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부승민은 아이가 임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부시아가 두 눈을 깜빡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숙모 임신했는데요!”“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부승민은 몸을 낮춰 부시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것 같은 희망이 끓어올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현승 삼촌 결혼하던 날에요. 숙모가 유치원에 저 데리러 왔을 때 말해줬었어요. 저녁에 삼촌은 집에 안 들어왔었고 그다음 날에 숙모가 집을 나갔어요. 그래서 삼촌한테는 얘기 안 했던 것 같은데요.”부승민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속으로는 이미 날뛰고 있었다.온하랑이 임신을 했다!이제 그들 사이에도 아이가 생겼다!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아이였다!감히 기대해본 적도 없는 좋은 소식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부승민은 잔뜩 흥분한 마음을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그대로 곧장 온하랑의 집으로 다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 부승민을 부시아가 옆에서 말렸다.“삼촌, 일단 진정해봐요. 아무리 그래도 숙모는 삼촌한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부승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야?”“할머니랑 그 이상한 아줌마가 숙모랑 삼촌이 재결합 하는 거 두고만 보진 않을 거라고요. 지금 숙모 데리고 가봤자 그 두 사람이 계속 숙모 괴롭히고 귀찮게 할 거예요. 그럼 숙모 배 속에 있는 아기한테도 안 좋아요. 숙모랑 재결합하고 싶으면 먼저 할머니랑 이상한 아줌마부터 처리해야 할걸요.”부시아가 또박또박 말했다.그 이상한 아줌마가 여기 남아 있는 이상, 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만 할 게 뻔했다.부승민은 부시아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의 자신은 지나친 기쁨에 뇌를 지배당한 나머지 너무 충동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온하랑의 몸으로 다시 임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이번 태교에는 무조건 신경을 써야 했다.만약 이번 아기까지 잃는다면 온하랑이 입는 마음의 상처가 상당할 것이
곁눈질로 봤을 때는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를 뿐이었다.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김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돌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재수가 없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보질 않는 건데.“그거 무슨 표정이야?”연도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거들떠볼 가치도 없고 귀찮아서 좀 비웃어봤어.”김시연의 입에서 정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김시연의 다른 한쪽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매번 밖에 나와서 일을 할 때면 연도진이 김시연을 찾아오는 걸 볼 수 있었다.그런다고 딱히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김시연과 입씨름만 하며 서로를 공격할 뿐이었다.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가 매니저도 김시연이 지금 천천히 끓는 물 속에 갇힌 개구리가 되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네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와본 거야.”“...”김시연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네가 그렇게 우리 아빠 말을 잘 들어? 아주 그냥 아빠라고 부르지 그래?”연도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장인어른이라면 몰라도.”“꺼져.”김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괜히 내 덕 보려고 덤비지 말고, 이럴 시간에 네 여자친구나 찾아가시지.”연도진의 여자친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김시연은 순간적으로 이엘리아가 부승민과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연도진은 과연 알고 있을까?설마 바람 핀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정말 이럴 것이라 생각하니 김시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나한테 여자친구가 어디 있다고... 왜 웃어?”“아무것도 아니야.”입을 꼭 틀어막은 김시연의 눈꼬리가 휘었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연도진이 미간을 가볍게 좁히더니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이 근처
연도진은 듣는 순간, 온하랑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하지만 연도진은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날에 바로 사람을 시켜 CCTV를 확인했고 해당 부분만 잘라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다.김시연의 질문에 연도진은 바로 그 영상을 보내주었다.“별로 중요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알아서 거절했어.”김시연은 연도진이 보내준 영상을 보더니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연도진 씨 해외에서 인기 많으신가 봐?”“그래도 난 너 하나만 원하잖아.”“가져도 돼요? 김시연 씨?”연도진이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한 손을 의자 등받이에 올리고는 몸을 김시연에게로 기울였다. 연도진의 상체가 점점 김시연에게 가까워지며 옅은 향수 냄새가 탐욕적인 수컷의 향기가 어우러져 서서히 김시연을 감쌌다.연도진은 금색 테두리로 된 안경을 벗으며 온화한 얼굴을 드러냈다. 표정은 웃는 듯 안 웃는 듯했지만,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 있는 모습이 꼭 전형적인 겉모습만 멀쩡한 쓰레기 같았다.김시연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간 듯했다.“김시연 씨?”눈앞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커지며 온기가 느껴지기 시작하자 김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얼굴을 뒤로 빼며 놀란 가슴을 두드렸다.“깜짝이야... 가자, 뭐 먹으러.”김시연은 몸을 일으켜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김시연의 뒷모습은 늑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당황스러워 보였고 걸음걸이 하나하나도 불안해 보였다.연도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몸을 일으켜 빠른 걸음으로 김시연을 뒤쫓아갔다.맨 뒷줄에서 마스크를 낀 한 여인의 눈길이 두 사람에게 향했다. 두 사람이 선후로 자리를 뜨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스크를 낀 그 여인도 몸을 일으켜 조용히 그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연도진이 두세 걸음 만에 김시연을 따라잡으며 말했다.“내 차 지금 지하 2층에 있어. 엘리베이터는 이쪽이고.”연도진이 김시연과 함께 걸으며 물었다.“아까는 왜 웃었어?”“아, 아까워라. 난 또 네가 네 여친 바람피우는 것도 모르고 있는 줄 알았는데.”김시연이 한숨을
“연도진!!”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두 사람이 선후로 올라타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코너 쪽에는 마스크를 쓴 여자가 서있었다. 조금 전, 자신이 목격했던 장면이 떠오른 그녀는 주먹을 꽉 쥔 채 원망만 잔뜩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만약 온하랑도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그 마스크를 쓰고 있는 여인의 정체가 앨리스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앨리스가 강남에 온 이유는 오직 연도진을 위해서였다. 이틀 전, 연도진이 C 시에 도착했을 때, 앨리스도 같은 곳에 도착했다.이엘리아가 연도진의 비서를 통해 연도진이 묵는 호텔을 알아내 앨리스에게 전해주었다.앨리스는 정말 연도진이 C시로 온 이유가 단순히 비즈니스 때문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눈치챘다.연도진은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다.게다가 얼마나 한가한 건지 C 시의 로컬 맛집, 먹자골목, 관광지와 같은 것들을 여기저기서 알아보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출장보다는 오히려 여행에 더 가까워 보였다.오늘에서야 조금 전 그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앨리스는 모든 걸 알게 되었다.카이사르가 좋아하던 사람은 페이가 아니라 페이의 친구인 김시연이었다!C 시까지 찾아온 것도 출장이 아니라 김시연 때문에 온 것이었다!사전에 C 시의 유명 관광지며 맛집이며 다 알아봤던 이유도 오늘 김시연을 데리고 나오기 위한 준비였다!앨리스는 그런 김시연에게 질투가 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카이사르는 윌슨 가문으로 돌아간 후부터 쭉 따사롭고 우아한 태도로 사람을 대해왔다. 그는 항상 성숙하고 무게 있는, 냉정하고 절제된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이사르만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모든 걸 예상했다는 듯한 선구안을 지닌 사람처럼 행동했다.그의 따사로움은 진정한 따사로움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기 위해 카이사르가 만들어낸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거절할 때의 카이사르는 그 누구보다도 냉혹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그는 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일전, 연도진은 강남에 머물면서 수시로 이엘리아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주시했었다. 그녀가 매일 밖으로 나돌아다니는 걸 연도진은 그저 오락에만 빠져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넘겼었다.김시연은 절대 사실 확인도 되지 않은 일을 함부로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시연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그녀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말하자면 좀 긴데, 우선 부승민의 고모인 부선월이 해외에서 한 고아 여자아이를 입양했어. 지금은 이미 다섯 살이고. 작년에 하랑이가 유산을 했는데 마침 그때 여사님께 일이 생겨서 아이를 부승민한테 대신 돌봐달라면서 맡겼거든. 그때 부승민이 하랑이 잘 꼬드겨 보겠다고 애를 아예 국내에 남겨두곤 하랑이랑 자주 만나게 했거든. 아이는 부승민 호적에도 같이 올랐어. 그런데...”연도진은 그다음에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예측이라도 한 듯 김시연의 말을 이어 말했다.“그런데 며칠 전에 갑자기 그 여자애가 부승민이랑 이엘리아의 아이라는 게 밝혀진 거고?”“응, 맞아. 자세한 건 나도 얘기해줄 수 없긴 한데, 부승민이랑 부선월이 사이가 좀 안 좋았던 것 같아. 부선월은 처음부터 아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계속 하랑이를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었거든. 어차피 지금 하랑이는 나랑 같이 살고 있고 그렇게 부승민이랑도 또 멀어졌지.”연도진이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그 아이가 부승민이랑 이엘리아의 아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는데? 친자 검사라도 해봤어?”“했어. 부승민이 직접 사람 부쳐서 BX 그룹이 후원하는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모양이더라고. 이런 검사 결과면 딱히 문제는 없을 거야.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됐을 때는 하랑이도 하랑이겠지만 나도 너무 믿기 힘들더라.”연도진의 눈빛이 무거워지더니 미간이 점점 좁혀졌다.이렇게 된 이상 친자 확인 결과는 진짜가 맞을 것이다.배 속에 있는 아이를 낳는 데는 10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숨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예전으로 시간을 돌려본다면
강남 쪽에서 알아주는 큰 도시였던 C 시에는 간식거리의 종류가 아주 많았다. 그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취두부, 킬바사 소시지, 쌀국수, 새우튀김 등이 있었다.김시연은 예전에 출장으로 C 시에 와본 적이 있었지만 촉박했던 시간 탓에 다른 곳들만 대충 돌아보고 이곳 먹자골목은 처음이었다.그녀는 우선 킬바사 소시지 두 개를 구매해 하나를 연도진에게 쥐여주었다.소시지를 절반 정도 먹은 김시연은 모찌를 파는 구역으로 가 군침을 삼키며 말했다.“쓰레기통 어디 있어요?”“남은 거 안 먹으려고?”“응.”“맛없어?”“아니, 완전 맛있어. 근데 다른 것도 많잖아, 배 남겨둬야지.”“...”“나 줘,”연도진은 김시연의 손에서 절반 정도 남은 소시지를 건네받더니 아무런 무리도 없이 바로 자신의 입속으로 집어넣었다.그러는 사이, 김시연은 이미 모찌를 구매했다.김시연은 일제강점기에 쳐들어온 왜놈이라도 된 것처럼 한 군데도 놓치지 않고 몇 입 맛만 본 후 남은 것들은 다 연도진에게 처리했다.연도진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7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지긋지긋한 공부가 끝나면 주말마다 둘이서 몰래 나와 이런 식으로 데이트를 하곤 했다.그 시절, 연도진의 아버지가 병원비로 집안의 전 재산을 털어 써버리는 바람에 연도진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학비도 연도진의 성적을 괜찮게 여기고 있던 선생님이 어떻게든 방법을 대 받게 된 후원금으로 댔다.그리고 평소 생활비 같은 것은 방학마다 간단히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해가며 천천히 모아 겨우 써왔다.그러니 두 사람의 데이트 비용은 대부분 김시연이 냈다.연도진도 김시연의 가정 형편이 좋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산의 정도를 떠나 김시연만 돈을 내는 것이 불편했던 연도진은 가끔 모은 돈으로 자신이 감당 가능한 김시연을 먹자골목 같은 곳으로 데려가고는 했다.김시연은 다양하게 사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한두 입 정도만 먹고 남은 것은 다 연도진의 몫이었다.가난
“왜 불러?”연도진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김시연을 쳐다보았다.“지금 여름이야.”이미 간질간질한 계절은 다 지났다는 거다.“난 그냥 너 과외 해주던 그 날에 우연히 너희 어머님 만났다는 얘기하려고 했던 건데, 어디까지 생각했던 거야?”연도진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그 말에 김시연이 당황한 듯 멈칫했다.김시연의 집에서 과외를 하던 그 날, 김시연의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쳤던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건 2학기 때의 일이었다.연도진은 일부러 1학기 때의 그 날을 들먹이며 의도적으로 김시연에게 오해하게 한 게 분명했다.만약 김시연이 여기서 연도진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고 짚어낸다면 연도진의 덫에 걸려들어 주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김시연이 여기서 더 말을 얹는 순간 그녀는 연도진과 함께 했던 그 옛 기억에 얽매여 계속 과거만 회상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지금 여름 아냐? 넌 또 무슨 생각 한 건데?”김시연은 당당하게 반격했다.말을 마친 김시연은 곧장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됐어, 얼른 다음 가게도 가보자.”10시가 다 되도록 밖에서 놀던 두 사람은 함께 호텔로 돌아왔다.김시연은 연도진이 차가 아닌 택시를 타고 혼자 돌아갈 계획이었다.하지만 그런 김시연의 행동에 연도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나 너랑 같은 호텔이야.”“...”이런 상황은 처음이 아니었다.전에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처음 연도진의 사진을 찍어줄 때, 김시연은 온하랑에게 연도진이 자신을 언급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온하랑의 대답은 생각보다 모호했다.“요 며칠 동안은 안 했던 것 같은데.”그야 그 연도진이 필라시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됐던 때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대답이었다.하지만 김시연이 온하랑에게 이런 질문을 하기 전부터 연도진은 이미 김시연이 한가할 때마다 찾아갔었다. 김시연이 출장을 가든, 강남에 남아있든 연도진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고 있는듯했다.“연도진, 너 대체 뭐 하잔 속셈이야?”“모르겠어? 시연아, 나 지금 너 꼬시는 중이잖아
강남 시.토요일 점심, 이엘리아는 더원파크힐로 가 부시아를 데리고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그녀는 웃는 얼굴로 부시아에게 말했다.“엄마가 어제 시아 데리러 유치원까지 가고 싶었는데 네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오늘 이렇게 왔어. 오후 내내 우리 시아랑 잘 놀아줄게, 어때?”부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저 오후에 숙제해야 하는데요. 점심만 먹으면 될 것 같아요.”“알겠어. 뭐 먹고 싶은 건 있어?”“양고기 먹으러 가요.”부시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삼촌이 저랑 점심 같이 먹을 거라고 했는데 올지는 모르겠어요.”이엘리아의 눈빛이 반짝였다.“정말이야?”“삼촌이 그랬어요. 아줌마, 저 데리러 온 건 저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아니었어요? 왜 자꾸 삼촌이 이쪽으로 오길 바라는 것 같죠?”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다.“아줌마... 아줌마가 아빠랑 얘기할 게 있어서 그래.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밥 한 끼 먹었으면 싶은 것도 있고.”이엘리아가 곧바로 핑계를 찾아 둘러댔다.이 아이, 꽤 영리했다.“아.”“아줌마가 바로 가게 알아볼게. 우리 먼저 도착하면 아빠한테 전화해.”“네.”부시아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이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똑똑해봤자 아직 어린 아이인데 먹는 것과 노는 걸 싫어할 리가 있을까?아이는 조만간 이엘리아에게 넘어갈 것이다.가게로 향하는 길, 이엘리아가 슬쩍 입을 열었다.“사실 난 네가 본가에 있을 줄 알고 찾아갔었는데 할머니께서 너희 아빠가 너 여기로 데려다줬다고 얘기해주셨어. 언제 온 거야?”“이틀 전에요.”“여기 너랑 너희 아빠 빼고 다른 사람 있어?”부시아는 이엘리아가 얘기하는 다른 사람이 온하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우미 아주머니도 계세요.”“아빠는 왜 갑자기 널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그날에 아줌마가 학교 찾아오는 바람에 애들이 저한테 사생아라고 했거든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학교 끝나고 숙모네 집 찾아갔었어요...”이엘리아의 심장이 철렁했다.“그리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