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입맛이 별로 없었고 이우범도 마찬가지였다.우리 두 사람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스테이크로 배를 채웠다.이때 이우범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근심 섞인 눈빛이었지만 내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사라졌다.그는 몸을 일으켰다.“밖에 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우범이 나를 피해 전화를 받는 일을 드물었다. 아무리 민설아의 전화라도 그는 아주 태연한 태도로 내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받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나를 피했다.나는 나도 모르게 이우범이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지 추측했다.10분 정도 지나자 그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미안해요. 회사에서 온 전화예요.”분명 회사에서 온 전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얘기하든 이우범의 자유였기에 나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우범 씨 그러면 먼저 돌아가 봐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회사 일이 급한 것 같은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아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까 우범 씨도 걱정하지 말고 가 봐요.”“그래요. 하지만 조심해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죠?”아까 아빠도 말했었고 지금은 나도 이우범에게 빨리 돌아가 회사 일을 해결하라고 하니 그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나는 그가 민설아를 얘기하고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민설아는 아직 이쪽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랐기에 그녀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이우범이 돌아간다고 했으니 내가 대신 아빠에게 말할 테니 그에게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아빠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이우범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병원으로 돌아갔다.마침 간호사가 아빠에게 링거를 꽂고 있었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고 은은한 꽃향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침대 옆에 놓인 화분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흰 꽃잎에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꽃이 흰 꽃병에 꽂혀 있었다. 향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게 배인호와 상의하지 않은 걸까? 그는 지금 많은 일을 겪고 있었고 나 대신 외국에 가서 민설아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우리 집안일로 그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게다가 부모님은 내가 배인호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일찍 돌아온 건 급하게 결정한 거예요. 나도 인호 씨가 거기 올 줄은 몰랐죠.”나는 옆에 있는 아빠를 힐끗 보았다. 아빠는 이미 누구인지 짐작하신 듯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셨다.내가 몇 마디라도 더 하면 배인호인 것을 아빠가 아실 것 같아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아빠에게 말했다.“아빠, 세희한테서 온 전화에요. 세희도 지금 외국에 있는데 아빠 보러 오겠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이미 돌아왔을 줄은 생각도 못 했나 봐요.”“세희한테 그럴 필요 없다고 해. 회사 때문에 바쁠 텐데 나한테까지 신경 써주고. 그 마음이면 충분해.”아빠는 손을 저으셨다.실제로도 정아와 애들은 아빠를 보러 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지금 우리 넷 중 그 누구도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특히 정아는 아이들도 돌봐야 했고 찰거머리 같은 노성민까지 상대해야 했다.그리고 세희는 이모건을 완전히 끊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돌아간 이모건은 다시 세희를 찾아갔을 테도 세희도 피할 수 없었다.민정이는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다. 그녀와 정아는 3년 안에 두 아이를 낳겠다는 같은 목표를 갖고 있었다. 어쨌든 모두 키울 여유가 있었으니 걱정할 것은 없었다.“네, 알겠어요. 아빠 제가 가서 입원 절차 마무리하고 올게요. 아마 다시 검사도 받아야 할 거예요. 준비하고 계세요.”나는 대답한 뒤 입원 절차를 밟으러 갔다.그 사이 나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배인호에게 문자를 보내 이곳의 상황을 설명했다.하지만 배인호는 답장이 없었고 나도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다.입원 절차가 끝나니 엄마가 오셨다. 엄마는 다급하게 병실로 들어오시더니 아빠를 보자마자 눈시
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민설아 때문에 아빠는 이미 기분이 안 좋으셨다. 배인호까지 나타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나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배인호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투덜대진 않았다.“이제 얘기해도 괜찮은 거야?”“네, 괜찮아요. 병원에는 왜 온 거예요?”내가 물었다.“너한테 볼일이 있어서.”배인호는 싸늘한 얼굴로 대답하고서는 사진 몇 장을 꺼냈다.“네가 얘기한 딜런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야?”나는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 속 남자를 확인하니 내가 전에 본 딜런이라는 사람이 맞았다. 그때 자주 나를 찾아와서 내가 민설아를 찾아 주기를 바랐다. 민설아와 딜런이 마주친 이후로 딜런은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직감적으로 민설아가 이미 딜런을 만나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민설아가 해결해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사진을 배인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맞아요. 이 사람 찾았어요?”사진의 배경을 보니 외국인 것 같았다.“어, 이 사람이 전에 일했던 보육원도 다 조사해 봤어. 민설아와 아는 사이더라고.”배인호는 대답했다. 이때 병원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우리를 쳐다보았고 얘기를 나누기 조금 불편했다.나는 배인호의 말을 끊었다.“우리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눌래요?”이 일은 빈이가 앞으로 어디에 있을지가 달렸기에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그래, 밥 먹자. 난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배인호가 대답했다.밥을 못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의 턱에는 거뭇거뭇 수염 자국이 가득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모습이 한눈에 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아빠를 모시고 수술을 받으러 갔다 오는 동안 그도 쉬지 않고 다른 나라에 가서 내가 부탁한 일을 알아보고 있었다.이런 이유로 함께 식사하자는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메뉴판을 받아 배인호에게 건넸다.“뭐 먹을래요?”“네가 주문해.”배인호는 딱히 메뉴에 신경
“그래요. 그럼, 밥 먹은 뒤에 가서 푹 쉬어요.”배인호가 이렇게 우기니 나도 그의 말에 따라 대답했다.배인호의 얼굴은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책장 번지듯이 표정이 변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알아냈고 이제 그것들을 정리하면 된다.내가 말이 없자 배인호는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우범은 조그마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면 그렇게 고마워하고 신세를 갚으려고 하더니, 내 도움은 받고서는 아예 신경도 안 쓰네. 왜 내가 이우범보다 못해?”나는 젓가락으로 집었던 음식을 내려놓았다.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걸까?“지금 이거 내가 밥 사는 거잖아요?”나는 고개를 들어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젓가락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지금 이게 나한테 밥을 사주는 거라고? 넌 그저 아저씨가 날 보고 기분이 상하실까 봐 두려운 거잖아. 거기에 딜런의 일을 알고 싶어서 날 이 레스토랑으로 끌고 온 거면서 핑계 대기는.”배인호는 나의 마음을 분석한 뒤 간결하게 정리했다.아주 정곡을 찔렀지만 나는 인정하기가 조금 민망했다.그래서 나는 설명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인호 씨, 우리가 지금 어떤 사이인지 잘 알잖아요? 이우범은 적어도 우리 부모님께는 밉보이진 않았어요.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설마 인호 씨를 위해서 다시 우리 부모님과 맞서길 바라는 건가요?”순간 나는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말을 멈췄다. 내가 왜 ‘다시’라고 한 거지?전에 그 한 번 때문에 나는 생명을 잃을 뻔했고 막심한 후회를 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우리 부모님 마음속에서 배인호의 위치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그에 대한 나의 마음마저 부정한 것이었다.역시나 배인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나에게 간접적으로 무시를 당했다.“그래, 내가 이우범만큼 부모님에게 예쁨받지 못했다는 거 인정해. 그러는 넌 이번에도 이우범한테 딜런을 조사해 달라고 하지 그
나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배인호를 목적지까지 데려갔다.“도착했어요.”배인호가 지내는 곳에 도착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술을 마셔서 이렇게 빨리 잠에 든 걸까?나는 손을 뻗어 그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고른 숨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 채웠고 아주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인호 씨, 일어나 봐요. 들어가서 자야죠.”나는 또 입을 열었다. 비록 오후였지만 나는 다시 병원에 돌아가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가 자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배인호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만 또 깨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 뒤 다시 눈을 감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이때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아까 내비게이션을 킬 때 화면을 닫지 않아 문자가 보였다. 민설아에게서 온 문자였다.민설아: 빈이가 당신 아이라는 거 알았다면서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한테서 빈이를 뺏어갈 건가요? 인호 씨 나에게 빈이밖에 없어요. 빈이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인호 씨가 더 잘 알잖아요.”나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다.이제 보니 그동안 민설아는 계속 배인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많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자기의 존재감을 어필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문자와 전화로 배인호에게 연락했다.그녀는 나에게서 배인호는 이미 빈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테스트까지 했다.배인호는 계속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나는 배인호가 왜 이렇게 하는지 막연하게 추측했다. 나를 위해 이렇게 한 것일까? 나는 빈이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빈이가 다시 민설아의 옆으로 돌아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배인호가 빈이의 진짜 밝히지 않고 민설아가 계속 질척거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에게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에
나는 배인호의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아빠는 아직 병원에 한동안 더 입원해 있어야 했다. 나는 매일 왔다 갔다를 반복했지만 마음은 이미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아빠의 회복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이다.오히려 엄마는 연속 2, 3일 동안 보이지 않았고 코슈메디컬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특허 레시피가 전체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체품을 찾았으니 얼른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엄마, 레시피 제공한 사람 같이 만나러 가요.”엄마가 상대와 계약을 체결하려고 준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다.“너도?”엄마가 약간 놀라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꾸만 찝찝했다. 이 프로젝트를 민설아와 그렇게 오래 담판했는데도 민설아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민설아와의 협력을 거부하자 오히려 대체품이 나온 게 이상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엄마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러면 작은삼촌에게도 할말이 생긴다.엄마와 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길에 나는 곧 협력하게 될 사람의 자료를 자세히 읽어봤다. 외국계 한국인이었고 외국에서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국내 회사와 협력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전에 있었던 나라는 마침 민설아가 오랫동안 있었던 나라와 겹쳤다.이런 이상한 우연이 나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엄마, 일단 계약서는 급해하지 마요.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같아요.”일단 엄마에게 귀띔했다.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고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나는 엄마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회사의 기타 주주들도 부담을 팍팍 주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관련된 범위가 넓었기에 완성하지 못하면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주주들은 이 책임을 다 엄마에게 돌릴 게 뻔했다. 작은삼촌의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지금 말하긴 그래요.”나는 엄마를 힐끔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배인호는 이 일에 매우 신경 쓰는 것 같았다.“너 지금 어디야? 만나서 얘기해. 이 프로젝트는 너희 삼촌 회사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민설아가 파놓은 함정에 뛰어든다면 경제적인 손실 뿐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엄마는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배인호야? 내가 한번 얘기해 볼게.”“엄마...”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엄마에게 넘겼다.회의실에는 어느새 나와 엄마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나를 피할 필요가 없었기에 배인호와 바로 회사의 현황을 토론했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배인호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는 엄마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배인호에게 손을 벌린 일로 바로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셨다.나는 옆에서 조용히 엄마와 배인호의 대화를 들었다. 반 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엄마는 피곤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지영아, 너의 판단이 맞기를 바란다.”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나도 마음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제니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증거가 필요했다. 아니면 회사에서 엄마의 입지가 곤란해지게 된다.엄마는 고개를 젓더니 더는 말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증거를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서 회사 주주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저녁이 되어서야 엄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아빠는 며칠만 더 있으면 몸조리를 집에서 해도 된다. 이젠 몸에 큰 문제가 없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사모님, 아가씨,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도우미가 나와 엄마 손에 들린 가방을 받더니 공손하게 말했다.엄마와 나는 지금 다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몸을 생각해 조금이라도 억지로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
“네.”배인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예의를 차린답시고 “별말씀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우리 엄마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무상으로 도와준다고 하면 엄마는 정신적으로 더 큰 부담을 가질 것이다.하지만 이를 떠나 엄마는 지금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렇게 배인호를 배척하면서 나와 배인호가 엮이는 걸 반대했는데 지금 배인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 볼게요.”배인호는 더 앉아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엄마에게 인사했다.나도 따라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요. 문 앞까지만 같이 가줄게요.”배인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집에서 나오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우리 집 상황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요?”“응, 당연하지.”배인호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보상하겠다고. 가끔 나를 무시해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더라고.”배인호의 성격에 전생에 서란에게 비굴하게 잘 따랐던 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나는 이게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 씁쓸하게 여겨야 할지 몰랐다.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이다.이때 배인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일인 것 같아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됐어요. 여기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 일은 고마워요.”“응.”배인호는 심플하게 한마디 대꾸하더니 차에 올랐다.그의 차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걸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아직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지영아, 너도 엄마가 우스운 거지?”“엄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엄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의 기분이 이상한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