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 폭발로 생겨난 구덩이 속에서 유태범은 여전히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방호막은 점점 불안정해지며 희미하게 깜빡였고 여기저기 수많은 균열이 생겨 빠르게 번져 나갔다. 그의 머리 위로 떠 있는 거대 검은 미세하게 진동하며 계속해서 아래로 눌러대고 있었다.유태범은 마치 거대한 산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 엄청난 힘에 그의 두 손은 떨렸고 두 무릎은 점점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티지 않을 수 없었다. 머리 위의 거대한 검이 내려오기만 하면 그는 분명 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는 유진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깨닫게 되었다. 알고 보니 상대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다. 상대가 이제 제대로 나서기 시작하자 그는 그 힘을 감당하기조차 버거웠다.“악!” 죽음의 위협을 느낀 유태범이 귀를 찢는 듯한 분노의 외침을 내질렀다. 그의 몸속에서 강기가 파도처럼 뿜어져 나와 끊임없이 방호막을 강화하려 했지만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방호막의 균열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젠장! 죽기 살기로 해보자.”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유태범은 묵직한 소리로 외치더니 곧바로 유씨 가문의 술법을 사용했다. 순간 그의 두 눈이 새빨갛게 변했고 온몸의 근육이 순식간에 한층 더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사방팔방에서 폭발하듯 거대한 에너지가 사정없이 뿜어져 나왔다. 유씨 가문의 술법은 짧은 시간 안에 신체의 잠재능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전투력을 강화하고 심지어 경계를 돌파할 수 있게 만드는 기술이다. 생사를 가르는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구하고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신묘한 기술이라 불린다. 하지만 이처럼 강력한 술법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효과가 사라진 뒤 신체가 극도로 허약해진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이 술법을 사용하는 자가 제한된 시간 안에 적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남아 있는 건 단 하나 오직 죽음의 길뿐이었다. 유태범은
유진우는 천천히 창궁검을 들어 검끝을 바로 앞에 있는 유태범을 향해 겨눴다. “두 번째 검, 파군!” 말이 끝나자마자 유진우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람과 검이 하나가 되어 검은 빛의 일격으로 변하며 유태범에게로 급격하게 돌진했다. 이번 검은 천지를 흔들지도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지도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빠르다는 것. 극단적인 속도였다. 눈 깜짝할 사이 검은빛은 수십 미터의 거리를 단숨에 가로질러 유태범의 가슴 바로 앞에 나타났다. “뭐지?” 유태범은 순간적으로 눈이 커지며 반응할 새도 없이 본능적으로 호체 강기를 일으켰다.“펑!” 폭발적인 소리가 울려 퍼지며 검은빛은 유태범의 방호막에 강하게 부딪혔다. 그 속에 숨어 있던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원래는 무적 같았던 방호막이 지금은 유리처럼 순식간에 터지며 아무 저항도 하지 못했다.방호막이 산산조각 나고 검은빛은 그 세력을 멈추지 않고 유태범의 금갑에 강하게 충격을 가했다. 현금으로 만들어진 갑옷은 그 충격에 의해 깊게 움푹 들어갔다. 엄청난 충격에 유태범은 마치 폭탄처럼 하늘로 튕겨 나가며 백 미터 이상 날아가 왕부 입구의 석사자와 강하게 부딪혔다. 몇 톤이나 되는 석사자는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유태범은 입과 코에서 피를 쏟으며 얼굴은 창백해지고 전신이 부서진 것처럼 땅에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이 장면을 본 모든 이들은 모두 놀라움에 휩싸였다. 진지해진 유진우가 이렇게나 강력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술법을 쓰는 유태범조차 그에게 맞설 수 없었고 단 두 방에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 사이의 실력 차이는 말 그대로 어마어마했다.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강하셨나요? 표기대장군조차 상대가 안 된다니.” “유씨 가문의 천재라더니 정말 말 그대로군요. 이런 천재야말로 세상을 제패할 자격이 있는 것 같네요.” “대장군도 참 운이 없으셨네요. 이렇게 괴
“휭!”강렬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위력이 놀라운 창궁검은 결국 유태범의 머리 위에 멈췄다. 사람과 검의 거리는 불과 몇 센티미터.유태범은 그 검에서 퍼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을 뚜렷이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등 뒤에는 차가운 땀이 흘렀다. “이리 와!” 유진우는 검을 다시 당겼고 날아간 창궁검이 ‘훅’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검은 빛으로 변해 그의 손에 돌아왔다. “삼촌이 졌어요.” 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유태범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깊은 상실감이 떠올랐다.그는 어릴 때부터 무공을 익혔고 날마다 꾸준히 노력해 왔다.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는 수련에 대한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이미 마스터 경지에 이르렀다. 서경 전역을 보더라도 그의 실력은 으뜸가는 존재였다.그는 자신이 깊은 내공과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충분히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조금 전 유장혁의 세 번의 검을 보고 그는 두 사람 간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비록 그는 목숨을 걸고 유씨 가문의 술법을 사용했지만 유장혁에게 한 점의 상처도 입힐 수 없었고 오히려 상대에게 손쉽게 무너졌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천부적인 재능이 유장혁 앞에서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삼촌의 실력은 이미 대단하셔요. 서경뿐만 아니라 용국 전체를 봐도 삼촌을 이길 사람은 많지 않아요.”유진우가 조용히 말했다. “위로는 필요 없다. 졌으면 졌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아직 지면 안 되는 정도까지는 안 왔어.” 유태범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삼촌, 우리 사이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해요. 그저 저한테 진신을 말해 주시고 호룡각의 잔존 세력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더 이상 난처하게 하지 않을게요.”유진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유태범은 아무 말 없이 유
“유태범 저 자식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냐?”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심지어 유만수조차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송원호는 흑용군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통했다. 한때 그들은 형제처럼 지냈고 함께 적을 처치하며 함께 나라를 지키고 공을 세운 사이였다.10년 전 자금성의 변고 이후 송원호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화재 현장에서 송원호의 탄 시체와 그 몸에 달린 영패를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후 그는 송원호를 위해 묘지에 의관 무덤을 세웠다. 수년이 지난 지금 이 익숙한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어때? 놀랍지 않아?”유태범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처음 송원호를 만났을 때 나도 너희들처럼 깜짝 놀랐어. 10년 전에 죽은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내 앞에 서 있는 걸 보고 호기심에 한참 얘기를 나눴지. 그런데 그 결과가 뭔지 알아?” 여기서 멈추고 유태범은 주위를 살피며 말끝을 흐리더니 궁금증을 유발한 채로 이어갔다. “10년이 지난 송원호는 더 이상 송원호라고 불리지 않았어. 그는 이름을 바꿨고 지금은 채원진이라고 불리며 호룡각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나타났어.” “뭐? 송원호가 흑룡각의 새로운 주인이라고?”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한번 충격에 빠졌다.십 년 전 자금성 사건은 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많은 단서가 황권 뒤에 숨겨진 신비로운 조직 호룡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흑룡각은 너무 거대했고 세력이 온 천하에 퍼져 있었다. 당시 한창 기세를 떨친 서경왕 육만수도 공공연히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고 결국 참아야만 했다. 한때 흑용군의 대장군이었던 인물이 흑룡각의 주인으로 변했을 줄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이 신분 변화는 정말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었다.“계속 하세요.” 유진우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송원호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다 알
유태범이 말을 마친 뒤 유진우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삼촌, 당신 이야기는 이제 알겠어요. 당신은 누군가에 의해 미혹되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한 거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채원진은 어디에 있어요? 호룡각의 잔여 세력은 또 어디에 숨어 있어요?” 이렇게 많은 말을 했지만 중요한 건 하나도 없었다. “사실 내가 그와 협력했던 건 맞지만 어디에 있는지 나도 몰라.” 유태범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모른다고요?” 유진우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결국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셈이 아니야?’ “조급해하지 마. 내가 채원진의 행방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와 연락할 방법은 있어.”유태범은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사실 나랑 채원진은 약속했었어. 일이 끝난 후 특정한 장소에서 만나서 함께 의논하기로 했어.” “그렇다면 그 약소 장소는 어디예요?” 유진우는 눈을 똑바로 뜨고 물었다. “내가 지금 말해도 되는 건가?” 유태범은 주위를 둘러보며 의도적으로 말을 흐렸다. “이봐라. 삼촌을 왕부로 모셔라.” 유진우는 큰소리로 명령했고 바로 몇 명의 호위병들이 다가와 중상을 입은 유태범을 왕부로 실어 갔다. “홍복아, 밖의 일들은 네가 처리해라. 목숨만은 건들지 않도록 해라.” 유만수가 낮은 목소리로 당부한 뒤 함께 왕부로 향했다.“왕의 명령이다. 흑용군 장병들은 즉시 부대로 복귀하여 요새를 지켜라!” 홍복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흑용군 장병들은 일제히 크게 응답했다. 이 순간 그들 사이엔 망설임이 없었다. 즉시 대오를 정비하며 각자 맡은 곳으로 흩어졌다. 이번에 유태범을 따라나선 것도 사령관의 영패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왕의 명령이 최우선이 되었다.“멈추시오!” 그때 홍복의 시선이 몰래 빠져나가려는 제갈영군을 정확히 붙들었다. “제갈영군, 누가 당신을 보내줬
“걱정하지 마라. 그냥 정기적인 심문일 뿐이다. 난 너희들을 먹지는 않으니까.” 홍복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물론 너희들이 반항한다면 내가 마음 놓고 처리를 할 수밖에 없겠지. 데려가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유만군들이 즉시 나타나 곤룡띠를 꺼내 제갈영군 일행을 결박했다. 곤룡띠는 무도 고수들을 위해 특별히 개발된 것으로 무도 마스터도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특수한 장치였다. 물론 제갈영군이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무런 반항을 할 수 없었다.홍복의 실력은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만약 그를 자극한다면 그들의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다. 그들은 홍복이 약속을 지키고 그들에게 고문을 가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현장 정리하고 사방을 경계해라. 의심스러운 사람은 하나도 놓치지 말고 감시해.”홍복은 또 다른 명령을 내린 후 제갈영군 일행을 호위하며 수감차로 이동시켜 곧바로 감옥으로 향했다.이 시각 왕부의 중추당 안.유만수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 뜨거운 차를 손에 들고 얼굴은 차분하고 평온했다. 그의 옆에는 이의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금갑을 입은 유천우는 문 앞에서 지키며 경계를 풀지 않았다. 유진우와 유태범은 서로 마주 앉았고 테이블 위에는 차와 다과가 놓여 있었다. “삼촌, 이제 조용해졌습니다. 말할 준비가 되셨나요?” 유진우는 차 한 잔을 유태범 앞에 놓으며 겸손하고도 단호하게 물었다. 유태범은 헛기침을 두 번 한 후 차를 들고 한 모금에 다 마셨다.“장혁아, 10년 만에 다시 보니 네 실력이 이렇게 무시무시할 줄은 몰랐어. 아까 그 두 검은 삼촌이 목숨을 하나 차이로 건졌다.”유태범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삼촌, 이제 더 이상 돌려 말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하세요.”유진우는 변함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장혁아, 네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 그래서 난 이번 기회에 내 죄를 갚고 싶다.”유태범의 얼굴은 진지해졌다.“어떻게 갚
“채원진을 잠복해서 살인 하자고요? 그리 간단하지 않을걸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채원진의 실력은 나보다 위에 있어요.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그는 즉시 알아차릴 것이고 만약 그가 도망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을 겁니다.”경천 랭킹 순위에 따르면 채원진은 무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강한 인물이다.다시 말해 그는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강한 자이며 이런 사람을 처치하려는 건 하늘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만약 단순한 잠복 살인 계획이라면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을 것이다.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유태범이 채원진의 실력을 모르고 있거나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일 수 있다.“강제로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지. 우리는 독약을 쓸 수 있어.”이 말이 나오자 유태범은 유만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님 진귀당에 많은 희귀 보물이 있잖아요. 그중 하나는 ‘멸신’이라는 독약이었던 것 같은데.”“멸신? 천하십대기독 중 가장 위험한 그 독약인가요?” 유진우의 눈동자가 좁혀졌다.천하십대기독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주는 끔찍한 독들이며 그중 1위인 ‘멸신’은 수련 수준을 무시하고 상대의 혼을 통째로 날려버릴 수 있다.게다가 방어, 저항 그리고 제거할 방법도 없다.하지만 ‘멸신’이라는 독은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어서 누구도 그것을 본 적이 없다.그런 강력한 무기가 자기 아버지의 진귀당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맞아. ‘멸신’은 열 대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독이야. 이 독에 걸리면 아무리 강한 실력을 갖춘 자라도 피할 길이 없고 죽음을 면할 수 없어. 물론 용호산의 그자를 제외하고는 말이지.”유태범이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덧붙인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용호산의 그자는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라서였다. “내가 어떤 보물을 가졌는지도 다 알고 있다니. 놀라운 정보력이다.” 유만수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저 우연히 알게 된 정보일 뿐이에요.” 유태범은 재빨리 웃으며 대답했다.
유태범은 눈썹을 추켜세우고 검은 알약을 보며 약간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혁아, 네 성의는 알겠지만 이런 보물이야 네가 가지고 있어. 삼촌은 쓸 데가 없어.”“저는 천하대보환은 많아요. 귀한 보물도 아니고 편히 드세요. 한 알로 부족하면 많으니까 더 드릴게요.”유진우는 계속 웃으며 말했다.“그게...” 유태범은 조금 망설였다.“왜요? 삼촌은 저를 못 믿으세요? 제가 독을 넣었다고 생각해요?”유진우가 냉담하게 한마디 덧붙였다.“그럴 리 없지.”유태범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했다. “장혁이 너는 정직한 사람이라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그럼 먹어봐요.”유진우는 검은 알약을 다시 앞으로 내밀었다.유태범은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결국 그 검은 알약을 받아들여 한 번에 삼켰다. 이 약이 무엇이든 그는 반드시 먹어야 했다. 그래야 상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삼촌, 어때요?”유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군. 역시 신비한 약이야. 방금 먹자마자 몸 안에 따뜻한 기운이 퍼지면서 전에 막혀 있던 경락들이 모두 뚫리는 느낌이야.” 유태범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말했다.“삼촌이 큰 문제가 없으니 이번 습격은 오늘 밤에 진행하죠.” 유진우가 말을 이었다. “오늘 밤?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냐?” 유태범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그의 상처는 하루이틀에 나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설령 습격에 실패해 채원진이 반격하면 그는 도망가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삼촌, 기회를 놓치면 안 돼요. 왕부 쪽에서의 소식은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거예요. 채원진이 곧 이상함을 눈치챌 겁니다. 우리가 미룰수록 채원진이 도망칠 가능성이 커지니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유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그 말은 맞지만...” 유태범은 말을 아끼며 입을 다물었다.“삼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삼촌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겁니다. 만약 위험에 처하시면 크게 소리치세요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