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배인호를 목적지까지 데려갔다.“도착했어요.”배인호가 지내는 곳에 도착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술을 마셔서 이렇게 빨리 잠에 든 걸까?나는 손을 뻗어 그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고른 숨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 채웠고 아주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인호 씨, 일어나 봐요. 들어가서 자야죠.”나는 또 입을 열었다. 비록 오후였지만 나는 다시 병원에 돌아가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가 자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배인호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만 또 깨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 뒤 다시 눈을 감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이때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아까 내비게이션을 킬 때 화면을 닫지 않아 문자가 보였다. 민설아에게서 온 문자였다.민설아: 빈이가 당신 아이라는 거 알았다면서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한테서 빈이를 뺏어갈 건가요? 인호 씨 나에게 빈이밖에 없어요. 빈이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인호 씨가 더 잘 알잖아요.”나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다.이제 보니 그동안 민설아는 계속 배인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많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자기의 존재감을 어필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문자와 전화로 배인호에게 연락했다.그녀는 나에게서 배인호는 이미 빈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테스트까지 했다.배인호는 계속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나는 배인호가 왜 이렇게 하는지 막연하게 추측했다. 나를 위해 이렇게 한 것일까? 나는 빈이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빈이가 다시 민설아의 옆으로 돌아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배인호가 빈이의 진짜 밝히지 않고 민설아가 계속 질척거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에게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에
나는 배인호의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아빠는 아직 병원에 한동안 더 입원해 있어야 했다. 나는 매일 왔다 갔다를 반복했지만 마음은 이미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아빠의 회복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이다.오히려 엄마는 연속 2, 3일 동안 보이지 않았고 코슈메디컬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특허 레시피가 전체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체품을 찾았으니 얼른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엄마, 레시피 제공한 사람 같이 만나러 가요.”엄마가 상대와 계약을 체결하려고 준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다.“너도?”엄마가 약간 놀라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꾸만 찝찝했다. 이 프로젝트를 민설아와 그렇게 오래 담판했는데도 민설아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민설아와의 협력을 거부하자 오히려 대체품이 나온 게 이상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엄마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러면 작은삼촌에게도 할말이 생긴다.엄마와 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길에 나는 곧 협력하게 될 사람의 자료를 자세히 읽어봤다. 외국계 한국인이었고 외국에서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국내 회사와 협력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전에 있었던 나라는 마침 민설아가 오랫동안 있었던 나라와 겹쳤다.이런 이상한 우연이 나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엄마, 일단 계약서는 급해하지 마요.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같아요.”일단 엄마에게 귀띔했다.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고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나는 엄마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회사의 기타 주주들도 부담을 팍팍 주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관련된 범위가 넓었기에 완성하지 못하면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주주들은 이 책임을 다 엄마에게 돌릴 게 뻔했다. 작은삼촌의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지금 말하긴 그래요.”나는 엄마를 힐끔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배인호는 이 일에 매우 신경 쓰는 것 같았다.“너 지금 어디야? 만나서 얘기해. 이 프로젝트는 너희 삼촌 회사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민설아가 파놓은 함정에 뛰어든다면 경제적인 손실 뿐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엄마는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배인호야? 내가 한번 얘기해 볼게.”“엄마...”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엄마에게 넘겼다.회의실에는 어느새 나와 엄마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나를 피할 필요가 없었기에 배인호와 바로 회사의 현황을 토론했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배인호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는 엄마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배인호에게 손을 벌린 일로 바로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셨다.나는 옆에서 조용히 엄마와 배인호의 대화를 들었다. 반 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엄마는 피곤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지영아, 너의 판단이 맞기를 바란다.”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나도 마음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제니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증거가 필요했다. 아니면 회사에서 엄마의 입지가 곤란해지게 된다.엄마는 고개를 젓더니 더는 말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증거를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서 회사 주주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저녁이 되어서야 엄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아빠는 며칠만 더 있으면 몸조리를 집에서 해도 된다. 이젠 몸에 큰 문제가 없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사모님, 아가씨,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도우미가 나와 엄마 손에 들린 가방을 받더니 공손하게 말했다.엄마와 나는 지금 다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몸을 생각해 조금이라도 억지로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
“네.”배인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예의를 차린답시고 “별말씀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우리 엄마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무상으로 도와준다고 하면 엄마는 정신적으로 더 큰 부담을 가질 것이다.하지만 이를 떠나 엄마는 지금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렇게 배인호를 배척하면서 나와 배인호가 엮이는 걸 반대했는데 지금 배인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 볼게요.”배인호는 더 앉아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엄마에게 인사했다.나도 따라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요. 문 앞까지만 같이 가줄게요.”배인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집에서 나오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우리 집 상황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요?”“응, 당연하지.”배인호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보상하겠다고. 가끔 나를 무시해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더라고.”배인호의 성격에 전생에 서란에게 비굴하게 잘 따랐던 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나는 이게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 씁쓸하게 여겨야 할지 몰랐다.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이다.이때 배인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일인 것 같아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됐어요. 여기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 일은 고마워요.”“응.”배인호는 심플하게 한마디 대꾸하더니 차에 올랐다.그의 차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걸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아직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지영아, 너도 엄마가 우스운 거지?”“엄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엄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의 기분이 이상한 걸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네요, 민설아 씨. 지금 당신이랑 이럴 시간 없으니까 이렇게 찾아오지 마요.”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민설아를 쳐다봤다. 사실 그녀는 서란 보다 더 총명했다. 배인호가 거리를 두고 밀어내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배인호의 다른 친구를 매수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나만 괴롭혔다.이우범도 민설아가 먼저 회유한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오래전부터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봐야 했다.민설아는 불같이 화를 냈다.“쓸데없는 생각이라고요? 허지영 씨, 참 매정하네요. 인호 씨를 뺏어가더니 빈이까지 뺏어가려는 거예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이 말은 맞았다. 빈이를 뺏어오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빈이의 친모도 아니고 빈이에게 그렇게 못되게 구는데 빈이가 계속 학대받게 남겨줄 수는 없었다.“아빠 휴식 방해하지 마요. 간호사 선생님!”나는 민설아와 더는 입씨름하기 싫어 옆에 있는 간호사를 불렀다.“이 사람 지금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는데 경비 불러서 쫓아주세요.”간호사는 아빠는 알고 있었지만 민설아는 누군지 몰랐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아가씨, 나가 주실래요? 환자가 휴식이 필요해서요. 협조 안 하시면 경비를 부르는 수밖에 없어요.”민설아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딱 봐도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여기는 병원이라 경비가 그녀를 내쫓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민설아는 나를 서늘하게 째려봤다. 그 눈빛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었다.민설아가 가고 나는 바로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전에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노민준을 지켜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노민준은 이미 살인 미수를 인정받아 형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민설아를 토해내기 전까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이 변호사님, 전에 가보라고 했던 곳 있잖아요, 가봤나요?”나는 전화에 대고 변호사에게 물었다.“네, 허지영 씨, 전에 말한 곳은 이미 가봤습니다. 노민준은 나이 든 어머니와 이혼한 전처 사이에
노민준의 반응을 보니 나도 한 줄기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하여 계속 아들 얘기를 이어갔다.“하지만 수술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입천장갈림증과 손가락 기형은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쳐 조금씩 고쳐야 해요.”노민준은 바싹 바른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물었다.“얼마나 걸려요?”“그건 나도 잘 몰라요. 만약 더 좋은 병원에 가서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겠죠. 아이가 아직 어려서 모를 수 있지만 크면 외모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느끼고 위축될 거예요. 여자 친구를 찾는 것도 영향을 받겠죠.”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계속 노민준의 심리적 방어를 무너트리려고 했다.만약 이런 일을 저지른 게 단순히 가족을 위해서라면 내가 한 말에 무조건 매우 초조해할 것이다.이미 교도소에 들어온 이상 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아예 도울 수 없으니 말이다.“어떻게 된 거지? 민...”노민준은 관건 인물을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표정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려는 사람은 민설아일 것이다.나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만약 민설아가 배후라는 증거를 여기서 얻을 수만 있다면 나와 배인호에게 모두 좋게 작용할 것이다.배인호는 민설아와 양육권을 경쟁하기 위해 이미 많은 증거를 모았을 것이다. 거기에 민설아가 살인을 교사했다는 증거까지 내가 찾아주면 거의 100퍼센트 승률이다.민설아가 아무리 빈이 배인호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도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양육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내가 빈이를 입양해도 된다.“노민준,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내 신분도 조사했을 거 아니야.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어. 알아?”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회유를 이어갔다.“어머니는 요양원에 있는데 조건도 별로 안 좋던데. 내가 최고급 요양원으로 옮겨서 남은 나날을 편안하게 보내게 해줄 수도 있어. 그리고 율이, 남은 치료 비용도 다 책임질게. 입학하면 학비도 전부 제공할 거야, 성인이 되어서 자립할 때까지.”내 제안에 노민준의 눈동자가 흔
“이 얘기도 더는 하지 마요. 나 이제 의사 안 해요.”이우범은 이 화제를 매우 꺼리는 것 같았다. 그는 차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데려다줄까요?”나는 차가 아직 교도소 근처에 있었기에 대답했다.“교도소 근처까지만 데려다줘요. 내 차로 돌아가면 돼요.”이우범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돌려 교도소 근처에 내가 차를 세운 곳으로 바래다줬다.요즘에 계속 서울에 있을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칙칙한 그의 눈을 보고 도로 삼켰다.이쪽 일은 계속 변호사에게 맡길 예정이었다. 민설아가 나를 기소한 사건이 곧 개정을 앞두고 있기에 서울에 계속 남아있기 힘들었다.집에 돌아오자 이미 늦은 밤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볼에 살며시 뽀뽀하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을 청했다.마음이 불안해서 그런지 그날 밤 나는 너무 어이없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와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이를 나눠 안았고 빈이는 뒤에서 도저처럼 보이는 하얀 강아지를 잡고 있었다. 우리는 공원에 봄나들이하러 나갔는데 주변에는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게 봄기운이 물씬했고 분위기가 너무 화목했다.로아와 승현이는 이미 한 살이 넘은 듯한 모습이었고 달콤하게 배인호를 아빠라고 불렀다.나는 두 아이가 상큼하게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일어나보니 도우미가 아이들은 일찍부터 바람 쐬러 나갔다고 했다.나는 뭔가 마음이 씁쓸했다. 꿈이 너무 생생했다. 왜 이런 꿈을 꾸게 된 건지 모르겠다. 아마 나도 아이들에게 아빠가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나 싶었다.오늘은 아빠가 퇴원하는 날이다. 엄마는 새로운 코슈메디컬 대체 방안을 찾았고 많은 사람이 반대했지만 그래도 계속 밀고 나갔다.엄마는 오늘 계약서를 체결하러 가는 날이라 아빠의 퇴원은 내가 동행하게 되었다.나는 운전해서 병원으로 향했고 퇴원 수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병원 문을 나서려는데 배인호의 전화를 받았다.오늘 빈이가 특수 병실에서 나오는 날이었다. 상황이 좋아 병실에서 나올 수 있는 수준을
나는 민설아가 빈이를 보러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빈이는 기대하고 있었다.아이들은 원래 그랬다. 자기가 좋아하고 신경 쓰는 사람이 다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건호와 김미애를 만나니 민설아도 자기를 보러 와주기를 기대했다. 그가 소위 “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 말이다.빈이는 아직 모르고 있다. 배인호와 민설아 중에 그와 피를 나눈 사람이 없다는 걸 말이다.하지만 아이의 세계는 단순했다. 아무리 민설아가 전에 학대하다시피 해도 같이 지낸 시간이 길다 보니 엄마라는 존재를 매우 의존하고 있었다.빈이는 가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문 쪽을 두리번거렸다. 이를 지켜보는 우리는 빈이의 생각을 단번에 알아차렸다.김미애가 빈이를 안으며 주의력을 다른 데로 돌리려 했다.“빈아, 아줌마가 너 놀이공원 데려가 준다고 했다면서? 그때 할아버지 할머니도 같이 가면 안 될까?”김미애의 말을 들은 빈이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요, 좋아요!”“그래, 그럼. 그 며칠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옆에 있어줄게.”김미애의 태도는 많이 바뀌었다. 최근에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병실 안은 화기애애했다. 배건호, 김미애, 배인호만 여기 있으면 될 것 같아 나는 조용히 병실에서 나왔다.아빠는 산책하러 가지 않고 아직 병원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어가 아빠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이제 집으로 가요.”아빠가 약간 의외라는 듯 말했다.“이렇게 빨리 왔어?”“네, 괜찮으면 된 거죠.”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배건호와 김미애가 빈이를 받아들이자 나도 기뻤다. 이렇게 되면 내가 없어도 배씨 집안에서 잘 보살펴줄 테니 말이다.아빠는 내 손을 다독이더니 말했다.“그래, 집에 가자.”최근 두 달간 아빠는 거의 병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국내와 외국의 병원을 전전하다가 끝내 집으로 돌아오자 조금 흥분되어 보였다. 손주들을 보자 안고 마구 뽀뽀했다.로아와 승현이는 이제 사람을 알아볼 나이가 되었기에 아빠를 보자 매우 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