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이 되자 연도진은 김시연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이동했고, 온하랑은 부시아를 보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다.차 안에서 김시연은 조수석에 앉아 새로 산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예뻐?”연도진이 한 번 쓱 보더니 말했다.“응.”가늘고 예쁜 김시연의 손목에 어제 끈에 묶인 탓에 생긴 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밥 어디서 먹을 거야? 어제 구해준 게 고마워서 오늘은 내가 쏠게. 아무 데나 골라 봐.”김시연이 말했다.“어디든 다 좋아.”연도진은 어제 사건을 겪고도 아무렇지 않은 김시연을 보며 웃었다.“어제 봤던 세 집 중에 뭐가 제일 마음에 들어?”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김시연이 진지하게 평가했다.“생각해봐, 집은 우리 서로 다 방해 안 되게 충분히 커야 하고, 여가생활을 위한 다른 방도 필요해. 실버 플라워는 시내에 있어서 좋긴 하지만 내가 봤을 땐 조금 좁은 것 같고, 푸르지오는 우리 집이랑 너무 멀어. 집 구조도 생각보다 별로고. 인테리어를 내 마음대로 하려면 돈이 꽤 들긴 하겠지만, 가성비는 괜찮다고 봐. 그린 빌리지는...”“어떤데?”“다 좋은데 가성비가 별로야. 우리 둘만 사는데...”이렇게 말하는 김시연의 말투에서는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외부 요소 같은 건 따지지 말고 네가 제일 맘에 드는 게 뭔데?”“그린 빌리지.”김시연은 생각도 거치지 않고 말했다.“그래, 점심 먹고 바로 부동산 찾아가서 계약서 쓰자.”김시연은 연도진의 말에 순간적으로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연도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물었다.“뭐라고?”환청을 들은 건 아니겠지?“그러니까, 점심 먹고 부동산 가서 바로 계약하자고.”연도진은 고개를 돌려 김시연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무슨 계약?”“매매 계약서.”“그 집 사려고?”“그린 빌리지. 좋다고 하지 않았어?”“...”김시연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내려갈 줄 몰랐다.“연도진, 방금 그 말 진짜야?”“물론이지.”김시연은 연도진의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 내어 웃음을
“걱정하지 마, 충분하니까. 네 돈 안 쓸 거야.”“너한테 지금 돈이 그렇게 많다고?”김시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반짝였다.연도진은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학비마저 지원받아야 했던 가난한 아이였다. 7년 만에 할인이나 서정훈의 지원도 마다하고 이 집을 사기 위해서는 연도진에게 적어도 16억은 있어야 했다.벤처 투자만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건가?“뭐, 어느 정도 간신히? 집 사고 나면 난 굶어야지.”“괜찮아. 내가 너한테 월세 낼게!”김시연이 대범하게 얘기했다.잠시 후, 상담원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와 매매 계약서와 볼펜을 함께 내밀었다.“연도진 님, 김시연 님, 저희의 매매 계약서입니다. 사인 해주시면 됩니다.”연도진은 볼펜을 건네받아 김시연의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네가 사인해.”김시연이 잠시 멍을 때리다가 손에 쥐어진 볼펜을 보더니 다시 연도진을 바라보며 자신의 코앞을 가리켰다.“내가...?”“응.”연도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집문서에도 네 이름 적을 거야.”그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상담원이 부러운 눈길로 김시연을 바라보았다.잘생기고 돈도 많은 데다가 이렇게 통도 큰 남자친구가 왜 본인 인생에는 안 나타날까?김시연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입술을 달싹이다가 펜대를 만지작거리며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이래도 되나? 그럼 내가 미안해지는데.”“너 주는 거니까, 사인만 해.”“알겠어.”김시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하며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두어 번 정도 펜을 휘갈겨 자신의 사인을 새겼다.헤헤... 헤헤헤헤...마음속의 어린아이는 이미 바닥에 누워 배를 부여잡은 채 깔깔 웃고 있었다. 겉으로는 최대한 점잖게 행동하며 펜을 내려놓고 귀 옆머리를 정리하고는 연도진을 바라보았다.“됐어, 이제 무르기 없기다.”“안 그래.”연도진은 김시연이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상담원이 포스기를 들고 왔다.연도진은 지갑에서
이 별장만 보면 다음 달 결혼이 무슨 말인가. 내일이라고 해도 김시연은 좋다고 받아들일 것이다.어차피 가짜 결혼이니까.별장은 두 사람의 독립적인 공간이 충분히 있을 정도로 컸다. 그 덕분에 서로에게 방해가 될 일도 없었으니 김시연은 연도진을 없는 존재로 여기고 지낼 수도 있어 보였다.“그래.”별장은 작은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지금은 아직 잔디만 깔려있었다.남쪽 정원에서 바라보면 큰 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물안개가 얼굴에 와닿으니 더위가 조금 가시고 시원해졌다. 소음은 줄어들고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공기도 시내보다는 훨씬 맑은 것 같았다.김시연은 정원 구석을 가리키더니 눈을 반짝이며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여긴 장미 같은 걸 좀 심고, 포도나무 덩굴도 만들고 싶어. 내년 여름엔 여기서 시원한 바람도 맞으면서 꽃이랑 강경치도 보고, 그러면서 샤부샤부까지 먹으면 진짜 행복하겠다.”“맞아.”연도진이 웃으며 김시연의 말에 대답해주었다.“너 좋을 대로 다 해.”김시연은 연도진을 한 번 쳐다보며 웃었다.“가자, 안에 좀 더 살펴보자.”집에 돌아오자마자 김시연은 이 좋은 소식을 바로 온하랑에게 공유했다.“온하랑도 연도진이 이 정도로 대범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보아하니, 연도진이 외국에서 돈 꽤 많이 벌었나 봐.”연도진이 나중에 이 집을 되찾으려 하든 말든 일단 지금 연도진의 행보는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도진이 능력 있잖아.”김시연이 온하랑의 말에 동의하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그런 말을 하는 김시연은 어딘가 연도진 대신 뿌듯해졌다.“고등학생 때 우리 반 반장이었는데 성적도 좋았고 반 관리도 잘했었어. 뒷자리 문제아들까지 다 따랐으니까 말이야.”안 그랬으면 김시연 같은 여자가 어떻게 먼저 연도진에게 대시했겠나?“오.”온하랑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김시연의 말에 리액션을 해주었다.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의 흥미로운 기색에 김시연은 어색하게 웃다가 귀 끝을 붉혔다.“... 그냥 막 해본 말이
그날 저녁, 김시연은 온하랑과 함께 근사한 저녁 식사를 했다.김시연은 너무 기쁜 나머지 과음을 한 탓에 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져 자유를 만끽했다.그러다가 김시연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에서 잠들었다.“응?”김시연은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집 도착했어? 하랑아, 왜 안 내려?”“내가 어떻게 내려?”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김시연이 고개를 숙이자 온하랑에게 문어처럼 매달려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녀는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온하랑에게서 떨어졌다.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김시연은 자신의 이마를 문지르며 물었다.“나 뭐 이상한 짓 안 했지?”“안 했어.”“그렇다면 다행이네...”김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연도진한테 전화를 걸었을 뿐.”“...”김시연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란 탓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서둘러 온하랑에게 물어보았다.“나 별말 안 했지?”“안 했어.”김시연은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뒤로 온하랑의 말이 들려왔다.“그냥 노래 몇 곡 불러주던데.”“무슨 노래 불렀는데?”김시연이 마음을 졸이며 물었다.“아주 나이스.”“... 또 있어?”“럭키 걸.”김시연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또... 또 있어?”“빙고.”“... 더 얘기하지 마.”김시연은 이마를 짚더니 할머니라도 된 듯 그대로 쭈그려 앉았다.“왜 나 안 말렸어?”“난 말렸지... 근데 넌 굳이 다시 전화를 걸더라. 전화 걸어선 내가 너 전화도 못 하게 괴롭힌다고 연도진 씨한테 고자질이나 하고.”“난 아무래도 지구를 떠나야겠다. 안녕.”김시연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통화 기록의 첫 번째를 확인해보았다.연락처: 연도진, 통화 시간: 37분.김시연은 침묵을 지키며 자신이 이 37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내려 애썼다.연도진이 혹시라도 자신을 얕잡아 보지는 않았을
김시연은 태생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그날, 연도진이 얘기했던 “컸다”라는 말에 어찌 된 영문인지 김시연은 자꾸 버섯의 크기가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순전히 김시연의 호기심이었다.절대 다른 의도는 없었다.이런 면에서 그녀는 늘 대범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인간 생명의 기원을 탐색하고 싶어 했던 쪽도 항상 김시연 쪽이었다.하지만 연도진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다니...이러면 마치 김시연이 줄곧 연도진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정말이지 술이 원수였다!김시연은 찬물로 세수를 하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씻고 난 후, 김시연은 집 계약서를 꺼내 사진을 찍어 김연자에게 카카오톡으로 전송했다.김연자는 김시연이 혼자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는 생각에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시연아, 갑자기 집을 샀다니? 게다가 그린 빌리지? 대출을 도대체 얼마나 받은 거야? 클래식캐슬 그 집은 어떻게 할 건데?”김시연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엄마, 이건 제가 산 게 아니라 누가 저한테 사준 거예요.”김연자가 몇 초 정도 침묵을 유지하다가 말했다.“시연아, 너 연도진이랑은 다음 달에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니?”“맞아요.”“근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주는 집을 그렇게 덥석 받아?”“... 맞아요, 제가 어떻게 다른 사람이 주는 집을 그렇게 덥석 받겠어요?”김연자가 순간 멈칫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그 별장 설마, 도진이가 선물해준 거니?”“네!”김시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전액 결제로?”“걔한테 무슨 돈이 있어서?”“어쨌든 훔친 것도, 누구 것 뺏은 것도 아니잖아요. 엄마, 딸이 돈 잘 버는 사위 구해왔는데 기쁘지도 않으세요?”“당연히 기쁘지. 도진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 해줬니? 지금 이렇게 별장까지 선물해주고, 게다가 앞으로는 회사 일도 부탁해야 하잖니. 너도 도진이 잘 챙겨줘야 해.”“네네네, 엄마는 벌써 도진이 편부터 드시네요!”“얘 좀 봐.”김연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안 보인다니?뭐가 안 보인다는 거지?김시연이 의아하다는 듯 연도진을 한 번 바라보다가 물었다.“뭐가?”연도진은 김시연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그는 두 손으로 핸들을 잡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마치 조금 전 연도진의 말이 환청이라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김시연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고는 트위터를 대충 훑어보다가 문득 연도진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답답하네.김시연은 연도진을 흘끔 쳐다보고는 시선을 아래로 축 내렸다.그 순간, 연도진은 그런 김시연의 눈빛을 눈치챈 듯 갑자기 입을 열었다.“그렇게 궁금하면 오늘 밤 직접 한 번 볼래?”“난 겁쟁이 버섯 따위엔 관심 없거든.”식물 vs 좀비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인 겁쟁이 버섯은 날씬하고 큰 키를 갖고 있지만 좀비를 만나는 순간 겁을 먹고 몸을 움츠려 버린다.“그럼 폭탄 버섯은?”“콜록콜록...”김시연의 머릿속에 감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 장면은 미처 눈 뜨고 볼 용기조차 없었다. 김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연도진을 노려보았다.“궁금하면 솔직하게 얘기해.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연도진이 김시연을 한 번 쳐다보고는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난 그냥 네 호기심을 채워주려는 것뿐이니까.”“흥, 고작 너 같은 그 작은 고깃덩어리가 볼 게 뭐 있다고.”김시연이 입술을 삐죽이며 화제를 돌렸다.“야, 너 혹시 외국에 있을 때 태권도라도 배웠어? 그날에 어떻게 그렇게 빨리 그 세 놈을 처리해버린 거야?”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연도진은 마르고 얇은 남학생이었다.지금도 물론 마른 편이긴 했지만 핸들을 잡은 팔 위의 셔츠 주름이 어깨 근육과 팔의 잔 근육을 보여주었다. 딱 봐도 속이 꽉 찬, 아주 탄탄한 근육이었다.“응.”연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대화 주제 돌리는 스킬이 진짜 서툴구나, 너는. 분명 관심 있으면서. 왜? 못 보겠어?”절대 넘어가선 안 된다.“누가 못 본대? 내가 안 보고 싶은
“너 이 녀석...”“시연아, 너 아버님께 자꾸 왜 그런 식으로 얘길 하는 거야? 게다가 서 의원님께선 이미 희수 씨한테 결혼 상대 찍어주셨고, 희수 씨가 하루빨리 나한테서 마음을 접길 바라고 계시는 중이야. 설령 의원님께서 희수 씨 편에 서신다고 해도 아버님께서 그렇게 하실 리가 없잖아. 그렇죠, 아버님?”연도진이 말했다.김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도진이 말이 맞아. 아빠가 어떻게 너희를 갈라놓을 생각을 하겠니?”그 말을 하면서도 김웅은 진지하게 생각에 잠겼다.“... 다음 달에 결혼이라니, 시간은 조금 촉박하겠지만 안 될 건 없지. 희수 씨한테는 언제라고 얘기했어? 어느 호텔에서 할지는?”연도진은 김시연을 한 번 보더니 최대한 날짜를 앞당겨 말했다.“10월 14일, 글로벌 빌리언 캐슬 호텔입니다.”“그렇게 가까운 날짜에? 호텔 이미 예약 다 끝났을 텐데...”“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김웅은 이미 연도진의 능력을 믿고 있었던 덕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그 집 사느라 돈 많이 썼을 텐데, 혹시라도 돈이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 아저씨한테 얘기하려무나, 사양하지 말고.”예식장 임대료, 연회, 웨딩드레스, 웨딩사진 등등을 다 합쳐보면 결혼식 비용도 절대 적지 않았다.“걱정하지 마세요, 아저씨. 돈은 저한테 있어요. 필요할 때는 꼭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날짜를 정하고 나서 김웅과 김연자는 간단히 연도진과 함께 결혼식 준비에 대해 상의하기 시작했다.김 씨 본가에서 나온 연도진이 입을 열었다.“이제 웨딩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네가 좋아하는 스튜디오라도 있어?”“없어.”김시연은 그쪽 분야에 전혀 알아본 적도 없었던 탓에 고개를 가로저었다.문득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우리끼리 옷 대여해서 하랑이한테 찍어달라고 하면 되지 않아? 우리가 하랑이의 고객이 되면 되잖아.”“안 될 건 없지. 네가 하랑 씨 실력을 믿는다면야.”“나야 당연히 믿지.”두 사람의 외모 자체가 나쁘지 않은 덕에 다른 일반 사
그녀는 이미 온하랑의 다음 스케줄이 글피로 예정된 덕분에 내일과 모레에는 시간이 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비서는 속으로 수많은 물음표를 띄웠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답장을 보냈다.“죄송합니다만, 온하랑 작가님께서는 웨딩 촬영은 받지 않으십니다.”“그래도 말은 한 번 해주세요. 제가 온하랑 작가님 스타일을 너무 좋아해서 그래요! 부탁드립니다!”“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여쭤보도록 할게요. 하지만 작가님께선 내일이랑 모레만 시간이 비셔서요. 그 후부터는 한 주일 스케줄 꽉 차 있거든요.”“일주일 뒤면 너무 늦어요. 내일이나 모레도 괜찮습니다!”몇 분 정도 지나자 비서에게서 답장이 왔다.“죄송합니다. 작가님께서 요즘 몸 상태가 안 좋으시다고 쉬고 싶다고 하셔서요. 아쉽지만 거절하셨습니다.”사실 온하랑이 웨딩 촬영을 거절했던 이유가 힘든 촬영에 비해 보수가 너무 낮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런 그녀의 뜻을 비서가 고객에게 완곡하게 전달하는 중이었다.김시연은 온하랑이 임신 중이라는 것을 감안해 역시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서에게 말했다.“이틀 동안 최대한 빨리 찍도록 할게요! 그리고 저는 작가님 스타일 자체를 좋아하는 거라 딱히 까다롭게도 안 굴 겁니다. 금방 끝날 거예요! 보수는 두 배로 지급해드릴게요! 저는 진심으로 작가님 작품을 좋아하고 있는 팬입니다!”몇 분 정도가 더 지나자 비서에게서 답장이 왔다.“작가님께서 동의하셨어요. 내일 아침 8시까지 스튜디오로 오셔서 계약서 쓰기고 자세한 거 얘기해주신 다음에 큰 문제 없으시면 바로 촬영 가능하십니다. 하지만 의상은 직접 준비해오셔야 합니다.”“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기뻐요!”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시연을 발견한 연도진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신났어?”“하랑이가 우리 웨딩 촬영을 수락해줬어. 내일 아침에 바로 스튜디오로 가면 된대.”“그래.”연도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침구 세트를 가리켰다.“이 색깔은 어떤 것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