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이엘리아는 머리채를 잡혀 땅에 눌려 있었고 두 손은 김시연에게 묶인 채로 다리를 힘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온하랑은 이엘리아의 위에 올라타서 그녀의 턱을 잡고 얼굴에 두 대의 따귀를 때렸다!온하랑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새로운 원한과 옛날 원한을 함께 풀고 있었다.카이사르의 비행기가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앨리스는 얼굴이 붉게 부은 상태로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아아아! 딱 기다려! 내가 반드시 너네 죽여버릴 거야! 이거 놔! 우리 삼촌한테 너희 다 감옥 보내라고 말할 거야! 기다려! 아아! 페이 너 이 빌어먹을 년!”이엘리아는 땅에 누워 날카로운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녀는 이 나이 먹도록 크면서 처음으로 이런 모욕을 당했다!‘이 원한을 제대로 갚아주지 않으면 난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내가 꼭 삼촌한테 너네 둘 감옥에 집어넣고 사형 집행하라고 시킬 거야!’이엘리아의 소리는 몇몇 행인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러나 옆에 주차된 차가 마세라티인 것을 본 행인들은 이 사건에 끼어들 수 없음을 알았고 그냥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누군가가 동영상을 찍고 있었지만 온하랑은 두려워하지 않았다.이엘리아가 계속해서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우리 삼촌한테 너희들 다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할 거야!”이 말이 녹화되면 서정훈이 동영상이 온라인에 퍼지지 않도록 할 것이 분명했다.김시연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화장해서 재가 되어도 입만 살아남을 사람이네, 아주!”차 안에 있던 앨리스는 온하랑이 거의 다 때렸다고 생각하며 대시보드에서 유리 조각을 집어 손에 그었다.곧 하얀 피부에 선명한 피의 자국이 나타났다.그녀는 유리 조각을 던지고 차 문을 열고 내리면서 온하랑과 김시연을 막는 척했다. “그만 때려요!”온하랑은 상황을 보고 일어서서 손을 털고 옆에 있는 안전망치를 들며 이엘리아를 내려다보며 경고했다.“이엘리아 씨, 앞으로 또 장난치면 몇 대의 따귀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그 말을 하고 그녀
‘이런 성격이니 맞아도 싸지!’이엘리아는 차를 고치기 위해 돌아간 후 사람을 불러서 견인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는 사람을 불러 자신을 데리러 오게 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이엘리아는 옆에 있는 앨리스를 보며 뭔가 생각난 듯 차갑게 쳐다보았다.“아까 내가 맞을 때 너는 차 안에서 뭐 하고 있었어?”앨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도와주려고 차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내 쪽 차 문이 유리 조각 때문에 안 열리는 거야. 그래서 힘들게 열었고 그 과정에서 손도 다쳤어...”말을 마치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상처 입은 손을 보여주었다.마치 깨끗한 흰 종이에 잉크가 떨어진 것처럼 상처는 매우 두드러져 있었다.이엘리아는 그제야 좀 납득하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이엘리아, 차가 오면 어디로 갈 거야?”“어디로 가겠어?”이엘리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냉소를 지었다.“당연히 집으로 가서 삼촌에게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해야지!”앨리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카이사르 오빠 비행기가 곧 도착하는 거 아니야?”이엘리아는 멈칫했다.‘하마터면 잊을 뻔했잖아!’그녀는 이를 갈며 말했다.“그러면 먼저 우리 오빠를 맞이하러 가야지!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 아직도 그 여자를 좋아할지 봐야겠어!”앨리스는 안심시키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오빠는 널 무척 아끼니까 분명 널 위해 싸워줄 거야!”...강남국제공항.연도진은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옆에 서서 자신의 짐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켜고 일반 모드로 전환했다.곧바로 그는 낯선 번호로부터 받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연도진은 영상을 열어 보았다. 공항에서 찍힌 CCTV 영상 같았다.영상을 자세히 본 그는 영상 속 인물이 온하랑과 부승민 같다는 것을 알았다.‘So?’연도진은 금테 안경을 밀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영상을 삭제했다.그러고는 수하물 트롤리를 끌고 도착 게이트를 나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오빠, 여기야!”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연도진은
이엘리아는 당연히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전에 시테니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죠? 그때 시계를 훔쳐 간 사람이 바로 그 여자들이었어요. 며칠 전 쇼핑몰에서 페이의 친구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나를 알아보고 비웃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그 여자들이랑 마주쳐서 겁주려고 했는데 되레 내 차를 부수고 나를 때렸어요.”연도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누가 너보고 겁주라고 했어?”시테니 사건을 언급하자마자 그는 온하랑과 김시연일 것이라고 직감했다.그때 그는 귀국하지 않았지만 김시연의 블로그를 통해 온하랑이 시테니에 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온하랑은 자신이 손해를 입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지만 아무 이유 없이 남을 비웃을 사람도 아니었다.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또한, 이엘리아가 겁을 주려 했다는 말도 믿기 어려웠다.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말하기 마련이다. 예전에 이엘리아가 누군가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도 그녀는 단순한 부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이엘리아는 믿을 수 없었다.“내가 겁을 주려 했어도 그 사람들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았어요. 근데 왜 내 차를 부수고 나를 때린 건데요? 오빠, 왜 자꾸 그 여자들을 감싸고 돌아요?”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책임을 축소했지만 연도진은 여전히 그녀의 편을 들지 않았다.그는 정말 페이에 미쳐 있는 것 같았다!“며칠 전에 비웃었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복수하지 그랬어?”연도진은 차가운 얼굴로 이엘리아를 한 번 쳐다보았다.“왜냐하면...”하지만 연도진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왜냐하면 넌 아버지와 가문에 의지할 뿐 아무것도 할 줄 모르기 때문이지. 억울하면 마치 어린애처럼 어른들에게 하소연할 뿐이잖아!”“오빠...”이엘리아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온하랑에게 차를 부수고 따귀를 맞은 후, 이제는 연도진에게까지 꾸중을 듣다니...그녀는 정말이지 이런 모욕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정말 너무해요. 돌아가서 삼촌한테 다 말할 거예요!”“그래, 가서 말해봐. 삼촌이 널 감싸 줄지 어디 한번 보자.”연도진
자신이 이렇게 맞고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연도진이 여전히 페이의 편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엘리아는 페이를 그의 마음속에서 지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렇게 이엘리아는 상처 입은 얼굴로 서정훈의 집으로 돌아갔다.서정훈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는데, 아들은 이미 결혼해서 며느리와 함께 집을 나갔고 딸은 해외에서 유학 중이었다.서정훈은 일로 바빴고 그의 아내도 한 부서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어서 집에는 자주 사람이 없었다.저녁이 되어서야 서정훈 부부가 집에 돌아왔다.이엘리아는 서둘러 서정훈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자신에게 불리한 요소는 감추고 애교를 부렸다.“삼촌, 숙모, 꼭 저 대신 복수해주셔야 해요!”그러자 서정훈의 부인은 피곤한 듯 이마를 주무르며 서정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서정훈은 이엘리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그의 온화한 외모 뒤에 있는 깊고 강렬한 눈빛은 마치 어떤 비밀도 그의 앞에서 숨길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이엘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고 손바닥에는 땀이 났다.“삼촌...”“그 말 다 사실이야?”서정훈은 물었다.“...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서정훈은 그녀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모습을 보고 미소 지었다.“확실해?”“저... 저...”이엘리아는 눈을 깜빡이며 변명하려 했지만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연도진이 비웃으며 말했다.“이엘리아, 거짓말이지? 내가 추측하기엔 넌 단순히 겁을 주려 한 것이 아니라 진짜 복수를 하려 한 것 같은데... 그 사람들한테 되레 당했지, 그렇지?”“아니요... 그렇지 않아요...”이엘리아는 변명하려 했지만 연도진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앨리스를 겨누며 말했다.“그쪽이 말해봐요!”앨리스는 이 상황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이엘리아의 눈짓을 받았다.그래서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말했다.“사실 처음에 자동차로 그 사람들을 치려고 했어요...”이 말을 들은 이엘리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하지만 이엘리아를 탓하지 마세요. 제가 그렇게
부승민이 구치소에서 무사히 나온 뒤 부현승과 서혜민의 결혼식 일정도 다시 잡혔다.달라진 게 있다면 임신한 서혜민의 배가 눈에 띄게 커졌다는 것이다.하여 결혼식은 심플하게 진행되었다.이제 막 결혼하는 신부가 임신해서 배가 나온 게 보기 안 좋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신부와 배 속의 아이가 힘들까 봐 간단하게 준비했다.서혜민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녀에게는 발언권이 없었다.한 번뿐인 결혼식을 럭셔리하게 치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이런 요구를 말했다가 괜히 아이에게 신경 쓰지 않는 엄마로 비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웨딩카는 아침 5시에 강남으로 출발했고 8시쯤에 신부에게 도착했다.서혜민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부현승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많은 친척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팔짱을 끼고 신혼집으로 들어갔다.온하랑은 부씨 가문 식구로서 소청하 및 가까운 친척들과 함께 찾아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그러다가 10시쯤에 모두가 함께 호텔로 출발했다.양가 친척들만 참석하는 단출한 결혼식을 치른다고 했지만 호텔은 그에 비해 매우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졌다. 부씨 가문은 신부 쪽을 위해 버스 두 대를 빌려 직접 신부 측의 친척들을 모셔 와 피로연에 참석시켰다.온하랑도 소청하와 함께 서혜민의 부모님께 인사를 마친 후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는데 부선월이었다.부선월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핸드백을 들고 안으로 걸어갔다.순간 소청하와 눈이 마주친 온하랑은 급히 입을 열었다.“신부 측 사촌 언니가 아직 안 온 것 같네요. 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싫어하는 사람에게 굳이 인사할 필요가 없었기에 온하랑은 무시한 채 걸음을 옮기려 했다.“알겠어요.”소청하가 답했다.그런데 이때 온하랑을 발견한 부선월은 목을 한껏 치켜들고선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여긴 왜...”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온하랑은 마치 부선월을 보지 못한 듯 일부러 시선을 돌리
그 상대가 온하랑의 사촌오빠인 줄은 이제야 알았다.온하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씨 가문에 입양되었으니 사촌 오빠라는 사람도 부씨 가문인 게 틀림없었다.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 부승민도 나타날 것이다.부승민과의 거래가 떠오른 서수현은 옆에 있는 온하랑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선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온하랑은 두 사람을 이끌고 홀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게 했다.하객들이 거의 도착하자 온하랑은 단상 바로 옆에 놓인 원형의 테이블로 걸어갔다.이 테이블에는 김정숙, 소청하, 부윤민 그리고 가까운 친척 이모들로 모인 부씨 가문의 식구들이 앉았다.부선월은 김정숙의 왼쪽에 자리 잡고 앉았다.테이블에 온 온하랑은 부선월에서 한 자리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부선월과 가까운 중간의 빈자리는 부승민을 위해 남겨두었다.부선월은 온하랑을 째려보며 속으로 궁시렁댔다.‘버르장머리 없는 것.’인기척 소리에 주위에 있던 모든 친척이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쳐다봤다.사실 사촌 중 온하랑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녀가 처음 부씨 가문에 입양됐을 때 다들 별로라는 티를 팍팍 내다가 부승민과 결혼한 후에야 조금 나아졌다.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고모님도 오셨네요? 언제 가시게요?”부선월은 어이가 없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왜? 빨리 갔으면 좋겠어?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 났네.”“그럴 리가요.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코빼기도 안 보이셔서 당연히 오늘도 안 오는 줄 알았죠. 이제 보니까 오빠가 그래도 체면이 좀 있는 편이네요.”“너...”김정숙은 재빨리 부선월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렸다.“이 좋은 날에 결혼식 망칠 일 있어? 이제 그만해.”결혼식이 시작되려 할 때 어디선가 큰 손이 나타나 온하랑 옆에 있던 의자를 잡아당겼다. 자리에 앉은 남자는 온하랑의 다리에 손을 얹더니 자연스럽게 만지며 입을 열었다.“고모, 언제 오셨어요?”“어제.”부선월은 부승민
화려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가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입장했다.신랑과 신부는 서로 반지를 교환했고 곧이어 무대 아래로 내려가 양가 부모님께 절을 올리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서수현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무대를 꾸민 아름다운 꽃바구니가 앞을 가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다.인사를 끝낸 후 신랑 신부는 양가 부모님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서수현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매니저님 어머님이 왜 집주인 아주머니랑 닮은 것 같지?’서석철도 뭔가 이상한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서수현에게 물었다.“수현아, 저 사람 집주인이랑 닮은 것 같지 않니?”“저도 마침 그 생각 했어요.”결혼식이 끝나면서 신랑신부가 퇴장했고 곧이어 종업원들이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신부는 임신 중이라 음주하면 안 됐기에 신랑만 어른들과 함께 술 한잔을 기울였다.그렇게 잔을 비우고선 다시 술을 채워 어른들의 지시를 따라 다음 테이블로 향했다.걸음을 옮기던 부현승은 낯익은 사람을 보고선 걸음을 멈췄고 혹시나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부릅뜨고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옆에 앉은 서석철도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님을 깨달았다.그는 이전에 서씨 가문의 친척들로부터 ‘현이’라는 이름을 자주 들었지만 그 사람이 서수현인 줄은 아예 상상도 못 했다.서혜민의 사촌 언니가 서수현이라니, 참 공교로운 일이다.마침 고개를 든 서수현도 부현승과 눈이 마주쳤고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잔을 채웠다.신랑이 테이블로 다가오자 사람들은 젓가락질을 멈췄다.윗사람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부현승은 옆에 있던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저와 혜민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혜민이는 몸이 안 좋아서 인사드리러 못 왔는데 제가 그 마음까지 담아서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 테니 잘 지켜봐 주세요.”서수현도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음료수를 들어 보이며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셨다.그렇게 몇 마디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그 여자 피 확실하지?”“확실합니다. 못 믿겠으면 직접 cctv를 돌려보셔도 됩니다.”종업원의 답을 들은 부선월은 말없이 웃으며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비밀번호는 없어.”그렇게 말 한 뒤 피 묻은 접시 조각이 담긴 유리병을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먼저 들어갈게.”차에 탄 온하랑은 운전기사에게 말했다.“근처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보건소로 가주세요.”기사는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길일이라서 그런지 오늘따라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이 유난히 많았다.호텔 근처 곳곳이 자가용 차들로 꽉 막혔고 짧은 거리는 이동하는데 적어도 10분 정도 걸렸다.온하랑은 미간을 찌푸린 채 몸에 난 상처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중 가장 심각한 건 종아리였다.순간 아랫배도 아파왔다. 비록 틍증이 심한 건 아니었지만 식은땀이 맺힐 정도로 쑤셨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온하랑은 등받이에 기대여 허약하게 말했다.차라리 병원에 가서 검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기사더러 차를 돌리라고 했다.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의사 선생님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고 의사 선생님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마지막 생리가 언제죠?”“20일 전쯤?”온하랑은 생각에 잠기더니 긴가민가해하며 말을 이었다.“그런데 이번에는 양이 너무 적었어요. 다음 날에 바로 없어져서...”“다음날에 없어진 거면 생리가 아니라 출혈인 것 같은데요?”온하랑은 몇초간 침묵했다.“그럴 수도 있겠네요.”기억이 맞다면 그날은 부승민과 침대에서 오랫동안 사투를 벌이다가 나중에 출혈이 발생했다.‘설마 잠자리를 가져서... 질염이 생긴 건가?’“산부인과에 가보세요.”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번호표를 뽑은 후 온하랑은 산부인과에 가서 자신의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다.10분 후, 온하랑의 순서가 되었고 그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 온하랑 씨 맞으시죠? 어디가 불편해서 찾아오셨죠?”온하랑은 자신의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