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이엘리아는 무의식적으로 해명을 시작했다.“나는 다음에 우리 세 가족이 밥 한 끼 같이 먹고 싶어서.”“우리 아빠는 양고기 좋아해요!”어린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양념장 양고기도 좋아하고 그냥 삶은 양고기도 좋아하고 구운 양꼬치도 좋아하고 양고기로 우린 탕도 좋아해요.”“그래?”“네.”어린아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알겠어, 잘 기억하도록 할게. 아직 아빠가 점심을 드셨을지 안 드셨을지 모르겠네? 시아야, 아빠한테 전화 한 번 해볼래? 아빠도 식사하셨는지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이렇게나 빨리 본성을 드러낸다고?’‘인내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안돼요. 지금 삼촌은 아마 손님 접대 중일 거예요. 방해하면 안 돼요.”“이게 어떻게 방해야? 아빠도 전화 받으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야!”부시아가 고집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싫어요.”이엘리아가 잔뜩 어두워진 표정으로 부시아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부시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본인 식사에만 집중했다. 마치 솜뭉치에 주먹을 꽂는 듯한 의미 없는 타격감에 이엘리아도 힘이 빠졌다.어린아이 주제에 경계심만 많았다.점심 식사가 끝나고 이엘리아는 부시아를 유치원까지 다시 데려다주었다.점심 휴식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은 탓에 부시아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잠시 잠을 청했다.수업 종소리가 울리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부시아의 짝꿍이었던 민지가 궁금함을 못 이기고 물었다.“시아야, 오늘 점심에 너 데리러 왔던 사람, 혹시 너희 엄마야? 왜 전에 교문 앞에서 만났던 사람이랑 다른 것 같지?”“나 알아! 나 알아!”뒷자리에 앉아있던 남자아이가 갑자기 입을 열어 떠들기 시작했다.“우리 아빠가 알려줬는데 부시아 사생아래!”이엘리아는 대표의 조카딸로서 모두가 그녀의 라인을 타 대표님과 가까운 사이가 되길 바랐던 탓에 이엘리아의 일거수일투족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러니 근
아이들은 문 앞에 모여있었고 선생님들 또한 아이들과 함께 교문 앞에서 학부모님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부시아 혼자 다시 학교 안으로 들어갔고 딱히 위험할 건 없으리라 판단했던 선생님은 아이를 따라 들어가지 않은 채 교문 앞에서 부시아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시아가 학교 안에서 사라진 건 확실한 거죠?”“이것도 단정 지을 수는 없어요.”원장 역시 확답을 내놓기는 어려웠다.“저희가 CCTV를 다 확인해 봤거든요.”“지금 바로 갈게요.”“네.”전화가 끊기자 온하랑은 바로 앞치마부터 벗은 채 신발을 갈아 신고 차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차를 몰고 유치원으로 향하던 도중, 온하랑은 또다시 원장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CCTV 확인 결과, 부시아가 후문으로 나갔다는 소식이었다.매일 대량의 신선한 식자재를 준비해야 하는 유치원이었기에 식당과 상대적으로 더 가까운 후문을 통해 식자재를 공급해오고 있었다. 식자재를 납품받을 때 빼고는 후문을 사용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아이는 후문으로 유치원을 빠져나가기 전, 식당 관리인 아저씨를 철저히 따돌리는 것도 잊지 않은 모양이었다.유치원 CCTV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부시아가 유치원을 빠져나간 이후엔 어디로 갔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경찰에 신고는 했나요?”온하랑이 물었다.“이미 했어요.”온하랑은 곧바로 유치원 근처의 파출소로 향했다.원장과 본가의 운전기사가 이미 온하랑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경찰에게 상황설명을 마치고 바로 유치원 근처의 외부 CCTV를 확인해보았다.CCTV 화면에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한 여자아이가 책가방을 멘 채 길을 걷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이 아이예요.”경찰이 빨리 감기를 눌러 부시아의 행적을 계속 뒤쫓아갔다. 이윽고 화면 속의 아이는 한 버스 정거장에 도착해 버스에 올라탔다.경찰은 아이가 탄 버스를 특정하고 버스가 멈춰서는 역을 하나씩 추적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몇 개의 정거장을 지나 아이
문을 열고 들어선 온하랑은 신발을 갈아신고 소파에 앉았다.부시아는 온하랑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 들어갔다. 아이는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잘못을 안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왜 기사 아저씨랑 같이 안 돌아갔어? 왜 혼자 여기까지 온 거야?”온하랑은 무표정으로 부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부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며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돌아가고 싶지 않아요.”“왜?”“그야... 그야 이상한 아줌마가 우리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친구들이 그 장면을 봐 버린 바람에 다들 저한테 사생아라고 했단 말이에요...”맑은 눈물방울이 아이의 백옥 같은 피부를 타고 진주 방울처럼 똑똑 떨어졌다.아이는 붉은 눈시울에 눈물을 방울방울 매단 채 겁먹는 눈빛으로 훌쩍거렸다.“숙모, 저 미워하지 마세요. 네? 말도 잘 듣고 화나게도 안 할게요. 동생이랑 여동생도 제가 잘 돌볼게요...”말을 마치자 부시아의 눈에서 또 한줄기의 눈물이 흘렀다.아이의 눈빛이 어미 잃은 짐승처럼 불쌍했다. 아이는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혹시라도 그녀가 자신을 싫어할까 두려워했다. 아이의 눈빛을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본인이 너무 무자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렇게 귀엽고 기특한 아이를 어떻게 감히 싫어할 수가 있을까?부시아가 이렇게나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데 온하랑이 어떻게 아이를 밀어내고 버릴 수가 있을까?부시아는 죄가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신분을 미리 정하고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테니.온하랑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부시아를 자신의 앞으로 데리고 와 아이의 얼굴에 맺혀있던 눈물방울을 살살 닦아주며 말했다.“울지 마, 시아야. 숙모는 널 싫어한 적 없어.”부시아는 새끼 고양이처럼 온하랑의 손길을 느꼈다.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아이의 코는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부시아가 계속해서 훌쩍이며 말했다.“정말요?”“정말이지.”온하랑의 마음이 사르르
지금 온하랑은 결혼이라는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이다.어차피 부승민과 재혼 할 생각이 없으니 같이 살든 말든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아이를 낳게 되면 그저 같이 키우면 그만이었다.만약 부승민과 함께 산다고 하면 이엘리아와 부선월이 찾아와 귀찮게 할 게 뻔했다. 임신 중인 온하랑은 좋은 것만 생각하며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건강하게 품는 것에만 집중해야 했다.차라리 이엘리아와 부선월에게는 자신과 부승민이 정말 끝난 사이라고 여기게 하는 편이 더 편할 것이다. 그래야 그녀들이 자신이 아닌 부승민을 집중적으로 공략할 테니 말이다.부시아는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간을 찡그렸다.“하지만 숙모, 이러면 그냥 할머니 뜻대로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그 이상한 아줌마가 빈틈이라도 노려서 제대로 들어앉으면 어쩌려고요?”온하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만약 네 삼촌이 정말 그 여자가 들어올 빈틈을 준다면, 내가 더는 좋아할 가치도 없다는 거잖아? 그땐 완벽히 버리면 돼.”부시아가 미련이라도 남은 듯 온하랑의 품에 안겨 주위를 둘러보았다.“시연 아줌마는요?”“출장 갔어.”“알겠어요.”부시아가 천천히 온하랑의 품을 벗어났다.“저는 송이 찾으러 갈게요.”온하랑은 요리를 하던 중 부승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시아 지금 너희 집에 있어?”“응.”“귀찮게 해서 미안해. 지금 시아 데리러 갈게.”부승민은 혹시나 온하랑이 화라도 났을까 걱정이었다.“그래, 이쪽으로 와.”프라이팬 손잡이를 잡고 있던 온하랑은 다른 한 손으로는 뒤집개를 든 채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낀 채 불편한 자세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또 할 말 있어? 다른 용건 없으면 끊을게.”생각보다 흔쾌한 온하랑의 대답에 부승민의 마음이 무거워졌다.부시아는 부승민이 다른 여인과 어떠한 관계가 발생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 자체로도 이미 온하랑에게는 가슴에 꽂힌 비수였다. 부시아를 마주할 때마다 그 비수가 가슴을 더 깊게 파고들었을 것이
고개를 든 부승민의 눈빛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시아를 위한다는 걸 명분으로 내세우시면 본심이 가려질 거라 생각하세요? 시아가 누군지 진작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제야 밝히신 건데요?”“내 사심이 좀 담겼던 것쯤은 인정할게. 하지만 다 널 위해서였어. 이엘리아가 집안이며 얼굴이며 너한테 안 어울리는 게 뭐니? 게다가 시아 친엄마라는데, 이거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인연 아니겠니?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여전히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선 본인이 옳은 줄로만 알고 계시네요.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회장님을 위해서겠죠.”부선월은 부승민과 부시아를 위한 선택이라고 주장했지만 지금 부승민과 부시아 모두 부선월의 선택에 만족하지 못했다.만약 정말 부승민과 부시아를 위한 것이었다면 부승민이 좋아하는 여자가 온하랑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부시아가 누구의 딸인지 밝히며 억지로 이엘리아를 부승민과 엮으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부선월은 부승민이 다시 온하랑을 마주할 수 있는 면목조차 없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온하랑은 부승민에게 풀 수 없는 응어리가 생겨버렸다.부선월은 온하랑이 부승민의 아내가 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던 나머지 모든 방법을 동원해 둘의 재결합을 막았던 것이다.부시아는 그저 부선월의 도구에 불과했다.부선월이 부시아의 정체를 밝히던 그 날부터 부승민은 그녀를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승민아, 난 네가 날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실망이구나.”부선월은 마음 아프단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널 낳지도 않는 건데. 너만 아니었으면 내 반평생을 해외에서 보낼 일도 없었어.”“회장님께서 반평생을 해외에서 보내신 건 저 때문이 아니라 최국환 때문이었겠죠.”부선월은 아직도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임가희의 잘못으로 돌리며 온하랑을 계속해서 증오하고 있었다.“나랑 네 아빠도 한때는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어. 임가희가 그이만 안 꼬셨으면...”남자는 다 똑같다. 최국환이 술자리 도우
부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친자 확인 검사하기 전에 한 번 왔었어요. 그때 막 저 보고 귀여워서 선물 주고 싶다고 했었는데 진짜 이상했어요.”“알겠어. 다시는 유치원 가서 애 방해하지 말라고 내가 잘 말해둘게.”“네.”“가서 놀아.”들어올 때부터 주방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을 느꼈던 부승민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큰 보폭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하랑아.”“왔구나.”온하랑은 그저 눈길 한 번 주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밥은 먹었어?”“아직.”“그럼 같이 먹자.”온하랑이 먼저 자신에게 식사 요청을 했다는 사실에 부승민의 마음이 좋아졌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오늘은 미안했어. 시아 보고 싶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갈게. 다음부터는...”“내가 왜 시아를 안 보고 싶어 하는데?”온하랑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아, 나는 그냥...”온하랑이 부승민을 훑어보며 말했다.“내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야? 며칠 전만 해도 시아 안고 자던 사람인데 시아 정체 하나 알았다고 안 보고 싶어 지게?”“아니, 아니.”부승민은 웃음을 터뜨리며 바로 말을 바꾸었다.“하랑이 착하지, 그러니까...”“오늘 돌아가면 시아 다시는 본가로 보내지 마.”서프라이즈가 이렇게나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부승민은 믿기 힘든 마음에 가까스로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 넌 나가봐도 돼, 남은 건 내가 할게.”온하랑이 정말 이렇게 쉽게 부승민을 용서하는 걸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부시아를 계속 본가에 둬야 할 것 같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필요 없어진 걸까?며칠 동안 계속 고민해오던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건가?다음 채소를 손질하는 내내 부승민의 마음은 계속 들떠있었다.“좋아.”온하랑은 앞치마를 부승민에게 건네주고는 주방을 벗어났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승민은 알아서 접시와 그릇들을 한데 모아 주방으로 옮겨 설거지를 시작했다. 온하랑은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
그 순간, 부승민은 아이가 임신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했다.부시아가 두 눈을 깜빡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숙모 임신했는데요!”“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부승민은 몸을 낮춰 부시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깊은 곳에서부터 감히 건드리지도 못할 것 같은 희망이 끓어올라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현승 삼촌 결혼하던 날에요. 숙모가 유치원에 저 데리러 왔을 때 말해줬었어요. 저녁에 삼촌은 집에 안 들어왔었고 그다음 날에 숙모가 집을 나갔어요. 그래서 삼촌한테는 얘기 안 했던 것 같은데요.”부승민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속으로는 이미 날뛰고 있었다.온하랑이 임신을 했다!이제 그들 사이에도 아이가 생겼다!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아이였다!감히 기대해본 적도 없는 좋은 소식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부승민은 잔뜩 흥분한 마음을 어찌할 방도를 몰랐다.몸을 일으킨 부승민은 그대로 곧장 온하랑의 집으로 다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 부승민을 부시아가 옆에서 말렸다.“삼촌, 일단 진정해봐요. 아무리 그래도 숙모는 삼촌한테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부승민이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이야?”“할머니랑 그 이상한 아줌마가 숙모랑 삼촌이 재결합 하는 거 두고만 보진 않을 거라고요. 지금 숙모 데리고 가봤자 그 두 사람이 계속 숙모 괴롭히고 귀찮게 할 거예요. 그럼 숙모 배 속에 있는 아기한테도 안 좋아요. 숙모랑 재결합하고 싶으면 먼저 할머니랑 이상한 아줌마부터 처리해야 할걸요.”부시아가 또박또박 말했다.그 이상한 아줌마가 여기 남아 있는 이상, 부승민과 온하랑 두 사람의 관계는 멀어지기만 할 게 뻔했다.부승민은 부시아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의 자신은 지나친 기쁨에 뇌를 지배당한 나머지 너무 충동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온하랑의 몸으로 다시 임신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니 이번 태교에는 무조건 신경을 써야 했다.만약 이번 아기까지 잃는다면 온하랑이 입는 마음의 상처가 상당할 것이
곁눈질로 봤을 때는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다만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를 뿐이었다.김시연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앉은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정체를 확인한 김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돌리며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재수가 없었다.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보질 않는 건데.“그거 무슨 표정이야?”연도진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물었다.“거들떠볼 가치도 없고 귀찮아서 좀 비웃어봤어.”김시연의 입에서 정 없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김시연의 다른 한쪽에 앉아있던 매니저가 두 사람의 말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태연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매번 밖에 나와서 일을 할 때면 연도진이 김시연을 찾아오는 걸 볼 수 있었다.그런다고 딱히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김시연과 입씨름만 하며 서로를 공격할 뿐이었다.그 횟수가 점점 늘어나가 매니저도 김시연이 지금 천천히 끓는 물 속에 갇힌 개구리가 되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네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와본 거야.”“...”김시연이 코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네가 그렇게 우리 아빠 말을 잘 들어? 아주 그냥 아빠라고 부르지 그래?”연도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아빠라고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장인어른이라면 몰라도.”“꺼져.”김시연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괜히 내 덕 보려고 덤비지 말고, 이럴 시간에 네 여자친구나 찾아가시지.”연도진의 여자친구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김시연은 순간적으로 이엘리아가 부승민과 함께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이제 다섯 살이 되었다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 연도진은 과연 알고 있을까?설마 바람 핀 사실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정말 이럴 것이라 생각하니 김시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나한테 여자친구가 어디 있다고... 왜 웃어?”“아무것도 아니야.”입을 꼭 틀어막은 김시연의 눈꼬리가 휘었다. 누가 봐도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연도진이 미간을 가볍게 좁히더니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이 근처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