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 오빠!”유진우가 떠나려 하자 당황한 남궁은설이 재빨리 쫓아가서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오빠, 정말 미안해요. 나도 미치오 씨가 올 줄은 몰랐어요. 다 내 탓이에요. 그러니까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은설 씨, 나 화 안 났어요. 의사로서 나도 은설 씨 아버님 치료해 주고 싶어요. 하지만 날 믿지 않는데 어쩌겠어요.”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여러 번이나 경고했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그도 별수가 없었다.“난 진우 오빠를 믿어요. 하지만...”남궁은설이 말을 잇지 못했다. 집안일은 부모님이 결정권을 갖고 있어 딸이라고 해도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괜찮아요, 은설 씨. 먼저 병실로 돌아가요. 난 밖에서 커피나 마시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요.”유진우는 웃으면서 남궁은설의 어깨를 토닥였다.“알았어요.”남궁은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꾸만 돌아보며 병실로 들어갔다. 괜한 걸음 하게 해서 얼마나 미안한지...“은설아, 저 자식 왜 신경 써? 그냥 가게 내버려 둬. 쟤가 뭐가 대단하다고. 보험이나 파는 놈을 이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어?”남궁은설이 들어오자 유연지가 또 부채질하기 시작했다.“그러게 말이야. 미치오 씨가 있는데 저 자식이 함부로 하게 해서는 안 되지.”한솔이 밖을 힐끗거리며 하찮다는 표정을 지었다.“미치오 씨, 이젠 아무도 방해 안 하니까 빨리 치료해 주시죠.”도란영이 다그치기 시작했다.“그래요. 당신들 성의를 봐서 한 번 더 도와줄게요.”호시노 미치오는 아량을 베푸는 척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검은색 약병을 꺼내 금옥탕을 남궁보성에게 먹였다. 그러고는 약상자에서 은침을 꺼내 남궁보성 몸의 혈 자리에 놓았다. 한꺼번에 침 열몇 개를 꽂고 나서야 멈췄다.“침을 맞으면 경맥을 뚫어주고 기혈을 고르게 하는 효과가 있거든요. 거기에 귀한 금옥탕까지 마셨으니 환자분 꼭 기사회생하실 겁니다.”호시노 미치오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그렇다면 너무 잘됐네요.”도란영은 긴장감이 감도는 얼굴로 침대에 누워
사람들이 비아냥거리자 병실 안에 있는 교수들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의술이 호시노 미치오보다 못하긴 하지만 그들도 여기서는 인재들이었다. 같은 나라 사람에게 무시당하니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감히 건드릴 수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못 들은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미치오 씨, 우리 남편 언제쯤 깨어날 수 있나요?”도란영이 떠보듯 물었다. 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의식을 되찾지 못했기에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조급해하지 말아요. 침을 뽑으면 깨어나실 겁니다.”호시노 미치오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재빨리 은침을 뽑았다. 은침을 다 뽑자 남궁보성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몇 초 후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에 핏빛이 스쳤다.“깨어났어요. 드디어 깨어났어요.”사람들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역시 미치오 씨입니다. 말씀대로 정말 깨어났네요. 진심으로 존경합니다.”남궁진혁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괜히 명의가 아니네요. 용국의 의사들보다 백배 더 뛰어나요.”유연지 등 몇몇도 아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고맙습니다, 미치오 씨. 이제부터 당신은 우리 집안의 은인입니다.”도란영이 기쁨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난 불치병을 전문으로 치료하거든요. 이런 병 나한테는 일도 아니에요.”호시노 미치오가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러면서 조력자가 건네는 물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런데 침대에 누워있는 남궁보성의 두 눈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고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으악!”남궁보성이 갑자기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모습은 흉악하기 그지없었고 핏줄도 다 튀어나와 무서운 악마를 연상케 했다. 그리고 코와 입에서 검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렸다.“뭐야?”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미치오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우리 남편 조금 전까지 멀쩡했잖아요.”도란영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죽... 죽었어?”갑자기 숨을 거둔 호시노 미치오를 보며 사람들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나같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궁보성이 갑자기 미쳐 날뛸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것도 아무런 조짐도 없이 호시노 미치오의 숨통을 끊어버렸다.‘단 일격에 죽여버렸어. 어떻게 이런 일이... 큰 문제 아니라며? 정상적인 현상이라며? 침으로 해결할 수 있다더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젠장.’“으악!”남궁보성은 포효하면서 호시노 미치오의 시신을 확 던져버렸다.쿵!호시노 미치오의 시신이 벽에 부딪히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맥없이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미치오 씨!”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특히 유연지와 한솔 등 몇몇은 마치 친부모가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가슴 아파했다.“얼른! 얼른 가서 작은아버지 붙들어!”남궁진혁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명을 내리자 부하들이 남궁보성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이미 미쳐 날뛰기 시작한 남궁보성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아주 폭주했다. 게다가 실력까지 강해서 아무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누구든지 전부 날려버렸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여보, 사람 다치게 하지 말아요!”“아빠, 정신 차리세요. 다 아빠 가족이라고요!”도란영과 남궁은설은 끊임없이 소리 지르며 남궁보성을 깨우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되레 남궁보성의 주의만 끌게 되었다.“죽어! 다 죽어!”남궁보성은 소리를 지르면서 남궁은설을 덮치려 했다. 그의 두 손은 마치 칼처럼 날카로웠고 손가락 사이에 원기가 감돌아 쇠도 손쉽게 부러뜨릴 수 있었다. 일반 사람이 그 공격을 맞는다면 바로 즉사할 것이다.“여보, 안 돼요!”도란영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남궁은설에게 달려가며 몸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막으려 했다. 당장 누구 하나 죽어 나갈 것 같던 위기의 순간, 은침 한 개가 갑자기 날아왔다.슉!문밖에서 날아온 은침은 전광석화처럼 남궁보성의 목을 그대로 찔렀다. 남궁
“내가 안 왔더라면 당신들 다 위험했을 거예요.”유진우가 손가락을 튕기자 은침 하나가 또 날아갔다. 조금 전까지 발버둥 치던 남궁보성은 그대로 굳어버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진우 씨, 살려줘서 고마워. 의술이 뛰어나잖아? 우리 남편 좀 도와줘.”도란영이 간곡하게 부탁했다.“미안하지만 난 지식이 얕아서 미치오보다 실력이 안 되니까 다른 의사 찾으세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미치오 씨?”도란영은 구석에 내던져진 시신을 보며 난감해했다. 만약 호시노 미치오가 진짜로 치료할 수 있었더라면 목숨을 잃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진우 씨, 전에는 내가 정말 미안했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도란영이 먼저 사과를 건넸다. 유진우가 실력 있는 의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호시노 미치오에 비하면 명성이 조금 부족했기 때문에 유진우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젠 호시노 미치오가 죽었으니 남궁보성을 살릴 사람은 유진우밖에 없었다.“진우 오빠, 아빠 지금 이성을 잃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남궁은설이 가여운 눈빛으로 말했다.“은설 씨를 봐서 한 번 더 도와줄게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을용 장군에게 신세 진 게 있어서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고마워요, 진우 오빠.”남궁은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작은어머니, 정말 유진우한테 맡기려고요? 미치오 씨도 치료하지 못했는데 저놈이 무슨 수로요?”그때 남궁진혁이 나서서 부채질하기 시작했다.“맞아요! 만약 저놈이 치료를 방해한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아요.”유연지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난 저 자식이 되레 아버님의 병을 키울까 걱정이에요. 그럼 누가 책임져요?”한솔도 가만히 있지 않고 한마디 덧붙였다.“이 지경이 된 이상 더 나빠질 게 뭐가 있겠어.”도란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성을 잃은 남편을 제때 치료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위험해질까 걱정이었다.“작은어머니, 그건 아니죠. 무엇보다 안전이 우선인데 작은아버지 목숨으로 위험을 무릅쓸 수는 없어요.”남궁진혁이 의미
방해 요소들이 사라지자 유진우는 남궁보성을 기절시킨 후 진지하게 치료에 임하기 시작했다.남궁보성은 나쁜 무공을 수련했기 때문에 생명력을 잃었고 경맥이 손상됐으며 오장육부도 망가진 것이었다. 게다가 호시노 미치오가 가한 자극으로 상태가 더욱 엄중해졌다.지금의 그는 과하게 부풀어 오른 공 같아 조금이라도 주의하지 않으면 당장 폭발할 수도 있었다.유진우는 은침으로 기혈을 고르게 한 후 진기로 막힌 경맥을 뚫어주는 동시에 망가진 곳을 회복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약물치료도 병행해야 했다.시간이 점점 흘렀고 유진우는 남궁보성의 몸에 은침을 계속 놓았다. 맨 처음에는 머리, 그다음은 가슴, 마지막에 복부에 놓았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어찌나 빼곡하게 놓았는지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다.침을 다 놓은 후 유진우는 손가락으로 마치 현을 튀기는 것처럼 은침을 살짝 건드렸다.윙...그러자 많은 은침이 진동하기 시작하면서 진기가 은침을 따라 남궁보성의 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상황이 대략 30분 정도 지속되었다.유진우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을 무렵 진기도 다 불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은침을 뽑아 은침 가방에 넣었다.“끝났어?”도란영은 의심에 찬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남궁보성은 아직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아까 기절해서 이따가 깨어날 겁니다.”유진우는 종이와 펜을 꺼내 처방을 적어서 도란영에게 건넸다.“이 처방대로 약을 지어서 연속 7일 동안 마시면 거의 완치할 겁니다.”“알았어.”도란영은 처방을 건네받고 부하에게 약을 지어오라고 했다.“아, 그리고 하나 더.”문득 뭔가 떠오른 유진우가 진지하게 경고했다.“남편분은 서혼공이라는 무공을 수련한 탓에 주화입마에 빠져서 죽을 뻔한 거예요. 그러니까 깨어나면 다시는 수련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다시 재발한다면 그땐 누가 와도 살리지 못합니다.”“알았어. 내가 꼭 잘 타이를게.”도란영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 임무는 끝났으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그 모습에 사람들은 전부 넋이 나갔다. 특히 유연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뭐야? 왜 내가 말하자마자 깬 거야?’“깨어났어요, 아빠 깨어났어요!”남궁은설은 펄쩍 뛰면서 기쁨에 겨워했다.“정말 깼어? 그 녀석 의술이 이렇게 대단하다고?”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호시노 미치오마저 속수무책이었던 병을 이름 없는 유진우가 고쳐버렸다. 실로 예상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연지 언니, 어때요? 이젠 진우 오빠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죠?”남궁은설은 자랑스럽고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유연지를 쳐다보았다.“어...”유연지는 민망한 나머지 목까지 시뻘게졌다. 조금 전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까지 했는데 이렇게나 빨리 망신당할 줄은 몰랐다.“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 있어?”남궁보성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힘들게 일어났다. 온몸이 뭔가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렸다.“아빠가 주화입마에 빠져서 하마터면 돌아가실 뻔한 걸 진우 오빠가 살려줬어요.”남궁은설은 앞으로 다가가 자초지종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 말에 남궁보성이 얼굴을 찌푸렸다.“유진우가 날 구했다고? 말도 안 돼.”“사실이에요.”남궁은설이 진지하게 말했다.“진우 오빠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목숨을 잃었을걸요?”“아니야. 이 일 뭔가 이상해.”곰곰이 생각하던 남궁보성이 갑자기 말했다.“미치오 씨마저 고치지 못한 내 병을 유진우가 무슨 재주로 고쳐? 난 못 믿겠어.”서로 얼굴을 붉힌 사이라서 자신을 구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뭔가 음모가 있는 게 분명해.’“아빠, 사실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도 못 믿으시겠어요?”남궁은설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버지가 괜한 억지를 부리는 것 같았다.“이 녀석아, 사람 마음은 모르는 거야. 겉만 봐서는 안 된다고.”남궁보성은 잘난 척하며 분석했다.“난 어릴 적부터 무공을 수련해서 몸이 아주 건강한데 왜 갑자기 중병에 걸렸겠어? 내 추측이 맞다면 분명 유진우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먼저 몰래 나한테 약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요.”유진우가 모함을 당하자 남궁은설이 고개를 저으면서 해명했다.“다들 오해했어요. 진우 오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 함부로 모함하지 말아요.”“이 녀석아, 넌 아직 너무 어려서 그래. 어떤 사람은 자신을 꽁꽁 숨겨서 아예 알아볼 수가 없다고. 나 정도는 돼야 상대의 속셈을 꿰뚫어 볼 수 있지.”남궁보성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그래, 은설아. 유진우 좋은 놈 아니니까 속지 마.”사람들이 나서서 타일렀다.“안 믿어요... 안 믿는다고요. 진우 오빠는 절대 남을 해치는 사람이 아니에요.”남궁은설은 두 눈이 벌게진 채 도란영을 보며 말했다.“엄마, 뭐라 말 좀 해봐요. 진우 오빠가 예전에 날 살려줬고 오늘은 아빠도 살려줬어요. 전부 다 봤으면 증명해줄 수 있잖아요.”“여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요?”도란영이 남궁은설을 도왔다.“당신도 속아 넘어갔어?”남궁보성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은설이가 모르는 건 그렇다 쳐도 당신도 몰라?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 만났는데. 우리한테 빌붙어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사람은 뭐든지 다 해. 이처럼 은혜를 베푸는 척하면서 대가를 바라는 놈 아주 많이 봤다고.”“하지만...”도란영이 뭐라 더 말하려는데 남궁보성이 짜증을 내며 잘라버렸다.“왜? 내 판단이 들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난 그 뜻이 아니라...”도란영은 난감해하며 결국 입을 다물었다.남궁보성이 뭔가 억지스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가족도 아닌 유진우 때문에 남편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아빠, 엄마,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남궁은설이 불만을 드러냈다. 분명 살려준 건 유진우인데 결국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았다. 이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은설아, 네가 진우 그놈 좋아하는 거 알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 때문에 이성을 잃어선 안 돼.”남궁보성이 진지하게 경고했다.“그 자식은 빈털터리야. 신분, 배경 아무것도
도란영은 자기 딸이 그런 길을 선택할까 걱정이었다.“왜?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그 시각, 하늘은 이미 어둑해졌다.병원에서 뛰쳐나온 남궁은설은 가로등 밑에 쪼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누런 불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유진우의 신분이 뭐든, 권력이 있든 없든 남궁은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단순히 유진우를 좋아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두 사람이 함께하려면 꼭 집안 형편이 비슷해야 해? 그럼 난 어떡하지? 모든 걸 다 버리고 사랑을 택한다? 아니면 가족들의 말대로 좋아하는 마음을 꾹꾹 참아야 하나?”끼익!그때 검은색 승합차가 갑자기 길가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검은 옷차림에 복면을 쓴 사람들이 빠르게 내려 남궁은설을 둘러쌌다.“당신들 누구야? 뭐 하는 거야?”남궁은설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은설 씨, 주인님께서 만나겠다 하십니다. 저희랑 함께 가시죠.”복면을 쓴 우두머리가 깍듯하게 인사하면서 손을 내밀며 차에 타라고 했다.“싫어! 꺼져!”남궁은설은 두말없이 바로 도망쳤다.“가서 잡아.”우두머리가 손을 흔들자 검은 옷차림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 남궁은설을 꼼짝 못 하게 묶어버렸다.“이거 놔! 놓으라고!”남궁은설은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실례 좀 하겠습니다, 은설 씨. 모셔가!”우두머리의 명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남궁은설을 곧장 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그대로 시동을 걸고 질주했다. 현장에 남궁은설이 떨어뜨린 신발만 덩그러니 남았다...밤이 점점 깊어졌다.그 시각 풍우 산장.유진우는 강린파 사람들과 함께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염룡파 당주 자리가 지금까지 계속 비어있었다. 이젠 왕현도 왔으니 자연스레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주정뱅이 영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병이 다 낫긴 했지만 예전의 버릇을 고치진 못했다. 지금도 쩍하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곤 했다.따르릉...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
이 순간 유진우의 눈이 피를 뿜을 듯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살기가 솟구쳤다.비록 예전에 아버지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아버지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는 그동안 품었던 그 작은 분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단지 호룡각의 일을 완전히 해결한 후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 효도를 제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둘이 만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암살당해 돌아가셨다. 이 충격은 그에게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창공!” 유진우가 갑자기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손을 뻗어 창공보검을 불러들이고는 밖으로 달려 나가려 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는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 없었다. 그는 반드시 호룡각의 잔당들을 모조리 섬멸해야만 했다!“전하! 제발 진정하십시오!” 유진우가 이성을 잃을 것 같은 모습을 보고 손도운이 급히 그를 막아서며 침착하게 조언했다. “호룡각은 준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이렇게 무모하게 뛰쳐나가신다면 복수는커녕 오히려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실 수 있습니다!”“비키세요!” 유진우의 눈이 붉게 충혈된 채 창공검의 칼날을 손도운의 목에 바로 겨누었다. 예리한 기운이 피부를 스치며 상처를 내자 피가 천천히 배어 나왔다.“전하! 저를 죽이시더라도 전 전하를 막아야만 합니다. 제가 어찌 전하께서 죽으러 가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왕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께 더 이상의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입니다!”손도운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진우 앞을 가로막은 채 죽음도 불사하는 자세를 취했다.유진우는 이를 악물었고 그의 손에 든 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몇 초간의 대치 끝에 그는 깊은 숨을 내쉬고 마침내 검을 내렸다.손도운의 말이 맞았다. 그는 지금 냉정해져야만 했다. 유만수가 죽었으니 왕부가 분명 큰 혼란에 빠졌을 것이고 이때
다른 처녀들도 모두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진심 어린 간청을 했다.이 광경을 본 유진우는 넋이 나갔다.노란 옷 처녀의 말은 그의 귀를 때리는 듯했다.지옥 같은 일을 겪고도 이 아이들이 자신이 아닌 천하의 모든 약자들을 생각하다니... 상상도 못 했다.이런 원대한 뜻과 깨달음은 그조차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이청성이 말했듯, 이들은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빛을 향하는 처녀들이었다.귀하고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누가 여자가 남자만 못하다 했는가?진정한 대의 앞에서 이 여자들이야말로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었다.이런 의로운 용사들이 있는데 어찌 서경이 부흥하지 않을까? 어찌 천하가 평안하지 않을까?“오빠, 결정해요. 받아주지 않으면 저 애들은 살아갈 희망조차 잃을 거예요.” 이청성이 진지하게 말했다.“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어요?” 유진우가 엄숙하게 물었다.“절대 후회하지 않겠습니다!”모든 소녀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좋아요! 허락하죠!”유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특별 훈련을 시작할 거예요. 견뎌낼 수 있다면 여러분들의 원대한 뜻을 이루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한다면 편한 곳에서 평안히 살도록 해요.”“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소녀들도 따라 외쳤다.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청성을 바라보았다. “당분간 네가 돌봐. 내일 저애들의 거처를 정하도록 해.”“알겠어요.”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소녀들을 데리고 떠났다.일행이 막 나가자 손도운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그의 표정이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고 큰일이라도 난 듯했다.“전하! 큰일 났습니다!”유진우를 보자마자 손도운은 ‘쿵’하고 무릎을 꿇고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왕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왕께서 자객의 암살로 돌아가셨습니다!”“뭐라고요?”이 말을 듣자 유진우는 벼락을 맞은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유
“오빠, 급한 건 알지만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아가씨들은 지금 오빠만 믿고 있고 목숨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어요. 받아들이면 좋은 점이 많을 거예요. 예를 들어, 오빠가 외로울 때...”“농담하지 말고 요점이나 말해요!” 유진우가 짜증스럽게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솔직히 말할게요.”이청성이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장혁 씨, 사실 이 처녀들은 보기 드문 인재예요. 제가 이미 선별했는데 모두 영리하고 의지가 강해요. 조금만 가르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예요.”“무슨 뜻이에요?” 유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밀사의 중요성은 잘 아실 거예요. 특히 여자 밀사는 어떤 면에서 타고난 장점이 있죠. 이 처녀들을 밀사로 키우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이청성이 말했다.“말은 쉽지, 밀사 하나 키우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요. 전 지금 제 몸 하나도 챙기기 힘든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요?” 유진우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그는 이 처녀들이 평온하게 살기를 바랐지, 이용당하거나 장기말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충성심인데 그들은 이미 그걸 가지고 있어요. 장혁 씨가 그들을 구해줬고 장혁 씨의 빛이 그들의 어두운 세상을 비춰줬죠. 저애들은 장혁 씨를 신처럼 여기고 있어요.”“시간과 노력은 걱정하지 마요. 장혁 씨가 직접 가르칠 필요 없이 좋은 스승만 찾아주면 돼요. 장혁 씨 곁의 손도운이라면 아주 적합할 것 같은데요.” 이청성이 살짝 미소 지었다.“그건 청성 씨 생각이고 저 애들한테는 물어봤어요?” 유진우가 물었다.“당연히 물어봤죠. 모두 하겠대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요.” 이청성이 말했다.“불쌍한 사람들인데 그럴 필요까지야...” 유진우가 눈썹을 찌푸렸다.“장혁 씨, 어둠 속에 있어도 빛을 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세요.” 이청성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발 저희를
“마마의 뜻은 내통자를 찾으라는 것입니까?”석태혁이 물었다.“아니요, 내통자와 범인 수사는 이미 홍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석 장군께선 더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이의진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경은 최근 몇 년간 불안정했어요. 전에는 어르신이 계셔서 소인배들이 함부로 날뛰지 못했지만 이제 어르신께서 돌아가셨으니 서경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우리 왕부가 가장 먼저 모든 이의 표적이 될 겁니다.”“제가 유만군을 소집한 것은 왕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누구든 왕부를 해하려 한다면 즉시 처단하세요. 자비를 베풀 필요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대답했다.비상시기에는 비상조치가 필요했다. 왕이 돌아갔으니 왕부가 곧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황을 진압하지 못한다면 왕부가 위험할 뿐 아니라 서경이 사분오열되어 제후들이 각자의 영토를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천하가 대란에 빠질 것이다!“석 장군, 장군께선 어르신의 심복이자 우리 왕부의 기둥입니다. 앞으로의 일은 모두 장군께 달렸습니다.” 이의진이 깊은 뜻을 담아 말했다.“소신, 충성을 다해 왕부를 지키겠습니다!” 석태혁의 표정이 결연했다.왕이 암살당한 것은 친위대장인 자신의 책임이었다. 왕부가 지금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면 자결로 죄를 갚았을 것이다.“석 장군, 전 이미 소식을 봉쇄했습니다. 어르신의 서거를 아는 이가 많지 않아요. 조금 후 조문 오는 자들을 잘 살피세요. 대부분이 불순한 의도를 품고 올 테니 누구든 방자히 굴면 즉시 체포하세요!” 이의진이 다시 명령했다.“알겠습니다!” 석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왕의 죽음은 모두에게 숨길 수 없을 것이다. 특히 흉심을 품은 자들은 이미 왕부에 첩자를 심어두었을 거고 왕의 서거를 알면 반드시 방문을 빌미로 허실을 탐색하거나 심지어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오늘부로 왕부는 평온할 수 없을 것같았다....서쪽에 있는 고풍스러운 저택에서.유진우가 막 기상하여 문을 열자 밖에 십여 명의 꽃다운 처녀들이
“어르신!”“깨어나세요! 제발 깨어나세요!”이의진은 숨이 끊어진 유만수를 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러웠고 그가 자신의 품에서 이렇게 죽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소식을 듣고 모여든 왕부의 사람들도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 유만수는 왕부의 하늘이자 서경의 하늘이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하늘이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서경 왕부 전체가 비통한 분위기에 잠겼고 전에 정무를 보던 대청은 이제 영당이 되어 사방에 흰 만장이 걸렸다. 정교하게 조각된 검은 관이 중앙에 놓였고, 그 안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유만수가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영당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릎 꿇고 있었는데 대부분 왕부의 신임 장수들과 유씨 가문의 자제들로, 모두 상복을 입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이의진은 맨 앞에서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홍복홍이 들어와 영정 앞에 절을 올리고 이의진 앞으로 와서 깊이 절했다.“왕비마마, 왕의 장례는 분부대로 처리했습니다. 소식을 봉쇄하고 조용히 진행하여 민심이 동요치 않게 했습니다.”“범인은 잡았습니까?” 이의진이 눈물을 닦으며 살기를 뿜었다.남편이 눈앞에서 피살당했으니 그녀는 범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범인의 무공이 너무 높아 추적에 실패했습니다.”“호룡각 잔당의 소행이에요. 즉시 수사하세요. 범인을 반드시 잡아오되, 필요하다면 흑용군을 동원해도 좋습니다!”“네.” 홍복홍은 물러갔다.“천우는 언제 오나?” 이의진이 고개를 돌려 여자 호위병에게 물었다.“도련님께서 변방 훈련 중이라 전갈을 보냈으니 오후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여자 호위병이 대답했다.“왕부 경계를 엄중히 하고 아무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하게 해.”이의진이 또 명령을 내렸다.“네!” 호위병이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다.“어르신, 제가 반드시 원수를 갚겠습니다!” 이의진은 유만수의 영정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뒤 영당을 나와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후원에
“물러가겠습니다.”이의진이 예를 갖추고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대청의 지붕이 무너져 내렸고 까만 인영 하나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검은 복면의 자객이었다.“조심하세요!”이의진이 순간 얼어붙었다가 외쳤다.“유만수! 죽어!”흑의인이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검을 내지르자 섬광이 스치더니 검은 유만수의 가슴을 관통했다.한 줄기 빛처럼 빠른 검세에 누구도 반응할 틈이 없었다.유만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가슴을 꿰뚫은 검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문간에 있었던 이의진도 충격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왕부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어떻게 자객이 들어왔단 말인가?하필 홍복홍과 석태혁이 공무로 나간 때를 노린 것이, 마치 미리 계획된 듯했다.“유만수! 이것이 호룡각에 맞선 대가다!”흑의인이 거칠게 검을 뽑자 유만수의 가슴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사람 살려! 자객이야! 자객이 들었어!” 이의진이 소리쳤다.순식간에 서경 왕부 전체가 발칵 뒤집혔고 호위병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흑의인은 형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즉시 지붕으로 도약해 달아났고 왕부의 고수들은 연이어 공중으로 날아올라 최대한 빠르게 추격했다.“어르신! 어르신!”이의진이 급히 유만수 앞으로 달려갔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유만수는 가슴에서 피가 멈추지 않았고 말을 하려다 격렬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어르신! 말씀하지 마세요! 괜찮으실 거예요! 꼭 괜찮으실 거예요!”이의진은 한 손으로 유만수의 상처를 누르며 다른 손으로 문 밖을 향해 외쳤다. “의원! 의원은요? 어서 와서 어르신을 살려주세요!”“의진아...” 유만수가 떨리는 손으로 이의진의 팔을 붙잡고 힘없이 말했다. “의진아... 나는 이제 끝에 다다랐어. 잘 들어... 내가 죽으면 서경이 크게 혼란스러워질 거야. 네가 왕비로서 사태를 안정시켜야 해. 내 신임하는 장수들이 널 도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