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성격이니 맞아도 싸지!’이엘리아는 차를 고치기 위해 돌아간 후 사람을 불러서 견인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는 사람을 불러 자신을 데리러 오게 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이엘리아는 옆에 있는 앨리스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차갑게 쳐다보았다.“아까 내가 맞을 때 너는 차 안에서 뭐 하고 있었어?”앨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도와주려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내 쪽 차 문이 유리 조각 때문에 안 열리는 거야. 그래서 힘들게 열었고 그 과정에서 손도 다쳤어...”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 입은 손을 보여주었다.마치 깨끗한 흰 종이에 잉크가 떨어진 것처럼 상처는 매우 두드러져 있었다.이엘리아는 그제야 좀 납득하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엘리아, 차가 오면 어디로 갈 거야?”“어디로 가겠어?”이엘리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냉소를 지었다.“당연히 집으로 가서 삼촌에게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해야지!”앨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카이사르 오빠 비행기가 곧 도착하는 거 아니야?”이엘리아는 멈칫했다.‘하마터면 잊을 뻔했잖아!’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면 먼저 우리 오빠를 맞이하러 가야지!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그 여자를 좋아할지 봐야겠어!”앨리스는 안심시키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오빠는 널 무척 아끼니까 분명 널 위해 싸워줄 거야!”...강남국제공항.연도진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서 자신의 짐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켜고 일반 모드로 전환했다.곧바로 그는 낯선 번호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연도진은 영상을 열어 보았다. 공항에서 찍힌 CCTV 영상 같았다.영상을 자세히 본 그는 영상 속 인물이 온하랑과 부승민 같다는 것을 알았다.‘So?’연도진은 금테 안경을 밀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영상을 삭제했다.그러고는 수하물 트롤리를 끌고 도착 게이트를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오빠, 여기야!”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연도진은
이엘리아는 당연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전에 시테니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죠? 그때 시계를 훔쳐 간 사람이 바로 그 여자들이었어요. 며칠 전 쇼핑몰에서 페이의 친구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비웃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그 여자들이랑 마주쳐서 겁주려고 했는데 되레 내 차를 부수고 나를 때렸어요.”연도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누가 너보고 겁주라고 했어?”시테니 사건을 언급하자마자 그는 온하랑과 김시연일 것이라고 직감했다.그때 그는 귀국하지 않았지만 김시연의 블로그를 통해 온하랑이 시테니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온하랑은 자신이 손해를 입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지만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비웃을 사람도 아니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또한, 이엘리아가 겁을 주려 했다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말하기 마련이다. 예전에 이엘리아가 누군가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도 그녀는 단순한 부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엘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내가 겁을 주려 했어도 그 사람들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어요. 근데 왜 내 차를 부수고 나를 때린 건데요? 오빠, 왜 자꾸 그 여자들을 감싸고 돌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책임을 축소했지만 연도진은 여전히 그녀의 편을 들지 않았다.그는 정말 페이에 미쳐 있는 것 같았다!“며칠 전에 비웃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복수하지 그랬어?”연도진은 차가운 얼굴로 이엘리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왜냐하면...”하지만 연도진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왜냐하면 넌 아버지와 가문에 의지할 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지. 억울하면 마치 어린애처럼 어른들에게 하소연할 뿐이잖아!”“오빠...”이엘리아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온하랑에게 차를 부수고 따귀를 맞은 후, 이제는 연도진에게까지 꾸중을 듣다니...그녀는 정말이지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정말 너무해요. 돌아가서 삼촌한테 다 말할 거예요!”“그래, 가서 말해봐. 삼촌이 널 감싸 줄지 어디 한번 보자.”연도진
자신이 이렇게 맞고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연도진이 여전히 페이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엘리아는 페이를 그의 마음속에서 지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이엘리아는 상처 입은 얼굴로 서정훈의 집으로 돌아갔다.서정훈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이미 결혼해서 며느리와 함께 집을 나갔고 딸은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서정훈은 일로 바빴고 그의 아내도 한 부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어서 집에는 자주 사람이 없었다.저녁이 되어서야 서정훈 부부가 집에 돌아왔다.이엘리아는 서둘러 서정훈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는 감추고 애교를 부렸다.“삼촌, 숙모, 꼭 저 대신 복수해주셔야 해요!”그러자 서정훈의 부인은 피곤한 듯 이마를 주무르며 서정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서정훈은 이엘리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그의 온화한 외모 뒤에 있는 깊고 강렬한 눈빛은 마치 어떤 비밀도 그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이엘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손바닥에는 땀이 났다.“삼촌...”“그 말 다 사실이야?”서정훈은 물었다.“...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정훈은 그녀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확실해?”“저... 저...”이엘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변명하려 했지만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연도진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엘리아, 거짓말이지? 내가 추측하기엔 넌 단순히 겁을 주려 한 것이 아니라 진짜 복수를 하려 한 것 같은데... 그 사람들한테 되레 당했지, 그렇지?”“아니요... 그렇지 않아요...”이엘리아는 변명하려 했지만 연도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앨리스를 겨누며 말했다.“그쪽이 말해봐요!”앨리스는 이 상황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이엘리아의 눈짓을 받았다.그래서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사실 처음에 자동차로 그 사람들을 치려고 했어요...”이 말을 들은 이엘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하지만 이엘리아를 탓하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부승민이 구치소에서 무사히 나온 뒤 부현승과 서혜민의 결혼식 일정도 다시 잡혔다.달라진 게 있다면 임신한 서혜민의 배가 눈에 띄게 커졌다는 것이다.하여 결혼식은 심플하게 진행되었다.이제 막 결혼하는 신부가 임신해서 배가 나온 게 보기 안 좋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신부와 배 속의 아이가 힘들까 봐 간단하게 준비했다.서혜민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발언권이 없었다.한 번뿐인 결혼식을 럭셔리하게 치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이런 요구를 말했다가 괜히 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는 엄마로 비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웨딩카는 아침 5시에 강남으로 출발했고 8시쯤에 신부에게 도착했다.서혜민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부현승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많은 친척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팔짱을 끼고 신혼집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부씨 가문 식구로서 소청하 및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그러다가 10시쯤에 모두가 함께 호텔로 출발했다.양가 친척들만 참석하는 단출한 결혼식을 치른다고 했지만 호텔은 그에 비해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졌다. 부씨 가문은 신부 쪽을 위해 버스 두 대를 빌려 직접 신부 측의 친척들을 모셔 와 피로연에 참석시켰다.온하랑도 소청하와 함께 서혜민의 부모님께 인사를 마친 후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는데 부선월이었다.부선월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핸드백을 들고 안으로 걸어갔다.순간 소청하와 눈이 마주친 온하랑은 급히 입을 열었다.“신부 측 사촌 언니가 아직 안 온 것 같네요.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기에 온하랑은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려 했다.“알겠어요.”소청하가 답했다.그런데 이때 온하랑을 발견한 부선월은 목을 한껏 치켜들고선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여긴 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하랑은 마치 부선월을 보지 못한 듯 일부러 시선을 돌리
그 상대가 온하랑의 사촌오빠인 줄은 이제야 알았다.온하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씨 가문에 입양되었으니 사촌 오빠라는 사람도 부씨 가문인 게 틀림없었다.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부승민도 나타날 것이다.부승민과의 거래가 떠오른 서수현은 옆에 있는 온하랑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선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온하랑은 두 사람을 이끌고 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게 했다.하객들이 거의 도착하자 온하랑은 단상 바로 옆에 놓인 원형의 테이블로 걸어갔다.이 테이블에는 김정숙, 소청하, 부윤민 그리고 가까운 친척 이모들로 모인 부씨 가문의 식구들이 앉았다.부선월은 김정숙의 왼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테이블에 온 온하랑은 부선월에서 한 자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부선월과 가까운 중간의 빈자리는 부승민을 위해 남겨두었다.부선월은 온하랑을 째려보며 속으로 궁시렁댔다.‘버르장머리 없는 것.’인기척 소리에 주위에 있던 모든 친척이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쳐다봤다.사실 사촌 중 온하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부씨 가문에 입양됐을 때 다들 별로라는 티를 팍팍 내다가 부승민과 결혼한 후에야 조금 나아졌다.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고모님도 오셨네요? 언제 가시게요?”부선월은 어이가 없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왜? 빨리 갔으면 좋겠어?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 났네.”“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코빼기도 안 보이셔서 당연히 오늘도 안 오는 줄 알았죠. 이제 보니까 오빠가 그래도 체면이 좀 있는 편이네요.”“너...”김정숙은 재빨리 부선월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렸다.“이 좋은 날에 결혼식 망칠 일 있어? 이제 그만해.”결혼식이 시작되려 할 때 어디선가 큰 손이 나타나 온하랑 옆에 있던 의자를 잡아당겼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온하랑의 다리에 손을 얹더니 자연스럽게 만지며 입을 열었다.“고모, 언제 오셨어요?”“어제.”부선월은 부승민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신랑과 신부는 서로 반지를 교환했고 곧이어 무대 아래로 내려가 양가 부모님께 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서수현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무대를 꾸민 아름다운 꽃바구니가 앞을 가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인사를 끝낸 후 신랑 신부는 양가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서수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매니저님 어머님이 왜 집주인 아주머니랑 닮은 것 같지?’서석철도 뭔가 이상한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수현에게 물었다.“수현아, 저 사람 집주인이랑 닮은 것 같지 않니?”“저도 마침 그 생각 했어요.”결혼식이 끝나면서 신랑신부가 퇴장했고 곧이어 종업원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신부는 임신 중이라 음주하면 안 됐기에 신랑만 어른들과 함께 술 한잔을 기울였다.그렇게 잔을 비우고선 다시 술을 채워 어른들의 지시를 따라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걸음을 옮기던 부현승은 낯익은 사람을 보고선 걸음을 멈췄고 혹시나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부릅뜨고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서석철도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그는 이전에 서씨 가문의 친척들로부터 ‘현이’라는 이름을 자주 들었지만 그 사람이 서수현인 줄은 아예 상상도 못 했다.서혜민의 사촌 언니가 서수현이라니, 참 공교로운 일이다.마침 고개를 든 서수현도 부현승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잔을 채웠다.신랑이 테이블로 다가오자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멈췄다.윗사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부현승은 옆에 있던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저와 혜민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혜민이는 몸이 안 좋아서 인사드리러 못 왔는데 제가 그 마음까지 담아서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 테니 잘 지켜봐 주세요.”서수현도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음료수를 들어 보이며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그렇게 몇 마디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 여자 피 확실하지?”“확실합니다. 못 믿겠으면 직접 cctv를 돌려보셔도 됩니다.”종업원의 답을 들은 부선월은 말없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비밀번호는 없어.”그렇게 말 한 뒤 피 묻은 접시 조각이 담긴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먼저 들어갈게.”차에 탄 온하랑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근처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보건소로 가주세요.”기사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길일이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호텔 근처 곳곳이 자가용 차들로 꽉 막혔고 짧은 거리는 이동하는데 적어도 10분 정도 걸렸다.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에 난 상처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건 종아리였다.순간 아랫배도 아파왔다. 비록 틍증이 심한 건 아니었지만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쑤셨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온하랑은 등받이에 기대여 허약하게 말했다.차라리 병원에 가서 검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기사더러 차를 돌리라고 했다.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의사 선생님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지막 생리가 언제죠?”“20일 전쯤?”온하랑은 생각에 잠기더니 긴가민가해하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양이 너무 적었어요. 다음 날에 바로 없어져서...”“다음날에 없어진 거면 생리가 아니라 출혈인 것 같은데요?”온하랑은 몇초간 침묵했다.“그럴 수도 있겠네요.”기억이 맞다면 그날은 부승민과 침대에서 오랫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나중에 출혈이 발생했다.‘설마 잠자리를 가져서... 질염이 생긴 건가?’“산부인과에 가보세요.”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번호표를 뽑은 후 온하랑은 산부인과에 가서 자신의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다.10분 후, 온하랑의 순서가 되었고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온하랑 씨 맞으시죠? 어디가 불편해서 찾아오셨죠?”온하랑은 자신의
온하랑은 표정이 밝아지더니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고 어찌나 기쁜지 머리카락마저 신이 나서 바람에 흩날렸다.그녀는 테스트지를 들고 다시 진찰실로 돌아갔고 이를 확인한 의사는 웃음 가득 머금은 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축하합니다.”“감사합니다.”온하랑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병원에 들어왔을 때 비해 아예 사람이 바뀐 듯 이제는 아랫배를 쑤시는 고통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일단 채혈부터 하시고 초음파검사 진행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약은 제가 처방해 드릴게요.”“알겠습니다.”“잠깐만요. 혹시 혼자 오셨어요?”“아니요.”기사님이랑 같이 왔다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진찰실을 나온 온하랑은 곧바로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쏜살같이 달려온 기사는 온하랑을 대신하여 줄을 섰고 한편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차례가 다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기사는 온하랑과 부승민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온하랑이 다시 임신한 것을 보고선 자기 일마냥 매우 기뻐했다.두 시간 후 온하랑은 착잡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든 채 진찰실로 돌아왔다.아이는 필라시에서 임신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검사 결과에 따르면 임신 14주 차라고 한다.그렇다는 건 임신한 지 3개월이 넘었다는 걸 뜻했기에 필라시에 오기 전에 이미 임신했다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해 보면 임가희가 약을 먹인 시점과 매우 일치했다.당시 약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지만 부승민의 말에 따르면 그날 관계를 가진 게 아니라 그저 서로 맞닿은 채 안고 있었다고 했다.물론 임신이 될 수도 있지만 이런 희박한 확률도 임신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온하랑은 기분이 착잡했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보고선 약을 처방하며 신신당부했다.“여기 오기 전에 다치셨죠? 태아가 아직 불안정하니 이런 상황에서는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하랑 씨의 경우 다른 여성분들에 비해 몸이 허약하여 유산할 확률이 훨씬 높거든요. 늘 좋은 기분을 유지하는 게 아이한테도 좋습니다. 아참, 임신 중에는 절대 잠자리를 가지면 안 돼요. 반드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