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층으로 내려와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민설아 때문에 아빠는 이미 기분이 안 좋으셨다. 배인호까지 나타난다면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나의 조심스러운 태도에 배인호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투덜대진 않았다.“이제 얘기해도 괜찮은 거야?”“네, 괜찮아요. 병원에는 왜 온 거예요?”내가 물었다.“너한테 볼일이 있어서.”배인호는 싸늘한 얼굴로 대답하고서는 사진 몇 장을 꺼냈다.“네가 얘기한 딜런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야?”나는 사진을 건네받았다. 사진 속 남자를 확인하니 내가 전에 본 딜런이라는 사람이 맞았다. 그때 자주 나를 찾아와서 내가 민설아를 찾아 주기를 바랐다. 민설아와 딜런이 마주친 이후로 딜런은 나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나는 직감적으로 민설아가 이미 딜런을 만나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민설아가 해결해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사진을 배인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맞아요. 이 사람 찾았어요?”사진의 배경을 보니 외국인 것 같았다.“어, 이 사람이 전에 일했던 보육원도 다 조사해 봤어. 민설아와 아는 사이더라고.”배인호는 대답했다. 이때 병원에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우리를 쳐다보았고 얘기를 나누기 조금 불편했다.나는 배인호의 말을 끊었다.“우리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나눌래요?”이 일은 빈이가 앞으로 어디에 있을지가 달렸기에 나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그래, 밥 먹자. 난 아직 아무것도 못 먹었어.”배인호가 대답했다.밥을 못 먹은 것도 문제지만 그의 턱에는 거뭇거뭇 수염 자국이 가득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한 모습이 한눈에 봐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아빠를 모시고 수술을 받으러 갔다 오는 동안 그도 쉬지 않고 다른 나라에 가서 내가 부탁한 일을 알아보고 있었다.이런 이유로 함께 식사하자는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우리는 근처 레스토랑의 프라이빗 룸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메뉴판을 받아 배인호에게 건넸다.“뭐 먹을래요?”“네가 주문해.”배인호는 딱히 메뉴에 신경
“그래요. 그럼, 밥 먹은 뒤에 가서 푹 쉬어요.”배인호가 이렇게 우기니 나도 그의 말에 따라 대답했다.배인호의 얼굴은 갑자기 차가워지더니 책장 번지듯이 표정이 변했다.나는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필요한 정보는 거의 다 알아냈고 이제 그것들을 정리하면 된다.내가 말이 없자 배인호는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우범은 조그마한 부탁이라도 들어주면 그렇게 고마워하고 신세를 갚으려고 하더니, 내 도움은 받고서는 아예 신경도 안 쓰네. 왜 내가 이우범보다 못해?”나는 젓가락으로 집었던 음식을 내려놓았다. 지금 질투하고 있는 걸까?“지금 이거 내가 밥 사는 거잖아요?”나는 고개를 들어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젓가락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지금 이게 나한테 밥을 사주는 거라고? 넌 그저 아저씨가 날 보고 기분이 상하실까 봐 두려운 거잖아. 거기에 딜런의 일을 알고 싶어서 날 이 레스토랑으로 끌고 온 거면서 핑계 대기는.”배인호는 나의 마음을 분석한 뒤 간결하게 정리했다.아주 정곡을 찔렀지만 나는 인정하기가 조금 민망했다.그래서 나는 설명하지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인호 씨, 우리가 지금 어떤 사이인지 잘 알잖아요? 이우범은 적어도 우리 부모님께는 밉보이진 않았어요. 나한테 뭘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설마 인호 씨를 위해서 다시 우리 부모님과 맞서길 바라는 건가요?”순간 나는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말을 멈췄다. 내가 왜 ‘다시’라고 한 거지?전에 그 한 번 때문에 나는 생명을 잃을 뻔했고 막심한 후회를 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우리 부모님 마음속에서 배인호의 위치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 그에 대한 나의 마음마저 부정한 것이었다.역시나 배인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고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나에게 간접적으로 무시를 당했다.“그래, 내가 이우범만큼 부모님에게 예쁨받지 못했다는 거 인정해. 그러는 넌 이번에도 이우범한테 딜런을 조사해 달라고 하지 그
나는 내비게이션을 따라 배인호를 목적지까지 데려갔다.“도착했어요.”배인호가 지내는 곳에 도착한 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불렀지만 그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술을 마셔서 이렇게 빨리 잠에 든 걸까?나는 손을 뻗어 그를 흔들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고른 숨소리만이 차 안을 가득 채웠고 아주 깊은 잠이 들어있었다.“인호 씨, 일어나 봐요. 들어가서 자야죠.”나는 또 입을 열었다. 비록 오후였지만 나는 다시 병원에 돌아가야 했다. 여기서 이렇게 그가 자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배인호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지만 또 깨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본 뒤 다시 눈을 감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뒤로는 내가 어떻게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이때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아까 내비게이션을 킬 때 화면을 닫지 않아 문자가 보였다. 민설아에게서 온 문자였다.민설아: 빈이가 당신 아이라는 거 알았다면서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나한테서 빈이를 뺏어갈 건가요? 인호 씨 나에게 빈이밖에 없어요. 빈이가 나한테 얼마나 소중한지 인호 씨가 더 잘 알잖아요.”나는 참지 못하고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다.이제 보니 그동안 민설아는 계속 배인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래도 많이 참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자기의 존재감을 어필하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문자와 전화로 배인호에게 연락했다.그녀는 나에게서 배인호는 이미 빈이가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테스트까지 했다.배인호는 계속 부정하지 않았지만 아주 간단하게 답했다. 나는 배인호가 왜 이렇게 하는지 막연하게 추측했다. 나를 위해 이렇게 한 것일까? 나는 빈이를 불쌍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빈이가 다시 민설아의 옆으로 돌아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배인호가 빈이의 진짜 밝히지 않고 민설아가 계속 질척거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은 그에게 좋은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에
나는 배인호의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아빠는 아직 병원에 한동안 더 입원해 있어야 했다. 나는 매일 왔다 갔다를 반복했지만 마음은 이미 많이 안정된 상태였다. 아빠의 회복 상태가 괜찮았기 때문이다.오히려 엄마는 연속 2, 3일 동안 보이지 않았고 코슈메디컬 프로젝트에 전념했다. 특허 레시피가 전체 프로젝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체품을 찾았으니 얼른 프로젝트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했다.“엄마, 레시피 제공한 사람 같이 만나러 가요.”엄마가 상대와 계약을 체결하려고 준비하는데 내가 먼저 말했다.“너도?”엄마가 약간 놀라며 말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꾸만 찝찝했다. 이 프로젝트를 민설아와 그렇게 오래 담판했는데도 민설아는 전혀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민설아와의 협력을 거부하자 오히려 대체품이 나온 게 이상했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래.”엄마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프로젝트만 끝나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러면 작은삼촌에게도 할말이 생긴다.엄마와 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길에 나는 곧 협력하게 될 사람의 자료를 자세히 읽어봤다. 외국계 한국인이었고 외국에서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국내 회사와 협력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전에 있었던 나라는 마침 민설아가 오랫동안 있었던 나라와 겹쳤다.이런 이상한 우연이 나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엄마, 일단 계약서는 급해하지 마요. 이 사람 문제 있는 거 같아요.”일단 엄마에게 귀띔했다.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고 걱정 가득한 표정이었다.나는 엄마가 심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작은삼촌뿐만 아니라 회사의 기타 주주들도 부담을 팍팍 주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관련된 범위가 넓었기에 완성하지 못하면 회사에 막대한 손실을 주게 된다. 그때가 되면 주주들은 이 책임을 다 엄마에게 돌릴 게 뻔했다. 작은삼촌의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지금 말하긴 그래요.”나는 엄마를 힐끔 쳐다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배인호는 이 일에 매우 신경 쓰는 것 같았다.“너 지금 어디야? 만나서 얘기해. 이 프로젝트는 너희 삼촌 회사의 미래가 달린 일이야.”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민설아가 파놓은 함정에 뛰어든다면 경제적인 손실 뿐만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엄마는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 눈치챈 것 같았다. 엄마는 손을 뻗어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배인호야? 내가 한번 얘기해 볼게.”“엄마...”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핸드폰을 엄마에게 넘겼다.회의실에는 어느새 나와 엄마만 남아 있었다. 엄마는 나를 피할 필요가 없었기에 배인호와 바로 회사의 현황을 토론했다.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배인호의 도움을 받으려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는 엄마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에 우리 집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배인호에게 손을 벌린 일로 바로 목덜미를 잡고 쓰러지셨다.나는 옆에서 조용히 엄마와 배인호의 대화를 들었다. 반 시간 남짓이 지나서야 엄마는 피곤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지영아, 너의 판단이 맞기를 바란다.”엄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엄마...”나도 마음이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제니에게 문제가 있는 건 확실하지만 증거가 필요했다. 아니면 회사에서 엄마의 입지가 곤란해지게 된다.엄마는 고개를 젓더니 더는 말하지 말라고 손짓했다. 나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증거를 찾아낼 방법을 생각해서 회사 주주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저녁이 되어서야 엄마와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아빠는 며칠만 더 있으면 몸조리를 집에서 해도 된다. 이젠 몸에 큰 문제가 없어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사모님, 아가씨,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도우미가 나와 엄마 손에 들린 가방을 받더니 공손하게 말했다.엄마와 나는 지금 다 입맛이 별로 없었지만 나는 몸을 생각해 조금이라도 억지로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
“네.”배인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예의를 차린답시고 “별말씀을요”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배인호는 우리 엄마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무상으로 도와준다고 하면 엄마는 정신적으로 더 큰 부담을 가질 것이다.하지만 이를 떠나 엄마는 지금 마음이 좋지 않을 것이다. 전에 그렇게 배인호를 배척하면서 나와 배인호가 엮이는 걸 반대했는데 지금 배인호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시간이 늦었으니 먼저 돌아가 볼게요.”배인호는 더 앉아 있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엄마에게 인사했다.나도 따라서 일어나며 말했다.“가요. 문 앞까지만 같이 가줄게요.”배인호는 눈썹을 추켜세웠다. 이렇게 좋은 대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집에서 나오고 나서야 나는 입을 열었다.“우리 집 상황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요?”“응, 당연하지.”배인호의 대답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내가 말했잖아. 너한테 보상하겠다고. 가끔 나를 무시해서 죽여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더라고.”배인호의 성격에 전생에 서란에게 비굴하게 잘 따랐던 것 외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마음 아파하는 건 나도 처음 봤다.나는 이게 영광으로 여겨야 할지 씁쓸하게 여겨야 할지 몰랐다. 타이밍이 어긋났기 때문이다.이때 배인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급한 일인 것 같아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됐어요. 여기까지 데려다줄게요. 오늘 일은 고마워요.”“응.”배인호는 심플하게 한마디 대꾸하더니 차에 올랐다.그의 차가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걸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엄마가 아직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엄마는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지영아, 너도 엄마가 우스운 거지?”“엄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엄마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의 기분이 이상한 걸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네요, 민설아 씨. 지금 당신이랑 이럴 시간 없으니까 이렇게 찾아오지 마요.”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민설아를 쳐다봤다. 사실 그녀는 서란 보다 더 총명했다. 배인호가 거리를 두고 밀어내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배인호의 다른 친구를 매수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나만 괴롭혔다.이우범도 민설아가 먼저 회유한 건 아닐 것이다. 아마 오래전부터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봐야 했다.민설아는 불같이 화를 냈다.“쓸데없는 생각이라고요? 허지영 씨, 참 매정하네요. 인호 씨를 뺏어가더니 빈이까지 뺏어가려는 거예요? 너무 잔인한 거 아니에요?”이 말은 맞았다. 빈이를 뺏어오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빈이의 친모도 아니고 빈이에게 그렇게 못되게 구는데 빈이가 계속 학대받게 남겨줄 수는 없었다.“아빠 휴식 방해하지 마요. 간호사 선생님!”나는 민설아와 더는 입씨름하기 싫어 옆에 있는 간호사를 불렀다.“이 사람 지금 환자의 휴식을 방해하고 있는데 경비 불러서 쫓아주세요.”간호사는 아빠는 알고 있었지만 민설아는 누군지 몰랐기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아가씨, 나가 주실래요? 환자가 휴식이 필요해서요. 협조 안 하시면 경비를 부르는 수밖에 없어요.”민설아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딱 봐도 마음에 내켜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여기는 병원이라 경비가 그녀를 내쫓으러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민설아는 나를 서늘하게 째려봤다. 그 눈빛에 나는 소름이 끼쳤다.‘내가 죽기를 바라는구나.’순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었다.민설아가 가고 나는 바로 변호사에게 연락했다. 전에는 계속 서울에 있으면서 노민준을 지켜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노민준은 이미 살인 미수를 인정받아 형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민설아를 토해내기 전까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이 변호사님, 전에 가보라고 했던 곳 있잖아요, 가봤나요?”나는 전화에 대고 변호사에게 물었다.“네, 허지영 씨, 전에 말한 곳은 이미 가봤습니다. 노민준은 나이 든 어머니와 이혼한 전처 사이에
노민준의 반응을 보니 나도 한 줄기 희망이 생긴 것 같았다. 하여 계속 아들 얘기를 이어갔다.“하지만 수술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입천장갈림증과 손가락 기형은 여러 번의 수술을 거쳐 조금씩 고쳐야 해요.”노민준은 바싹 바른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물었다.“얼마나 걸려요?”“그건 나도 잘 몰라요. 만약 더 좋은 병원에 가서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겠죠. 아이가 아직 어려서 모를 수 있지만 크면 외모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걸 느끼고 위축될 거예요. 여자 친구를 찾는 것도 영향을 받겠죠.”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계속 노민준의 심리적 방어를 무너트리려고 했다.만약 이런 일을 저지른 게 단순히 가족을 위해서라면 내가 한 말에 무조건 매우 초조해할 것이다.이미 교도소에 들어온 이상 집에 무슨 일이 생겨도 아예 도울 수 없으니 말이다.“어떻게 된 거지? 민...”노민준은 관건 인물을 말하려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표정이 매우 안 좋아 보였다.민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려는 사람은 민설아일 것이다.나는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만약 민설아가 배후라는 증거를 여기서 얻을 수만 있다면 나와 배인호에게 모두 좋게 작용할 것이다.배인호는 민설아와 양육권을 경쟁하기 위해 이미 많은 증거를 모았을 것이다. 거기에 민설아가 살인을 교사했다는 증거까지 내가 찾아주면 거의 100퍼센트 승률이다.민설아가 아무리 빈이 배인호의 친자가 아니라는 걸 인정해도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양육권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내가 빈이를 입양해도 된다.“노민준, 나를 죽이고 싶었다면 내 신분도 조사했을 거 아니야.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어. 알아?”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회유를 이어갔다.“어머니는 요양원에 있는데 조건도 별로 안 좋던데. 내가 최고급 요양원으로 옮겨서 남은 나날을 편안하게 보내게 해줄 수도 있어. 그리고 율이, 남은 치료 비용도 다 책임질게. 입학하면 학비도 전부 제공할 거야, 성인이 되어서 자립할 때까지.”내 제안에 노민준의 눈동자가 흔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