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영, 너 잘 준비하는 거야?”전화기 너머로 배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네, 자려고요. 왜요?”나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피로를 풀고 있었다.배인호는 잠시 3초간 조용히 있었다. 나는 불안감이 점점 강해지는 듯했다.역시, 내 예상대로 그는 나를 갈구기 시작했다.“너 나 굶겨 죽일 예정이야?”“내가 인호 씨를 굶겨 죽인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병원에서 밥 안 먹었어요?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병원에 음식은 입에 안 맞아. 밖에 음식도 먹고 싶지 않고. 위장병에는 식이요법이 가장 중요하지. 의사 선생님도 나보고 집밥을 먹는 게 위에도 가장 좋다고 했어.”배인호는 듣기에는 허약해 보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나는 그가 나한테 밥을 해달라고 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뭐가 먹고 싶으면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 간단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시킨다거나 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왜 곧 잠들 전 와이프에게 부탁을 하는 걸까?나는 냉정하게 그를 거절했다.“나 요리 잘 못 해서 집밥 같은 거 해줄 수 없어요. 아니면 박준 씨에게 부탁해 봐요.”박준도 아직 있을 건데 이럴 때나 그를 부려먹지 대체 언제 부려먹으려고 저럴까?어차피 노성민 쪽은 인젠 걱정할 필요 없으니, 이제는 배인호만 걱정하면 되겠네.“걔는 5성급 호텔 음식밖에 포장할 줄 몰라. 나 이미 질렸어. 나 집에서 끓인 죽 먹고 싶어. 쉽잖아.”배인호는 심지어 나에게 더 구체적으로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말했다.내 음식솜씨가 별로인 건 맞지만,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보고 죽을 끓여다 달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전제하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게다가 쌀죽 같은 건 쉽게 구할 수 있는 거라 나는 다시금 거절했다.“박준 씨보고 5성급 호텔로 가서 미쉐린 쉐프님한테 직접 끓여달라고 부탁해요. 난 안돼요.”내가 끝까지 거절하자 배인호는 그의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진짜 안 되는 거야? 내가 빨리
이것은 인삼의 문제가 아니라, 배인호가 나에게 큰 도움을 요청한 일이다.나는 얼른 대화 주제를 돌려 곧 병원을 옮기는 일에 대해 아빠한테 말해주었다. 아빠는 국내든 해외든 별다른 의견이 없으셨다. 처음에는 심지어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도 한 적 있으니 말이다.“나 배인호 씨한테 갔다 올게요.”나는 말을 마친 뒤 몸을 일으켜 배인호에게로 갈 준비를 했다. 그 모습에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어쨌든 어제 배인호 부모님이 한번 왔다 가셨기에, 아빠도 더는 뭐라고 할 수 없었다.나는 그렇게 별 탈 없이 배인호의 병실로 갔다. 병실에 도착해보니 예상외로 박준도 있었고, 한가득 풍성한 음식이 매혹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배인호는 한 입도 먹지 않았고, 내가 온 걸 본 뒤에야 박준은 뭔가를 깨달은 듯 내 손의 보온 도시락을 가리켰다. “어쩐지 내가 사 온 아침을 안 먹는다 했어. 인제 보니 아침 가져다줄 사람이 있어서네.”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나는 그 미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보온 도시락통만 내려놓았다.“먹어요.”“다행히 오셨네요. 계속 안 왔으면 인호 아마 혼자서 굶어 죽었을 거예요.”박준은 내가 가져간 도시락통을 열며, 안에 죽을 떠서 배인호에게 건네주었다.“냄새 좋네. 직접 했어?”배인호는 약간의 희망 섞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그 질문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답했다.“그럴 리가요. 집에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 거예요.”내 말에 그의 반짝이던 눈빛은 삽시간에 빛을 잃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숙여 배고픈 듯 죽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그렇게 내가 가져간 죽을 순식간에 다 먹어버리고, 박준이 사간 아침도 조금 곁들여 같이 먹었다.나는 임무완수를 했다고 생각해 보온 도시락을 들고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박준이 단번에 나를 잡았다.“가긴 어딜 가요? 나 오늘 서울로 가봐야 해요. 지영 씨 아버지도 이 병원에 입원했다면서요? 병원에 올 때마다 겸사겸사 이 친구도 좀 돌봐주세요...”박준은 배인호를 한번 힐끗 보며 명확한
새 병원에 도착한 뒤 나는 바로 입원 절차를 밟았다. 그리고 새로 다시 검사를 받아야 했다.나는 2, 3일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주일 뒤면 수술을 받을 수 있었는데 나는 걱정이 되어 마음속에 돌덩이가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다행히도 아빠의 상황이 나쁘지 않았고 암세포도 억제되어 진행이 늦어졌다.수술 날짜를 기다리던 중 해외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상대방은 유창한 영어로 아빠의 입원을 시켜줄 수 있다고 했다. 검사와 수술 스케줄도 앞당겨줄 수 있다는 말에 해외 병원에서의 치료는 이미 포기했던 나는 깜짝 놀랐다.“죄송하지만 무슨 이유로 우리 아버지의 순서를 앞당길 수 있다는 거죠?”나는 혼란스러워 물었다.“저희 쪽에 한 환자분의 수술이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입원과 수술을 앞당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영 씨 언제쯤 오실 수 있으신가요? 저희 쪽에서 의료진과 병실을 준비해 두겠습니다.”해외 병원의 태도는 아주 친절했다.나는 순간 멈칫했다. 금방 새 병원에서 안정되어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꿔야 할까?한참을 고민하다가 나는 가족들과 상의한 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자 아빠가 내게 물었다.“무슨 일이야? 외국에서 온 전화니?”“아빠, 전에 그 해외 병원에서 아빠 입원을 시켜주겠다고 하네요. 수술도 미리 잡아주고요.”나는 시간을 아끼려고 간단하게 설명했다.“그쪽에 가서 수술받는 거 어때요? 전에 알아봤는데 그쪽 병원의 의료 수준이 훨씬 더 높더라고요. 아빠 상황에는 더 좋을 것 같은데.”아빠는 내 말을 들으시더니 바로 거절하셨다.“나 안 가. 네가 전에 예약해도 반년 뒤에나 받을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수술할 수 있다는 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아. 난 안 갈 거야.”고집을 부리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나는 다급해졌다.“아빠 그쪽 병원에 한 환자분이 수술을 취소하셨대요. 그래서 앞당길 수 있는 거예요. 저희는 돈만 내면 되는 거고요.”나는 거짓말을 했
아빠와 내가 모두 자기를 무시하자 민설아도 더 질척거리지 않았고 가는 동안 조용했다.목적지가 같은지 민설아는 또 아빠가 입원하시게 될 병원에 나타났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비행기에서 왜 그렇게 조용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결국 목적지가 같았기에 그녀는 서두르지 않은 것이었다.“정말 우연이네요. 우리 같은 비행기에 목적지까지 같았네요.”병원에서 민설아는 내게 차분한 미소를 지었다.“난 친구 만나러 왔어요.”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고 그냥 아빠의 입원 절차를 와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국내에서 이미 검사를 받았지만 더 신중해야 했기에 검사들을 다시 받았다. 나는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민설아의 쓸데없는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그녀는 급해하지도 않고 옆에서 내가 끝나기를 지켜보더니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말투에 질투가 가득했다.“인호 씨가 대신 예약 문제를 해결해 준 거죠?”다행히 아빠가 옆에 안 계셨다. 나는 바로 그녀를 째려보았다.“민설아 씨, 당신 친구 만나러 온 거라고 하지 않았어요? 여기서 나한테 시간 낭비할 필요 있어요?”“왜요? 내 예상이 맞았어요?”민설아의 미소는 싸늘했다.“항상 인호 씨와 더 엮이고 싶지 않다는 지 뒤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건 사실 다 핑계였죠? 단지 고귀한 척하고 싶었을 뿐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한 인호 씨를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그래도 이혼을 아주 잘 활용한 건 인정해요.”“민설아 씨는 머릿속에 온통 사랑밖에 없나 봐요?”이곳이 해외 병원이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민망했을 것이다.민설아는 미련이 가득해 보였다.“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하지만 내 인생은 허지영 씨 때문에 망가졌어요. 난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허지영 씨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글쎄, 당신이 죽지 않았다고 예상하지 못한 내 탓을 해야 하는 걸까? 나도 민설아가 살아 있다는 걸 알았다면 배인호와의 결혼을 거절했을 것이다.
“저와 지영 씨는 친구예요. 친구 가족이면 제 가족이기도 하죠.”이우범의 대답에 나의 눈빛이 반짝였다.친구? 좋다. 이 관계는 내가 꿈꿔왔던 바로 그런 관계였다.이우범이 직접 한 말이라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심리적 부담감이 많이 줄어든 나와는 반대로 아빠는 조금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눈앞에서 자기 마음속 최고의 사윗감이 딸의 친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시며 많이 속상해하셨다.“아빠, 먼저 쉬세요. 저 우범 씨하고 나가서 밥 좀 먹고 올게요.”나는 이우범과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 아빠에게 말했다.아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빠의 눈동자에서 빛나던 불꽃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래, 가 봐.”나는 이우범을 데리고 병실을 나왔다. 그는 수술받는 아빠를 보러 멀리에서 와줬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마음에 나는 감동했다.나에게도 내 가족에게도 그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잘해주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을 때 이우범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조금 굳은 얼굴로 말했다.“먼저 밥 먹지 말고 병원에 남아서 아저씨를 돌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근처에 레스토랑 있어요. 지난번 한국에서 못 샀던 밥 이번에 살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여기 병원 간호사들이 와서 아빠 돌봐줄 거고.”이우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더니 병실 문 쪽으로 데려갔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나는 그가 왜 이러는지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우범 씨, 왜 이러는 거예요? 설명 좀 해줄래요?”예전 같았으면 밥을 사겠다는 내 말에 이우범은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비행기를 타고 왔는데 한 끼도 먹고 싶지 않다는 그가 많이 이상했다.하지만 민설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떠오르니 나는 은연중에 뭔가가 떠올랐다. 이우범이 바로 나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그를 쳐다보았다.이우범이 입술을 움찔거리며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는데 갑자기 민설아의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우범 선배, 왜 여기 있어요?”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내일이에요. 왜요?”내가 물었다.“너 혼자서 아저씨 모시고 간 거야?”배인호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서는 계속 물었다.나는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네, 나 혼자에요.”이우범은 오늘 막 왔고 순간 나는 그가 떠오르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나 혼자서 아빠를 챙겼기 때문이다.“허허, 그래?”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배인호는 비웃음을 날렸다. 나를 믿지 않는 듯 해 오늘 이우범이 왔다는 말을 바로 하려고 했지만 배인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이우범 지금 거기 있지 않아?”“인호 씨가 어떻게 알았어요?”나는 이 일을 아직 정아와 애들에게도 하지 않았기에 조금 놀랐다.하지만 다음 순간 방금 다녀간 민설아가 떠올랐다. 분명 그녀가 배인호에게 알려줬을 것이다.이런 식으로 나와 이우범이 얽히는 것을 배인호는 가장 걱정했다. 그가 나와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이런 일에서는 양보하지 않고 내게 화를 냈다.“맞아요. 오늘 왔어요.”나는 배인호 말투에서 불쾌함과 질투를 느꼈지만 더 해명하지 않았다.“그럼, 너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아?”배인호의 목소리를 들으니 점점 더 화를 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내가 어떻게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까?그가 며칠 전 퇴원한 뒤 서울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병원에 남아 빈이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그는 말없이 짜증을 내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조금 불안했지만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을 수가 없어 다시 전화를 걸지 않았다.내가 나오니 이우범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아빠는 이우범이 친구를 만나러 갔다고 하셨다.“지영아, 아빠가 네 일에 간섭하려는 게 아니라 우범이는 정말 어디 흠잡을 데 없다는...”아빠는 편찮으시고 난 뒤에 더 잔소리가 많아지셨다.“아빠, 전에 이우범이 어떻게 했는지 아시잖아요?”나는 아빠의 말을 끊었다.“전 마음을 터놓지 않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아요.”아빠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이우범이 어떤 짓을 했는지 나는 부모님께 모
나는 정아와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었다.배인호가 현재 나를 대하는 방식은 확실히 이전과 많이 다르지만 너무 늦었고 모든 것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누구 전화에요?”이우범은 어느 순간 내 뒤에 서서 물었다.나는 고개를 돌리며 핸드폰을 집어넣고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정아에요. 아빠 수술 어떻게 됐는지 묻더라고요.”“언제 한국으로 돌아갈 거예요?”이우범은 갑자기 말을 바꾸며 이 일을 물었다. 그는 꼭 내가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것 같았다.아빠는 수술을 받으신 뒤 몸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잠시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상황 봐서요. 왜요? 우범 씨 바쁘면 먼저 돌아가도 돼요.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나는 이 상황을 틈타 이우범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가길 바랐다. 여기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빠는 더 마음이 흔들려 내가 다시 이우범과 잘 되길 바랄 테니 말이다.이우범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그 반응에 나는 불안해졌다. 만약 이우범이 독심술을 할 수 있다면 그는 내 마음속에 떠오른 ‘어서 돌아가’라는 한 마디를 알아챘을 것이다.실제로 이우범과 배인호를 비교하면 이우범이 더 상대하기에 어려웠다. 배인호가 지금 여기 나타난다면 아빠는 망설임 없이 그를 쫓아낸 뒤 나에게 배인호와 죽을 때까지 다시 엮이지 말라고 경고할 것 같았다.이우범은 그와 달랐다. 그는 우리 부모님 마음속의 원픽이었다. 전에 부모님이 내게 다시는 감정사에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더라도 이우범이 조금만 더 존재감을 어필하면 부모님은 또 흔들렸다.“지영 씨하고 아저씨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나도 함께 있을게요.”뜻밖에도 이우범은 이런 말을 하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나는 그를 또 어떤 이유로 쫓아낼 수 있을까?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이건 긴
나는 사실 입맛이 별로 없었고 이우범도 마찬가지였다.우리 두 사람은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스테이크로 배를 채웠다.이때 이우범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근심 섞인 눈빛이었지만 내가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사라졌다.그는 몸을 일으켰다.“밖에 가서 전화 좀 받고 올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스토랑 밖으로 나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이우범이 나를 피해 전화를 받는 일을 드물었다. 아무리 민설아의 전화라도 그는 아주 태연한 태도로 내가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받았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나를 피했다.나는 나도 모르게 이우범이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지 추측했다.10분 정도 지나자 그는 미안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왔다.“미안해요. 회사에서 온 전화예요.”분명 회사에서 온 전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얘기하든 이우범의 자유였기에 나는 굳이 더 묻지 않았다.“우범 씨 그러면 먼저 돌아가 봐요.”나는 부드럽게 말했다.“회사 일이 급한 것 같은데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아요. 아빠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났으니까 우범 씨도 걱정하지 말고 가 봐요.”“그래요. 하지만 조심해요.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죠?”아까 아빠도 말했었고 지금은 나도 이우범에게 빨리 돌아가 회사 일을 해결하라고 하니 그는 더 고집부리지 않았다.나는 그가 민설아를 얘기하고 있다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다.민설아는 아직 이쪽에 있었다. 그 누구도 그녀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몰랐기에 그녀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이우범이 돌아간다고 했으니 내가 대신 아빠에게 말할 테니 그에게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아빠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이우범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병원으로 돌아갔다.마침 간호사가 아빠에게 링거를 꽂고 있었다. 병실은 아주 조용했고 은은한 꽃향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나는 침대 옆에 놓인 화분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흰 꽃잎에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꽃이 흰 꽃병에 꽂혀 있었다. 향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