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님, 가요. 술 마시러.”천영 구슬을 챙긴 후 유진우는 사람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창공보검을 들고 링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알아서 길을 터주었다.오늘 유진우가 보여준 실력은 모든 사람들을 굴복하게 했다. 유진우가 왜 무림 맹주 자리를 거절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선 적어도 좋은 일이었다.특히 각 파벌의 오너들은 맹주 자리를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무림에 새로운 바람이 곧 불어닥칠 것 같았다.“아 참...”그때 유진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송천수를 보았다.“화근이 하나 더 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네.”“뭐... 뭐 하려고?”송천수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두 눈에 당황함이 스쳤다.“내가 들어올 때부터 죽이겠다느니 어쩌겠다느니 난리 쳤잖아. 오늘 널 없애지 않으면 편히 못 잘 것 같아서 그래.”유진우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양측 모두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송천수의 목숨을 남겨두면 나중에 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너... 너... 함부로 하지 마. 난 무도 연맹의 장로야!”당황한 송천수는 연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찍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건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는데 결국에는 들키고 말았다.“무림 맹주도 죽였는데 한낱 장로를 두려워하겠어?”유진우가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튕기자 은침 하나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그러고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송천수의 미간을 찔렀다.“너...”송천수가 입을 벌리면서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이어 시뻘건 피 한 방울이 미간에서 흘러내렸다.송천수는 숨이 멎은 채 그대로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얼굴에는 두려움과 경악이 가득했다.그 광경에 송천수의 몇몇 부하들은 혼비백산한 나머지 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유진우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시선을 장수현 일행에게 돌렸다. 두 눈에 짙은 살기가 가득했다.“
“인마, 어때? 나 타이밍 딱 맞게 왔지?”돌아가는 차 안, 술광은 술병을 들고 다리를 꼰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영감님이 오지 않았더라도 날 어쩌지 못해요.”유진우가 어깨를 들먹였다.“됐어. 내 앞에서까지 허세 부릴 필요 없어.”술광은 유진우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입을 삐죽거렸다.“너 유씨 가문의 술법을 써서 강제적으로 레벨을 돌파했어. 시간이 다 됐으니 곧 엄청난 고통이 밀려올 거야.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 아마 여기서 죽었을걸?”유씨 가문의 술법으로 다음 레벨로 돌파할 수는 있지만 그 대신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생명력을 어느 정도 잃는 건 물론이고 몸이 무척이나 허약해진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런 순간에 적에게 기회를 준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영감님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요.”유진우는 피식 웃더니 더는 숨기지 않고 뒤통수에 꽂았던 은침을 뽑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 빠진 공처럼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엄청났던 기운도 전부 사라져 허약하기 그지없었다.“후... 후...”유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커다란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조금 전까지 윤기 나던 얼굴은 어느덧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고 두 눈에도 핏발이 가득했으며 팔다리에도 힘이 하나도 없는 게 완전히 탈진한 모습이었다.술광의 말대로 유씨 가문의 술법은 실력을 강제적으로 늘릴 수는 있지만 부작용이 심했다. 송만규를 죽이는 게 아니었더라면 절대 쉽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자, 술로 기력 좀 보충해.”술광이 들고 있던 술병을 건네자 유진우도 거절하지 않고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면서 허약했던 몸이 어느 정도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술에 뭔가를 섞은 게 분명했다.“인마, 너한테 할 얘기 있어.”술광은 하품하면서 의자에 기댄 채 느긋하게 말했다.“내 오랜 친구한테 일이 생겨서 잠깐 어디 좀 가야 할 것 같아.”“간다고요? 어디로요?”유진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연경에 가려
“영감님,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약하긴 누가 약해요? 나 아주 엄청나요!”유진우가 펄쩍 뛰었다. 너무 흥분한 탓에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고 게다가 안색까지 창백해서 정력이 더욱 부족한 것 같았다.“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진정해.”술광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치 바보를 달래듯 했다.“아무튼 아주 좋은 약이니까 가지고 있어. 나중에 필요할지도 모르잖아.”그러고는 약병을 유진우의 주머니에 넣었다.“젠장...”유진우는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발끈하려다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기 시작했다.“됐어, 됐어. 아무 말도 하지 마. 나 다 알아.”술광은 유진우의 등을 토닥이면서 말했다.“이따가 비행기 타야 해서 가볼게. 약 제때 먹는 거 명심해. 떡두꺼비 같은 아들 얼른 낳아야지.”말을 마친 술광은 마치 유령처럼 눈앞에서 바로 사라졌다.“영감님, 잘 지내요.”유진우는 먼 곳으로 점점 멀어지는 술광의 뒷모습을 보면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끝이 있기 마련이라고 술광의 천인오쇠를 치료한 다음부터 유진우는 언젠가는 헤어질 날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는 그의 목표가 있었고 술광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인생이 다르면 가야 할 길도 다른 법이었다. 유진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술광이 무사하고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는 것뿐이었다...잠깐 휴식을 취한 후 유진우는 장 어르신과 함께 풍우 산장으로 돌아왔다.그런데 대문 앞으로 도착하자마자 분주히 움직이는 강린파 제자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풍우 산장을 예쁘게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다.조선미와 조홍연은 이것저것 지휘하면서 최대한 정교하고 완벽하게 꾸며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두 사람이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죽이 척척 잘 맞았다.“선미 씨, 홍연아,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유진우는 안으로 들어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오빠, 왔어요?”조홍연은 유진우를 보자마자 냉큼 달려와 반갑게 맞이했다.“내일 오빠
“조씨 가문의 족장이 바꾼 후로 완전히 선우 가문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어요. 조씨 가문의 산업도 지금 점점 빼앗기고 있다고요. 약혼식만 끝나면 선우희재 아마 본색을 드러낼 거예요.”조선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조씨 가문의 내란으로 형제들끼리 등을 돌렸고 친척들도 전부 적이 되고 말았다. 그 바람에 조씨 가문 전체가 큰 위기에 직면했다.다행히 조선미가 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을 전부 연경으로 옮긴 덕에 마지막 불씨는 남겼다.“선미 씨, 조씨 가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저씨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래요?”유진우가 물었다. 조군수의 인맥과 위신에 자리를 되찾으려 한다면 이길 가능성이 꽤 컸다.“아빠는 되돌리려고 큰아버지랑 얘기도 했다던데 효과가 딱히 없대요.”조선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른 건 다 좋은데 정을 너무 중요시해서 문제였다. 가족들과 등을 돌리기 싫어 계속 일방적으로 양보하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조씨 가문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아저씨는 아직도 망설이나 봐요. 하지만 이런 일은 결사의 각오로 끝까지 임해야 하는데...”유진우가 귀띔했다. 형제의 정 때문에 망설이는 건 이해가 되지만 계속 물러서기만 한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뿐이었다.“아빠가 하루빨리 깨닫길 바랄 뿐이에요.”조선미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조선미는 조군수를 도와 형세를 뒤바꿀 수 있었지만 문제는 조군수가 싸울 의지조차 없다는 것이었다.“아 참...”그때 조선미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가방에서 정교한 비단 주머니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내일 당신 생일이라고 아빠가 준비하신 선물이에요.”“아저씨께 고맙다고 전해줘요.”유진우가 웃었다.“열어봐요.”조선미가 그에게 눈치를 줬다.“지금요?”유진우가 비단 주머니를 열어보자 안에 잘 보관된 양피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꺼내 열어보니 양피지에 미스터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부족한 부분이 조금 있었다.“선미 씨, 이게 뭐예요?”유진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조씨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온 보물
조군해와 조윤지는 쩔쩔매면서 옆에 서 있었는데 숨소리조차 감히 내질 못했다. 정말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지난번 범표사에 잡혀간 후 그들은 이틀 동안 갇혀있다가 풀려났다. 그들은 선우희재가 직접 나서서 홍연 전쟁 여제를 설득했기에 풀려났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그들이 선우희재를 따르길 잘했다는 걸 더욱 증명해주었다.“내일이 약혼식인데 물건 준비됐어요?”선우희재는 바둑 한판을 다 두고 나서야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게...”조군해의 표정이 굳어지더니 옆에 서 있는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오빠, 원래 거의 성공했는데 빌어먹을 유진우가 우리 계획을 싹 다 망친 바람에 잡히고 말았어요.”조윤지는 설명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됐어. 그런 쓸데없는 변명 듣고 싶지 않아.”선우희재는 두 사람을 싸늘하게 흘겨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원하는 건 결과지, 과정이 아니야. 전에 우리가 했던 약속대로 당신들은 보물 지도를 나한테 주고 난 당신들을 높은 자리에 앉힌 다음 두 가문이 사돈을 맺어서 함께 발전해야지. 난 약속대로 다 했는데 당신들은?”“도련님, 우리도 최선을 다했어요. 며칠만 시간을 더 주면 안 될까요? 이번에는 반드시 보물 지도를 손에 넣겠습니다.”조군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네, 오빠. 시간 조금만 더 주면 무조건 약속 지킬 수 있어요.”조윤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난 약속 어기는 사람 가장 싫어해. 약속대로 약혼식 전에 보물 지도를 내놓지 않으면 내일 약혼식 취소할 거야. 우리 두 가문 앞으로 더는 왕래할 일도 없어.”선우희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네?”그의 말에 조군해와 조윤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급변했다. 현재 조씨 가문에 원성이 자자했고 각 세력들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만약 선우 가문이 없다면 두 사람이 금방 얻은 권력을 그대로 다시 잃게 될 것이다.“오빠, 취소하면 안 돼요!”당황한 조윤지가 연신 장담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이번에는 꼭 보물 지도를 찾아낼게요.”재벌가에 시집가 장군 부인이
이미 아들을 잃은 아픔을 한 차례 겪은 조군해는 더는 딸의 앞날과 행복을 망칠 순 없었다.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친형제와 등을 돌리더라도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역시 아빠는 큰일을 하실 분이에요!”조군해가 허락하자 조윤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우리 부녀가 손을 잡는다면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요.”아버지만 설득하면 무슨 일이든 다 쉬울 것이다.“윤지야, 네 방법을 허락하긴 했지만 이것만은 명심해. 절대 작은아버지의 목숨을 해쳐선 안 돼.”조군해가 엄숙한 얼굴로 경고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아빠. 보물 지도 때문에 이런 거니까 작은아버지가 바로 내놓는다면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아요.”조윤지가 바로 장담했다. 물론 끝까지 내놓지 않는다면 무슨 짓이든 할 그녀였다.“그래. 그럼 됐어.”조군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속하여 말했다.“그나저나 또 다른 문제가 있어. 네 작은아버지 옆에 고수가 지키고 있어서 우리 힘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워.”만약 시간이 충족하다면 밖에서 고수들을 불러 해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지금 생각난 사람이 있는데 우릴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요.”조윤지가 불쑥 말했다.“그래? 누군데?”조군해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선우장훈요!”조윤지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선우장훈? 선우희재 동생이잖아. 우릴 뭘 도와줄 수 있는데?”조군해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선우장훈이 선우희재의 친동생이긴 하지만 개인 능력으로 보나 신분 지위로 보나 선우장훈보다 한참 뒤처졌다. 두 형제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아빠, 선우장훈을 무시하지 말아요.”조윤지가 고개를 내저었다.“선우장훈이 희재 오빠보단 부족하지만 그래도 인맥이 넓어요. 무도 고수도 많이 알고 밑에 따르는 세간의 고수들이 엄청 많아요. 선우장훈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조군수를 납치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에요.”“그래서 어떻게 하려고?”조군해가 떠보듯 물었다.“비밀이에요.”조윤지가 의미심장한
예쁜 여자를 많이 봤지만 조윤지처럼 매력이 끝이 없는 여우는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게다가 눈앞의 요물은 그의 형수였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상대라서 짜릿함과 욕망이 오히려 극에 달했고 참기 힘들었다.“휴...”따뜻한 말 몇 마디 건넨 후 조윤지는 갑자기 수심에 찬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선우장훈이 먼저 물었다.“아니에요. 별거 아니니까 계속 식사해요.”조윤지는 억지로 웃으면서 다시 한번 밀당했다. 먼저 도움을 청한다면 의심을 쉽게 사지만 상대가 먼저 물어본다면 상황은 또 달라질 것이다.“형수님, 우리 다 가족인데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해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건 다 도와줄게요.”선우장훈은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아니에요. 다친 곳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또 폐를 끼칠 순 없어요.”조윤지는 고개를 저으면서 가여운 척했다.“형수님, 그게 무슨 말이에요?”선우장훈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일부러 불만이 있는 척했다.“폐를 끼치다니요? 날 무시하는 거예요? 아니면 내가 무능해서 도움이 안 된다는 말인가요?”“아니에요. 절대 그런 뜻이 아니에요.”조윤지는 연신 손을 내저었다.“형수님, 날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말해봐요. 내가 깔끔하게 해결해 줄게요.”선우장훈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도련님, 정말 도와줄 거예요?”조윤지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그럼요. 내 형수님인데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어요?”선우장훈은 아주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도련님한테 말하지 못할 것도 없죠. 사실은 우리 작은아버지와 연관이 있어요.”조윤지는 속상한 척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아빠가 지금 조씨 가문의 족장이긴 하지만 진짜 실권은 아직 작은아버지인 조군수가 쥐고 있거든요. 작은아버지는 욕심도 많고 교활한 사람이라 계속 족장 자리를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어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비열한 수단도 썼고 가족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거든요. 우리 아빠는 너
밤이 점점 깊어졌고 밤하늘의 초승달이 어둠을 조금이나마 밝게 비춰주었다.그 시각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선우 저택의 문 앞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선우장훈이 먼저 내렸다. 그의 명령과 함께 부하들은 커다란 마대 자루를 들고 저택 안으로 재빨리 들어갔다.모두들 비밀스럽게, 그리고 조용하게 움직였고 결국 한 밀실로 들어갔다. 이곳은 선우 가문의 승낭 호위들이 고문하면서 자백을 강요하는 곳이었다.“열어.”밀실에 들어온 선우장훈은 의자에 털썩 앉더니 술잔에 술을 따랐다.찌지직!누군가 마대 자루를 열자 산발에 만신창이인 한 남자가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조군수였다.“영감탱이야, 내가 누군지 알아?”선우장훈은 술잔을 들고 좌우로 흔들면서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선우장훈?”조군수는 주변을 자세히 살피다가 바로 이상함을 감지했다.“어? 보는 눈은 있네? 날 한눈에 알아봤어.”선우장훈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덤덤하게 말했다.“내가 누군지 안다면 일이 많이 쉬워지겠어. 보물 지도를 내놓으면 목숨은 살려줄게.”“보물 지도? 허...”조군수가 코웃음을 쳤다.“드디어 더는 못 참겠어? 난 또 선우 가문이 끝까지 나서지 않는 줄 알았네.”선우희재는 매사에 신중했고 후방에서 전략을 세웠다. 지금까지 직접 나서지 않은 건 꺼리는 게 있어서였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의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칼을 숨긴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움직인 걸 보면 더는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보물 지도 내놔. 안 그러면 가만 안 둬!”선우장훈이 호통쳤다.“보물 지도는 조씨 가문의 보물인데 너 같은 놈한테 줄 리가 없지.”조군수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영감탱이가 곧 죽게 생겼는데도 큰소리를 쳐? 칼로 베어버리는 수가 있어.”선우장훈이 두 눈을 부릅떴다.“사람은 언젠가 죽기 마련인데 몇 년 일찍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조군수가 피식 웃었다. 목숨을 포기한 듯 무척이나 태연한 모습이었다.“X발, 배짱은 있
한참 동안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유만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제 겨우 내우외환을 해결했는데, 유만수가 자리를 넘겨준다고 하니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여보,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요?”옆에 있던 이의진이 권유했다.“그러니까요. 위왕 님, 아직 몸도 정정하시고 지금은 백세시대인데 어찌 이렇게 일찍 자리를 넘겨줄 생각을 하십니까?”장범규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만약 누군가 나서서 유만수를 설득한다면 새로운 위왕 님의 미움을 살 수도 있으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조용하게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여러분,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마침 여러분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후사를 미리 안배하는 것도 제 소원을 이루는 셈입니다.”유만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여보...”이의진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유만수가 손을 들어 제재하며 말했다.“그만. 난 이미 결정했으니 더 이상 설득할 필요 없어.”유만수는 다시 모든 사람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여러분, 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선정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손에 미래 서경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저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누가 미래의 서경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그건...”유만수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당황했다. 형세를 보아하니 유만수는 내부 투표를 통해 지지자가 많은 사람한테 서경을 맡길 생각인 것 같았다.그러니 문제는 유진우를 선택할 것인가 유천우를 선택한 것인가였다.재능과 능력 면에서 보면 당연히 유진우가 한 수 위이지만 집안 내력과 배후 세력으로 판단하면 유천우가 한 수 위였다.유천우는 최근 몇 년 동안 전쟁에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미래가 기대된다는
보물 지도를 나눈 뒤 유진우는 사람을 안배해 호룡각의 기지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이곳은 위치가 은밀하여 수비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아주 어려웠고 또한 두 나라의 국경 지대에 놓여있었다.그러니 이곳을 군사 요새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만약 앞으로 서방 제국과 충돌이 생긴다면 이곳이 중요 군사 지점이 될 것이고 여기서 출병한다면 반드시 예상치 못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겠지만 미리 준비해 둔다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해당 건을 해결한 뒤 유진우는 사람들을 데리고 서경왕부로 돌아갔다.이번에 유진우가 서경의 복병을 해결하고 대승을 거두었기에 유만수는 서경의 왕으로서 특별히 부내에서 연회를 열어 많은 손님을 초대했다.이번 사건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초청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한동안 왕부 안팎은 매우 시끌벅적했다.유만수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한테 매우 기쁜 소식이었고 호룡각을 멸한 건 더욱 기쁜 일이니 축하할 이유가 충분했다.밤이 되자 왕부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서경에 있는 모든 사람이 거의 다 모인 것 같았다.각 고급 장교, 각 고위 간부, 그리고 각 방면의 거물들이 모두 왕부에 모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여러분, 후배인 제가 먼저 몇 마디 하겠습니다.”연회에서 유천우는 먼저 일어나 손에 잔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이번에 왕부가 위기를 맞았었지만, 여러분은 떠나지 않고 앞다투어 왕부의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 제가 먼저 여러분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말을 마친 유천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도련님이 너무 겸손하네. 우리는 서경의 신하로서 당연히 왕부와 함께해야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별거 아니야.”평양 제후 장범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맞는 말이야. 오랜 시간을 위왕 님과 함께 보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늘 같이했으니, 왕부가 곤경에 처했다면 당연히 전폭적으로 도와야지. 나라를 위해서
“맞아요. 길이라는 건 한번 잘못 들어서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죠. 사철수의 모든 행동은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가 없어요. 누구처럼 죄를 공으로 대처할 기회조차 없죠.”유천우는 유태범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유태범이 셋째 삼촌이 아니고 아버지의 인자함이 없었다면, 그뿐만 아니라 형제의 상잔을 원하지 않았고 손실이 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역모는 열 번 죽어도 모자란 죄였다.“흠 흠.”유천우의 눈빛에 유태범은 괜히 마음에 찔려 화제를 돌렸다.“장혁아, 세 개의 보물 창고를 모두 합치면 가치가 엄청날 텐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당연히 전부 서경으로 가져가야죠. 설마 그 잡놈들한테 남겨두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유천우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세 개의 보물 창고를 우리가 전부 독차지할 수는 없어.”유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우리만의 힘으로 호룡각을 멸망시킨 건 아니잖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야. 그러니 보물 창고도 공평하게 함께 나눠야지.”“공평하게 나눈다고? 장혁아, 장난이지?”유태범은 어리둥절해서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방금 사철수의 말을 들었잖아. 호룡각의 보물 창고는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것들이고 그 수가 엄청날 텐데, 그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이번에 호룡각을 소탕하는 데 유태범은 뛰어난 공을 세웠으니, 나중에 또 다른 표창을 받을 수도 있었다.다시 말해, 서경왕부가 더 많은 보물을 얻어야만 유태범의 이익도 더 많아지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보물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보물도 좋지만, 도의도 지켜야죠. 사람들이 멀리서 우리를 도와주러 왔는데, 우리가 보물을 독차지한다면 그건 배은망덕한 사람이죠.”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그렇지만 굳이 똑같이 나눌 필요는 없잖아. 적당하게 성의를 보여주면 되는 거지.”유태범이 말했다.“저는 이미 마음먹었어요. 제 결정이 불만스럽다면 유만수에게 일러바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
“사철수 씨, 아직도 멍하니 서서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이라도 찍어줘요? 빨리 보물 지도를 찾아내세요.”불만으로 꼴 독 찼던 유태범은 못마땅한 얼굴로 사철수에게 화풀이했다.“알겠어요. 서두를게요.”유태범의 말에 사철수는 즉시 합금으로 되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가 채원진의 부러진 손을 들어 중간 부분에 있는 감응 위치를 살짝 눌렀다.띵 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자, 금속으로 만든 금고가 드러났다.금고는 약 33제곱미터 정도의 크기였고 한가운데에는 골드바가 사람의 키보다 더 높게 쌓여 있었다.골드바 외에도 그 주변에는 다양하면서도 진기한 보물들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고 귀중한 물건들이었다.“이곳은 채원진의 개인 금고예요. 채원진은 마음에 드는 모든 물건을 전부 이곳에 수집했어요.”사철수가 설명했다.“보물들이 어마어마하네요.”유천우는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이것들을 전부 가지고 나가면 성을 하나 사고도 남겠네요.”“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호룡각의 다른 세 보물 창고에 비하면 눈앞에 있는 것들은 새 발의 피죠.”사철수가 설명했다.“정말이에요?”유천우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당신 말대로라면 호룡각의 보물을 전부 모으면 산더미가 되겠는데요?”“제가 직접 본건 아니지만 수십 년 동안 쌓아왔으니, 산더미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예요.”사철수는 진지하게 말했다.“좋아요. 아주 좋아요! 빨리 모든 보물을 긁어모으고 싶네요.”유천우는 정신이 번쩍 들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보물 지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유태범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여기 있어요.”사철수는 맨 안쪽 선반으로 가서 위에 놓여있는 정교한 박달나무 상자를 꺼내 조심스럽게 유진우에게 건넸다.유진우가 열어보니 안에는 양피지 3장이 들어있었다. 모든 양피지에는 상세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지도 중앙에는 보물 창고의 위치가 금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보물 지도가 진짜라면, 지도에 그려져 있는
“보물 지도는 어디 있나요?”유진우가 추궁했다.“채원진의 지하 밀실에 있어요.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모시지요.”사철수가 말했다.“지하 밀실?”유천우는 실눈을 뜨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속으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건 아니죠? 나중에 나를 악랄하다고 탓하기 싫으면 그런 생각은 빨리 접는 게 좋을 거예요.”밀실 같은 건물에는 함정과 암기가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유천우는 사철수가 다른 속셈이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다.“저는 이미 독 안에 든 쥐가 아닙니까.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사철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앞서서 안내하세요.”유진우가 두 근위병에게 눈치를 주자 근위병 두 명이 와서 사철수를 일으켜 세웠다.“잠깐만요. 밀실에 있는 보물 상자를 열려면 채원진의 손이 필요해요.”사철수가 갑자기 말했다.“그건 쉽죠.”유천우는 즉시 칼을 빼 들어 채원진의 오른손을 잘라 사철수에게 건네며 말했다.“자. 선물이에요.”사철수는 징그러웠지만 아무 말도 못 하고 채원진의 손을 받아 들고 앞장섰다.유진우와 몇몇 사람은 사철수를 따라 기지로 들어갔고 마침내 지휘실 입구까지 도착했다.사철수는 문을 열고 벽 쪽으로 다가간 다음 벽에 걸려 있는 그림 하나를 떼어냈다.그림 뒤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기 어려운 하나의 버튼이 있었다.사철수가 손을 내밀어 버튼을 누르자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벽 전체가 갑자기 양쪽으로 열리더니 안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드러났다.사철수가 유진우를 포함한 몇 명을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올라탄 뒤 스위치를 누르자 문이 닫히더니 천천히 지하로 내려갔다.반 시간 남짓 지나자 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몇 명 사람들의 눈에는 넓고 호화로운 지하 밀실이 들어왔다.말이 밀실이지 사실 호화 저택에 가까웠다. 안에는 없는 것 없이 다양한 생활 시설이 모두 갖춰져 있었고, 많은 물과 식량도 수집되어 있었는데 수십 년 동안 혼자 생활하기에는 충분한 수량이었다.“핵 방지
“유진우?”무릎을 꿇은 채 냉정한 표정을 한 유진우를 바라보는 사철수의 얼굴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놀라움과 기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더욱 컸다.흑용군이 매복되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사철수는 이미 호룡각의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아차렸다.아니나 다를까 호룡각의 기지는 파괴되었고 채원진은 목숨을 잃었으며 사철수는 유진우한테 체포되었다. 하지만 사철수는 어쩌면 이게 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비록 사철수가 호룡각의 사람이긴 했지만, 서경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서경은 이미 사철수한테는 고향 같은 곳이었고 주변에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아주 많았다.사철수가 저질렀던 많은 일들은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했던 거라 마음이 늘 불편했었다.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도 모두 사철수의 업보였고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이였다.“아저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채원진이 패했으니, 당신도 패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이제 와서 더 할말이 남았나요?”유진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기면 영웅이고 지면 도적이 되는 법이지요. 세자 전하께서 죽이시든 벌을 주든 저는 다 괜찮습니다. 다만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사철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했다.“당신이 지금 나한테 그런 조건을 내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세요?”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세자 전하, 죄인인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제 아내와 딸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용서해 주십시오.”사철수는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머리를 세게 박으며 유진우에게 절을 올렸다.“당신 말대로 그들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못난 남편과 아비 때문에 그들도 죄인이 된 겁니다. 설마 당신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큰 죄를 지어 놓고 가족은 아무 일 없이 무사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유진우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세자 전하, 공을 세우는 거로 저의 죄를 보상하면 안 될까요? 세자 전하께서 소가 되라면 소가 될 것이고 말이 되라면 말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때 조무진이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조무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자 완전 무장을 한 군부가 보였는데 족히 수만 명은 되는 것 같았다.검은 갑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병사들은 기세가 매우 위풍당당했다.얼핏 보면 마치 강철로 되어 있는 호수 같았는데 멀리서부터 강한 압박감을 주는 이 부대는 바로 서경의 최강 정예 부대 흑용군이었다.“보아하니 사철수는 이미 체포된 것 같네요.”이청성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이 흥용군의 리더는 바로 유천우였다.당시 유천우는 명령에 따라 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호룡각의 정예 부대를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만든 뒤 절대적인 병력 우세로 오천여 명의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포로로 체포했다.쿵 쿵 쿵!수만 명의 흑용군이 가까워질수록 그 압박감은 점점 더 강해졌다. 성벽 위에 있던 백호군들도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졌다.소문에 의하면 흑용군은 용국의 최강 군부로서 창시 이래 백전백승을 이뤘고 여러 차례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어떠한 군부도 흑용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했다.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닌듯했다. 흑용군의 강렬함과 살벌함은 충분히 다른 군부를 경시할 만했다.“형! 임무를 완성했어요. 호룡각의 남은 사람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잡아들였어요.”유천우가 먼저 앞으로 다가와 보고했다.“잘했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이쪽은 어떻게 됐어요? 채원진은 죽었어요?”유천우는 여기저기 둘러보며 말했다.“머리가 잘렸는데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조무진은 발로 채원진의 머리를 슬쩍 건드리며 말했다.채원진의 머리는 축구공처럼 땅바닥에서 굴러 유천우의 발밑에 멈추었다.“뭐야! 이렇게 못생겼다고? 어쩐지 맨날 가면을 쓰고 다니더라니.”유천우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암살하고 서경을 해친 놈을 미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채원진은 이미 죽었고 밑에 있던 정예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니, 호룡각은 이제 완전히 멸망한 셈이에요.
채원진은 죽고 호룡각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호룡각은 조직 전체가 완전히 멸망했고 남은 사람이라고는 흩어져 있는 병사들뿐이라 크게 위험이 되지는 않았다.하지만 유진우는 방심하지 않고 호룡각이 관련된 모든 사람은 전부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만약 그들이 자진해서 항복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남은길은 죽음뿐이었다.“형, 드디어 이 재앙 같았던 놈을 처리했네. 축하해!”조무진은 앞으로 걸어가 채원진의 시신을 발로 차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미소를 지었다.“다 네 덕분이야. 네가 20만 명의 백호군을 데리고 채원진의 퇴로를 끊어놓지 않았다면 채원진은 또 다른 기회를 찾아 연명했을지도 몰라.”유진우가 말했다. 그는 채원진을 죽이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걸었다. 결국 채원진은 죽었고 그는 승리했다.“난 별로 한 게 없어. 고마워할 거면 공주마마께 고마워해야지.”조무진은 고개를 돌려 뒤에 서있는 이청성을 보며 미소를 짓고 말했다.“공주마마께서 형을 돕는다고 엄청 바쁘셨어. 한순간도 긴장을 놓지 않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독촉하느라 발등에 불이 붙을 뻔했다니까.”“조무진 씨! 지금 무슨 말 하는 거예요?”이청성은 앞으로 걸어 나오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별거 아니에요. 공주마마께서 학식과 도리가 깊고 외모와 지혜가 뛰어나다고 칭찬하고 있었어요.”조무진은 아첨하며 웃음을 지었다.“흥! 말은 번지르르하게 잘하네요.”이청성은 조무진을 흘겨보며 말했다.“공주마마, 감사합니다.”유진우는 공수하며 말했다.“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요?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끝까지 도와줬을 뿐이에요.”이청성은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게다가 채원진은 우리 공공의 적이잖아요. 유진우 씨뿐만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해요. 전체적으로 보면 백성을 위해 나쁜 놈을 제거 한 거죠.”“공주마마의 대의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이 얘기는 그만하죠. 비록 채원진이 죽었다고 하
반면 채원진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십여 미터나 날아가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 팔 전체가 파열되었고 용담적염창도 튕겨 나갔으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도련님, 괜찮으십니까?”홍복홍은 재빨리 달려가 떨고 있는 유진우를 부축했다.“괜찮아요.”유진우는 몸에 기혈이 들끓고 팔이 저리고 검도 제대로 잡지 못할 것 같았다.비록 채원진이 중상을 입기는 했지만 방금 전력으로 내뿜은 일격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힘이었고 결국 유진우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채원진의 몸에 있는 멸신독이 퍼지지 않았다면 오늘 그를 제압하지 못했을 것이다.“왜? 이럴 수 없어. 절대 이럴 수는 없어...”땅에 엎드려 맥 빠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채원진의 두 손은 긴 손가락 자국을 남긴 채 땅바닥에 푹 꺼져 있었다.안 그래도 흉측하던 얼굴이 더욱 흉측해 보였다.“남길 유언이라도 있나?”유진우는 창궁검을 손에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 채원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한 세대의 효웅이었던 채원진은 마치 죽음을 앞둔 늙은 개처럼 낭패와 처참함 그리고 빨리 죽기 위해 발악하는 듯한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유진우! 이 비열한 새끼야! 네가 이런 모함을 꾸미지 않았다면 내가 패할 가능성은 절대 없었고 이 지경까지 되지도 않았을 거야. 인정 못 해. 죽어도 인정 못 해!”채원진은 미친 사람처럼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그의 상대는 용국의 지존인 서경 왕 유만수처럼 천하를 뒤흔든 거물이었는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 몇 명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채원진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비열?”유진우는 콧방귀를 뀌고 말을 이었다.“이런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오니까 정말 어이없구나. 사람을 시켜서 내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간질로 삼촌을 유혹하여 반역을 도모해 서경을 혼란에 빠뜨리고. 네가 했던 일 중에 어느 하나 비열하지 않은 일이 없어.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와서 도리를 따지는 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그리고 네가 인정하든 못하든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