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이 들어와서 대답했다.“아주 좋아요. 동...”“알렉스, 둘이 아는 사이야?”최동철이 온하랑에게 말을 거는 것을 들은 이엘리아는 안색이 변하며 그들의 말을 끊었다.최동철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너도 하랑이랑 아는 사이야?”이엘리아는 웃음기를 띠고 있는 온하랑의 눈을 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두 번 정도 봤어. 친한 건 아니야.”어찌 친하지 않을 뿐이겠는가?그야말로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이엘리아는 갑자기 최동철의 취미도 사진 촬영이었고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었지만 신분 문제 때문에 포토그래퍼의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온하랑은 마침 포토그래퍼였다.최동철이 당시 필라에 왔을 때, 사진 촬영을 하며 윌리엄을 알게 되고, 업무로 인해 연도진을 알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고 그들을 통해 이엘리아와도 알게 되었다.이엘리아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최동철은 이미 그녀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했고,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지만 말하지 않았다.“그렇군.”최동철은 테이블의 모든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소개할게. 온하랑은 내 친구이자 학생이야. 필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잘 돌봐 줘.”“당연하지!”“네 친구는 우리 친구나 다름없어. 안심해.”“...”윌리엄은 입술을 씰룩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얼마 전 최동철이 자신의 친구에게 윌리엄의 연락처를 알려줬다고 연락이 왔던 것이 문득 생각났다.그 친구가 M국에 와서 필라에서 포토그래퍼로 일하게 된다면 윌리엄에게 연락할 수도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하지만 윌리엄은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그는 최동철의 친구가 필라에 남지 않았거나 포토그래퍼 일을 종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최동철의 친구가 바로 페이일 줄이야.페이는 한국인이었다. 그때 진작 알아챘어야 했다.온하랑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잔을 들며 말했다.“동철 오빠가 도원 오빠와 벨라를
윌리엄은 간단하게 설명하였다.“그날 온하랑이 이엘리아 촬영을 맡았는데 이엘리아가 목걸이를 잃어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니지만 온하랑이 아무 이유 없이 회사를 그만둘 일은 없으니까 분명 억울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다만 이엘리아가 자신이 일부러 한 것임을 숨겼을 뿐, 마치 단순히 목걸이를 잃어버려서 생긴 평범한 오해인 것처럼 말이다.“그렇군.”진도원은 양아치처럼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윌리엄, 너는 작업실 주인으로서 일을 더 난감하게 만들면 안 되지. 직원이 이런 일을 당하면 실망하기 마련이야. 이런 상황에선 네가 앞장서 직원들 앞에 나서야지. 게다가 넌 동철 친구잖아? 고의는 아니겠지만 넌 동철마저 온하랑 앞에서 난처하게 만들었다고.”한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그러고 보니 이엘리아, 끝까지 사과를 안 했지? 그건 너무 했잖아. 누명을 씌우고 어떻게 사과도 안 할 수 있니?”이엘리아는 입을 삐죽거리며 떳떳한 듯이 반박해 나섰다.“일부러 한 것도 아닌데 조금 화가 난 걸로 일을 그만둘 줄 누가 알겠어? 어쨌든 지금 새 직장도 구했잖아. 이미 지난 지 오란 일인데 그 말을 왜 또 꺼내?”그 친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엘리아가 윌슨 가문의 큰 아가씨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하고 싶지 않다는 일은 부모님과 연도진 외에 그 누구도 그녀를 강요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부모님과 연도진 또한 온하량 편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아니면 그만두자. 이미 지나간 일인데 뭐, 더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온하랑도 다시 일자릴 찾았으니까 다행이야.”또 다른 친구가 말했다. “정말 마음에 걸린다면 윌리엄이 밥 한 끼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최동철은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말이 없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담담하게 윌리엄과 이엘리아를 바라보았다. 윌리엄은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 잘못이 맞아. 내가 가서 온하랑에게 사과할게.”“사과? 누구한테?”
이엘리아는 마음이 답답하고 분했다.온하랑을 반드시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며 결심했다.이엘리아는 곧장 옆방으로 가서 온하랑에게 달려가 오만한 기세로 또박또박 말했다.“미안, 됐냐?”온하랑은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모르는 척하지 마!”이엘리아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쏘아붙였다.“네가 벨라에게 그들 앞에서 네가 새 직장 구한 일을 말하라고 한 거, 나보고 사과하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온하랑은 벨라의 의도가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말하면 어때? 전부 사실이잖아. 네가 한 일을 차마 남에게 알릴 용기가 없는 거야?”이엘리아는 이를 악물고 독이 든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너 딱 기다려. 절대 가만 안 둘 거야!”이엘리아가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온하랑은 벨라와 눈이 마주쳤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온하랑의 표정과는 달리 벨라는 오히려 문득 무언가를 깨닫는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페이를 목걸이 훔친 범인으로 모함한 여자가 바로 이엘리아였다.‘역시 걘 바보였어.’“페이, 지난번 일은 정말 미안해.”윌리엄이 갑작스레 방에 나타나 입을 열었다.“이엘리아에게 사과하라고 할 테니 동철의 체면을 봐서라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윌리엄 씨의 사과는 받아들였으니 그만 돌아가세요.”온하랑은 무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그래, 이만 나가 볼게.”윌리엄은 방을 떠나자 벨라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하여튼 성의가 조금도 안 보여. 너를 모함한 사람이 이엘리아라는 걸 난 이제 알았어. 걘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못되고 미련한 년이네.”“예전에도 그랬어?”온하량이 물었다.“예전엔 이보다 훨씬 심했어. 걘 교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자기밖에 몰라. 또 워낙 질투심이 많고 마음도 좁쌀만 하고, 자기 가문을 믿고 함부로 남을 괴롭혔어.”이엘리아의 결점을 말한다면, 벨라는 얼마든지 더 말할 수 있었다.“중학교 때, 걔가 좋아하던 남자애가 다른 여자애를 예쁘다고 한마디 칭찬한 일로 학교 밖에서
벨라는 호기심에 물었다.“뜻밖의 사고 아니었어? 이제 와서 또 새로운 발견이라고?”“나도 몰라. 우린 이미 서로 화해까지 했고 경찰서는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했는걸. 혹시 스미스 씨의 사람들이 그의 뒤를 밟다가 뭔가를 발견했을까?”“아, 그건 아니야. 지난번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차 주인이 경찰서에 실려 갔었어.”“그럼 나 일단 무슨 일인지 확인하러 가볼게.”온하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 잘 놀고 있어, 나 먼저 갈게. 다음에 또 봐.”“오케이.”온하랑은 가방을 들고 객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복도 한 모퉁이를 지나자 그의 발걸음은 순간 멈춰졌다.바로 앞에 보이는 화장실 문 옆에 한 여자가 남자를 뒤로 꼭 껴안고 있었다.남자는 금테 안경을 쓰고 연한 파란색 셔츠에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고 여자는 웨이브한 긴 머리에 명품 롱스커트를 입고 있었다.옆모습이 좀 낯익었고 그날 록펠러 저택에서 만난 앨리스와 흡사했다. 온하랑은 거의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찰칵’하는 소리가 존재감 있게 들려왔다. 셔터를 닫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다.남자는 즉시 여자의 팔을 뿌리치고 곧장 온하랑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알 수 없는 눈빛과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온하랑, 사진 지워.”“내가 안 지운다고 하면?”온하랑은 팔짱을 끼고 연도진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연도진, 여자 친구도 있는 넌 지금 앨리스랑 이러고 있어? 너는 여자 친구를 내연녀로 만들고 싶었구나? 너 설마 네 여자 친구가 딴 여자랑 바람피우는 걸 가장 싫어한다는 거 몰라?”“일단 사진 지워, 내가 설명해 줄게...”“걱정 마, 네가 앨리스에게 매달리지 않는 이상 이 사진은 절대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연도진는 골치가 아픈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난 쟤랑 아무 관계 없어. 쟤가 나한테 집착하고 있는 거야.”“쟤가 너한테?”온하랑은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하지만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어.”앨리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속상한지 머리를 푹 숙였다.“언젠가 좋아하게 될 거야, 그 여자 이름이 뭔지 알아? 어떻게 생겼는데?”“페이라고 불리는 한인이야. 벨라의 친구인데 최근에야 M 국으로 온 것 같아. 카이사르도 마침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지 않았어?”이엘리아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페이?한인?벨라의 친구?고민할 필요조차 없었고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었다.이엘리아는 곰곰이 회상해 보았다. 얼마 전, 카이사르가 한국으로 돌아가 몇 달 동안 머물다가 며칠 전에 금방 돌아왔고 페이 또한 며칠 전 금방 M 국에 도착했다.그녀는 또 방금 방에서 최동철이 페이에게 사과할 일을 언급하자, 연도진은 즉시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자신더러 페이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던 것이 생각났다.카이사르가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페이라고?이엘리아는 온몸이 짜증과 분노의 절정에 도달한 것만 같았다.젠장!!!열받아!도대체 왜!페이는 이곳에 오자마자 벨라랑 친해졌고 진도원의 도움을 받으며 최동철도 그를 잘 챙겨주었다. 심지어 다른 친구들도 전부 페이의 편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오빠 카이사르마저 그녀를 좋아한다니!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진 이엘리아에게 앨리스가 물었다. “왜? 설마 페이랑 아는 사이야?”이엘리아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아는 사이뿐만이 아니야... 흥, 기다려, 난 절대 그녀를 윌슨 가문의 문턱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할거야!”‘페이 그 가난한 촌놈 주제에 감히 내 오빠에게 손을 대려고 해? 자신이 무슨 주제인지 거울이나 좀 똑바로 보지 그래? 떡 줄 사람은 꿈도 안 꾸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더니 참 자기 분수를 모르고 있어!’ “이엘리아, 정말 고맙지만 너희 남매 감정에 영향 될가 봐 걱정이야.”“그럴 리 없어. 생각해 봐,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그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과연 페이에게 있어 봤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있을 수 있겠어? 나는 그가 오로지 한 여자 때문에 나랑 관계를 끊을 거라고 생각하지
강남시.부현승과 서혜민의 결혼식은 연기되었다.부승민이 체포되고 BX 그룹에 난리가 났는데 부현승이 지금 이 시각에 혼례를 치를 리가 없었다. 서혜민도 부승민이 부현승에게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현재 결혼 날짜가 정해지지 않자 부현승은 서혜민과 함께 그녀의 본가에 들렀다.서혜민의 본가는 강남시 북구 황길진 오하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마을 사람들은 서 씨네 둘째 영감의 큰딸이 도시에 돈 많은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그는 대범하고 모든 걸 아낌없이 주었다. 덕분에 서혜민은 집에 가전제품도 사두고 자동차도 살 수 있었으며 동생들의 전학 수속도 밟아 주었다.들은 바에 의하면 서 씨 둘째네는 서혜민이 남자 친구와 결혼한 후 시내에 집을 살 계획도 있다고 한다.옆 사람들은 부러워할 몫밖에 없었다. 다들 서 씨 둘째가 팔자 좋게도 좋은 딸을 두었다고 했다.하지만 뒤에서 수군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도시에 사는 부자가 왜 고등학교도 못 다녀 본 시골 여자와 결혼하겠어, 그저 가지고 노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또 어떤 마을 사람들은 부자랑 겨우 몇 년 만났는데 돈이 그렇게 많아진 거로 보아 나중에 헤어져도 서혜민은 손해 볼일이 없기에 지금 몸과 마음을 모두 그에게 맡기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서혜민과 그의 남자 친구의 결혼 날짜는 7월로 정해졌고 서 씨네 둘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친척과 친구들에게 시내 고급 호텔에서 함께 식사 하자고 일일이 초대하였다.그제야 모두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었고 속으로는 한편 부럽기 그지없었다.이 소식은 서 씨네 둘째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태도마저 크게 바뀌게 하였다.서 씨네 둘째는 속이 좁고 쩨쩨하며 깨알만 한 이익도 놓치지 않는 사람이어서 명성이 썩 높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지금 도시에 돈 많은 사위가 생겼으니, 앞으로 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마을 사람들은 태도가 돌변하였다.물불 안 가리고 양심을 어겨서라도 듣기 좋은 말이라면 전부 서 씨네
이런 소문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바로 이때 부현승과 서혜민이 오하마을에 도착했다.서 씨네 둘째는 일찍부터 집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바깥에 인기척이 들려오자, 그는 급히 아이들더러 나가 살펴보라고 했다.서혜민의 두 여동생과 남동생은 오래 참았다는 듯 쏜살같이 뛰어나갔다.집 문 앞에 세워진 세 대의 고급 승용차와 차에서 내리고 있는 부현승, 그는 종잇장같이 흰 셔츠에 명품 양복바지, 스마트하고 귀티가 흘러넘치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본 세 남매는 자신의 서툰 행위가 서혜민의 체면을 구길까 봐 조금 겁을 먹었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작은 소리로 불렀다.“언니.”“혜진아, 혜정아, 영민아, 어서 형부라고 불러.”세 아이는 차례로 형부에게 인사하고 부현승과 서혜민을 집안으로 맞아들였다.서 씨 둘째네 집 앞은 진작 구경꾼들로 시끌벅적했다.부현승은 젊고 눈에 띄는 잘난 외모에 훤칠한 키를 지니고 있었고 지식인들의 특유한 점잖음과 여유로움이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침투되어 있었으며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서혜민이 팔자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마을 곳곳에서 돌던 소문은 그제야 자취를 감추었다.부현승은 결코 빈손으로 처가를 방문할 사람이 아니었다. 고급 차 세대에 각 승용차 트렁크마다 쌓여있는 선물들, 유명한 담배와 술, 고급 선물 세트, 그리고 서혜민의 동생들에게 따로 골라준 선물까지 만단의 준비를 하고 왔다.기사들은 왔다 갔다 몇 번을 뛰어다닌 후에야 짐들을 전부 집안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이 굉장한 장면을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은 감탄하며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았다.부 씨 일가와 함께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는 부현승외에 그의 가까운 친척들이 몇 명 더 있었는데 부 씨 본가보단 세력이 약해도 서 씨 둘째네 가문에게는 건들지 못할 어마어마한 부자들이었다.처음에 서 씨 둘째는 그래도 장인의 위엄을 부려보자고 했다.그는 거실에 앉아 밖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조마조마한 듯 손잡이를 꽉 잡고 있었다.
서혜민의 말 덕분에 넷째 삼촌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현승도 이런저런 생각을 하여 서씨 가문에 대한 인상이 나빠질까 걱정되어 급히 화제를 돌렸다.부현승 역시 여러 가지를 생각하였다. 젊은 여대생이 단기간에 많은 돈을 모으려면 스폰서를 찾거나 몸을 팔 수밖에 없다. 물론 최고 명문 대학의 일부 전공 졸업생들은 몇 개월 만에 높은 월급을 받으며 그 돈을 모을 수 있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어떻게 보나 서혜민의 사촌 언니는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했다는 점에서 효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능력과 처지가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런 길을 선택하는 게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주 겪게 되는 무력감이었다.그래서 부현승은 이 일 때문에 서혜민의 사촌 언니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혜민아, 돌아가면 큰아버지를 뵈러 가자.”이미 신장 이식을 했으니 후속 치료와 면역억제제 비용, 합병증 치료 비용도 많아야 수천만 원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라면 그가 도와서 낼 수 있거나 사촌 누나에게 자선 기관을 연결해 줘 그녀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할 수 있다.그러나 이 말에 서혜민은 표정을 굳히더니 시선을 피하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얘기하자.”큰아버지를 뵈러 가면 서수현을 마주칠 수 있었다. 서혜민은 부현승이 서수현을 보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가 서수현을 보면 그날 밤의 일을 떠올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는 그날 온천 리조트에서 있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땐 이미 밤이 되었고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KTV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서수현은 몸이 불편하다며 먼저 돌아갔고 친구들에게는 천천히 즐기라고 했다.이번 모임은 서수현이 주최한 것이었고 서혜민은 다른 친구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사촌 언니를 배웅한다는 핑계로 따라나섰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