. 이모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마.”그 말에 하연은 이내 몸을 일으켰다.“뭐라고요? 상혁 오빠가 다쳤어요?”그 일을 떠올리자 하성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때 하성은 가흔을 지켜주느라 하연을 잊는 바람에 벌써 할아버지와 다른 형제들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이번에 하연을 구할 수 있었던 건 상혁 덕분이었다.때문에 상혁은 최씨 가문 은인이나 다름없다.“걱정하지 마. 세계 최고의 의료진이 치료해 주고 있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너야말로,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저는 괜찮아요.”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더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최동신이 막아 나섰다.“하연아, 너 어디 가려고 그러니?”“할아버지, 저 상혁 오빠 보러 갈래요. 너무 걱정돼요.”하연을 한참 설득하던 최동신은 설득하다 못해 끝내 하연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서두를 필요 없어. 내가 간호사더러 휠체어 가져오라고 할 테니까 휠체어에 안자 가.”“필요 없어요, 저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요.”고집을 부리던 하연은 결국 최동신을 꺾지 못하고 휠체어에 앉아 하민과 함께 상혁의 병실로 향했다.병실에는 아니나 다를까 조진숙이 지키고 있었고, 상혁은 등에 화상을 입은 탓에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상혁 오
“그래, 그런 사람은 갈기갈기 찢어 죽여도 시원찮아. 이 일은 너희들한테 맡길게.”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무언중에 협의를 달성하는 순간, 구완선의 최후는 이미 정해졌다.며칠 뒤.완선은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음습한 방 안에 갇혀 있다. 눈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입에는 냄새 나는 양말이 물려 있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소리만 낼 뿐이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방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 애원하는 듯했다.하연은 방 안에 서서 처참한 몰골의 완선을 내려다보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나야, 최하연.”말소리가 들리자 마구 버둥대던 완선은 동작을 멈췄다.이윽고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눈을 가린 검은 천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하연이 손을 뻗어 그 천을 풀어주자 공포로 가득한 완선의 두 눈이 드러났다. 심지어 몸을 끊임없이 떨고 있었다.하연은 완선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왜? 무서워? 애초에 방화할 때는 이럴 거라는 거 생각 못 했나 봐?”완선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공포에 젖은 두 눈에는 눈물이 맺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하연이 자비 없는 태도로 완선의 입을 막고 있던 양말을 빼내자 완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최하연,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빌게, 제발 한 번만 봐줘.”하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그 웃음에는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봐 달라고? 너는 나 봐준 적 있어?”그때 완선은 분명 하연의 목숨을 노렸다.그날 만약 구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모든 사람이 불길 속에서 목숨을 잃었을 거다.‘그런데 봐달라고? 꿈도 야무져.’“최하연, 나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너무 화나서 그랬어, 너무 화나서 너한테 겁만 주려고 한 거였어. 다른 의도는 정말 없었어. 나 풀어줘, 응? 나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 못 있겠어.”완선이 이곳에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바퀴벌레와 쥐가 지나다녔는지 모른다. 심지어 더러운 썩은 냄새가 코를 자극해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며칠 동안
짤막한 비명을 지르자마자 완선은 그대로 쓰러졌다.그 모습은 CCTV를 통해 감시실에 있는 사람의 눈에 고스란히 전해졌다.하성은 입가에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독도 없는 뱀을 보고도 저렇게 겁을 먹다니.”그 말에 옆에 있던 하경이 말했다.“여자애들은 거의 다 뱀을 무서워해. 그저 평범한 얼룩 뱀이어도 공포의 대상일 거야. 물론 오늘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매일 뱀 한 마리씩 추가해. 한계를 테스트해 보지 뭐. 감히 우리 공주님을 건드리다니, 미치거나 바보가 될 때까지 몰아붙여야지. 우리 하연을 건드린 대가는 톡톡히 치르게 헤야지.”“...”옆에서 듣고 있던 하성이 몸서리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그래. 그렇게 하지 뭐.”완선이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는 하연은 모든 걸 두 오빠한테 맡기고 곧바로 떠나갔다. 그러고는 병원으로 가 상혁을 보살피는데 집중했다.상혁의 상황은 심각한 게 아니었지만 양가 어르신들 등쌀에 못 이겨 보름 정도 입원한 뒤에야 퇴원했다.그동안 F국에만 있던 하연은 B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리 없었다.그때 하성이 최근 기사를 하연에게 보여주었다.“자, 이번 패션쇼 엄청 성공적이야.”“정말요?”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태블릿을 받아 들었다.“직접 봐. 국내외 매체에서 난리 났어. 네티즌들도 거의 호평이고. 앞으로 DS 그룹에 주문 많이 들어오겠는데?”하성의 말에 하연은 들으며 곧바로 기사를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국내외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 네티즌들도 이번 패션쇼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이것만으로도 이번 패션쇼가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정말 다행이에요. 우리 브랜드 홍보도 하고 우리나라 문화도 해외에 널리 알렸네요.”“그럼, 우리 하연이가 누구인데. 당연히 최고지.”하성의 칭찬에 하연은 싱긋 미소 지었다.“셋째 오빠, 고마워요. 저 앞으로 더 노력할게요.”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 번호를 확인한 하연은 이내 엄숙한 표정을
하민은 질문한 하성이 아닌 하연을 바라봤다.“하연아, 방금 정태훈한테서 연락받았는데...”태훈의 이름을 들은 순간 하연은 대충 무슨 일을 말할지 짐작했다.“패션쇼 현장에서 벌어졌던 그 일 때문이에요?”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옷 망가뜨린 범인 잡았대. 패션쇼에 가위를 소지해 들어왔다는 것도 인정하고, 몯델의 신발에 칼날 숨긴 것도 인정했다.”들으면 들을수록 하연은 화가 치밀었다.“그리고요?”“찾아봤더니 그 사람 고아였어. 가족도 친척도 없는 사람이 뜬금없이 계좌로 몇천만 원이 입금돼서 조사했는데 아무 단서도 못 찾았어. 그리고 입 꾹 다물고 있어. 그저 본인 잘못 인정만 하고 누가 지시했는지는 말하지 않아.”“...”여기까지 들은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그러니까 다른 단서는 없다는 거네요?”“응. 상대방은 분명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를 공격하고 있어. 막기 어려워. 잘 생각해 봐, 너 평소에 누구 심기 건드린 적 있어?”하연은 어깨를 으쓱했다.“그건 저야 모르죠. 그런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에요.”그 말에 하민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설마 한서준 그놈 때문에 너한테 이러는 건 아니겠지?”민혜경만 봐도 아주 좋은 선례다.“혹시 민씨 가문 짓은 아닐까?”하연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민씨 가문은 이미 몰락했어요. 그렇게 큰돈을 선뜻 내놓으면서 그런 지시를 내렸을 리 없어요.”하연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하민은 그것 외에 다른 경우는 떠오르지 않았다.“큰오빠, 그 사람이 인정했다면 우리 집안 규칙대로 처리하는 건 어때요?”하민은 하연의 뜻을 단번에 이해했다.“우리 최씨 집안 사람을 건드리면 당연히 그 대가를 치러야지. 이 일은 오빠한테 맡겨.”그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하민이 오히려 걱정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하연아, B시는 너무 위험해. 네가 혼자 그곳에 가 있으면 우리 모두 마음 놓지 못해. 차라리 DS 그룹은 포기하고 여기 F국에 있는 본사로 돌아오는 건 어때?”“
하연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하민은 하연이 F국을 떠나는 걸 끝내 동의했다.B시로 돌아온 하연은 곧바로 안형준을 만나러 길을 떠났다.그 시각, 안형준은 민성시립 대학교 교수 사무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이번 하연이 패션쇼에서 선보인 복장을 평가하고 있었다.“안 교수님, 이번 패션쇼가 성공리에 막을 내린 건 모두 메인 의상 덕분이었어요.”안형준의 제자인 주형민이 먼저 의견을 내비치자 안형준도 그 말에 동의했다.“맞아. 이번 디자인 무척 훌륭해. 벌써 해외 패션쇼의 초대도 받았어.”“정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이번 기회에 해외에서 패션쇼 열 수 있겠네요?”그 말에 다른 제자도 흥분한 듯 눈을 반짝였다.“당연하지.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해?”“국제 패션쇼에서 예전에는 우리 작품 꺼리더니. 심지어 우리는 세계 무대에 설 만한 복장을 디자인하지 못한다고 무시도 했었잖아. 그런데 이런 걸 보면 우리 실력을 제대로 증명했나 봐.”“어떡해, 너무 흥분돼.”“...”흥분한 듯 말을 보태는 학생들 속, 유일하게 한 사람만 기쁨이 아닌 비아냥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디자인도 평범하고, 포인트도 없구먼. 다들 어쩜 보는 안목이 이렇게 없어?”그 말 한마디에 기쁨으로 가득 찼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서창섭, 너 그게 무슨 뜻이야? 너도 우리나라 디자인 무시하는 거야?”서창섭이라 불린 사람은 귀찮은 듯 대답했다.“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지연 선배는 어떻게 이겼나 몰라. 교수님, 대체 무슨 생각이예요? 어떻게 이런 사람을 메인 디자이너로 선발하셨어요?”지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안형준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다른 학생들도 지연의 이름에 하나둘씩 입을 다물었다.“서창섭, 자고로 말은 적게 하랬어. 말할 줄 모르면 조용히 닥치고 있는 게 어때?”“네가 지연 선배 짝사랑하는 건 알겠는데, 이번 일은 엄연히 따지면 지연 선배 잘못이야.”“잘못한 건 인정해야지. 편 들어주면 어떡해?”다른 학생들의 말에 창섭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졌다.“너희가 뭘 알
“서창섭! 너 그게 무슨 말이야. 하연 선배는 본인 실력으로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따냈거든. 패션쇼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사회적으로 평가도 얼마나 좋은데, 이거로 하연 선배 실력은 증명된 거 아닌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동기의 충고에도 창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경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하하, 고작 이게 뭐라고. 이 정도는 누구나 다 해! 최하연이여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서창섭, 그만해!”참다 못한 형민이 결국 나섰지만 창섭의 태도는 여전히 똑같았다.“최하연, 정말 이번 패션쇼에 본인 신분과 배경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어?”하연은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 그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창섭을 확인했다.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기에 하연은 상대의 이런 적대적인 태도가 더 이해되지 않았다.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이번 메인 디자이너 선발은 공평하게 진행되었어요. 창섭 씨가 말한 더러운 수단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창섭은 큰 소리로 웃었다.“그 말을 누가 믿지? 너희는 믿어?”그때, 형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서창섭, 메인 디자이너는 공정한 경쟁으로 선정한 거야.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하연 선배를 선택했고. 그러니까 소란 그만 피워!”그 말에 창섭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형민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모든 건 그가 지연한테서 들은 것과 완전히 달랐으니까.“서창섭,”그때 안형준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연유로 이러는지 몰라도 하나만은 명확히 알려주지. 하연 양의 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확인하고 충분히 고민한 끝에 선정된 거다. 오늘 너희가 모두 여기 모였으니 내가 솔직히 말하마.”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학생들은 모두 안형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안형준은 제자들의 시선 속에서 하연을 바라봤다.“하연 양, 내가 패션쇼 전에 대충 얘기한 적은 있어도 제대로 설명은 안 했었죠?
“스승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싱긋 미소 지으며 내뱉은 하연의 대답에 모두가 함께 준비를 돕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차 한잔을 하연에게 건넸다.하연은 차를 받아 들고 안형준의 앞에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스승님, 절 받으세요.”안형준은 하연이 건넨 차를 받아 들더니 미리 봉투에 넣어 두었던 용돈을 하연에게 건넸다.“그만 일어나거라.”“감사합니다.”입문 의식이 끝나자 안형준은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자기 제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나 하더니 끝내 업계에서 친한 친구들한테 문자로 이 일을 자랑했다.마치 세상에 모두 알리기라도 하듯이....민성 시립대학교에서 나오자마자 하연은 저에게로 걸어오는 웬 훤칠한 남자를 발견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운석이 먼저 하연을 알아보고 성큼성큼 걸어왔다.“여신님! 귀국했네요?”피곤함에 찌든 운석의 모습에 하연은 놀라운 듯 물었다.“운석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운석은 대답 대신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본인이 할 말을 내뱉었다.“화재 사고를 당했다던데,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괜찮아요?”“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하연의 대답에 운석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그동안 운석은 사업 때문에 D시에 있느라 B시의 소식을 여쭈어볼 새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연락했을 때, 하연이 화재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때문에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돌아왔고, 지금 하연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거예요?”그때, 하연이 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캐리어를 가리키며 물었다.운석은 부정하지 않고 서류를 꺼내더니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이처럼 하연에게 그 서류를 모두 건네며 말했다.“자, 봐봐요. 제가 그동안 이룬 실적이에요.”“이렇게나 많이요?”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류 뭉치를 확인하더니 속으로 운석의 능력에 탄복했다.그러자 운석은 득의양양
“뭐? 남자 두 명이 여자 한 명을 놓고 싸우기는! 최 사장님과 제일 친한 사람 부 대표님이거든. 설마 잊었어? 최 사장님 현재 애인은 부 대표님이라던데.”“대박. 막장이 따로 없네!”“...”직원들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소파에 앉아 있던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발자국도 안 되는 위치에 서 있던 구동후가 막아 나섰다.“대표님, 저 사람들 함부로 지껄이는 거나 신경 쓰지 마세요.”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 밑은 어느새 어두워졌고,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그로부터 얼마 뒤, 두 사람은 앞뒤로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를 올랐다.“하연 씨, D시에 아직 발전 공간이 엄청 많더라고요. 그래서 나 앞으로 3년 동안 중점적으로 D시 쪽에 집중할 예정이에요”“괜찮은 생각이네요. D시 시장을 열 수만 있다면 이익이 엄청날 거예요.”“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절대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오일은 우리가 앞으로 밀고 나갈 발전 방향이에요...”운석과 하연은 대화를 하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하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작스러운 목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최 사장님, 이제야 오셨네요?”익숙한 목소리에 운석은 하려던 말을 이내 멈췄고, 하연은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더니 싱긋 웃었다.곧이어 상대 쪽으로 걸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호 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입니까?”“최 사장이 죽다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돼서 상태도 살필 겸 왔죠. 몸은 괜찮아요?”‘웃겨 정말, 고양이가 쥐 생각하네.’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걱정과 관심 고맙습니다. 저는 무사합니다.”호현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배의 자태를 나타냈다.“괜찮다니 다행이군. 이번 최 사장님이 맡은 패션쇼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회사 실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던데, 축하해요. 물론 제1분기 실적이 나온 걸 보니 최 사장님이 약속한 30퍼센트에는 한참 못 미치던데, 힘내요.”하연은 눈을 들어 조금도 밀리지 않는 눈빛을 보냈다.“이제 고작 제1분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
송혜선은 태동이 불안해졌지만, 병원에 제때 도착한 덕분에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병실에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조봉규가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뒤 병실로 돌아오자, 송혜선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혜선아, 의사가 말했잖아. 임신 기간은 많이 지나서 안정기에 들었지만 그래도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한다고 지금처럼 자극을 받으면 쉽게 자궁 수축이 일어나 조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조봉규의 말에 송혜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대신 천천히 물었다. “그 사람... 아직 안 왔어?” 그녀가 말한 ‘그 사람’이란 당연히 부동건을 뜻했다. 조봉규는 안경을 고쳐 쓰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부드럽게 말했다. “이미 연락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송혜선은 그 말을 듣고서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이번에 남준이가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그 사람 때문이야. 그러니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야겠지...” 그녀는 손을 천천히 배 위로 가져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부동건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병실 문 너머로 송혜선이 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한걸음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괜찮아?” 하지만 송혜선은 몸을 돌려 등을 돌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동건은 다급해지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대답 좀 해봐.” 옆에 있던 조봉규가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회장님, 사모님께서 자극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부동건은 놀란 눈빛으로 물었다. “자극?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그 순간, 송혜선은 얼굴엔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흐르고 있지만,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무슨 일인지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나요?” 부동건은 어리둥절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러자 송혜선은 참아왔던 말을 모두 쏟아냈다. “뭐긴 뭐겠어요! 내가 다 들었어요. 이사회에
떠나기 전, 부동건은 마지막으로 남준에게 다시 한번 당부했다. “비록 너를 본사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동남아 지사의 전망은 여전히 밝다. 남준아, 이 기회를 잘 살려 내가 기울인 정성을 저버리지 말아다오.” 이사들이 하나둘씩 회의실을 떠났다. 순식간에 넓은 회의실에는 상혁과 남준 단둘만 남게 되었고,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준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이겼네요, 형님.”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느긋하게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결국 그렇게 말할 거면서 원래부터 누구의 것이었는지, 오늘로 분명해졌을 뿐이다.” 남준은 코웃음을 치며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맞아요. 승패는 병가상사일 뿐, 그저 순간의 결과에 불과하겠지요.” 상혁은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동남아 시장은 기회의 땅이지. 남준아, 이 기회를 잘 활용해라. 너의 전임자였던 정규인의 사례처럼 성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 낭패를 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상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참, 깜빡할 뻔했네. 정규인의 사건이 곧 재판에 들어간다고 하더라.” 남준의 얼굴에는 잠시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렇게 빨리?’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남준은 곧 평정을 찾으려 애썼다. 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꿰뚫은 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정규인의 입은 아직 단단히 닫혀 있지. 지금까지는 별다른 중요한 정보는 불지 않았다고 하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 말입니까?” 남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급히 물었다. “형님, 말씀은 끝까지 하셔야죠.” 상혁은 몇 걸음을 걸어 남준의 바로 앞에 서서 목소리를 낮췄다. “고경수는 제법 많은 걸 실토했다고 하던데. 정규인은 거의 감옥에서 나올 수 없을 거야. 게다가 정규인의 아내가 뭔가 중요한 증거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하고... 그게 네 일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