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이엘리아는 무의식적으로 해명을 시작했다.“나는 다음에 우리 세 가족이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서.”“우리 아빠는 양고기 좋아해요!”어린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양념장 양고기도 좋아하고 그냥 삶은 양고기도 좋아하고 구운 양꼬치도 좋아하고 양고기로 우린 탕도 좋아해요.”“그래?”“네.”어린아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알겠어, 잘 기억하도록 할게. 아직 아빠가 점심을 드셨을지 안 드셨을지 모르겠네? 시아야, 아빠한테 전화 한 번 해볼래? 아빠도 식사하셨는지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이렇게나 빨리 본성을 드러낸다고?’‘인내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안돼요. 지금 삼촌은 아마 손님 접대 중일 거예요. 방해하면 안 돼요.”“이게 어떻게 방해야? 아빠도 전화 받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부시아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이엘리아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부시아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부시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본인 식사에만 집중했다. 마치 솜뭉치에 주먹을 꽂는 듯한 의미 없는 타격감에 이엘리아도 힘이 빠졌다.어린아이 주제에 경계심만 많았다.점심 식사가 끝나고 이엘리아는 부시아를 유치원까지 다시 데려다주었다.점심 휴식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부시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잠시 잠을 청했다.수업 종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부시아의 짝꿍이었던 민지가 궁금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시아야, 오늘 점심에 너 데리러 왔던 사람, 혹시 너희 엄마야? 왜 전에 교문 앞에서 만났던 사람이랑 다른 것 같지?”“나 알아! 나 알아!”뒷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갑자기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우리 아빠가 알려줬는데 부시아 사생아래!”이엘리아는 대표의 조카딸로서 모두가 그녀의 라인을 타 대표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길 바랐던 탓에 이엘리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니 근
아이들은 문 앞에 모여있었고 선생님들 또한 아이들과 함께 교문 앞에서 학부모님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부시아 혼자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갔고 딱히 위험할 건 없으리라 판단했던 선생님은 아이를 따라 들어가지 않은 채 교문 앞에서 부시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시아가 학교 안에서 사라진 건 확실한 거죠?”“이것도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원장 역시 확답을 내놓기는 어려웠다.“저희가 CCTV를 다 확인해 봤거든요.”“지금 바로 갈게요.”“네.”전화가 끊기자 온하랑은 바로 앞치마부터 벗은 채 신발을 갈아 신고 차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차를 몰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도중, 온하랑은 또다시 원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CCTV 확인 결과, 부시아가 후문으로 나갔다는 소식이었다.매일 대량의 신선한 식자재를 준비해야 하는 유치원이었기에 식당과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후문을 통해 식자재를 공급해오고 있었다. 식자재를 납품받을 때 빼고는 후문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아이는 후문으로 유치원을 빠져나가기 전, 식당 관리인 아저씨를 철저히 따돌리는 것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유치원 CCTV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부시아가 유치원을 빠져나간 이후엔 어디로 갔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는 했나요?”온하랑이 물었다.“이미 했어요.”온하랑은 곧바로 유치원 근처의 파출소로 향했다.원장과 본가의 운전기사가 이미 온하랑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경찰에게 상황설명을 마치고 바로 유치원 근처의 외부 CCTV를 확인해보았다.CCTV 화면에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한 여자아이가 책가방을 멘 채 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이 아이예요.”경찰이 빨리 감기를 눌러 부시아의 행적을 계속 뒤쫓아갔다. 이윽고 화면 속의 아이는 한 버스 정거장에 도착해 버스에 올라탔다.경찰은 아이가 탄 버스를 특정하고 버스가 멈춰서는 역을 하나씩 추적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 아이
문을 열고 들어선 온하랑은 신발을 갈아신고 소파에 앉았다.부시아는 온하랑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 들어갔다. 아이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잘못을 안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왜 기사 아저씨랑 같이 안 돌아갔어? 왜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온하랑은 무표정으로 부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부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며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돌아가고 싶지 않아요.”“왜?”“그야... 그야 이상한 아줌마가 우리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친구들이 그 장면을 봐 버린 바람에 다들 저한테 사생아라고 했단 말이에요...”맑은 눈물방울이 아이의 백옥 같은 피부를 타고 진주 방울처럼 똑똑 떨어졌다.아이는 붉은 눈시울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채 겁먹는 눈빛으로 훌쩍거렸다.“숙모, 저 미워하지 마세요. 네? 말도 잘 듣고 화나게도 안 할게요. 동생이랑 여동생도 제가 잘 돌볼게요...”말을 마치자 부시아의 눈에서 또 한줄기의 눈물이 흘렀다.아이의 눈빛이 어미 잃은 짐승처럼 불쌍했다. 아이는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싫어할까 두려워했다. 아이의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본인이 너무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귀엽고 기특한 아이를 어떻게 감히 싫어할 수가 있을까?부시아가 이렇게나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데 온하랑이 어떻게 아이를 밀어내고 버릴 수가 있을까?부시아는 죄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미리 정하고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온하랑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부시아를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와 아이의 얼굴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을 살살 닦아주며 말했다.“울지 마, 시아야. 숙모는 널 싫어한 적 없어.”부시아는 새끼 고양이처럼 온하랑의 손길을 느꼈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아이의 코는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시아가 계속해서 훌쩍이며 말했다.“정말요?”“정말이지.”온하랑의 마음이 사르르
지금 온하랑은 결혼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이다.어차피 부승민과 재혼 할 생각이 없으니 같이 살든 말든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아이를 낳게 되면 그저 같이 키우면 그만이었다.만약 부승민과 함께 산다고 하면 이엘리아와 부선월이 찾아와 귀찮게 할 게 뻔했다. 임신 중인 온하랑은 좋은 것만 생각하며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건강하게 품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차라리 이엘리아와 부선월에게는 자신과 부승민이 정말 끝난 사이라고 여기게 하는 편이 더 편할 것이다. 그래야 그녀들이 자신이 아닌 부승민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테니 말이다.부시아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간을 찡그렸다.“하지만 숙모, 이러면 그냥 할머니 뜻대로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그 이상한 아줌마가 빈틈이라도 노려서 제대로 들어앉으면 어쩌려고요?”온하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만약 네 삼촌이 정말 그 여자가 들어올 빈틈을 준다면, 내가 더는 좋아할 가치도 없다는 거잖아? 그땐 완벽히 버리면 돼.”부시아가 미련이라도 남은 듯 온하랑의 품에 안겨 주위를 둘러보았다.“시연 아줌마는요?”“출장 갔어.”“알겠어요.”부시아가 천천히 온하랑의 품을 벗어났다.“저는 송이 찾으러 갈게요.”온하랑은 요리를 하던 중 부승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시아 지금 너희 집에 있어?”“응.”“귀찮게 해서 미안해. 지금 시아 데리러 갈게.”부승민은 혹시나 온하랑이 화라도 났을까 걱정이었다.“그래, 이쪽으로 와.”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있던 온하랑은 다른 한 손으로는 뒤집개를 든 채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낀 채 불편한 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또 할 말 있어? 다른 용건 없으면 끊을게.”생각보다 흔쾌한 온하랑의 대답에 부승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부시아는 부승민이 다른 여인과 어떠한 관계가 발생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 자체로도 이미 온하랑에게는 가슴에 꽂힌 비수였다. 부시아를 마주할 때마다 그 비수가 가슴을 더 깊게 파고들었을 것이
고개를 든 부승민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시아를 위한다는 걸 명분으로 내세우시면 본심이 가려질 거라 생각하세요? 시아가 누군지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밝히신 건데요?”“내 사심이 좀 담겼던 것쯤은 인정할게. 하지만 다 널 위해서였어. 이엘리아가 집안이며 얼굴이며 너한테 안 어울리는 게 뭐니? 게다가 시아 친엄마라는데, 이거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겠니?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여전히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선 본인이 옳은 줄로만 알고 계시네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회장님을 위해서겠죠.”부선월은 부승민과 부시아를 위한 선택이라고 주장했지만 지금 부승민과 부시아 모두 부선월의 선택에 만족하지 못했다.만약 정말 부승민과 부시아를 위한 것이었다면 부승민이 좋아하는 여자가 온하랑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부시아가 누구의 딸인지 밝히며 억지로 이엘리아를 부승민과 엮으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부선월은 부승민이 다시 온하랑을 마주할 수 있는 면목조차 없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온하랑은 부승민에게 풀 수 없는 응어리가 생겨버렸다.부선월은 온하랑이 부승민의 아내가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던 나머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둘의 재결합을 막았던 것이다.부시아는 그저 부선월의 도구에 불과했다.부선월이 부시아의 정체를 밝히던 그 날부터 부승민은 그녀를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승민아, 난 네가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실망이구나.”부선월은 마음 아프단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널 낳지도 않는 건데. 너만 아니었으면 내 반평생을 해외에서 보낼 일도 없었어.”“회장님께서 반평생을 해외에서 보내신 건 저 때문이 아니라 최국환 때문이었겠죠.”부선월은 아직도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임가희의 잘못으로 돌리며 온하랑을 계속해서 증오하고 있었다.“나랑 네 아빠도 한때는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어. 임가희가 그이만 안 꼬셨으면...”남자는 다 똑같다. 최국환이 술자리 도우
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친자 확인 검사하기 전에 한 번 왔었어요. 그때 막 저 보고 귀여워서 선물 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진짜 이상했어요.”“알겠어. 다시는 유치원 가서 애 방해하지 말라고 내가 잘 말해둘게.”“네.”“가서 놀아.”들어올 때부터 주방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던 부승민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큰 보폭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하랑아.”“왔구나.”온하랑은 그저 눈길 한 번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밥은 먹었어?”“아직.”“그럼 같이 먹자.”온하랑이 먼저 자신에게 식사 요청을 했다는 사실에 부승민의 마음이 좋아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오늘은 미안했어. 시아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갈게. 다음부터는...”“내가 왜 시아를 안 보고 싶어 하는데?”온하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아, 나는 그냥...”온하랑이 부승민을 훑어보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며칠 전만 해도 시아 안고 자던 사람인데 시아 정체 하나 알았다고 안 보고 싶어 지게?”“아니, 아니.”부승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바로 말을 바꾸었다.“하랑이 착하지, 그러니까...”“오늘 돌아가면 시아 다시는 본가로 보내지 마.”서프라이즈가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부승민은 믿기 힘든 마음에 가까스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넌 나가봐도 돼, 남은 건 내가 할게.”온하랑이 정말 이렇게 쉽게 부승민을 용서하는 걸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부시아를 계속 본가에 둬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필요 없어진 걸까?며칠 동안 계속 고민해오던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건가?다음 채소를 손질하는 내내 부승민의 마음은 계속 들떠있었다.“좋아.”온하랑은 앞치마를 부승민에게 건네주고는 주방을 벗어났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승민은 알아서 접시와 그릇들을 한데 모아 주방으로 옮겨 설거지를 시작했다. 온하랑은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
그 순간, 부승민은 아이가 임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부시아가 두 눈을 깜빡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숙모 임신했는데요!”“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부승민은 몸을 낮춰 부시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것 같은 희망이 끓어올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현승 삼촌 결혼하던 날에요. 숙모가 유치원에 저 데리러 왔을 때 말해줬었어요. 저녁에 삼촌은 집에 안 들어왔었고 그다음 날에 숙모가 집을 나갔어요. 그래서 삼촌한테는 얘기 안 했던 것 같은데요.”부승민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속으로는 이미 날뛰고 있었다.온하랑이 임신을 했다!이제 그들 사이에도 아이가 생겼다!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아이였다!감히 기대해본 적도 없는 좋은 소식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부승민은 잔뜩 흥분한 마음을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그대로 곧장 온하랑의 집으로 다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 부승민을 부시아가 옆에서 말렸다.“삼촌, 일단 진정해봐요. 아무리 그래도 숙모는 삼촌한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부승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야?”“할머니랑 그 이상한 아줌마가 숙모랑 삼촌이 재결합 하는 거 두고만 보진 않을 거라고요. 지금 숙모 데리고 가봤자 그 두 사람이 계속 숙모 괴롭히고 귀찮게 할 거예요. 그럼 숙모 배 속에 있는 아기한테도 안 좋아요. 숙모랑 재결합하고 싶으면 먼저 할머니랑 이상한 아줌마부터 처리해야 할걸요.”부시아가 또박또박 말했다.그 이상한 아줌마가 여기 남아 있는 이상, 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만 할 게 뻔했다.부승민은 부시아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의 자신은 지나친 기쁨에 뇌를 지배당한 나머지 너무 충동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온하랑의 몸으로 다시 임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이번 태교에는 무조건 신경을 써야 했다.만약 이번 아기까지 잃는다면 온하랑이 입는 마음의 상처가 상당할 것이
곁눈질로 봤을 때는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를 뿐이었다.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김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돌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재수가 없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보질 않는 건데.“그거 무슨 표정이야?”연도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거들떠볼 가치도 없고 귀찮아서 좀 비웃어봤어.”김시연의 입에서 정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김시연의 다른 한쪽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매번 밖에 나와서 일을 할 때면 연도진이 김시연을 찾아오는 걸 볼 수 있었다.그런다고 딱히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김시연과 입씨름만 하며 서로를 공격할 뿐이었다.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가 매니저도 김시연이 지금 천천히 끓는 물 속에 갇힌 개구리가 되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네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와본 거야.”“...”김시연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네가 그렇게 우리 아빠 말을 잘 들어? 아주 그냥 아빠라고 부르지 그래?”연도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장인어른이라면 몰라도.”“꺼져.”김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괜히 내 덕 보려고 덤비지 말고, 이럴 시간에 네 여자친구나 찾아가시지.”연도진의 여자친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김시연은 순간적으로 이엘리아가 부승민과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연도진은 과연 알고 있을까?설마 바람 핀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정말 이럴 것이라 생각하니 김시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나한테 여자친구가 어디 있다고... 왜 웃어?”“아무것도 아니야.”입을 꼭 틀어막은 김시연의 눈꼬리가 휘었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연도진이 미간을 가볍게 좁히더니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이 근처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