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씨, 자기 주제를 좀 파악하세요. 대단한 사람을 만났다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줄 아나 본데 당신 같은 사람은 그저 외제 차 판매원처럼 모두 자신의 차인 것마냥 잘난 척하는 사람이에요!”주하늘은 한껏 무시하는 말투였다.이처럼 가끔 분위기를 타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었다.“지금 뭐라고 하셨어요!”유진우가 화를 내기 전에 옆에 있던 홍길수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감히 우리 보스를 모욕해? 여기가 염룡파 구역이었다면 아주 목을 따버렸을 거야!”“어머! 호위무사도 있었어요? 어디서 잘난 척이세요?”정건우는 전혀 두렵지 않은 눈치였다.유진우의 뒤를 쫓는 사람 역시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진우 씨, 애완견 관리 좀 잘하세요. 자꾸 짖잖아요. 도씨 가문은 당신들이 이럴만한 곳이 아니에요.”나동수는 피식 웃었다.“너...”“됐어. 그만들 해.”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현미리가 나서서 수습했다.“오늘 경기 구경하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거 아니잖아.”“됐어. 미리를 봐서라도 이런 무례한 사람과 따지지 않는 것이 좋겠어.”나동수는 마치 아량이 넓은 사람인 척했다.유진우는 그런 그에게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이 사람들이 조선미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뺨을 때렸을 것이다.‘마주치기만 하면 비아냥거리는 것을 어디서 배웠는지.’“얘들아, 오늘 경기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염룡파 새로운 보스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도규현 씨한테 도발했대?”주하늘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나도 그 새로운 보스라는 사람에 대해 좀 들은 거 있어.”이때 정건우는 아는 척하기 시작했다.“내가 듣기로는 젊고 실력도 좋은 서울의 신예라고 들었어. 심지어 박웅과 싸워서 이겼다고 들었어!”“뭐라고? 박웅 실력으로도 안 된다고? 그렇게 대단해?”주하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박웅이라 함은 이 바닥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이었고 칼에 찔려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었다.일당백으로 누구나 제
“염룡파 새로운 보스?”나동수 일행은 그대로 얼어붙더니 홍길수와 유진우를 번갈아 보았다.처음에는 피식 웃더니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하하하... 이봐요, 아저씨. 혹시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주하늘은 배를 끌어 잡고 웃었다.“진우 씨가 도규현 씨한테 도전장을 내민 염룡파 보스라고요? 아예 하늘까지 날 수 있다고 그러시지?”“어디서 굴러온 병신이래? 뭐? 서울의 신예? 그 꼴로 가당키나 해요?”정건우가 비웃었다.“감히 저희 보스님을 모욕해요? 죽고 싶어요?”홍길수는 화가 나서 옷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한판 붙을 행세를 했다.“그만해. 우물 안의 개구리인 사람들과 무슨 말을 해.”유진우는 그를 말렸다.오늘의 목표는 도규현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한테는 관심이 없었다.“어머! 잘난 척하기는? 자기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정건우가 비웃었다.“하하... 당신 말대로 당신이 2인자고 진우 씨가 보스가 맞다면 제가 왜 모르고 있죠?”나동수는 한껏 비웃는 표정이었다.“그러게! 동수가 염룡파 보스랑 친한 사이라고 했는데 당신들이 여기서 가짜 행세를 한다고 모를 줄 알아요? 정말 망나니와 다름없네요!”주하늘은 경멸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똑똑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허세까지 떨다니. 이런 남자는 참 무능하기도 하지.’“왜 아무 말도 못해요? 찔리나 봐요? 동수랑 따지지 못하겠나 보죠?”정건우는 여전히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진우 씨, 능력이 없으면 허세나 부리지 말고 밖에서는 가만히 있어요. 다른 사람한테 들통나면 얼마나 민망해요.”나동수가 비웃었다.“이봐요, 그 입 좀 닫아주시겠어요? 모기처럼 앵앵거리기나 하고... 정말 시끄럽네요!”유진우는 귀를 파면서 하찮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이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당신!”정건우가 반박하려고 하자 나동수가 말렸다. “됐어. 그깟 불쌍한 자존심 지켜주자고. 미쳐 날뛰기 전에.”말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비난이었다.“흥! 당신과 같이 권력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기세등등한
하나같이 두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고 있었다.“누구신데 도씨 가문에 와서 행패를 부려요?”도씨 가문의 세 명의 고수는 바로 무대 위로 올라가 그 남자를 호시탐탐 노렸다.“하! 쓰레기 같은 당신들은 내가 누군지 알 필요도 없어! 빨리 도규현이나 내보내!”그는 건방지게 창으로 겨누고 있었다.“누군데 이렇게 건방져?”“대놓고 도규현한테 시비를 걸다니! 간이 부은 게 틀림없어!”“유명세를 치르려고 목숨까지 내놓네.”사람들은 무대 아래에서 건방진 이 사람을 놓고 의논하기 시작했다.“규현 도련님께 도전장을 내밀어도 좋은데 먼저 우리부터 이겨봐!”도씨 가문 고수 셋은 바로 칼을 겨눴다.“하! 죽고 싶다니 그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지!”청의 차림의 남자는 창을 쥔 채 매섭게 공격을 했다.그 공격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반응할 새도 없었다.눈 깜빡할 사이에 한 도씨 가문 고수 앞에 나타났고 그 고수는 얼굴색이 확 바뀌더니 칼로 창을 막았다.“쨍!”창끝이 칼몸에 부딪혀 그 자리에서 바로 뚫어버렸고 그 힘이 어마어마하여 고수의 복부까지 찌르고 말았다.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창으로 그 고수를 무대 아래로 쓸어버렸다.한 명을 제압한 청의 차림의 남자는 이대로 멈추지 않고 연속으로 창을 휘두르더니 나머지 두 고수도 무대 아래로 날려 보냈다.눈 깜빡할 사이 세 사람은 참패하여 꿈틀거릴 힘도 없었다.“대박!”이 장면을 목격한 무대 아래 분위기는 들끓기 시작했다.그 누구도 청의 차림의 남자의 실력이 이렇게 대단한 줄 몰랐던 것이다.이 세 사람 역시 도씨 가문에서 소문난 고수였고 절대 평범한 실력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일당 셋으로 이렇게 쉽게 이길 수 있다니!’‘아주 어마어마한 실력을 갖추고 있어!’“누가 또 저랑 한판 붙으시겠어요?”청의 차림의 남자는 위풍당당하게 사방을 둘러보았다.“올라가!”아직 포기하지 않은 몇몇 도씨 가문 고수들이 바로 무대 위로 올라가더니 이번만큼은 주동적으로 공격을 가했다.하지만 청의 차림의 남자는 전혀
“네 이놈! 내가 한번 손 좀 봐주지!”이때 덩치가 크고 손에 관도를 들고 있는 한 남자가 먼저 경기 무대에 올라갔다.근육질 몸매에 두 팔이 유난히 두꺼워 보였고 백 근 가까이 되는 관도를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었다.“누구신데 죽으러 올라오셨죠?”청의 차림의 남자는 창으로 겨누더니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대도문 수장 진운일세!”관도로 바닥을 툭 치더니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냈다.“진 수장님이시군요. 글쎄 낯이 익다 했습니다.”“대도문이라 하면 무림 세계에서 아주 유명하죠. 수장님의 관도는 워낙 날카로워 바위도 쪼개고 금과 옥을 부러뜨릴 정도로 그 위력이 엄청나죠.”“진 수장님이 직접 나서시니 저 사람은 이제 죽겠군요!”“진 수장님! 저놈한테 본때를 보여주시고 저희 강남 무사들의 위신을 살려주세요!”진운의 등장으로 무래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뭐? 들어도 보지 못한 대도문?”청의 차림의 남자는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상대방을 무시했다.“이봐! 오늘 내가 진정한 실력자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지!”진운은 호통을 치더니 관도를 바닥에 끌면서 공격에 나서기 시작했다.날카로운 칼날은 무대 바닥과 마찰하면서 깊게 흔적을 남겼고 이어 불꽃까지 튀기 시작했다.“얍!”가까이 다가가 관도를 들어 그를 향해 내리쳤다.휙!날카로운 칼날에 공기마저 절반으로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그 위력은 사람은 물론 커다란 코끼리마저 두 동강 낼 수 있을 정도였다.“주제 파악도 못하는 자식!”청의 차림의 남자는 전혀 피하지도 않고 창을 들어 올렸다.이내 창과 관도가 서로 부딪히고 말았다.“쨍!”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진운의 관도가 순간 튕겨나면서 그 위력에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로 뒤로 계속 물러났다.반응하기도 전에 청의 차림의 남자가 다시 한번 창을 들어 진운의 어깨를 찔렀고 진운은 그대로 무대 아래로 버려지고 말았다.단 두 방으로 대도문 수장 진운이 참패하고 말았다.“세상에! 너무 막강한 거 아니야? 진 수장님도
한 사람을 제패하면 운이라고 볼 수 있지만 열몇 명의 고수를 제패한 건 온전히 실력이었다.청의 차림의 남자는 단숨에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현장에 있던 과반수의 무림고수를 제패했기 때문이다.“도대체 누군데 저렇게 강해?”“청의 차림에 창까지 다룰 줄 아는 것이, 설마 무림 계에서 고수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기로 유명한 청의객은 아니겠지?”“뭐? 청의객? 스카이 랭킹 20순위에 드는 패왕창 정웅마저 저 사람 손에 패했다지?”“스카이 랭킹 순위에 드는 정웅마저 이긴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괴물이람?”청의객이라는 사실에 현장은 순간 야단법석이었다.청의객은 최근에 수많은 고수를 제패한 것으로 유명했고 특히 정웅을 손쉽게 이긴 후로 더욱 이름을 날렸다.하지만 신비로운 사람이라 그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은 드물었다.오늘 직접 도씨 가문에 와서 강남 무림에 도전장을 내밀 줄은 몰랐다.“도규현! 이제 당신 차례예요!”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청의객은 창을 휘두르더니 다시 도씨 가문 쪽을 겨냥했다.한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은 모두 도규현에게 집중되고 말았다.“청의객 실력이 막강한데 도규현이 이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도규현은 스카이 랭킹 13위고, 청의객은 랭킹 20위인 정웅을 제패했으니 붙어보지 않는 이상 누가 이길지 모르는 거지.”“오늘 도규현이 천적을 만났군!”사람들은 수군거리며 추측하기 시작했다.“왜요? 도전장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건가요? 겁쟁이로 남으실 건가요?”청의객은 계속하여 도발했다.“하하... 재밌군.”도규현은 피식 웃더니 한 걸음 한 걸음 무대 위로 올라갔다.“비록 어디서 굴러온 돌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칭 정도는 해도 되죠?”“스트레칭이요?”청의객은 콧방귀를 뀌었다.“말투를 보니 아직 위험이 다가오고 있는 줄은 모르나 보네요.’“당신이?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도규현은 뒷짐을 쥐고 무표정으로 서 있었다.“하! 스카이 랭킹 순위에 드는 사람들 대부분 저한테 졌는데 당신 역시 그저 디딤돌로 보이네요. 당
“뭐야?”이 장면을 본 사람들은 아연실색이 되고 말았다.청의객의 실력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특히 마지막 그 한 방은 위엄과 기세가 넘쳐났지만, 그 무서운 한 방을 도규현이 손쉽게 막았다.무기도, 방패막이도 아닌 맨몸으로, 가슴으로 그 한 방을 막은 것이다.‘사람 맞아?’“이럴 수가!”청의객은 믿기지 않는 듯 놀라서 연신 뒷걸음쳤다.이 마지막 한 방은 그가 오랫동안 연마한 것이기 때문이다.이 한 방이면 그 누구든 제패할 수 있었다.심지어 스카이 랭킹 20위인 정웅도 이 한 방으로 해결했다.도규현 역시 이 한 방으로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몸으로 막았는데도 끄떡없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철갑옷을 입고 있다고 해도 이 한 방의 사살력으로는 충분히 중상을 입었을 것이지만 상대방이 끄떡없어서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이것이 바로 최후의 일격이에요? 정말 실망이네요.”도규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오버하지 마세요! 정말 칼과 총알도 꿰뚫을 수 없을 만큼 단단하다고요?”청의객은 다시 이를 꽉 깨물면서 하늘로 솟았고 도규현을 향해 창을 겨누더니 있는 힘을 다해 한 방을 날렸다.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기운이 창에 실려 한순간 칼날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죽어!”청의객의 외침과 함께 창이 빨간 불빛을 뽐내며 도규현의 가슴을 찔렀다.“퍽!”굉장한 부딪힘 소리가 들려왔지만 도규현은 여전히 뒤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채 끄떡없었다.오히려 창에 힘을 너무 많이 실었는지 아치형으로 변형하고 말았다.“고작 이 정도예요?”도규현은 피식 웃더니 한 손으로 창을 꽉 뒤틀었다.“빠지직...”눈 깜짝할 사이에 청의객의 창은 밧줄처럼 꼬아졌다.“이럴 수가?”이 모습을 본 청의객은 놀랍고 두려워 그대로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최후의 일격이 상대방의 머리카락 하나 건들지 못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그야말로 엄청난 실력 차이였다.“너무 약하네요. 몇 년 더 수
‘이런 괴물과 어떻게 대결을 해?’“맹주님, 규현이 모습 마음에 드십니까?”무대 정면에 있는 관중석에서 도장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들이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아주 자랑스러운 눈치였다.“괜찮네요. 정말 놀라운 실력이네요.”황보용명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보기엔 10년 내로 마스터 경지에 도전해봐도 될 것 같네요.”이 한마디로 주위에 많은 사람의 표정이 변했다.마스터의 경지라면 신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전국 팔도 5천만 명 중에 마스터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 다섯 명이었고 저마다 위엄을 떨친 이름있는 인물들이었다.도규현의 실력은 맹주가 감히 그렇게 높은 평가를 해줄 만했다.이로써 그 천부적인 실력이 얼마나 놀라운지 알 수 있었다.“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저놈이 뛰어난 실력이 있다고 해도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도장수는 애써 겸손한 척했지만, 얼굴에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10년 내로 아들이 마스터의 경지에 다다르면 도씨 가문 전체가 잘될 일만 남았기 때문이다.심지어 탑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탑포가 될 수도 있었다.“역시 훌륭한 아버지를 둔 덕분이네요. 형님, 축하드립니다!”옆에 앉아있던 조군수가 두 손 모아 축하해주었다.심지어 어느 정도 위신이 있는 사람들도 그를 따라 축하를 건넸다.누구나 마스터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황보 가문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황보용명이 혼자 닦아놓은 업적 덕이다.이것이 바로 마스터의 위엄이었다.“언니, 도규현이 저렇게 강한데 형부가 지지 않을까?”조아영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그저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야.”조선미 역시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아까 도규현의 실력을 눈앞에서 직접 보았기 때문에 일말의 희망마저 철저히 짓밟히고 말았다.“오늘 저에게 도전장을 내민 분이 또 한 분 계신다면서요?”이때 도규현이 누구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도전장을 내밀어? 청의객이 어떻게 되었는지
“설마 정말 올라간다고?”무대 위로 올라가는 유진우를 보면서 주하늘 일행은 더는 웃지 못했다.서로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그저 올라가는 척만 할 줄 알았지 정말 올라갈 줄 몰랐다.‘살고 싶지 않은 건가?’“이봐요, 손에 장을 지지겠다면서요? 안 하고 뭐 하세요?”홍길수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정건우는 눈을 파르르 떨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그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는데 유진우가 정말 무대에 올라갈 줄 몰랐던 것이다.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잠깐만! 설마 진우 씨가 정말 염룡파 보스인 건 아니겠지?”이때 주하늘이 먼저 반응했다.‘도규현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한 서울 신예 중에서 염룡파 보스 빼고 누가 있지?’“말도 안 돼! 저런 병신같은 사람이 염룡파 보스일 리가?”나동수는 사실을 부정했다.“하하! 아직도 못 믿겠어요? 그럼 오늘 좋은 구경시켜주도록 하죠!”홍길수는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서 꺼낸 영패를 힘껏 나동수 얼굴에 던졌다.“당신...”나동수는 폭발하려다 영패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것은 바로 염룡파 영패였기 때문이다!“이봐요, 잘 보셨어요? 지금도 무슨 할 말 있으세요?”홍길수는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었다.이 한마디에 나동수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염룡파 영패만으로도 증거가 충분했지만, 유진우가 무대에 올라가 대결을 신청한 것은 확인사살이나 다름없었다.한참이나 토론했던 광인 박웅을 제패한 서울 신예 고수가 보잘것없는 유진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정말 생각지도 못한 결말이었다.“이봐요, 아까는 저희 보스랑 친하다면서요? 그럼 지금도 친한지 여쭤봐도 될까요?”홍길수가 조롱했다.나동수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고 주위 시선에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인생에서 제일 창피한 것은 그 자리에서 거짓말이 들통난 것이 틀림없었다.그야말로 얼굴을 들 수 없는 일이었다.“왜 아무 말도 못 해요? 아까는 그렇게 대단한 척 비꼬더니 지금은 얼굴을 못 들겠나 봐요?”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