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은 사진과 달리 화면감, 이야기성, 론리성과 제품 자체의 풍격 특점 및 시장을 결합시켜 대중적 취향에 부합되어야만 선전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제품 광고와 동영상 발표 방안에 대해 카일러는 줄곧 회답하지 않았다. 어제 카일러는 비서를 보내 3명에게 오늘은 동영상 방안에 대해 회의를 열자고 말했다.온하랑과 기타 3명은 지정된 시간에 마케팅 층에 도착했고 비서는 그들에게 먼저 회의실에 가서 앉으라고 했다.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두 사진작가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마케팅 층에서 ‘띵’ 소리를 내며 멈춰 서더니 젊고 멋있는 여자가 걸어 나왔다.그녀를 본 온하랑은 걸음을 멈추었다.‘이엘리아가 여기에 왜?’이엘리아도 온하랑을 발견하고 도전적인 미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마케팅부 디렉터 사무실로 향했다.온하랑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이엘리아가 그녀 때문에 온 것 같은 막연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온하랑은 낮은 목소리로 비서에게 물었다.“저 여성분은 누구예요?”비서는 이엘리아를 보고는 모른다고 대답했다.이엘리아가 마케팅 책임자와 친구였거나 사업적인 거래가 있었다면 비서가 그녀를 모를 리 없었다.이엘리아의 도전적인 미소를 생각하며 온하랑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그녀는 회의실에 앉아 침묵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이엘리아가 디렉터에게 뭐라고 말할까?윌슨 가문의 아가씨의 신분으로 디렉터에게 그녀의 참여를 막으라고 하려나?만약 정말 그렇게 요구한다면 디렉터는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온하랑은 이런저런 생각에 조바심이 탔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범인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들어와서 커피를 리필해주며 말했다.“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디렉터께서 중요한 일로 카일러 씨를 부르셨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온하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디렉터가 왜 카일러를 부른 걸까?카일러한테 그녀를 해고하라고 했으려나?온하랑은 커피를 홀짝거렸는
하지만 온하랑의 마음은 여전히 편안하지 않았다. 카일러가 회의실을 떠나는 걸 보고 온하랑은 다른 두 사진작가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먼저 돌아가세요. 저는 카일러 님에게 볼 일이 있어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갔고 카일러를 따라잡았다. 카일러는 곁눈질로 한 번 그녀를 쳐다보며 앞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페이, 무슨 일이에요?”온하랑은 웃으며 말했다. “방금 이엘리아 아가씨께서 디렉터를 찾으셨다는데, 무슨 일이었나요?”카일러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디렉터님이 이엘리아가 윌슨 가문의 이름을 내세워 사진작가를 바꾸라고 협박했다고 말했어요.”“그러면 디렉터님은 어떻게 말씀하셨어요?”“어떻게 말하긴요. 당연히 무시했죠. 우리가 어떤 사진작가를 선택하든 이엘리아 씨랑 아무런 상관없어요. 윌슨 가문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 회사 내부 사안에 개입할 수는 없어요. 그분의 아버지가 직접 나타나지 않는 이상 말이죠.”카일러의 말에 듣고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온하랑은 사업 촬영을 선택한 것에 만족했다. 회사가 실력이 있어서 이엘리아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까.개인적인 사진 스튜디오였다면 이런 큰 압박을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온하랑은 마침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이엘리아는 디렉터가 그녀를 거절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거절이 매우 단호할 줄도 몰랐다. 과거에는 윌슨 가문의 세력을 이용하여 싫어하는 사람들을 필라시에서 쫓아냈지만 이번에는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엘리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몇 소비자를 사들여 일부 일용 화학 제품에 독성 물질이 들어있다고 주장하게 하고, 몇몇 건달들을 쇼핑몰 매점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하였다. 일화 그룹은 전에 경쟁사의 비방과 방해를 겪었기 때문에 대처 경험이 대단했다.그들은 이번에도 경쟁사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여기고 매우 깔끔하게 일을 처리했으며 몇몇 소란을 피운 건달들을 잡아 가만
현지인들은 햇볕 쬐기를 좋아한다.또 주말인지라 모래사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 남자들은 상반신을 벗고 여자들은 비키니를 입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바비큐를 먹거나 모래에 몸을 묻고 햇볕을 쬐곤 했다.온하랑은 도착하자마자 모래사장에서 돌아다니는 하얀 몸을 볼 수 있었다.멀리서 바라보자니 눈부신 광경에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녀는 실눈을 뜨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몇 분 후에야 마침내 벨라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었다.핑크 비키니를 입은 벨라는 파라솔 아래 모래사장에 체크 무늬 천을 깔고 앉아 있었는데 옷감 가운데에 작은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바구니 안에는 약간의 음식이 놓여 있다.천천히 다가가 보니 벨라의 긴 금발이 제멋대로 흩어져 햇빛 아래서 아름다운 비단결처럼 빛났다.희고 고운 피부를 자랑하는 벨라는 허벅지가 하얗다 못해 청색의 혈관이 투과될 정도였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가는 허리, 분홍색 천으로 감싸져 곡선을 이룬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온하랑은 속으로 감탄하며 저도 모르게 그 말캉한 촉감을 느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그리고 벨라의 옆자리에는 비키니 차림의 친구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페이, 드디어 왔구나.”달씨가 먼저 온하랑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이윽고 벨라도 고개를 돌려 온하랑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페이, 어서 치마를 벗고 우리와 함께 햇볕을 쬐자.”“오늘 해가 좀 쨍쨍한데 너무 뜨겁지 않아?”“햇볕을 쬐어야 하니까 옷을 벗고 시원하게 입어야지.”벨라가 윙크를 하며 능글맞게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우린 선크림을 발랐으니까 화상을 입지 않을 거야.”온하랑은 체크 무늬 천의 가장자리에 앉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해변은 온통 화끈한 비키니로 가득 차 있는데 그녀 하나만이 예외인 것 같았다.결국, 온하랑은 치마를 벗어 곱게 접은 뒤 한쪽에 놓았다.이런 상황은 그녀도 이미 예상했기에 진즉 안에 원피스 수영복을 준비해두었다.국내 여행 때도 바닷가를
노준형은 진심으로 부승민이 아깝다는 듯 혐오스러운 눈길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그는 확실히 온하랑을 싫어한다. 그러나 부승민에게 반드시 추서윤과 함께 있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다만 부승민이 온하랑을 선택한 후, 부승민은 위험에 빠졌고 그와 달리 온하랑은 외국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만약 부승민이 이를 알게 된다면 마음속으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른다.한편, 온하랑은 노준형의 표정을 보며 우습다는 듯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부승민이 구치소에 갇혀있는 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그리고 오빠는 부승민의 가장 좋은 친구로서 이렇게 의분이 가득 차서 그 사람을 대신하여 화를 내면서도 결국 여기에서 여자나 꼬시고 있잖아요.”정곡이 찔린 듯 순간 말문이 막힌 노준형이 버럭 화를 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승민이가 널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데 말 한마디로 그냥 깨끗이 정리하려고? 난 네가 이기적인 여자라는 거 진즉 알아봤어. 승민이가 눈이 멀어서 너에게 반한 게 분명해.”부승민에게 속아 감정이 놀아나면서도 그의 친구에게 이런 핀잔까지 들으니 온하랑은 씁쓸하면서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늘어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하지만 벨라 등 사람들 앞에서 노준형과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온하랑은 먼저 일행들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벨라, 먼저 가서 저쪽에서 기다려. 금방 갈게.”벨라와 다른 일행들도 온하랑과 노준형 사이의 앙금을 눈치채고 순순히 물러나 주었다.“알겠어. 그럼 너도 조심해. 우리 먼저 갈게.”노준형은 벨라 등 몇 명을 쳐다보고는 눈썹을 치켜들며 조롱하는 말투로 시비를 걸었다.“왜? 필라시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백인들에게 아부하기 시작한 거야?그리고 내가 저 사람들 앞에서 네 정체를 폭로할까 봐 이렇게 급하게 떠나보내려고 하는 거야?”“제기랄.”온하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막말을 내뱉었다.“노준형 씨, 당신은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 어쩐지 당신 부모님이 당신더러 회사에 손도 못 대게 하더라니.
하지만 노준형의 말대로라면 그는 이곳에 오기 전 추서윤과 만났었고 그들은 아직 화해하지 않았다고 한다.이건 어떻게 된 일이지?게다가 노준형의 감정을 보아 거짓을 얘기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하, 됐다.온하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복잡한 생각을 전부 떨쳐 버렸다.어쨌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월요일 점심, 최동철이 밥을 산다며 온하랑과 약속을 잡았다.지난번에 너무 급히 만난 탓에 미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 모두 해주고 싶은 말이 가득했다.온하랑은 그에게 처음 이곳에 온 생활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는데 처음에는 낯설고 호기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익숙해졌고 가끔은 새로운 발견도 얻을 수 있었다.그리고 최동철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웃겼던 농담도 함께 전하며 자신의 생활 경험을 전해주었다.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두 사람은 매우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얼마나 지났을까, 최동철이 문득 말을 꺼냈다.“승민이가 구속된 건 이미 알고 있겠지?”온하랑은 뜻밖에도 갑자기 이 일을 꺼낸 최동철에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아요.”“어떻게 생각해?”최동철이 눈을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자 온하랑은 눈빛을 드리운 채 아무 생각 없이 곧바로 답해주었다.“저는 이제 그 사람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요. 부승민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말았는지 제가 알 건 또 뭐예요?”“진짜?”“물론이죠. 그런데 이 얘기는 갑자기 왜 꺼내시는 거예요?”“아냐.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은 거지.”최동철은 물컵을 들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태연하게 말했다.“사실 이 일은 내 사촌과 관련이 있거든. 양측에서 어떤 일 때문에 마찰이 생겼는데 지금 상황은 쌍방의 싸움에 가깝지. 그러니까 난 내 사촌을 위해 행동할 거야. 그리고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네가 나중에 알고 나에게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고. 네가 부승민을 돕고 싶더라도 상관없어. 하지만 난 입장 문제로 우정이 깨지는 걸 원치 않아
“맞아. 두 사람은 연기하고 있었던 거야.”그러자 온하랑은 냉소를 터뜨리며 반박했다.“노준형 씨, 제가 그렇게 만만해요? 그럼 그들이 연기한 이유는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겠어요?”“너와 승민이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리고 이 모든 일에 네가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야. 부승민은 일찍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미리 준비를 했던 거야.”진실을 알게 된 노준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부승민은 정말 진심으로 온하랑을 사랑하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온하랑을 대신하여 생각하고 있다니.혼자 이 모든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온하랑의 안전만을 바랬다.하지만 노준형은 부승민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온하랑에게 오해를 받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반드시 온하랑에게 이 일을 알려야 한다.온하랑도 부승민의 감정을 알게 된다면 분명 진심으로 감동할 것이다.그런데 온하랑은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우습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노준형은 당황하고 말았다.“반나절이나 공들여 생각해낸 이유가 겨우 이거라는 게 웃겨서요. 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요?”이마에 ‘바보’라고 쓰이기라도 해서 노준형이 이렇게 쉽게 그녀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부승민이 그런 짓을 한 이유가 온하랑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서라고?그런데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을까?만약 그가 정말로 그녀를 연루시키고 싶지 않았다면 할머님과 부시아를 대하는 것처럼 그녀에게도 분명히 말해주고 외국으로 보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관계를 깔끔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을까?온하랑도 외국으로 출국하긴 했지만 그 과정과 이유는 전혀 다르다.“다 사실인데 왜 못 믿는 거야? 부승민이 그렇게 널 좋아했는데...”마음이 다급해진 노준형이 말을 더듬었다.“당신의 뜻에 따르면 부승민의 목적은 나의 안전이었겠죠. 지금 전 외국에서 매우 안전하니까 그의 목적도 달성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만 편히 쉬세요.”온하랑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그리고
하여 온하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기다리면 되는 것이다.만약 노준형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부승민이 구치소에서 나온 후에 그녀를 찾으러 올 것이다.만약 나오지 못한다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면 되는 것이다.아파트 아래층으로 돌아온 온하랑은 마침 아래로 짐을 나르고 있는 옆집 이웃과 마주치게 되었다.겉보기에는 담담해 보였지만 온하랑의 마음속에는 기쁨의 물결이 넘쳐났다.드디어 이사를 하는구나.온하랑의 옆집 이웃은 버스킹을 자주 다니는 뮤지션으로 집에서 늦게까지 마이크를 잡고 노는 탓에 온하랑은 늦은 저녁에도 잘 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었다.결국, 지난번 회의 때 정신을 딴 데 팔아 완전한 거짓말을 하지 못했었다.물론 옆집에 가서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지만 낯가죽이 두꺼운 이웃은 당일은 좀 수그러드는 것 같았으나 이튿날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계속하여 마이크를 잡아 온하랑을 무척 화나게 했었다.그런데 뜻밖에도 이웃이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었다니, 걷는 것조차 홀가분해진 온하랑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이웃은 무거운 종이상자를 옮기느라 온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홀가분해 보이는 온하랑의 모습을 본 이웃은 화가 치밀어 올라 종이상자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고 따지기 시작했다.“어이, 당신은 정말 모질기 짝이 없군. 아무리 내가 떠드는 게 싫다고 해도 그냥 몇 번 더 일깨워주면 되지. 당신이 무슨 근거로 사람을 찾아 나를 내쫓아?!”그 말에 온하랑은 멈칫하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억지 부리지 마세요. 제가 언제 사람을 찾아서 당신을 내쫓았습니까? 게다가 여긴 우리 집 아파트도 아닌데.”“아직도 인정 안 하네? 어제 어떤 한국 남자가 와서는 나더러 이곳을 떠나라며 협박했단 말이야. 당신이 찾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란 말인데?”남자?진도원?온하랑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그녀가 묵인했다고 생각한 이웃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을 이었다. “그러니 빨리 가서 그 사람에게 말해. 나더러 강제로 옮기라고 협박하지 말라고.”
온하랑은 의심스러운 눈초리고 한참을 둘러보다 결국 의혹을 등 뒤로 넘겨버리고 잡지사로 향했다.잡지 내부페이지에는 배우 사진뿐만 아니라 인터뷰 내용과 관련 묘사도 적혀있고 사진은 인터뷰 내용과 함께 사용되며 표현력이 있어야 한다.물론 배우 측에도 원하는 스타일이 있어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따로 두고 있다.그런데 온하랑이 지극히 젊은 여자이자 외국인인 것을 보고 배우 매니저는 깊은 걱정이 들었다.그는 온하랑이 괜히 사진을 잘못 찍어 모든 것을 망칠까 봐 편집장에게 다른 사진작가가 있냐고 묻기까지 했다.그러자 편집장은 애써 매니저를 달래주었다.“에이, 조급해하지 말게. 페이도 상당히 훌륭한 젊은 사진작가야. 먼저 그녀에게 기회를 주자고. 반드시 자네 마음에 쏙 들 테니까.”사실 편집장도 자신은 없었다. 페이도 전에 인물 촬영을 한 경험이 있지만 일반인과 스타는 요구 사항이 다를 뿐만 아니라 화면 구현도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들이 불러냈기에 인제 와서 그녀를 돌려보낼 수도 없다.편집장이 막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매니저도 그녀의 체면을 봐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같은 시각, 온하랑은 매니저와 배우 본인과 소통하기 시작했다.자신의 서비스 대상이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 온하랑은 배우의 사진과 작품을 찾아다니며 배우의 얼굴 상태와 기질을 미리 연구했고 지난 잡지 속 스타일도 찾아보며 대략적인 촬영 계획을 세웠다.그들이 원하는 효과를 알게 된 후, 온하랑은 스태프더러 소품을 준비하도록 하였다.현장은 이미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이었고 그녀는 그저 안에서 좌우를 둘러보며 간단하게 배치를 바꾸었다.매니저는 온하랑의 베테랑다운 모습을 보며 천천히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상대도 잡지와 사진을 찍은 경험이 많은 배우였기에 그들은 호흡이 매우 잘 맞았다.내부페이지 일러스트 외, 그들은 결코 적지 않은 사진을 성공적으로 촬영했다.촬영을 마치고 온하랑은 모든 사진을 컴퓨터로 옮겨와 편집장, 배우, 매니저에게 한 장씩 넘겨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