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이엘리아 옆에 있는 하인을 한번 보고 말했다.“이엘리아 양, 누가 훔쳤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제가 가서 CCTV를 확인하는 게 어때요?”이엘리아는 릴리안의 말에 온하랑을 가리키며 고집했다.“릴리안, 난 안니 믿어요. 절대 내 목걸이를 훔칠 리가 없어요. 범인은 페이가 분명해요! 저 사람 몸수색 해야겠어요!”안니가 바로 하인의 이름이었다.“몸수색?”온하랑이 빙그레 웃더니 그녀를 쏘아보았다.“이엘리아, 난 당신 수작에 같이 놀아줄 시간이 없어요. 내 몸을 수색하고 싶다면 증거를 내놔요! 아무 증거도 없이 어떻게 몸수색을 허락하지?”이엘리아가 말하기 전 온하랑은 안니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사람은 당신 사람이니 증인이 될 수 없어요.”릴리안이 또 말했다.“아무래도 CCTV를 돌려야겠네요. 어쩌면 다른 사람이 주웠을지도 몰라요.”이엘리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밖에서 캐주얼한 차림의 청년 남자가 들어왔다.사무실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물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윌리엄을 보자 이반의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스쳤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는 온하랑을 힐끔 쳐다보더니 뭔가를 작심한 듯했다.이엘리아는 구원자를 보듯 두 눈을 반짝이며 다가가 온하랑을 가리키며 말했다.“윌리엄, 마침 잘 왔어. 이 여자가 내 목걸이를 훔치고 인정하지 않잖아!”윌리엄의 시선이 온하랑에게 가더니 몇 초 동안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돌려 릴리안을 바라보았다.릴리안은 즉시 설명했다. “페이가 이엘리아 목걸이를 훔쳤다고 하는데 증거가 없어요.”온하랑도 윌리엄을 훑어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이름은 윌리엄이지만 한국인의 얼굴이고 릴리안의 태도를 보면 스튜디오 사장인 것 같았다.옆에 있던 이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사실...”사무실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사실 뭐?”윌리엄이 물었다.“페이가 이엘리아 아가씨 핸드백에서 목걸이를 가져가는 걸 제가 봤어요.”이반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
“내가 훔친 게 아니니 절대 인정할 수 없죠. 윌리엄, 나에게 결백을 증명할 기회를 주세요. 이반과 대질하고 싶어요. 만약 내가 진짜 목걸이를 훔쳤다면 스스로 사직할게요. 애초에 내가 사릴을 선택한 이유는 사릴의 신념이 가장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온하랑은 이반을 보며 말했다.“만약 불투명한 증언 하나만으로 내 죄를 정한다면 난 애초의 선택을 후회할 거예요.사릴은 그렇게 깨끗하고 순수한 신념에 어울리지 않아요.”“그래요, 대질하세요. 나도 인정머리 없다는 말을 듣고 싶진 않아요.”온하랑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윌리엄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엘리아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다급하게 제지했다.“윌리엄, 그렇게 많은 변명을 들어서 뭐해? 죄를 벗을 궁리만 하겠지.”“이엘리아, 설마 두려운 거예요?”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만약 내가 진짜 목걸이를 훔쳤다면 내가 이반이랑 대질하는 걸 지지해야 마땅하죠. 나의 치욕을 못 박는 셈이니.”“흥, 내가 왜 두렵겠어?”“그럼 대질하죠!”이엘리아가 더 말하려 하자 윌리엄이 제지했다.“놔둬.”이엘리아는 화가 나서 온하랑을 쏘아보았다.“이반, 내가 이엘리아의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다고 했는데, 그럼 언제 어디서 본 거죠? 내가 훔칠 때 이엘리아랑 안니는 뭐 하고 있었죠?”온하랑이 매섭게 물었다.이반은 놀라더니 회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을 거예요. 2번 세트장에서 촬영하다가 이엘리아가 조금 피곤해서 안니가 물 가지러 갔어요. 그때 기회를 타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어요.”“그럴 리가요. 당시 이엘리아 핸드백은 세트장 서쪽 구석에 주전자와 물컵이랑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기회를 타 목걸이를 훔치죠?”“안니가 휴지를 가져올 때 핸드백 지퍼를 열어 놓았어요. 안니가 등을 돌린 틈을 타 당신이 쏜살같이 달려가 목걸이를 훔치는 걸 봤어요.”온하랑은 피식 웃었다.“확실해요? 그런데 내가 잘못 기억했네요. 이엘리아 핸드백은 서쪽이 아닌 남쪽에 있었
이반은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을 굳힌 채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CCTV 영상을 네 얼굴에 뿌려야겠어?”윌리엄이 또박또박 물었다.“아니면 잘리고 싶어? 동료를 모함하고 사과도 안 하는 직원을 사릴은 원하지 않아.”이반은 어금니를 깨물고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미안해요.”“그리고 또?”“직접 보지 못한 상황에서 이엘리아 아가씨 목걸이를 훔쳤다고 해서 미안해요.”이반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이반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는 앞으로 윌리엄과 릴리안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윌리엄은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자, 이 일은 여기까지 하죠. 앞으로 그 누구도 다시 언급하지 마세요.”“잠깐만요, 이엘리아. 내가 당신 목걸이를 훔쳤다고 이유 없이 모욕하고 내 명성을 훼손한 것에 대해 사과하세요.”온하랑은 매서운 눈빛으로 이엘리아를 보며 말했다.이엘리아는 코웃음을 쳤다.“흥, 내 목걸이는 확실히 잃어버렸어. 난 그냥 합리적인 의심을 했을 뿐이지 당신을 어떻게 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뭐? 사과? 꿈도 꾸지 마!”“윌리엄. 고객이 사릴의 직원을 함부로 모욕하고도 사과를 거부해도 되는 건가요?”온하랑의 말에 이엘리아는 윌리엄과 눈을 마주치고는 기분 나쁜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렸다.이엘리아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낸 윌리엄은 그녀가 사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그냥 오해에요. 페이.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됐어요. 모두 나가 봐요. 난 릴리안이랑 할 말이 있어요.”이엘리아는 득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안니, 가자. 윌리엄, 내가 이제 밥 살게.”진작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반은 곧장 밖으로 나갔다.온하랑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윌리엄을 쳐다보았다.온하랑이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윌리엄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 일은 내가 충분히 페이 체면을 세워줬으니 더 이상 따지지
윌리엄은 잠시 눈을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 나 협박하는 건가?”온하랑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요. 저는 단지 이곳은 제가 있을 만한 가치가 없고 더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어서 나가려고요.”이엘리아가 윌슨 가문의 큰 아가씨이니 윌리엄도 그녀의 미움을 사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온하랑은 이엘리아와 이미 안 좋은 감정이 생겼으니 계속 이곳에 머무르면 이엘리아가 다시 그녀를 괴롭힐 것이고 사장도 그녀 편에 서지 않을 것이다.릴리안은 정직하고 공평한 사람이지만 이엘리아와 윌리엄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위치였다.그래서 온하랑은 사릴을 떠나기로 했다.“페이,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때요?”릴리안이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동안 챙겨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제가 만약 이 회사에 미련이 있다면 릴리안이 유일해요. 사직서는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처리해 주세요.”릴리안은 윌리엄을 한 번 보았다.윌리엄은 개의치 않았다.“사표 처리하라잖아요? 그렇게 하세요. 사릴은 포토그래퍼가 부족하지 않아요.”역시 젊은 사람은 고집이 세고 세상 물정도 모르니 그런 사람은 나가도 그만이었다.온하랑은 집에 돌아간 후, 사직서를 릴리안에게 보냈고 릴리안은 재빨리 처리했다. 또한 메일에서 그녀는 온하랑에게 보기 드문 훌륭한 작가라고, 이런 일이 발생해서 그녀도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온하랑을 돕지 못해서 미안하다면서 온하랑에게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줬다....릴리안의 친구는 잡지사의 편집장으로 평소 포토그래퍼와 협력이 잦았다.온하랑은 릴리안에게 감사하다는 메일을 보내고 편집장의 왓츠앱을 추가했다.아마도 릴리안이 이미 온하랑에 대해 언급했는지 편집장은 온하랑에게 친절한 태도를 보였고 기회가 된다면 그녀를 추천하겠다고 했다.사릴에서 사직한 후 온하랑은 제일 먼저 윌슨 가문에 대해 알아봤다.윌슨 가문은 19세기부터 필라시의 명실상부한 재벌이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혁신으로 한때 보수적인 윌슨 가문이 몰락하기도 했으나 나중에 한 가주가
온하랑은 이쪽 업계에서 일한 시간이 짧아 현재 접하는 주문은 거의 사적인 촬영이었다. 지금 상업 촬영을 찍을 기회가 생겼으니 그녀는 서둘러야 했다.이 주문은 모 일용 화학품 회사에서 출시한 신제품의 광고 촬영으로, 인물 촬영과는 매우 달랐다. 온하랑이 BX그룹에 있을 때, 많은 광고 촬영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직접 손을 댄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편이었다.시편 당일, 온하랑이 상대방이 준 주소로 와서 프런트 데스크에 시편 하러 왔다고 말하자 프런트 데스크는 온하랑을 위층 세트장 옆 대기실로 데려가 차 한 잔을 주며 말했다.“지금 세트장은 누가 사용하고 있으니 여기서 먼저 기다리세요. 이따가 직원이 와서 부를 거예요.”“네.”프런트 데스크가 떠난 후 온하랑은 이 휴게실을 두리번거렸다. 장식이 정교하고 동쪽 벽에 한 여자 연예인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그녀는 자사 제품을 손에 들고 웃으며 얼굴에 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회사 모델일 것이다. 서쪽 벽에는 회사의 몇 가지 주요 제품이 소개되어 있었다.이 일용 화학품 회사는 필라시에서 비교적 유명한 현지 기업이며 제품은 일상 슈퍼마켓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소파 옆 선반에는 잡지가 몇 줄 놓여 있었다. 온하랑은 아무렇게나 한 권을 가져와 보니 회사 소개였다. 앞 페이지는 회사 창립 시간, 창립 역사, 창립자가 있었다.온하랑은 몇 페이지를 넘겨 보다가 다시 놓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그녀는 휴대폰에 있는 각종 소프트웨어의 신선한 푸시 메시지를 힐끗 보았다.[BX그룹 회장 부승민이 경제범죄 혐의로 구속되다.]이 제목을 보았을 때 온하랑은 몇 초 동안 멍했다.어떻게 된 거지?가짜겠지?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푸시를 클릭했는데, 푸시는 뉴스에서 인물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 있을 뿐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뉴스는 이미 인스타에서 떠들썩했다.온하랑은 믿을 수 없었다.그녀가 아직 부승민에 대한 마음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부승민이 경제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간
“안녕하세요, 시편 하러 온 페이 맞으시죠? 따라오세요.”갑자기 들려오는 소리가 온하랑의 상념을 끊었다.온하랑은 마음이 복잡하지만 지금은 잡념을 버리고 시편에 집중해야 했다.시편은 16장의 사진을 한 세트 찍어야 했다.온하랑은 먼저 제품 소개와 컨셉을 보고 제품의 주요 판매점에 따라 적절한 촬영 계획을 수립한 다음 촬영 보조에게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준비하도록 요청했다.촬영하는 데 총 4시간이 넘게 걸렸다.끝난 후 온하랑은 카메라의 사진을 컴퓨터에 복사하여 간단히 처리하고 제품 광고 담당자에게 자신의 촬영 방법과 의도를 설명했다.또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드디어 시편이 끝났다.온하랑은 회사에서 나와 심호흡을 한 후 휴대폰을 꺼내 부씨 가문 집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부승민은 현재 그룹 회장이었으니 그에게 일이 생기면 부씨 집안이 영향받을 것이다.잘못하면 부씨 집안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그날 부승민은 확실히 말했다. 더 이상 온하랑을 부씨 집안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고, 더 이상 온하랑의 편에 서지 않을 것이고, 부씨 집안이 망해도 온하랑과는 무관하다고 말이다.하지만 부씨 가문은 온하랑이 10년 동안 지내온 곳이다. 할아버지의 피땀인데 이렇게 없어지는 건 너무 아쉬웠다.그리고 김정숙과 부시아가 영향을 받을까 봐 걱정했다.전화를 받은 사람은 저택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였다.아주머니는 온하랑에게 할머니와 부시아가 여행을 가서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말했다.온하랑은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부승민은 아마 이번 재난을 예상하고 미리 두 사람을 여행 보낸 것 같다.그런데 위험을 미리 감지했는데 왜 미리 해결하거나 피하지 않았을까?어쨌든 이건 온하랑이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그래, 할머니와 시아만 무사하면 돼.’그리고 부승민은 자기 자신에게 달렸다. 이런 죄명은 온하랑이 돕고 싶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니.저녁에 김시연은 온하랑을 떠보듯 뉴스에 관해 물었다.“뉴스 본 건 사실인데 안심해. 이제 나랑 상관없는 일이
이틀 후, 온하랑은 일용 화학 회사로부터 그녀가 시편에 통과했다는 소식을 받았다.앞으로 그녀는 두 명의 사진작가와 함께 신제품 출시까지 사진, 모델 촬영, 동영상 등 신제품 광고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반응이 좋다면 회사는 그녀와 다른 제품도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온하랑은 아주 기뻤다.이것은 그녀가 정식으로 맡게 된 상업 촬영이었다.상업 촬영은 항상 요구가 높았다. 온하랑이 시편에 통과했다는 것은 그녀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었다.그녀는 앞으로 점차 상업 사진작가로 발전하면서 여가 시간에 개인 주문을 받을 계획이었다.이 사실을 알게 된 벨라는 아주 기뻐하며 온하랑에게 축하하러 나가자고 했다.며칠 전 벨라는 온하랑이 사릴에서 퇴사했다는 것을 알고 이유를 물었고 온하랑은 간단히 설명했다.벨라는 온하랑을 모욕한 여자에게 복수하겠다며 이름을 물었지만 온하랑은 말하지 않았다.벨라는 진도원을 시켜 윌리엄에게 찾아가 복수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온하랑이 말렸다.그녀는 윌리엄이 최동철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온하랑이 이 일을 정말 신경 쓴다면 먼저 최동철에게 연락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가 최동철을 찾지 않았다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윌슨 가문은 건드리면 위험했고 벨라에게 괜한 폐를 끼치기 싫었다.약속 장소는 온하랑이 처음 가보는 한 클럽이었다.현장에 있는 사람은 벨라 외에 온하랑이 저번에 만났던 친구 두 명이었다.네 사람은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고 술도 마셨다.중간에 벨라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가 돌아온 뒤 투덜거렸다.“무슨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대체 왜 어딜 가도 저 바보랑 마주치는 거야?”벨라의 친구 데이지가 웃으며 물었다.“혹시 이엘리아 말하는 거야? 바보 취급하면서 왜 자꾸 상대해?”
“남 친구들 모임에 자기가 왜 끼어드냐고?”벨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이엘리아?온하랑은 자기가 아는 이엘리아를 말하는 건지 의심했다.이어 벨라가 말을 이었다.“페이, 이따가 나랑 옆 방에 한 번 다녀와.”“왜?”“알렉스가 왔어. 아도니스랑 애들이 지금 같이 놀고 있어.”진도원이 벨라에게 이 일을 말한 적 있지만 공교롭게도 오늘 같은 클럽에 그것도 옆 방에 있을 줄은 몰랐다.이엘리아 그 바보를 보지 않았다면 벨라도 몰랐을 것이다.“그래, 알겠어.”온하랑은 며칠 전 최동철과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생각났다. 최동철은 그녀가 필라시에서 적응하는 것에 대해 관심했고 며칠 후에 자신도 필라시에 한 번 올 것이라고 언급했었다....옆방.비슷한 또래의 청년 몇 명이 원탁에 둘러앉아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자, 동철아, 한 잔 마셔.”윌리엄은 잔을 가득 채우고 웃으며 말했다.“그래.”“이게 대체 얼마 만이에요. 오늘 제대로 마셔요.”진도원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술을 많이 마셔서 얼굴에 이미 붉은 노을이 조금 끼었다.다른 사람들은 모두 잔을 들어 최동철과 건배했다.“됐어, 그만해.”술 한 잔을 마신 최동철이 손을 내저었다.“나 비행기에서 방금 내렸어. 더는 못 마셔.”“참, 형 겨우 이 정도에요?”“하하하, 도원이가 너 겨우 이 정도냐고 해? 증명해야 하지 않겠어?”마침 이엘리아가 밖에서 들어왔다.“뭘 증명해?’“아무것도 아니야.”윌리엄이 웃으며 대답했고 진도원이 즉시 화제를 돌렸다.룸 안이 매우 떠들썩했다.오랜 친구 몇 명이 오랜만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즐겁게 이야기했다.벨라는 손에 술잔을 들고 문을 두드리더니 곧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런 우연이 다 있네.”룸안은 조용해졌고 입구의 온하랑과 벨라 두 사람을 보며 각자 눈빛이 달랐다.온하랑은 평온하게 룸안의 사람을 스캔했다. 최동철, 진도원, 이엘리아, 윌리엄.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세 사람이 있었다.이엘리아가 정말 여기에 있었다.보아하니 벨라가 방금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