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은 아주 미안했다.“죄송해요, 벨라 씨. 제가 오는 길에 차에 치여서 다리도 다치고 카메라도 깨져서 오늘 촬영은 미뤄야 할 것 같아요.”벨라가 말했다.“릴리안 매니저님이 이미 저에게 말해줬어요. 저야 시간이 넉넉하니 언제든지 촬영해도 괜찮으니까 하랑 씨는 몸 걱정이나 해요. 하랑 씨 지금 병원이에요 아니면 집이에요? 제가 보러 갈게요.”“벨라 씨 그냥 제 집으로 오세요. 집 열쇠는 문 앞의 화분 안에 있어요. 저는 카메라를 수리점에 맡기고 바로 들어갈 거예요.”“알겠어요.”벨라는 전화를 끊고 메이크업을 받던 의자에서 일어나 메이크업 선생님께 말했다.“오늘 촬영이 취소되어서 나중에 다시 약속 잡을게요.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어요.”그러나 온하랑이 집에 도착했을 때 벨라는 아파트 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온하랑이 택시에서 내리는 걸 보고 벨라는 얼른 다가가서 온하랑을 부추기며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벨라 씨, 정말 미안해요. 저 때문에 헛걸음질하게 했네요.”“괜찮아요. 저 시간 많아요.”벨라는 온하랑을 부축하여 소파에 앉혔다.“맞다, 하랑 씨를 다치게 한 사람은 잡았어요?”“아니요. 그 사람은 저를 치고 도주했어요. 경찰 말로는 소식이 있는 대로 저에게 전화할 거라고 했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저의 아버지보고 도와달라고 할게요. 하랑 씨가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카메라를 수리하는 돈은 물어달라고 해야죠.”“정말 고마워요.”“별말씀을요. 학교 다닐 때 하랑 씨가 저를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요. 하랑 씨가 아니었으면 저는 맨날 제임스 영감한테 혼났을 거예요. 하랑 씨 집에 먹을 거는 있어요? 지금 상태로 이틀 정도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 것 같은데요.”이렇게 얘기하면서 벨라는 주방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제가 밑에 마트에 내려가서 하랑 씨 먹을 거 좀 사놓을게요. 요 며칠에는 내려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요.”“그래요. 고마워요, 벨라 씨.”온하랑은 벨라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았다.벨라는
촬영 전날, 온하랑은 시스템에 등록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곧 전화가 연결되었다.“안녕하세요, 이엘리아 되세요? 저는 내일 촬영을 담당한 포토그래퍼 Fay입니다.”전화기 너머로 몇 초가 지났을까, 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이엘리아인데. 무슨 일이죠?”온하랑은 이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다름 아니라 선호하시는 스타일에 대해 여쭤보고 싶어서요. 촬영 배경이나 전체적인 분위기에 대해 요구가 있으신가요?”“음... 전화로 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내일 현장에서 말씀드리죠.”온하랑은 흠칫 놀라고는 말했다.“네, 그래도 되죠.”촬영 당일 분장실에 도착한 온하랑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는 여자를 보고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그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바로 오주행 비행기 안에서 김시연과 충돌한 승객이었다. 그리고 시테니 쇼핑 플라자에서 손목시계 하나 때문에 또다시 갈등을 빚었다.어쩐지 어제 그녀의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그렇다면 이엘리아가 온하랑을 사진작가로 지목한 것은 그녀의 신분을 알기 때문이었을까?온하랑은 못 알아본 척하고 처음 보는 고객 대하듯 말했다.“이엘리아? 저는 포토그래퍼 Fay입니다. 어떤 스타일과 배경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혹시 참고할만한 사진이라도 있으면 저한테 보여주세요. 제가 비서에게 세팅하라고 할게요.”이엘리아는 거울에 비친 온하랑을 한번 보고는 말했다.“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화장하고 현장에 가서 다시 얘기하죠.”“하지만 화장하고 나서 현장을 세팅하면 시간이 걸립니다.”“그건 그쪽 사정이지 제 사정이 아니죠.”이엘리아는 덤덤하게 말했다.‘그래!’처음부터 온하랑은 불안한 기운이 들었다.마음속으로 이미 이엘리아가 사진을 찍으러 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트집을 잡으러 온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그녀는 한인의 얼굴이고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완벽한 영어 이름이었다. 여기 태어난 한인계이거나 혼혈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오주에서 한 말과 행동을 통해 그녀가 부잣집 출신이고 현지에 어느 정
“그럼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 사진 속 배경은 이엘리아의 옷과 어울리지 않아요. 너무 난잡할 정도로 복잡해서 화면 중심 비중에 영향을 미쳐 결국 사진이 혼잡해질 수 있어요.”“난 그런 배경이 좋아요.”온하랑은 이엘리아의 웃는 얼굴을 보며 그녀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래요, 알겠어요.”온하랑은 비서를 불러 현장을 세팅했다.“현장 세팅에 시간이 걸리니 일단 다른 배경부터 찍죠. 그러면 최대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요. 원활한 촬영을 위해 이엘리아도 동의할 거로 생각합니다.”이엘리아는 가볍게 웃으며 마지못해 동의했다.두 번째 대결은 가까스로 넘겼다.그런데 촬영 중에 또 문제가 생겼다.이엘리아가 일부러 온하랑이 유도한 포즈를 제대로 취하지 않아서인지 어딘가 부족해 원하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온하랑이 원하는 그림이 나오려면 여러 번 주의를 기울여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온 오전 촬영했지만 온하랑이 만족할만한 사진이 별로 없었다.잠시 촬영을 멈추고 온하랑은 방금 찍은 사진을 이엘리아에게 보여주었다.이엘리아는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대체 사진을 어떻게 찍는 거예요? 너무 못생겼잖아요. 전부 다시 찍어요.”“다시 찍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오전 내내 시간을 낭비한 셈이니 이엘리아가 저녁에 야근을 좀 하셔야겠네요. 시각적인 효과를 추구하는 이엘리아가 이 정도 시간은 내주시겠죠?”“그쪽 실력이 없어서 날 이렇게 못생기게 찍어 놓고 무슨 근거로 나더러 야근하라는 거죠?”“지금 문제는 시간이 하루 반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 상황대로라면 절대 패키지 내용을 완성할 수 없는데, 이엘리아가 추가 촬영을 원하지 않으면 야근을 할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이엘리아는 촬영을 다 못하기를 기다려서 환불할 생각인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촬영할 필요 없겠네요. 지금 환불하세요.”이렇게 하면 온하랑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이엘리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 야근하죠 뭐.”이엘리아는 확실히 이틀 동안 온하랑을 괴롭힌 후 환
릴리안의 사무실에 가서 온하랑은 사실대로 말했다. 그녀가 촬영한 작품은 이엘리아가 만족할 수 없고 그녀에게 다른 포토그래퍼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이런 일은 전에도 종종 있는 경우였다. 어떤 포토그래퍼는 까다로운 손님을 꺼렸고 어떤 고객은 포토그래퍼의 실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이엘리아는 윌리엄의 친구였고 릴리안도 그녀를 알고 있었다.과거 이엘리아의 화보 촬영에는 무조건 윌리엄이 직접 나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엘리아가 Fay를 지목해 릴리안도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지금 Fay가 그녀를 찾아오자 릴리안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비록 Fay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릴리안은 그녀의 작품을 보고 그녀가 보기 드문 훌륭한 사진작가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윌슨 가문의 유일한 아가씨인 이엘리아는 교활하고 제멋대로여서 다른 사람이 늘 다독여야 했다.Fay를 포토그래퍼로 지정해 놓고도 작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한 것은 아마 이엘리아가 일부러 Fay를 괴롭히고 있다고 추측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Fay는 스튜디오 직원이었다. 릴리안은 이엘리아가 스튜디오와 일로 그녀를 괴롭히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그녀는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먼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여보세요, 이엘리아. 나 릴리안입니다. 듣자니 Fay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요?”“맞아요.”릴리안까지 알게 된 이상 이엘리아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작가 수준이 별로예요. 날 이상하게 찍잖아요. 대체 스튜디오는 왜 이렇게 수준 떨어지는 포토그래퍼를 고용한 거죠?”Fay는 릴리안이 직접 면접을 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엘리아가 이런 말을 하니 릴리안은 당연히 기분 나빴다.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그렇다면 제가 다른 포토그래퍼로 바꿔드릴게요. 누가 시간이 되는지 한번 체크해볼게요.”“그래요, 알겠어요.”전화를 끊고 릴리안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에게 말했다
그녀는 이엘리아 옆에 있는 하인을 한번 보고 말했다.“이엘리아 양, 누가 훔쳤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제가 가서 CCTV를 확인하는 게 어때요?”이엘리아는 릴리안의 말에 온하랑을 가리키며 고집했다.“릴리안, 난 안니 믿어요. 절대 내 목걸이를 훔칠 리가 없어요. 범인은 페이가 분명해요! 저 사람 몸수색 해야겠어요!”안니가 바로 하인의 이름이었다.“몸수색?”온하랑이 빙그레 웃더니 그녀를 쏘아보았다.“이엘리아, 난 당신 수작에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어요. 내 몸을 수색하고 싶다면 증거를 내놔요! 아무 증거도 없이 어떻게 몸수색을 허락하지?”이엘리아가 말하기 전 온하랑은 안니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은 당신 사람이니 증인이 될 수 없어요.”릴리안이 또 말했다.“아무래도 CCTV를 돌려야겠네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주웠을지도 몰라요.”이엘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밖에서 캐주얼한 차림의 청년 남자가 들어왔다.사무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윌리엄을 보자 이반의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스쳤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온하랑을 힐끔 쳐다보더니 뭔가를 작심한 듯했다.이엘리아는 구원자를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온하랑을 가리키며 말했다.“윌리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가 내 목걸이를 훔치고 인정하지 않잖아!”윌리엄의 시선이 온하랑에게 가더니 몇 초 동안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려 릴리안을 바라보았다.릴리안은 즉시 설명했다. “페이가 이엘리아 목걸이를 훔쳤다고 하는데 증거가 없어요.”온하랑도 윌리엄을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이름은 윌리엄이지만 한국인의 얼굴이고 릴리안의 태도를 보면 스튜디오 사장인 것 같았다.옆에 있던 이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사실...”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사실 뭐?”윌리엄이 물었다.“페이가 이엘리아 아가씨 핸드백에서 목걸이를 가져가는 걸 제가 봤어요.”이반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
“내가 훔친 게 아니니 절대 인정할 수 없죠. 윌리엄, 나에게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이반과 대질하고 싶어요. 만약 내가 진짜 목걸이를 훔쳤다면 스스로 사직할게요. 애초에 내가 사릴을 선택한 이유는 사릴의 신념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온하랑은 이반을 보며 말했다.“만약 불투명한 증언 하나만으로 내 죄를 정한다면 난 애초의 선택을 후회할 거예요.사릴은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신념에 어울리지 않아요.”“그래요, 대질하세요. 나도 인정머리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아요.”온하랑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윌리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엘리아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다급하게 제지했다.“윌리엄, 그렇게 많은 변명을 들어서 뭐해? 죄를 벗을 궁리만 하겠지.”“이엘리아, 설마 두려운 거예요?”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진짜 목걸이를 훔쳤다면 내가 이반이랑 대질하는 걸 지지해야 마땅하죠. 나의 치욕을 못 박는 셈이니.”“흥, 내가 왜 두렵겠어?”“그럼 대질하죠!”이엘리아가 더 말하려 하자 윌리엄이 제지했다.“놔둬.”이엘리아는 화가 나서 온하랑을 쏘아보았다.“이반, 내가 이엘리아의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다고 했는데, 그럼 언제 어디서 본 거죠? 내가 훔칠 때 이엘리아랑 안니는 뭐 하고 있었죠?”온하랑이 매섭게 물었다.이반은 놀라더니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을 거예요. 2번 세트장에서 촬영하다가 이엘리아가 조금 피곤해서 안니가 물 가지러 갔어요. 그때 기회를 타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어요.”“그럴 리가요. 당시 이엘리아 핸드백은 세트장 서쪽 구석에 주전자와 물컵이랑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기회를 타 목걸이를 훔치죠?”“안니가 휴지를 가져올 때 핸드백 지퍼를 열어 놓았어요. 안니가 등을 돌린 틈을 타 당신이 쏜살같이 달려가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어요.”온하랑은 피식 웃었다.“확실해요? 그런데 내가 잘못 기억했네요. 이엘리아 핸드백은 서쪽이 아닌 남쪽에 있었
이반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을 굳힌 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CCTV 영상을 네 얼굴에 뿌려야겠어?”윌리엄이 또박또박 물었다.“아니면 잘리고 싶어? 동료를 모함하고 사과도 안 하는 직원을 사릴은 원하지 않아.”이반은 어금니를 깨물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그리고 또?”“직접 보지 못한 상황에서 이엘리아 아가씨 목걸이를 훔쳤다고 해서 미안해요.”이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이반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앞으로 윌리엄과 릴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윌리엄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 일은 여기까지 하죠. 앞으로 그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마세요.”“잠깐만요, 이엘리아. 내가 당신 목걸이를 훔쳤다고 이유 없이 모욕하고 내 명성을 훼손한 것에 대해 사과하세요.”온하랑은 매서운 눈빛으로 이엘리아를 보며 말했다.이엘리아는 코웃음을 쳤다.“흥, 내 목걸이는 확실히 잃어버렸어. 난 그냥 합리적인 의심을 했을 뿐이지 당신을 어떻게 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뭐? 사과? 꿈도 꾸지 마!”“윌리엄. 고객이 사릴의 직원을 함부로 모욕하고도 사과를 거부해도 되는 건가요?”온하랑의 말에 이엘리아는 윌리엄과 눈을 마주치고는 기분 나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이엘리아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윌리엄은 그녀가 사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냥 오해에요. 페이.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됐어요. 모두 나가 봐요. 난 릴리안이랑 할 말이 있어요.”이엘리아는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안니, 가자. 윌리엄, 내가 이제 밥 살게.”진작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반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온하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윌리엄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윌리엄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일은 내가 충분히 페이 체면을 세워줬으니 더 이상 따지지
윌리엄은 잠시 눈을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온하랑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저는 단지 이곳은 제가 있을 만한 가치가 없고 더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어서 나가려고요.”이엘리아가 윌슨 가문의 큰 아가씨이니 윌리엄도 그녀의 미움을 사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온하랑은 이엘리아와 이미 안 좋은 감정이 생겼으니 계속 이곳에 머무르면 이엘리아가 다시 그녀를 괴롭힐 것이고 사장도 그녀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릴리안은 정직하고 공평한 사람이지만 이엘리아와 윌리엄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그래서 온하랑은 사릴을 떠나기로 했다.“페이,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릴리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동안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제가 만약 이 회사에 미련이 있다면 릴리안이 유일해요. 사직서는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처리해 주세요.”릴리안은 윌리엄을 한 번 보았다.윌리엄은 개의치 않았다.“사표 처리하라잖아요? 그렇게 하세요. 사릴은 포토그래퍼가 부족하지 않아요.”역시 젊은 사람은 고집이 세고 세상 물정도 모르니 그런 사람은 나가도 그만이었다.온하랑은 집에 돌아간 후, 사직서를 릴리안에게 보냈고 릴리안은 재빨리 처리했다. 또한 메일에서 그녀는 온하랑에게 보기 드문 훌륭한 작가라고, 이런 일이 발생해서 그녀도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온하랑을 돕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온하랑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줬다....릴리안의 친구는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평소 포토그래퍼와 협력이 잦았다.온하랑은 릴리안에게 감사하다는 메일을 보내고 편집장의 왓츠앱을 추가했다.아마도 릴리안이 이미 온하랑에 대해 언급했는지 편집장은 온하랑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기회가 된다면 그녀를 추천하겠다고 했다.사릴에서 사직한 후 온하랑은 제일 먼저 윌슨 가문에 대해 알아봤다.윌슨 가문은 19세기부터 필라시의 명실상부한 재벌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으로 한때 보수적인 윌슨 가문이 몰락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한 가주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