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허지영은 무려 5년 동안이나 배인호를 좋아하게 되었다.누군가에게 이토록 빠져있는 자기 모습에 허지영 자신도 탄복할 지경이었다.허지영의 마음에 대해 배인호는 상대조차 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분명하게 거절까지 했었지만, 이에 허지영은 기죽지 않았다.대학에 붙고 나서 허지영은 박정아, 오세희 그리고 이민정을 알게 되었다.세 친구는 처음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추구하라고 허지영을 격려해 주고 지지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졸업할 때 쯔음에 그만두라고 권하기 시작했다.이에 허지영 또한 배인호를 내려놓겠다며 자신있게 말했지만, 배인호를 마주치게 되는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지영아, 배인호는 그냥 좀 잘 생기고 돈도 좀 많은 것뿐이야. 대단한 거 하나도 없으니 인제 그만 마음 접고 내가 비슷한 남자, 아니, 더 좋은 남자로 소개해 줄게.”박정아는 매번 이런 식으로 허지영을 타이르고 했다.허지영은 지금 술을 마시고 한숨을 풀풀 내쉬고 있다.왜냐하면 어젯밤에 배인호가 어떤 여자와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한눈에 봐도 두 사람은 사이가 꽤 괜찮아 보였다.하지만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인기가 많은 배인호는 여자 친구를 옷 갈아입듯이 자주 바꾸어 이름난 바람둥이다.“맹세할게! 나, 허지영은 오늘부로 다시는 배인호를 찾아가지 않을 거야!”허지영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이미 헤아릴 수없이 했던 맹세를 거듭했다.그들의 우정이 참 예쁜 것은 허지영이 여러 번이나 맹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세 친구는 여전히 그녀를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심지어 세 사람은 허지영을 위해 소개팅까지 주선하고 있었는데, 인연이 되면 그대로 만나는 것이고 인연이 아니면 그만두면 된다.“지영아, 저 어정쩡하게 생긴 남자들 봐봐,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아가 허지영의 앞으로 다가와 수상쩍은 웃음을 드러냈다.“어정쩡한 것도 아닌데, 그냥 느낌이 오지 않아.”허지영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배인호의 얼굴과 목소리 뿐이다.
아직도 변함없이 배인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허지영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서 배인호 엄마는 입이 떡 벌어질 제안을 했다.“그럼, 우리 인호하고 결혼할래?”배인호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그때 허지영에게 있어서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친구들마저도 허지영에게 시대를 잘못 만났다고 했으니 말이다.그 중의 이유는 잘 알지 못했지만, 여러모로 어린 허지영은 충동하는 바람에 생각도 거치지 않고 배인호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배인호와 결혼만 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그러나 허지영을 기다리고 있는 건 배인호의 강렬한 저항이었다.그는 집안 어른들이 내린 이 결정에 대해 무척이나 황당하고 분개했으며 주동적으로 허지영과의 만남을 요구했다.허지영은 배씨 가문에서 일어난 일도 모른 채 자기가 좋아하는 치마를 입고 약속 장소로 달려갔는데, 배인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기뻐하기에는 너무 이르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배인호의 얼굴에는 전례 없는 혐오와 차가움이 묻어 있었다.허지영은 하얀 긴 치마를 차려입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쯤에서 휘날리고 있으며 피부는 무척이나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햇살이 살짝 비추자, 눈동자는 갈색을 띠게 되었다.그리고 지금 허지영은 몹시나 불안한 눈빛으로 배인호를 바라보고 있다.그 눈빛을 배인호 역시 알아차렸다.“누가 너더라 우리 엄마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어?”배인호의 목소리는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차갑고 아프기 그지없었다.눈앞에 있는 허지영이 아무리 예쁘고 자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는 조금의 흥미가 돌지 않았다.왜냐한면 그는 지금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의 이름은 민설아이지 허지영이 아니다.배인호는 민설아를 집으로 데리고 갔으나, 온 가족의 반대를 받게 되었었다.특히 그의 할아버지는 요즘 병세가 심각해져 몸져누웠는데,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아 더 이상 그 어떠한 충격도 받아서는 안 될 정도다.그는 할아버지에게 민설아를 소개해 주었는데, 할아버지로부터 강렬한 반대를 받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허지영이야말
배인호 엄마는 민설아와 만나는 일을 허지영에게 알려 주지 않았고 혼자서 이 민설아를 해결하려고 했다.민설아와의 만남은 이번이 두 번째이며 첫 만남은 배인호가 집으로 데려왔을 때였다.얼굴은 예쁜 편에 속하는 데 왠지 모르게 아주 불편한 느낌을 주고 있어 배인호 엄마는 보자마자 반감이 들었다.마음속 깊이 이미 민설아를 반대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아주머니, 안녕하세요.”민설아는 배인호 엄마의 맞은편에 앉아 조금의 두려움과 긴장한 기색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덤덤하게 웃었는데, 무척이나 자신있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왜냐하면 배인호가 어떻게든 가족들을 설득할 것이라고 약속했고 그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배인호 엄마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고 직접 은행 카드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설아 양, 이 카드에 4억 들어있어요. 우리 아들과 헤어지고 이 돈으로 편하게 지내요. 설아 양한테 어울리는 남자 만났으면 좋겠어요.”배인호 엄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하며 민설아의 얼굴은 보기 흉해졌다.그녀는 은행 카드를 도로 건네주며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만 전 그럴 수 없어요. 저와 인호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진심으로 사랑한다고요?”배인호 엄마는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어려서 사랑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현실은 그게 아니에요. 설아 양 집안과 살아온 환경에 우리 인호가 적응할 것 같아요? 우리 인호는 배씨 그룹의 상속자가 될 아인데, 아내가 될 사람이 어떻게 평범한 가문에서 나온 여자일 수 있겠어요? 인호한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설아 양은 우리 인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능력도 없어요.”배인호 엄마의 말에는 비아냥거리는 뜻이 가득했지만, 모두 사실이었다.민설아는 한 마디도 반박할 길이 없어 입만 뻥긋거렸는데, 정신 차리고 뭐라고 하려던 참에 배인호 엄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8억이면 되겠어요? 평생 벌어도 벌지 못한 돈인데, 앞으로 설아 양도 설아 양 가족분들도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거예요.”
민설아 대해 말하려고 할 때, 게임방의 문이 다시 열렸는데, 배인호 엄마가 들어왔다.배인호가 지금 허지영에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눈치라도 챈 듯이 허지영을 다른 곳으로 보내려고 했다.“지영이 왔구나, 할아버지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 어서 가 봐.”할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 허지영은 망설이지 않았다.이번 기회에 할아버지께 똑똑히 말씀드리려고 했다. 아니면 배인호가 자기를 평생 원수로 생각할 것인데, 배인호와 그런 사이로 남고 싶지 않았다.허지영이 떠나고 나서 배인호 엄마는 즉시 그를 경고했다.“민설아에 대해서 지영이한테 말했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아니면 나도 네 아빠도 너 같은 아들 다시 보지 않을 거야.”집안의 어른들이 허지영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친 아들인 자신을 외면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배인호 엄마는 아들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카드 명세서를 꺼내 보란 듯이 놓았다.“눈 뜨고 잘 봐. 내가 민설아한테 8억을 줬거든, 그 돈 받고 너랑 헤어지겠다고 했어. 네 돈을 노리고 너한테 접근했다는 말이야. 인호야, 엄마인 나도 여자야. 여자의 마음은 너보다 내가 더 잘아. 엄마인 내가 널 헤치겠어?”명세서를 바라보면서 배인호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는데, 거듭 확인하다가 흥분하면서 엄마를 질의하기 시작했다.“이 명세서로 뭘 증명하겠다는데요? 설아가 돈을 받았다는 증거라도 돼요?”배인호 엄마는 아들이 믿지 않을 줄 알고 식당 감시 카메라 동영상을 켰다.운전기사에게 식당 한구석에서 민설아가 돈을 받는 장면을 똑똑히 담게끔 미리 지시를 내린 것이다.배인호는 동영상에 나온 민설아의 모습을 보았는데, 민설아는 망설이던 끝에 카드를 선택했다.이를 보게 되는 순간 배인호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노여움이 단번에 밀려왔다.민설아가 돈을 선택하고 자기를 버린 것에 대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민설아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고 하던 순간 배인호 엄마가 크게 호통쳤다.“배인호! 아직도 정신 못
배인호는 차디찬 눈빛으로 노성민이랑 박준을 흘긋 봤다.두 사람은 그 싸늘한 눈빛에 깜짝 놀랐다. 남들은 결혼할 때 경사가 났다고 기뻐하는 얼굴인데 배인호는 오히려 누군가에게 뺨을 몇 대 맞은 듯, 얼굴이 흉흉했다.“왜 왔어?” 배인호는 그들을 초대한 적이 없었다. 내일 결혼식의 하객도 마찬가지로 신경 쓰지않았다. 그는 결혼식에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부모님께 맡겼다.“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주려고 왔어...”노성민이 가장 작은 목소리로 가장 용기 있는 말을 꺼냈다. 지금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 청첩장이 다 돌려진 터에 뭘 고민할 수 있을까?그때 이우범이 입을 열었다. “정말 다 생각해봤어?”배인호는 이우범을 바라보았다. 세 친구 중에서 이우범만이 가장 침착하고 진중했으며, 다른 둘처럼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기에 그의 질문도 무척 진지했다.배인호의 마음이 한순간 무거워졌고, 약간 짜증이 나 이우범의 눈길을 피했다. 이우범의 입가에는 조롱하는 미소가 걸렸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과일을 내려놓고 일어나 배인호에게 말했다. “잠깐 나와, 너랑 좀 얘기하고 싶어.”그러고는 밖으로 걸어갔다. 배인호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따라나섰다. 노성민과 박준은 서로를 쳐다봤다. 배인호와 이우범 둘만이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왜 숨기려는지 궁금해졌다.한적한 곳에 도착한 후, 이우범은 멈춰 서서 배인호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눈빛에 드물게 비난의 빛이 서렸다. “민설아는 어떻게 할 건데?”민설아라는 이름을 듣자 배인호의 몸이 굳어지며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어머니가 민설아가 돈을 받고 그를 떠나기로 했다고 말해준 이후 딱 한 번 민설아를 만났었다. 배인호는 그때 이별을 고한 이후로 더는 그녀와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민설아가 이미 자신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합의가 끝난 일이다. 그러니 더는 확인할 필요가 없다.“우
허지영은 결혼식에 온 하객들에게 둘러싸인 채 웨딩카에 앉아있었다. 그때 배인호가 허지영을 차에서 안고 내려 집으로 가는 부분에서 막혀버렸다.이때 배인호가 먼저 몸을 구부리고 몸 절반쯤을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차에서 자기를 안고 내려 줄 거로 생각해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띄워 보였다.하지만 바로 배인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내려와서 혼자 걷든지, 아니면 밤까지 여기 있든지.”이토록 짧은 두 마디에 허지영은 마음이 아예 식어버렸다. 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의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도 그는 전혀 허지영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단지 자신을 더 창피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하객분들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게 하기 위해 허지영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혼자 차에서 내렸다. 다른 사람들의 놀란 시선에 허지영은 다급히 해명했다.“저 이가 넘어질까 봐 겁나요. 그냥 제가 직접 내릴게요.”배인호는 허지영이 순순히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입가에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허지영의 힘든 나날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이번 결혼식에서 배인호는 허지영에게 조금의 존중과 협력도 없었다. 모두가 이 사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지만 다들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들 배인호가 이 결혼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씨 가문의 명성과 지위로 보아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희소식을 발표하고 성대하게 치렀을 것이다.허지영도 마음속으로는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허지영 주변의 가족과 친구들, 특히 들러리를 한 박정아와 오세희, 이민정도 다 알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후, 바로 허지영에게 찾아가 배인호의 험담을 늘어놓았다.“결혼하는 날에 왜 썩은 표정을 하고 있대? 젠장, 정말 미친놈인 게 분명해!”“그러니까 말아야. 영아, 왜 저 남자한테 시집간 거야? 세상에 남자는 널리고 널렸어.”“결혼하고 나서도 걔가 계속 이런 태도면 어떡하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